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12:1,6,7 잘 믿었는데도 왜 이런 일이?

조회 수 468 추천 수 23 2009.09.18 02:2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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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믿었는데도 왜 이런 일이?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저가 영영히 요동치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념하게 되리로다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시112:1,6,7)


흉보(凶報)만 기다리는 사람들

휴대폰 바람에 가까운 사람끼리는 시도 때도 없이 서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휴대폰이 지금처럼 대중화되기 전에 커뮤니케이션에 관한 한 세미나에서 강사가 "지금 이 시간 ‘OOO씨  전화 왔습니다’라는 전갈을 받으면 그것이 좋은 소식이겠는가 아니면 나쁜 소식이겠는가?"라고 물었다. 참석자의 거의 대부분이 흉보일 것이라고 대답했다.

한국 속담에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다. 평소 때에 자주 왕래하여 형편을 서로 잘 아는 사이가 아닌 경우에 갑자기 소식이 오면 거의 모두가 사고, 급한 일, 아니면 귀찮게 부탁할 일들이기 때문에 그런 말이 생긴 것 같다. 솔직히 아무 탈 없이 재미있게 지내면 그 재미에 빠져 주위 사람들에게 연락할 필요나 여유가 없다. 여름휴가 가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전화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모든 인간은 근본적으로 흉보에 대한 두려움을 항상 갖고 있다. 특별히 이른 새벽이나 오밤중에 전화가 오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그야말로 비상 연락이 아니면 그런 시간에 올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소식이 있다는 전갈만 들어도 길보로 기대하기 보다는 흉보로 두려워하는 경향을 인간이라면 그 기질이 비관적이든 낙관적이든 관계없이 누구나 갖고 있다.

물론 그것이 가까운 사람에 대한 애정 어린 관심과 자기 하는 일에 대한 세심한 주의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아무 근거 없는 걱정 때문일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무슨 뜻인가? 우리 모두 소심하고 겁쟁이라서 그런가? 아니다. 그보다는 인생이 그만큼 예측 불가능한 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소식을 받고 보면 별 것 아닌 일들이 대부분이다. 사소하고 별 걱정 거리가 안 되는 일들이라는 뜻만이 아니다. 인생살이에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상적인 일이라는 뜻이다. 교통사고로 다쳤다, 암에 걸렸다, 사업에 부도가 났다, 자식이 사고 쳤다, 등등의 연락이 비록 당사자에겐 당장에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이 두렵고 슬프고 힘들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큰일도 누구에게나 언제든지 필연적으로 한 번쯤 닥칠 일이지 않는가?

말하자면 진짜로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고, 해가 서쪽에서 돋거나 천지가 갑자기 캄캄해지는 대재앙은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희로애락과 생로병사는 잘못된 일이거나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한 사람이 태어나 평생을 무사무탈하게 지내다 병 한 번 들지 않고  평안하게 죽을 수 있는 자는 단 한명도 없다. 반드시 육신은 쇠퇴하여 병이 들고 가까운 사람과 상처를 주고받고 나아가 사랑하는 자와 이별하며 자기 하는 일에도 흥망성쇠는 있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들이 그런 흉보를 접하면 마치 잘못된 일인 것처럼 느끼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생에는 고난이 끊일 수 없다는 사실을 항상 잊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만은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 잡혀 있거나 심지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렇게 억지로 믿고 싶거나 아니면 그런 일을 망각하고 사는 것이 편하니까 그런 양 하고 있는 것이리라. 정말 착각 중의 착각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 인생은 항상 자기 통제 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긴급한 일들로 걱정해야 하는 것은 내 사전(辭典)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예측하고 통제하고 계획하여 그대로 수행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내 인생이 펼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자기가 자기 인생의 주인이다.

