목사는 바리새인을 향한 일곱 저주를 설교하지 말라.
마태복음강해 (214)



http://youtu.be/xaxfcxI3j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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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없음).”(마23:13,14)


예수님은 과연 하나님인가?

불신자나 타종교와 기독교가 충돌하는 첫째 원인은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교리 때문일 것이다. 그 교리를 바꿔 말하면 예수님은 죄에 빠진 인간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럼 어떻게 이천 년 전의 유대인, 그것도 로마의 한 사형수가 하나님이냐고 크게 반발한다.

그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변증이 가능하지만 불신자들은 아무리 그 변증이 타당하고 합리적이라고 수긍 되어도 믿지 않는다. 오직 한분 스승인 성령이 그 영혼을 변화시켜 깨우침을 주셔야만 믿어진다. 변증이란 그래서 기존의 신자들의 믿음을 더 견고케 하는데 주목적이 있다.

예수님이 고난 주간에 가르친 내용이 당신의 하나님 됨을 입증하는 아주 좋은 근거가 된다. 본문 이후부터 마지막 유월절 만찬까지의 주님의 말씀은 당신의 공사역을 마감하고 정리하는 가르침이다. 이 땅에 오신 핵심 목적을 밝힌 것인데 한마디로 유언(遺言)인 셈이다.  

모든 인간은 죽음을 맞이하면 남은 자들더러 다투지 말고 서로 돕고 사랑하라고 한다. 또 본인은 생명을 주관하는 절대자 신에게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소원하기 마련이다. 반면에 예수님이 마지막 며칠간에 말씀하신 내용은 무엇이었나? 우선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일곱 저주를 퍼부었다. 또 인류의 종말적 심판을 예언했다. 반면에 본인에 대해선 하나님께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간구하지 않았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 처형의 고통과 수치를 피하고 싶은 소원은 피력했다. 그러나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배경에는 죄악 중에 있는 인간의 비참한 상태에 대한 당신의 애통함과 긍휼함이 더 크게 포함되었다고 이해해야 한다.

요컨대 예수님은 자연인들과는 달리 죽음 직전에도 자신과 자기 주변에 대한 관심은 없었다. 오직 인류의 죄악에 대한 철저한 증오를 드러내는 동시에 인간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 가장 경건한 자들과 그 종교 체계에 대한 심판을 선포했다. 인류의 종말을 예언하는 동시에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당신의 백성들만 구원 받을 것이며 또 그들을 거룩하게 보존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는 어떤 인간 철학자나 종교가라도 감히 할 수 있는 유언이 아니다. 비유컨대 고 한경직  목사가 한국의 모든 종교와 성전이 파괴되며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했다고 유언한 셈이다. 그러면서 당신께서 담임하신 영락교회의 교인, 그것도 극히 일부의 믿음이 좋은 사람들만 구원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그들만을 위해서 기도해 준 것이다.

인간의 상식과 이성으로 볼 때는 도무지 말도 안 되는 유언이다. 그럼 그동안 한 목사님을 존경해왔던 불신자와 타종교인은 당연히 등을 돌릴 것이며 기독교 내부에서조차 반발이 거세질 것이다. 그와 동일한 모습으로 유언하신 예수님의 경우는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게끔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었듯이 그 유언 모두가 완전하게 실현되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결론 외에 다른 말로는 설명이 불가능할 뿐이다.  

일곱 저주를 벽에 걸어놓고 암송하라.

신자는 본문 이후의 말씀을 정말로 심각하고도 진지하게 접근해야 한다. 일반인들도 육신의 아비의 유언을 평생을 두고 반드시 실현하지 않는가? 땅의 아비는 일시적이며 이 땅의 삶에만 영향을 미친다.(9절) 영원한 운명을 가름하는 한 분 하늘의 아비의 유언은 더더욱 그래야 하지 않겠는가?

