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3) - 데이트 중에 가버린 여자

조회 수 3881 추천 수 336 2005.04.02 18:26:2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

묵상과 기도

어떤 잡지에서 보니까 한국의 한 유명한 스님이 기도란 소리를 내며 해선 안 된다고 했다. 기독교에선 가능한 소리를 내서 하라고 가르친다. 그것이 꼭 통성 기도할 때처럼 큰 소리로  부르짖으라는 뜻은 아니다. 모든 기도를 소리 내어 할 수는 없다. 사람이 소리를 낸다는 것은 어떤 경우인가? 울거나 웃는 경우나, 아직 말을 잘 할 줄 모르는 아이의 경우를 빼고는 동물과 달리 구체적이고도 분명한 뜻이 있는 말을 한다는 의미다.

또 말이란 반드시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두 당사자가 있어야 한다. 따라서 소리 내어 하는 기독교의 기도란  혼자서 내면 세계를 깨끗이 하여 평강을 얻고 깨우침을 얻으려는 묵상과는 전혀 다르다. 타 종교에선 묵상과 기도의 구분이 없거나 아예 어떤 절대자에게 아뢴다는 인식조차 없는 경우도 있다. 기독교에도 묵상은 있다.  성경을 보며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가며 그 뜻을 깨닫는 것, 혹은 내 삶에 간섭하신 하나님의 인도를 되돌아 보며 그 은혜를 헤아리는 것들은 묵상이다. 묵상(默想)은 문자 그대로 말을 하면 방해를 받는다.

그러나 기도란 성도의 바로 곁에 항상 함께 하시는 초월적 절대자에게 말로 아뢰는 것이다. 겉으로 소리내지 않고 속으로 기도하는 경우라도 정확한 문장의 형태로 의미가 전달 되어야 한다. 어떤 때는 성전에 나와 정말 하염없이 울고 싶을 때가 있지만 그럴 경우도 마음 속으로는 하나님에게 무엇인가 아뢸 것이 분명히 있으면 그것은 기도다. 또 그 울음 안에 자신이 하나님께 전할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고 하나님도 알고 계신다. 상대가 있다는 것은 기도가 일방적인 요청, 선언, 넋두리가 아니라 주고 받는 대화라는 뜻이다.      

그럼 어떤 사람과 대화할 때에 어떻게 시작하는가? 가장 먼저 상대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 기도의 첫 마디를 어떻게 하라고 하셨는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다. 하나님을 부름으로 대화를 시작하라는 것이다. 본문의 가장 근본적인 뜻은 바로 이것이다. 이제 하나님에게 제 사정을 낱낱이 아뢸 테니 들어 주세요. 나아가  제가 들을 테니 지금 나에게 말씀 해 주세요라는 요청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가 단순히 기독교라는 종교의 상투적인 하나님 호칭이 아니다. 우리의 기도를 듣고 응답해 주시는 절대자가 분명히 따로 있다는 온전한 확신의 표현이다.  
        
데이트 중에 가버린 여자

미국 사람들에게 한국인들은 잘 하지 못하는 좋은 습관이 하나 있다. 한 번 본 사람의 이름은 꼭 외운다. 그들의 교제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에티켓이다. 미국 TV에 생판 모르는 남녀를 소개 시켜 주고 데이트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Blind Date’라는 프로가 있는데, 가끔 보면 남자가 여자의 이름을 못 외우거나 다르게 부르면 여자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린다. 상대에게 관심을 갖지 않은 증거요 무시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하면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의 이름을 잘못 부르면 어떻게 되겠는가? 지난 주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분의 이름이 하나님과 하느님 중에 어느 것이 맞는지 따져 본 것이 바로 그 이유다. 신자가 입술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속으로는 하나님이 자기의 액땜만 해주든지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채워 달라고 요구한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하느님으로 부른 것과 마찬가지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채 듣지 않으시고 일어서 나가버릴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신자들의 복만 비는 기도는 어지간해서 들어 주지 않는다. 이미 신자들도 오랜 신앙 생활의 경험에서 그런 줄 안다. 그러니 교회에서조차 거창하게 특별 새벽 100일 기도 식으로 말도 안 되는 짓을 예사로 한다. 복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받아야겠는데 기도 응답이 잘  안 되니까 하나님과 한 번 끈기 시합을 하자고 덤비는 꼴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기도하면 꼭 그런 행사를 안 해도 되고 평소에 열심히 기도하면 된다. 하나님의 이름만 제대로 알고 부르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란 호칭도 하나님의 본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엘로힘, 만왕의 왕 등 다양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그 모든 이름들은 많은 사람들이 여러 다른 상황에서 온갖 형태의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으면서 각 경우마다 그 은혜의 특성에 가장 적합한 이름을 부친 것이지 하나님 스스로 자기의 이름을 밝힌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란 호칭도 인간이 부친 것이다.