스스로 속는 불신자들

신자는 다르다. 신앙을 가진다는 가장 근본적인 뜻이 무엇인가? 인생이 스스로 통제 불가능하며 예측 불가능한 일이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게 자기의 인생을 완전히 믿고 맡긴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까닭 없는 불안의 가장 큰 원인이 되는 예측 불가능한 흉사도 그분의 선하신 계획과 뜻 가운데 있음을 믿기에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인도와 보호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자는 흉한 소식 자체에 불안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 않는가? 신자가 되었다면 이제는 급한 연락이 오더라도 가슴부터 철렁 내려앉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인간은 누구라도 유한하고 불완전한 피조물에 불과하기에 일차적인 반응이 불안으로 나타나는 것은 신자에게도 자연스러운 일이긴 하다. 그러나 까닭 없이 불안해하거나 아무 근거 없이 염려하거나 인생사에 당연히 따라 오는 질병, 부도, 상처 등에 걱정만 하염없이 앞서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인생을 보는 시각이 아직 믿음 안에 서 있지 못하다는 증거다.

흥미로운 사실은 휴대폰으로 항상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어도 사람들이 불안해 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아마 더 불안해 할 확률이 더 높다. 휴대폰이 없었을 때는 속담 그대로 무소식이 희소식이었기에 특별히 전화가 불시에 와야만 불안해졌다. 그러나 지금은 휴대폰까지 갖고 있는데도 소식이 없는 것 보니까 뭔가 큰 일이 있는가 보다라고 전화가 올 때까지 항상 불안해한다.

결국 전화가 없다는 것은 아무 일이 없다는 뜻이다. 혼자서 남 몰래 깊은 산 속에 들어가 조난을 당한 것 아니고는 만약 진짜 큰 일이 일어났으면 주위 사람이나 경찰에서라도 연락은 오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연락이 있으나 없으나, 바꿔 말해 문제가 생겼든 안 생겼든 불안해하는 것은 자기의 생각 내지 상상일 따름이다. 자꾸만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일의 경위를 심지어 미래까지 다 알아야겠다고 우기고 있는 꼴이다.

불신자들이 사단의 하수인인 점쟁이에게 돈을 바쳐 가며 자꾸 찾아가는 이유다. 나에게만은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흉보에 불안해하는 것 자체는 인간이라면 너무나 자연스런 반응이므로 하등 문제 삼을 것이 없다. 그러나 인생을 자기가 주관하려 드는 근본적인 사고(思考)가 하나님에게 반역일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점쟁이를 찾아가는 이유는 인생에는 스스로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 셈인데도 여전히 어떻게 하든 자기 힘으로 그렇게 해보겠다고 고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했으면, 아예 포기하고 가만히 처분을 기다리든지 진짜로 할 수 있는 분을 찾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끝까지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외면하겠다는 완악한 심성이다.    

사단은 그런 심성을 역이용해 너희가 불안해 하니까 점을 쳐 주어 불안하지 않도록 해 줄께라고 달콤하게 유혹한다. 그런데 그 유혹이 기실은 그들을 더 불안으로 이끄는 속임수다. 불신자들이 자기가 통제하고 바꿀 수 없는 일인 줄 알고도 점쟁이를 통해 단순히 순간적 마음의 위로 내지는 헛된 해결책을 찾게 만든다. 말하자면 그들로 하여금 계속해서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고 스스로 속게 만든다. 근본적인 불안이 절대로 덜어질 리가 없다.

불안이 하나 더 늘어난 신자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모든 통제를 하나님께 맡겼다는 의미이기에 스스로 미래 일을 예측 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라면 어떤 소식이든 듣기도 전에 미리부터 불안해하거나 듣고 나서도 계속해서 염려할 이유가 없어야 한다. 비록 흉보를 접해 자연적으로 불안해지더라도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무릎 꿇으면 된다.