본문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에 대한 일곱 저주의 말씀 또한 그러하다. 그들보다는 오늘날의 신자에게 해당된다. 예수님은 그들과 종교 권력을 다툴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회개하리라 기대도 하지 않았다. 아니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자리에 없는 그들을 뒤에서 욕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성경을 읽는 모든 세대의 모든 신자들에게, 특별히 목회자들더러 목숨을 걸고 지키라는 뜻이다. 본문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말씀이다. 이를테면 일반 신자가 아닌 목사가 그 대상이다. 따라서 목사는 본문을 설교하기보다는 자기 집 벽에 크게 쓰서 붙여 놓고 아침저녁으로 암송하며 그런 잘못을 절대 범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실천해야 한다.

목사는 예수님을 완전히는 아니라도 가장 많이 닮아야 하는 자다. 예수님은 너무나 낮고 비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만 가르치고 그 가르친 진리대로 사셨다. 골고다에 올라 십자가를 지시고 조용히 죽으셨다. 죽으실 때에 기독교 경전을 남기지 않았고 종교적 조직과 체계를 형성하지 않았다. 제자들의 친목단체마저 만들지 않으셨다.

오로지 제자들의 유일한 스승인 성령을 기도하면서 기다리라고 당부하셨다. 오순절에 하늘로 올라가신 당신을 대신해서 성령이 강림하자,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제자들은 스승의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받아 새로운 참 생명을 누리며 살게 되었다. 예수님의 영이 각 믿는 자들 속에 보배로 내주하게 되었고 놀라운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났다.

그 무엇보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담대함을 얻었다. 또 복음대로 살면서 예수님처럼 죽음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믿음과 능력도 생겼다. 성령의 오심으로 예수님이 이 땅에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당신께 진정으로 항복한 자들이 가는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주님은 동행해주신다. 신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고아처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 당신의 유언의 뜻을 실현하는 자에게는 예수님이 이 땅에 살아계실 때에 제자들에게 베푼 사랑과 동일한 사랑으로 품어주신다. 신자는 이미 그런 사랑 안에 들어와 있는 자인 것이다.

목사가 예수님을 가장 많이 닮아야 한다는 뜻은 바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역하신 모습 그대로 지금 가시화 구체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교인들로 한 성령과 한 믿음과 한 소망 안에서 예수님만을 머리로 모시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십자가 은혜와 권능을 전파하고 누리며 살게 해야 한다. 교인들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으로 세상 죄악과 맞서 싸우는 십자가 군병으로 변모시켜야 한다.    

육신의 아비의 유언과도 비교할 수 없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의 유언이다. 정말로 죽기까지 충성하며 실현해야 한다. 그러나 너무나 유감스럽게도 바리새인을 향한 저주가 오늘날의 일부 목사에게 그대로 해당될 만큼 동일한 잘못을 범하고 있다. 이 일곱 저주는 죄송하지만 목사들이 스스로 부끄러워서도 설교를 하지 말아야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외식(外飾)의 더 깊은 의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예수님의 첫마디는 “외식하는 이들이여”였다. 겉으로만 가식적인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차는 경문과 옷 술을 크게 해서 자기들의 경건함을 과시하면서도(5-7절), 말하는 바와 실제로 행함이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3절)이다.

그런데 원어적인 유래를 따지면 더 깊은 의미가 있다. 고대 희랍에서 연극배우들이 맡은 역할에 따라 각기 다른 가면을 쓰고 연기하는 모습을 말한다. 한국 안동 하회탈에도 앞에는 근엄한 양반이, 뒤에는 천하의 난봉꾼 망나니 모습을 한 탈이 있다. 무슨 뜻인가? 겉으로 고상한 척하는 양반의 속에 상놈보다 더 저급한 쌍스러움과 음란함이 있다는 사실을 신랄하게 풍자한 것이다.

이는 말과 행동이 달라 뒤로 호박씨 까는 차원을 넘어선다. 지킬과 하이드 박사처럼 전혀 다른 사람 행세를 하는 것이다. 속에 있는 실제 본인과 겉으로 행동하는 사람 자체가 다르다. 한 사람 안에 두 사람이 있는 셈이다.

지난주에 성경적이고 기독교적인 순종은 계명 하나 하나를 준행하는 것보다는 한 인격체 전체가 자신을 완전히 내어드리며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역으로 따지면 불순종은 자기 전부를 바쳐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것이 된다.