하나님이 밝힌 하나님 당신의 이름

하나님 당신이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밝힌 적이 성경 전체를 통틀어 딱 한 번 있다.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3:13,14)

애굽에서 사백 년간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해 내기 위해 하나님이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간 양치기를 하고 있던 모세를 불러 내는 장면이다. 모세로선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하나님의 구원자로 자처하며 동족 앞에 나설 때에  그들이 자기를 어떻게 믿을 것인지 의구심을 가질 것이라고 추측한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소개해야 되느냐고 물은 모세의 질문에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대답하셨다. 이 대답만으로 따지면 하나님의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가 된다. 그러나 사실은 하나님의 대답은 그것이 아니었다. 성경 번역을 그렇게 했을 뿐이다.

히브리 원어적으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자신의 이름은 영어식으로 하면 주어와 Be 동사 뿐으로 그냥 “I am”이었다. 말이 안 되는 이름이다. 영어로 “I am”이라고 말하는 경우란 단순히 내가 존재한다거나, 어떤 질문에 대한 긍정의 의미밖에 없다. 즉 거기에 누가 있느냐(Who are there?)라고 물을 때에 “I am”(내가 있다)이라고 대답하거나, 당신은 목사입니까(Are you a pastor?)라고 물을 때에 “Yes, I am”(예 맞습니다)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지금 모세는 “What is your name?”이라고 물은 꼴인데 그 대답은 당연히 “My name is Jehova.”식으로 답해야 하는데도 단순하게 “I am”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모세와 하나님은 지금 동문서답한 셈이다.

모든 문장은 문법적 규칙에 맞아야 하고 그 가장 간단한 문장 구조는 우리가 중학교 들어가면 처음 배우는 영어 문장 “I am a boy”와 같이 주어 + Be 동사 + 보어의 형태다. 성경 번역가들은 히브리 원어의 하나님이 말씀하신 자신의 이름 “I am”을 그대로 살리면서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려고 그 이름을 보어의 위치에 넣은 것이 “I am who I am”이 된 것이고 그것을 번역하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된다.    

혹시라도 오해를 말아야 할 것은 이 부분의 번역 자체가 잘못된 것은 절대 아니다. 가장 훌륭하고도 완전한 번역이다.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이 만큼 잘 표현한 말도 없다. 스스로 있는 자란 “홀로 하나”(딤전1:17)이신 분으로 피조물이 아니라 창조주라는 말이다.

세상의 모든 물체나 생물은 하나 예외 없이 그 존재가 존재하게 된 생성원인이 있고 또 그 존재가 계속 존속하려면 어떤 에너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상호 의존하고 관계를 맺어 영향을 받아야만 한다. 모든 생물은 먹이 사슬로 연결되어 있고 사람만 해도 매일 먹는 음식은 둘 째 치고 물과 공기와 빛이 없으면 한 시라도 살 수 없다.  모두가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만물을 창조하시고 생명과 영혼을 불어 넣어 주시며 에너지 공급원인 해와 달을 만드시고 물과 공기의 분자구조를 결정 지으신 하나님만은 별개다. 그 분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자 능력 그 자체다. 스스로 있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전 우주를 통 털어 오직 한 분뿐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하나님이다.