“여호와께서 주의 은혜로 내 산을 굳게 세우셨더니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고 여호와께 간구하기를 내가 무덤에 내려 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어찌 진토가 주를 찬송하며 주의 진리를 선포하리이까 여호와여 들으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여호와여 나의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주께서 나의 슬픔을 변하여 춤이 되게 하시며 나의 베옷을 벗기고 기쁨으로 띠 뛰우셨나이다."(시30:7-11)

다윗이 질병을 만나 적은 시다. 환난이 닥치매 잠시 근심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흉보에 대한 일차 반응으로 자연히 염려가 생겼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어서 바로 "당신의 백성이 죽어 버리면 당신에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러니 저를 살려 달라"고 주께 부르짖었다. 마치 하나님을 협박하는 것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스스로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보잘 것 없고 나아가 살고 죽음이 오직 당신께 달렸음을 빗대어 표현한 겸손의 말이다. 흉보가 닥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무릎 꿇는 신자의 참된 모습이다.  

휴대폰이 있는데도 왜 연락이 없지 더 큰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라는 염려는 정말 쓸 데  없는 염려다. 이미 갖고 있는 근거 없는 염려에다 또 다시 전혀 타당하지 않은 염려까지 보태었다. 그런데 신자의 믿음에도 꼭 이런 비슷한 일이 있다. "내가 잘 믿었는데도 왜 이런 일이 일어나지? 하나님에게 무엇인가 잘못된 일이 있는 것 아닌가?"

불신자는 불신앙 안에서 염려 위에 염려를 보태는 자가당착을 범했다. 불안해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면서 평생을 불안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신자마저 똑 같이 신앙 안에서 염려 위에 염려를 보태는 자가 당착의 잘못을 범하고 있다. 신앙이란 자기가 통제와 예측을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떻게 생각하는가 따져 보자. "잘 믿었는데 왜 이런 힘든 일이 생겨 염려가 끊이지 않지?"는 스스로 예측과 통제를 하지 않겠다고 해놓고 오히려 그것이 제대로 안 되니까 다시 예측과 통제를 스스로 하려는 시도다. 나아가 예측과 통제하지 않은 것이 잘못인가 의심한다.

요컨대 혹시 잘못 믿었는가 후회한다는 뜻이다. "차라리 다시 불신자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불안을 없애는 좋은 길이 아닐까?" 불신자 시절의 까닭 없이 불안에 떨던 버릇은 그대로 살아 있고 그 위에 신앙적 불안마저 생겼다. "믿었는데도 좋은 일은 안 생기고 나쁜 일만 생기면 도대체 언제 희소식이 생기나? 차라리 믿음이 없었으면 덜 불안할 텐데…"

시편 112편의 기자는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의인은 어떤 사람인가를…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한자, 그래서 영영히 요동치 아니 하는 자"라고. 예측 불가능한 인생살이의 길사든 흉사든 자기가 통제하지 않겠다는 자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 계명대로만 정직하게 살고 있는 자다.

신자라면 인생살이에 흉보는 누구에게나 당연히 있는 것이기에 하나님에게 그 모든 것을 맡기고 담담하게 살아가야 한다. 쉽게 말해 최소한 무소식이 희소식이니 미리부터 염려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다면 그분으로부터 무소식마저도 당연히 희소식으로 믿어야 한다. 아직도 잘 믿었는데도, 기도했는데도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라는 의심이 드는가? 휴대폰이 있는데도 연락이 없는 것 보니까 틀림없이 큰 일이 생겼어라고 불안에 떠는 모습에서 하나 나아진 것 없다.

한 마디로 잘 믿은 나에게는 이런 흉보가 생기면 마치 안 되는 것처럼 착각, 아니 망상하는 것을 없애지 않고는 어떤 경건한 신앙 훈련을 아무리 오래 해도 전혀 소용이 없다. 믿음이 단 하나도 자란 것이 아니다.

믿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고난이 끊이지 않는 인생살이지만 마음 턱 놓고 하나님이 가라는 대로 가고, 하라는 대로 하며 순진하게 사는 것이다. "죽으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고백을 한 순간도 빠트리지 않고 담대하게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선언을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없다면 아직도 참 믿음의 자리에 서 있지 않는 것이며 어떤 소식이라도 듣기도 전에 가슴이 철렁할 수밖에 없다.      

1/17/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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