신자도 연약하고 영적 분별력도 미숙하며 아직 죄의 습관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기에 수시로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럼에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고치려 노력하면 외식이 아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시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진심으로 자기 전부를 바쳐 예수를 따를 의사가 없거나, 삶의 방향과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 쪽으로 완전히 되돌리지 않았거나, 성경적인 가치관 인생관을 형성하지 않고선 아무리 기독교 교리에 능통하고 교회활동에 성실해도 순종이 아니라 불순종이다. 또 그것이 바로 신자의 외식이다.  

예수님을 자신의 진짜 주인으로 모시지 않았거나, 하나님의 능력만 빌려서 자신을 높이고 치장하려 든다면 여전히 자기의 실체는 오직 자신이다. 말하자면 속에는 세상 사람인데 겉으로만, 그것도 교회나 기독교라는 종교적 범주 안에서만 신자인 것처럼 하면 한 사람이 두 인격체를 지닌 것이다. 그것이 바로 외식이다.

물론 개별적 행동을 성경의 계명과 진리에 일치시키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유원지의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하나의 죄를 두들겨서 이겨도 전혀 예상치도 못한 여기저기에서 또 다른 시험과 유혹이 몰려와 넘어질 수 있다. 날마다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 이겨야 한다.

목사 또한 연약한 인간으로 수시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다. 저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죄에 빠진다.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가 시험에 들까봐 평생을 두고 특정한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했다. 목사가 예수님처럼, 최소한 바울처럼 평생을 두고 죄와 완전히 담을 쌓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교인들, 특별히 불신자들 앞에선 죄를 짓지 않으려고 끝까지 자제하며 노력해야 한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저 같은 목사들은 도덕적 종교적 차원에서 통상적 의미의 외식을 자행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하고 있는 셈이다.

단 자신의 경건을 자랑하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기에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컫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최소한 욕되지 않게 하려는 동기라면 우리의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작은 노력이라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더 크고 놀라운 열매를 맺게 해주신다. 반드시 하나님의 공동체와 그 당사자에게 큰 유익이 되게 하고 영적 성장으로 이끄신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외식의 참 의미

그런데 예수님은 본문에서 목회자가 절대 행해선 안 되는 더 깊은 차원의 외식이 또 있다고 말씀하고 계심에 주목해야 한다. 바리새인을 향해 일곱 저주를 선포하시면서 세 번째 ‘소경’이라는 표현을 제외하고 나머지 여섯 번은 그들의 영적 실상을 ‘외식’이라는 한 단어로 지칭했다. 본문은 외식에 대한 첫 번째 설명이다. 그럼 외식의 정의(定意)이거나, 가장 핵심적인 특성을 말한 것이다.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 닫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을 막는 것이 외식이라고 했다. 그럼 조금 이상하지 않는가? 바리새인들이 천국에 들어가지 않으려 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와 정반대다. 율법과 성전 제사를 성실히 준행하기에 천국에 가장 가까이 있다고 자부했었던 자들이다. 아니 아브라함의 자손인지라 이미 천국 안에 들어와 있다고 안심하고 있었지 않는가?

본문의 뜻은 천국 문이 무엇인지 알면 간단히 알 수 있다. 선한 목자이자 참 목자로 오신 예수님은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10:9)고 하셨다. 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도 했다. 본문에서 천국문은 바로 예수님 자신이다.

바리새인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바로 자기들 눈앞에 있는데도 세 번이나 말의 올무를 걸려고 했다. 그럼에도 주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진리의 말씀으로 회개를 촉구했으나 그들은 끝내 교만하고 완악하게 물러가버렸고 주님을 십자가에 달아 죽일 궁리만 했다.