이름을 안 밝히신 하나님

“스스로 있는 자”라는 번역이 신학적 의미에 전혀 하자가 없지만 우리가 부르기에는 무엇인가 부족하다. 이름이란 한 마디로 모든 뜻이 드러나야 하고 우선 짧고 외우기 쉽고 부르기 좋아야 한다. “자 이제 ‘스스로 있는 자님께’ 기도하고 찬양 드립시다” 라고 말하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지 않는가? 나아가 더 근본적인 문제는 원래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이름이 아니며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계시하고자 하는 뜻이 온전히 드러나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문법적으로 따져 주어(主語) + Be 동사 + 보어(補語)의 형식을 취할 때는  반드시 주어와 보어가 동격(同格)이거나, 보어가 주어의 어떤 성질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한국 사람이 “I am an American”하면 미국 시민권자가 아닌 다음에는 문법적으로 틀리지 않지만 내용적으론 잘못된 말이 된다.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I am”으로만 대답한 것은 의도적으로 보어를 생략했다는 뜻이다.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시지 않겠다는 뜻이다. 보어의 위치에 사물, 사람, 성격, 형상을 나타내는 무슨 말이라도 갖다 넣게 되면 주체인 하나님과 그 설명하는 객체와 신분, 자격, 성격 등이 같아지게 된다. 인간의 말로 표현되는 어떤 말이라도 기왕에 이 땅에 있는 물체나 형상이거나 인간의 지정의 범위 안에 제한 되어 있는 어떤 특성이 될 수 밖에 없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이 땅의 불완전하고도 썩어 없어질 피조물과 닮거나 같은 성질을 가졌다는 뜻으로  해석이 된다는 말이다.

심지어 하나님에게만 적용되는 분명한 하나님의 속성일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는 보어의 자리에는 올 수 없다. 예를 들어 전지전능하신 분은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다. 하나님을 빼고는 어떤 존재도 전지전능하지 않다.   하나님이 만약 “나는 전지전능이니라” 식으로 모세에게 대답하셨다면 절대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속성 하나에 자칫 제한 받거나 그렇게 인식되어질 위험이 있다. 자비, 사랑, 긍휼, 공의, 등 하나님이 갖고 계신 다른 속성은 인간 이해 범위에서 제외 되거나 경시 될 가능성이 생긴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어떤 언어로도 설명되어질 수 없다. 이 세상과 완전히 다르고 구별 되신 존재다. 하나님 스스로 인간의 말로 이 땅의 어떤 형상에라도 자신이 빗대어 지는 것을 방지하셨다. 자신이 인간의 지정의 범위 내에 제한되어지거나 오해 되는 것을 스스로 막으신 것이다.

이름을 부르는 까닭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자기가 직접 지으신 자기의 자녀들 앞에 구태여 누구라고 이름을 설명해줄 필요가 있을까? 자식이 아버지를 부를 때에 아버지는 한 명뿐이니까 따로 이름이 필요 없다. 반면에 아버지는 자식이 여럿이니까 각 자의 이름을 구별해 불러야 한다.

한국 사람들은 남에게 아버지의 존함을 대놓고 부르면 큰 실례다. 반면에 미국 사람들은 아버지도 “하이 짐(Hi, Jim)”하고 이름을 예사로 부른다. 그것도 정식 이름 James 를 두고 약칭으로 Jim하고 부른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 아버지에 대한 예의와 공경심은 있다. 그럼에도 꼭 이름을 부르는 까닭은 개인주의 사상이 강해서이기도 하지만 혹시 아버지가 여럿이라 그런 것은 아닐까? 이혼을 밥 먹듯이 하니까 생부(生父)가 따로 있고 계부도 여럿이다 보니 이름을 불러야 구분된다.