반면에 유대 대중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서기관들과 달리 권세가 있음을 인정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왕으로 삼으려 열광했다. 이를 본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오직 자기들 주머니가 얇아지는 것만 걱정하고 예수님을 추종하는 자들에게 유대 사회에서 불이익을 당할 것을 각오하라고 협박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가이사의 납세 질문에서 보듯이 예수님은 로마의 편을 들고 그에 항거할 시도도 하지 않으니 메시아일 수 없다고 선동했다. 예수님 쪽에 붙으면 민족의 반역자로 단죄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은 천국 문이신 예수님 앞에 모인 대중들에게 천국 문이 아니니 돌아가라고 쫓아냈다.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주는 정말 좋은 소식을 전하러 오신 예수님의 말씀을 못 듣게 했다. 성전에서 가르칠 권세를 누구에게 받았느냐고 시비를 걸면서 예수님을 침묵케 하려 했으나 주님은 어떤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 진리를 선포하셨다. 비유컨대 예수님의 좋은 소식 방송국 자체를 완전히 파괴시켜버린 것이 바로 골고다 십자가 사건이다.

골고다 이후의 유대 땅에는, 아니 이 세상에는 북한 방송처럼 613 계명을 앵무새처럼 외우는 획일적이고 형식적인 율법주의만 남게 되었다. 인간을 구원하려는 사랑의 하나님은 더 이상 계시지 않고 인간이 만든 도덕과 종교만 왕성해졌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외식의 첫째 특성, 아니 그 핵심이자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의미는 당신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신자의 속에 진짜로 그분이 보배이자 주인으로 임재해 있지 않는 것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은 세상 윤리에서도 외식이라고 가르친다. 예수님은 당신의 백성, 특별히 그 지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외식을 말하셨는데 그리스도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여 그분이 정말로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함께 하고 있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교리적으로 납득 혹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참 생명 되시는 예수님과 매일의 삶에서 교제 동행하지 못하기에 활기차고 기쁘고 아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진정으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인생으로 살아가고 있지 않는 것이다. 이미 그분의 무한하신 사랑의 품 안에 들어와 있는 신자인데도 정말로 참 신자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자신의 겉모습이 후패해지고 멸시와 핍박을 받으면 아직도 서럽고 고달파지는 것이 신자의 외식이다. 자신의 속사람에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으로만 꽉 채우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이 바로 외식이다.

반면에 세상이 아무리 나를 실망시켜도 예수로 인해 살고 죽는다면 외식하지 않은 것이다. 그분의 뜻대로 실제 준행하는 일이 비록 더딜지라도 최소한 나의 나 된 것을, 나의 새로운 정체성에 대한 인식을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 안에서 확고히 세웠고 또 그런 바탕에서 살고 있다면 외식하지 않는 것이다. 비록 그분께로 다가가는 걸음이 거북이처럼 느릿느릿할 수  있어도 말이다.

오늘날 목사의 진짜 외식은?

오늘날의 목사도 설교한 것과 행동이 가끔 다를 수 있다. 솔직히 저부터도 어떤 설교를 할 때는 속으로 부끄러운 적이 가끔 있다. 그럼에도 성경의 진리를 그대로 전해야 하니까 그대로 설교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렇게 전했기 때문에 그렇게 살려고 노력은 한다. 또 혹시라도 잘못한 것이 들켜 교인들에게 상처를 주었다면 진심으로 용서를 구할 각오와 준비는 되어 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일종의 도덕적 종교적 위선을 범하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나름 감히 자신하는 부분은 예수님만은 온전히 예수님답게 전하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설교에서만은 외식을 하지 않겠다는 점이다. 비록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데는 너무나 느림보 거북이긴 해도 말이다.  

예수님은 지금 본문을 통해 오늘날의 목회자들에게 “왜 설교에서 골고다 십자가를 빠트리느냐? 그것이 바로 목사의 외식이다.”라고 선포한 것이다. 목사가 죄를 통박하여 회개토록 권면하지 않으면 외식이다. 설교에서 천국 구원과 지옥의 심판을 선포하지 않으면 외식이다. 사악한 시대의 영적 흐름을 분별하여서 신자에게 가르쳐 알게 하지 않거나, 또 그래서 임박한 인류의 종말에 대해 경고하지 않으면, 나아가 바로 그러하기에 예수님만이 인간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외치지 않으면 외식이다.

서두에서 기독교와 타종교나 불신자와 충돌하는 첫째 원인이 예수님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했다. 충돌의 첫째 원인이라면 기독교를 가장 기독교답게 하는 특성이다. 만약 그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실제 기독교가 아닌 다른 기독교를 가르치는 것이므로 기독교에 대한 외식이 된다.    