홀로 한 분 뿐이신 하나님은 수없이 많은 자기 자녀들 이름은 따로 기억하셔야 한다. 일일이 개별적으로 구분해 부를 필요가 있다. “내가 너를 손 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49:16)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을 부를 때는 구태여  따로 이름이 필요 없다. 좀 죄송한 표현으로 “거시기”라고 불러도 된다. 표현이 저속해도 하나님이 이해하신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거시기”라는 표현은 두 당사자가 서로 너무 잘 알아 구태여 말로 설명 안 해도 상대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을 때에 쓰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 모두에게 그런 존재다. 이 지구 상의 60억이 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다. 따로 이름이 필요 없는 존재다. 구태여 호칭을 안 들먹여도 그 분에 대한 마음이 열려 있고 대화가 통할 수 있어야 한다. 유일무이한 존재에 이름을 부친다는 자체가 이상하다. 신자란  하나님을 부르지 않아도 자기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그 분을 인식할 수 있는 자여야 한다.

한국 사람이 아버지 존함을 입에 잘 올리지 않는 것은 아버지를 공경한다는 것이 일차적인 뜻이지만 아버지는 이름으로 제한 받을 존재가 아니다는 뜻이다. 다른 어떤 사람과의 관계와도 다르다. 부모 자식간은 반드시 서로 이름으로 불리워져야 하고 이름이 없으면 구분이 안 되는 그런 일상적인 사이가 아니다. 어떠한 이해타산 관계도 둘 사이에 개입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부모 자식간에도 이럴진대 하물며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는 더 말할 것이 없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대할 때에 이름을 감히 입에도 올리지 못했고, 성경 필사자들이 바로 이 본문의 “I am”이라는 이름이 나올 때는 옷깃을 여미고 붓을 다시 씻은 것은 그런 뜻에서 너무나 당연했다.

하나님의 실제 이름

하나님이 스스로 밝히신 이름 “I am”을 우리 말로 직역하면 어떻게 되는가? “내다”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밝히신 이름으로는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 더 이상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어렸을 때에 부모가 외출하고 하루 종일 아이들만 집을 지켜 본 경험을 해 본 적이 있는가? 바람 소리에 문이 덜컹 소리만 내어도 도적이나 강도가 들었는가 싶고, 귀신이 나올까 밤에 변소도 못 간다. 그러다 밤 늦게 현관의 벨 소리가 나 누구냐고  물었을 때 철문이 중간에 가로 막아 비록 그 모습은 안 보일지라도 기침 소리나 인기척만 들어도 아빠가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순간 자연적으로 갖게 되는  안도감을 기억하는가? 혹시나 싶어 “누구세요”라고 물으면  “내다”라는 아버지의 그 한 마디 대답이 아이에게 주는 사랑, 위로, 능력,  의미는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다. 그 간의 모든 초조, 불안, 염려, 공포가 일시에 사라진다. 집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과 아빠가 오기 전까지 누워 자면 안 된다는 부담감을 순식간에 몽땅 벗어 버리고 정말 단잠에 빠질 수 있다. 그 때부터 그 집은 아빠의 손 아래 완전히  맡겨 드린 셈이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심지어 “아빠다”라고 말해 줄 것도 없다. “내다” 라고만 하면 된다.  

아까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스스로 밝힌 것이 성경에 한 번 있었다고 했지만 사실은 두 번이다. 마태복음 14장 22절 이하로 가보자. 배를 타고 가다가 한 밤중에 바람을 만나 곤경을 당하고 있는 제자들이 물 위로 예수님이 걸어 오자 유령인줄 알고 무서워하는 장면이다.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며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마14:26,27)  예수님이 자기를 어떻게 표현하셨는가? “내다.(I am)” 출애굽기와 동일한 표현이다. 주어와 Be 동사 뿐이다. 창조주 하나님과 그 독생자 예수님은 동일하신 하나님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이신 분이다. 그 분만이 우리의 염려와 불안을 깨끗이 없애주시며 만물이 그로 인하여 지음을 받은 우리의 영원하신 절대자요 주님이시다.