기독교의 본질이 무엇인가? 죄와 사탄과 사망의 권세에 눌려 신음하는 이 땅의 인간들이 너무 불쌍해서 구원해주러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 아닌가? 그 놀라운 은혜에 진정으로 항복하는 자는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로 삼아서 영원토록 교제 동행해 주신다. 죄 중에 있는 우리마저 하나님이 정말로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달아 항복하라는 것이 십자가이지 않는가?

작금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비난을 받으며 부흥은 중지되고 도리어 쇠퇴하고 있는 첫째 원인은 분명히 신자와 목회자들의 말과 행동이 다른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 더 근본적인 원인이 따로 있다고 지금 예수님이 본문에서 지적하고 있다. 그런 행위적 외식은 바로 진리적인 외식에서 온다는 것이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에서 경건했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은 천국 문으로 인정하지 않았듯이, 교회 강단에서 십자가가 변색, 타협, 굴절, 실종되어가기 때문이다. 천국 문을 일부 목사들이 닫고 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메시지는 오직 십자가 복음뿐이었다. 예수님이 내 대신에 죽고 부활함으로써 그 은혜에 진정으로 항복한 나도 새 사람으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의 율법적 계명이라고 할 수 있는 산상수훈이 포함된 본 마태복음이 기록되기 2-30년 전에 그랬다. 그 간단한 진리에 초대교인들은 자기 목숨까지 바쳤다.  

모든 인간의 유일한 소망

행동으로 외식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이전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모든 인간의 유일한 살 길이다. 예수님에게 자기 전부를 생명까지 바치는 것이 바로 참 순종이자, 구원과 영생을 얻은 것이자, 외식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를 너무나 사랑해 내 대신 죽으셨다는 것 이상 어떤 더 좋은 소식이 있다는 말인가? 인간에게 이외에 어떤 소망이 또 있을 수 있는가? 따라서 목사는 교회의 모든 모임과 사역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권능이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게 해야만 한다. 예컨대 목사가 먼저 교인의 발을 씻기며 섬겨야 한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타협, 굴절, 부인하는 자유주의 신학 측에선 행위적 외식을 하지 말라고 유난히 강조한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신자가 뒤로 호박씨 까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신자이기 이전에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만 하는 너무나도 근본이다. 교회가 구태여 강조해 가르칠 주제가 아니다.  

죽음 이후뿐만 아니라 예수 믿은 후의 이 땅의 삶에서도 자기 전부를 살리고 죽이는 이는 예수님뿐이라는 확고한 인식이 그들에게 없다. 십자가 진리에 자신의 전부를 바치는 체험은 물론 그런 관념조차 없다. 필연적으로 기독교를 조금 더 차원 높은 도덕이나 종교로만 소개할 수밖에 없다. 참 생명,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없어지고 도덕 선생 예수만 남게 만든 것이다.

본문에서 외식을 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이 목사들에만 해당되는 당부가 아님을 알 것이다. 신자도 세상 사람들 앞에 제사장으로 서야 한다. 정말로 예수님만이 자신의 유일한 소망이자 목적임을 현실의 삶에서 불신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예수님을 만나 그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진 자라면 그 안에 예수님이 보배로 내주하고 계시기에 그분만 진심으로 따라가고 있으면 그분의 거룩한 빛이 신자 밖으로 새어나오게 된다.

누차 강조하지만 도덕적 종교적 헌신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믿기 전의 나와 믿은 후의 내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알고 그 달라진 모습으로 살고 있으면 세상 사람이 먼저 신자로 인정해준다는 것이다. 또 그러면 신자에게 유일한 아비, 지도자, 스승이신 성삼위 하나님이 반드시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여 그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해주신다.

4/6/2014

사라의 웃음

2014.04.07 23:15:01
*.109.85.156

언행이 일치되지 않음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만이 아니고 진리의 일치가 없기에 나타나는 모습임을 배웁니다. 십자가를 소리높여 외치고 골고다 예수님을 많이 증거하여도 자신이 그리되지 아니하였을 때를 외식하는 자가 되는 것을요....

오래도록 배워온 바는 성도는 이런 저런 것들을 행해야함을, 또 이웃에게도 어찌 어찌 대해야함을 등등 성도다운 모습에 치중토록 배워왔습니다. 인격체가 예수님의 자녀로 바뀌어짐 보다는 교회에 출석하며 자신의 속 보다는 겉을 변화시켜 종교행위에만 더욱 치중하는 것에 익숙해진 저임을 고백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추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골고다에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자녀되게 하심의 의미를 깊이있게 알아가며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전 존재가 비록 거북이처럼 느릴지라도, 예수님 닮아가길 날마다 기도하는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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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매일 보고 만지는가? 마태복음 강해(152)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13:51,52) http://youtu.b...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1) (마태복음강해 #159 - 마14:28-33) [1]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1) 마태복음강해설교 (#159)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

참된 개종보다는 쉬운 길로만 가려는 목사들 (마태복음강해 #216 - 마23:15) [8]

참된 개종보다는 쉬운 길로만 가려는 목사들? 마태복음강해 (216) “화 있을찐저 외식(外飾)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이방...

모든 신자는 순교해야만 한다. (마태복음강해 #173 - 마16:24-28)

모든 신자는 순교해야만 한다. 마태복음강해 (#173) http://youtu.be/DUyzMzB-GpM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오디오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예수님 때문에 심히 통곡한 적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45 - 마26:69-75)

예수님 때문에 심히 통곡한 적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45) http://youtu.be/ls8cu58O-RA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

끈질긴 믿음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강해 #194 - 마20:29-34) [1]

끈질긴 믿음이 다 좋은 것은 아니다. 마태복음 강해(194) http://youtu.be/7wxKNidYDUY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희가 여리고에서 떠나갈 때에 큰 무리가 예수를 좇더라. 소경 둘이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

끝까지 견디어 구원 얻을 자신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25 - 마24:9-14) [3]

끝까지 견디어 구원 얻을 자신이 있는가? 마태복음강해 (225) http://youtu.be/ZJFfgXGhOf8 (클릭하시면 You-Tube 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 너희를 죽이리니 너희가 내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

당신이 정말로 신자임이 확실한가? (마태복음강해 205 - 마22:15-22) [1]

당신이 정말로 신자임이 확실한가? 마태복음강해 (205) http://youtu.be/mLEnl_Tjkeo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로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相論)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 ...

지금도 너무나 진지하신 하나님 (마태복음강해 #170 - 마16:13-17) [1]

지금도 너무나 진지하신 하나님 마태복음 강해 (#170) http://youtu.be/Q8Wm1DGQPqI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오디오로 설교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

오병이어 기적의 참 뜻은? (3) (마태복음강해 #157 - 미14:13-21) [2]

오병이어 기적의 참 뜻은? (3) 마태복음 강해 (157) “예수께서 들으시고 배를 타고 떠나사 따로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여러 고을로부터 걸어서 좇아간지라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

누가 무덤의 돌을 옮겼는가? (마태복음강해 #254 - 마27:57-66) [1]

누가 무덤의 돌을 옮겼는가? 마태복음강해 (254) http://youtu.be/0118IV1svQQ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

신자가 꼭 가져야할 종말에 관한 한 가지 지혜(마태복음 강해 #230 - 마24:44-51) [1]

신자가 꼭 가져야할 종말에 관한 한 가지 지혜 마태복음 강해(230) http://youtu.be/hy8pTp1qZ4k (클릭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

하나님의 심판에 기도로 동참할 수 있다. (마태복음강해 #198 - 마21:18-22) [2]

하나님의 심판에 기도로 동참할 수 있다. 마태복음 강해 (198) http://youtu.be/ScHdExNJdSk (클릭하시면 설교를 You-tube에서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

예수님의 참 이름 (마태복음강해 #158 - 마14:22-27) [2]

예수님의 참 이름 마태복음강해 #158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저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직무유기에 빠진 교인들 (마태복음강해 #200 - 마21:23-27) [1]

직무유기에 빠진 교인들 마태복음 강해 (200) http://youtu.be/5lkkuMPM9QU (클릭 하시면 You-tube에서 설교를 오디오로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나아와 가로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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