모세가 자기는  입이 둔하니 다른 자를 보내라느니, 여호와의 이름을 동족에게 어떻게 말해야 되겠느냐는 것들은 사실은 핑계에 불과했다. 그는 살인 죄를 저지르고 외국으로 도망간 지명 수배자였다. 현상금 붙은 범인이다. 거기다 애굽의 궁정에서 40년간 왕자로 자랐기에 당시의 세계 최강국이었던 애굽의 군사력과  제도가 얼마나 강력한지 그 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자기가 돌아 가면 당장 붙잡혀 사형당할 것이 뻔하니 두려워 자꾸만 딴 전을 부린 것이다. 바로 그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스승 예수가 자기들 더러 먼저 바다 건너편에 가 있으라고 해놓고 새벽 서너 시가 되도록 감감 무소식인데다 폭풍우로 배가 당장 뒤집어질   것 같아 어쩔 줄 몰라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 순간 칠흑 같이 어두운 바다 위에 흰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이 물 위를 걸어 오고 있지 않는가? 상상만 해도 머리카락이 곤두 설 지경이다. 바로 그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무엇이라고 하셨는가? “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3:12)고 약속하시고, 심지어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출4:12)고 다짐하셨다. 실제로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출4:19)고 지명수배까지 해제시켜 주셨다. 예수님도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고 제자들을 안심 시켰다.

하나님의 이름은 필요 없다.

하나님의 이름은 별 달리 없다. 있을 필요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 모세와 하나님이 동문서답(東問西答)을 한 것이 아니라 우문현답(愚問賢答)을 한 것이다. 모세의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은 질문에 하나님은 하나님 당신 만이 주실 수 있는 대답을 하셨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 것이라. “(롬1:20) 인간은 하나님의 이름을 몰라도 된다. 종교적 교리를 자세히 몰라도 된다. 하나님의 이름은 몰라도 하나님 당신은 얼마든지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께 무릎 꿇지 않는다면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완전히 다 드러내 보이셨다. 우리의 모든 질고와 슬픔과 고통과 죄악을 대신 감당하시고 죽으셨다. 만물이 그 분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을 수 밖에 없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이상하다.    

육신의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내다”라고 말하는 그  한 마디에도 모든 사랑과 능력이 다 포함되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 당신이 인간에게 “내다” 이상 무슨 말을  더 해줄 필요가 있겠는가?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능력, 은혜, 사랑, 긍휼, 자비, 공의, 정직, 생명, 거룩, 진리 그 모든 것들이 그 한마디 안에 완전하고도 충분하게 다 녹아져 있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은  인간의 어떤 언어와 수식으로도 제대로 그려낼 재간이 없다. 그 분은 인간의 추측과 평가와 분석을 넘어 선다. 심지어 신자의  어떤 선하고도 아름다운  기대와 예상마저도 그 분의 사역을 변경시키지 못한다.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정성과 계획도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그 분의 생각은 우리와 다르며, 그 길은 우리와 다르다. 길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 질과 양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더 높은 지성과 더 엄청난 능력을 뜻하지 않는다. 아예 차원과 영역이 전혀 다른 곳에 속한 것이라는 뜻이다. 인간의 이해의 한계를 넘어선다.

신자가 가끔 “하나님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단 말입니까?” 혹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까?” 라는 의구심과 불만은 하나님 앞에서만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의 그 보잘 것 없는 지성과 이성으로 하나님을 분석하려 들거나 겨자씨 만도 못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우리의 어떤 의심과 질문에도 하나님의 대답은 항상 동일하시다. “내다” 외의 어떤 다른 대답도 하지 않으신다.    

한 번 가만히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내다” 라고 말 하고 계신다는 것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를…하나님이 “내다”라고 하시는 데  감히 세상의 어떤 것으로 그 앞에 반발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분 앞에는 인간의 어떤 항변과 역설과 불평과 불만과 재론이 설 자리라고는 전혀 없다.

하나님이 인간의 지정의를 무시하신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우리의 이 얄팍한 생각으로 그 분의 그 풍성하시고 신비한 은혜와 권능이 제한 받기를 꺼려하신 것이다. 대신에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거룩하게 회복되어진 인간의 영혼을 통해 당신의 영으로 교통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 그 분의 거룩한 생명을 우리에게 넘치도록 부어주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이성이 펄펄 살아 있어선 은혜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을 축복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우리 주위를 둘러 보라. 대자연의 숨소리를 들어 보라. 우리에게 부쳐 주신 교회의 지체들을 보라. 우리에게 마련해 주신 보금자리와 일터를 보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펼쳐 보라. 그 어디에도 하나님은 항상 동일한 한마디 “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다가 오신다. 성도가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 누구를 만나도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은 빙그레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고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고 서 계신다.

아이가 밤중에 천둥 번개가 치거나 무서운 꿈을 꿔 아빠 방으로 뛰어 갈 때에 아빠 방문 앞에서 아빠라고 부르기만 해도 그 두려움은 사실 반 이상 없어진다. 왜 그런가? 비록 방문이 닫혀 아빠의 모습은 안 보이지만 방 안에 아빠가 계시다는 것을 알고 전혀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빠라고 불렀을 때 아직 방 안에서 문을 열고 나오지 안았지만 “왜 그래 아빠 여기 있어” 라고 하면 그 공포는 씻은 듯이 없어지지 않는가? 신자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기도를 시작하는 뜻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하나님이 “그래, 내다!” 라고 하시면서 곧 바로 무릎을 세우고 우리 쪽으로 다가 앉으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말이다.

구태여 소리 내고 기도나 찬양을 하지 않았지만  주일 날 교회에 나와 앉는 순간, 아직 본문을 읽지도 않았지만 성경 첫 장을 여는 순간, 범사가 오직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어떤 일이든 시작하려는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내다”라고 다가오신다. 나아가 하나님 앞으로 마음과 생각을 모으기만 해도 그 분만이 주실 수 있는 평강을 하늘에서부터 부어 주신다는 것을 아는가? 믿는가? 아니 받아 본 적이 있는가? 겁에 질렸던 아이가 아빠 방문 앞까지 도달한 단계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당신에게 “내다(I am)”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는가? 이제 아빠가 방문을 열고 나온 셈이다. 더 이상 무슨 다른 위로와 은혜가 필요하단 말인가?    


가시나무

2005.04.03 19:40:40
*.109.189.253

가시나무 입니다
이 글 강추입니다
더 이상 말로 표현 못하겠습니다

사라의 웃음

2012.07.27 23:02:42
*.109.85.156

모세의 질문에 "내다" 라고 대답하신 하나님은 우문현답을 해 주신 것이군요. "내다" 라는 그 한마디에 담긴 의미,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맘, 풍성한 생명... 말로 다 헤아릴 수 조차도 없는 의미를 조곤 조곤 설명하여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십자가위에서 "다 이루었다" 하신 예수님, 풍랑위에서 제자들에게 "내다"라고 안심을 주신 예수님, 전혀 다른 분이시기에 우리의 이성으론 도무지 헤아릴 수 없고 짐작조차도 할 수 없는 크신 분이 아버지가 되어주시어 "내다"하시며 늘 곁에서 빙그레 웃으시며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심을 생각하니 너무도 감사합니다. 정말 너무 좋고, 든든하고, 평안합니다.

날마다순종

2020.07.18 20:04:04
*.14.99.253

하나님의 대답이 자칫 모호하다고 생각이 들 수 있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스스로 있는자'라 말씀하신 것이 우리 인간에게 그분을 가장 알기 쉽게 알려주신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간단히 말해 이름이란 피조된 객체에 대해 그것을 만든자가 붙여 주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유일하신 창조주이시기에 이름이 없는, 아니 필요없는 것이 아닐련지요. 혹 그분께서 스스로 본인의 이름을 만드셨을지도 모르지만 말이죠. 

 

또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기를 '아버지'라 하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도 하나님을 향해 부를때에 '아버지'라 부르는 것 만큼 가장 어울리는 것이 없는것 같습니다. 굳이 혈육의 아버지와 구분하여 예수님처럼 '하늘에 계신 아버지' 또는 '하나님 아버지'라 구분하여 말이죠.

 

정말 그분께서 "내다"라고 하시는 그 한마디에 더 이상 무슨 위로와 은혜가 필요할까요?^o^

master

2020.07.19 04: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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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순종님 귀한 의견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일하게 자존하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 되심이 너무나 감사하기에 평생토록 경배와 찬송과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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