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18:1-3 하나님께 아부가 너무 심한 다윗

조회 수 527 추천 수 8 2009.09.18 00: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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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아부가 너무 심한 다윗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시18:1-3)


주일 대예배 때에 하는 대표기도의 내용을 가만히 들어보면 하나님에 대한 수식어가 너무 많이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만물을 섭리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우리의 앞길을 밝히 보이시며, 우리에게 항상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기뻐하시며....” 등등 기도의 전반부가 전부 하나님에 대한 찬양 일색입니다.

자신이 알고 표현할 수 있는 미사여구는 다 동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의 기도를 어쩔 수 없이 끝까지 참고(?) 들어야만 하는 신자들로선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속으로 “대충하고 말지. 하나님에게 저렇게까지 아부해서 자기 혼자 복을 다 받으려 하나?”라는 빈정거림이 자기도 모르게 생깁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더 심합니다. 하나님을 반석, 요새, 건지시는 자, 하나님, 피할 바위, 방패, 구원의 뿔, 산성, 찬송 받으실 여호와로 무려 아홉 가지 단어로 수식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표현에는 비교급과 최상급의 표현이 따로 없고 같은 말이나 내용을 반복하는 회수로 강조합니다. 두 번 반복하면 비교급이 되고 세 번만 반복해도 최상급이라는 뜻이 됩니다. 아홉 번이면 최상급을 세 번이나 반복한 셈입니다. 영어로 치면 “the best of best”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하나님은 최상급으로도 표현해선 안 됩니다. 최상급은 다른 비교하는 대상과 동일한 특성을 갖고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의미합니다. 예컨대 자동차 중에 삼성 이건희 회장이 탄다는 ‘마이바흐 62’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 차가 좋아도 조금 못 미치기는 하지만 거의 비슷한 차들도 많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속성을 자기의 피조물 특별히 인간과 공유(公有)하긴 하지만 인간과 도저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완전히 세상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분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으로선 스스로 인식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 그 분을 표현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마 천국에 가면 천국 언어로 거룩한 그분에게 온전히 적합한 참으로 신령한 찬양을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선 최고 중의 최고라는 표현, 말하자면 장로님들의 미사여구 나열이나, 다윗 같이 아홉 번씩이나 찬양하는 것 이상으로는 표현해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처럼 오늘날의 장로가 기도 가운데 무려 아홉 번이나 하나님을 미사여구로 표현했다면 틀림없이 아부 중에 그런 아부도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다윗의 기도는 왜 너무나 자연스럽게 여겨집니까? 단순히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라 그렇습니까? 다윗과 오늘날 장로나 성정이 동일한 연약한 인간이며 또 그의 시가 성경으로 편집되기 전에는 한 신자가 하나님께 드린 기도문이긴 마찬가지였지 않습니까?

자연스럽다는 것은 반드시 진실일 때에 그렇습니다. 이 시편의 서두에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로 여호와께 아뢴”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의 파란만장했던 전 생애의 체험이 있는 그대로 한 치의 과장 없이 묻어 나온 시라는 뜻입니다. 그의 일생에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것이 어찌 아홉 번 뿐이겠습니까? 오히려 아홉 번으로는 부족해도 한창 부족하지 않습니까?

골리앗과의 전투를 필두로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닌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아들과 부하로부터도 배신을 당했습니다. 사울의 딸이자 자기 아내가 또 그의 아들이 도와주어 겨우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적국 블레셋의 한 성읍으로 망명 생활을 했고 또 그곳에서 목숨을 건지기 위해 심지어 일부러 미친 척도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 최고의 장수인 사울의 창끝에서 두 번이나 살아났습니다.

우리 같으면 평생에 한두 번 겪을까 말까 하는 그런 환난을 그는 수도 없이 체험했습니다. 밤마다 침상을 눈물로 적시고 골수가 마를 정도로 환난은 그의 일상사였습니다. 이 시편에서도 4절 이하에는 비유이긴 하지만 도저히 직접 겪지 않고는 생각조차 해낼 수 없는 생생한 표현들이 나타나 있지 않습니까? 결국 평생을 통해 수도 없는 환난과 대적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보호에서 벗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홉 번에 걸쳐 각기 다른 비유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실제 경험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것도 그 때마다 대적이 다 다르며, 그 위급한 상황과 진행되어져 가는 모습도 다 다르고, 또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는 방법도 각기 다 달랐다는 것입니다. 모든 경우에 본인이 그 은혜를 체험하여 인식하고 감사하게 느껴지는 내용도 각각 다 달랐다는 뜻입니다. 비슷한 사건이나 동일한 대적을 두고 비슷한 체험을 한 것을 거푸 말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간단하게 이렇게 가정해 보십시오. 한 신자가 누가 봐도 완전히 죽을 고비를 아홉 번이나 넘겼는데, 그것도 질병, 교통사고, 사업부도, 가정파탄, 익사, 화재, 살인강도, 테러, 지진,  등에서 오직 하나님의 기적 같은 도움으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럼 그가 하나님에 대해 세상의 모든 미사여구를 다 동원해도 절대 아부로는 들리지 않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고도 은혜로운 찬양이 되지 않겠습니까?  

반면에 죄송하지만 대표기도 하시는 장로나 집사님 중에는 도무지 그런 미사여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분들이 가끔 있다 보니 아부로 들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에서 인간적 방법으로 치부하고 자기 이름 올리는 데만 급급하고 교회에는 단지 돈으로만 봉사하면서 여호와는  구원의 산성이요 반석이라고 아무리 거룩한 목소리로 기도해도 어서 빨리 기도를 끝내라는 기분만 들지 않겠습니까?  

지금 대표 기도하는 분들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른 분의 기도를 우리가 들어도 그저 입술로만 하는 아부인지 아니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찬양인지 구별할 수 있는데,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솔직히 우리 모두의 기도에 아부로 하는 기도가 때로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혹시라도 하나님이 신자더러 어서 빨리 기도를 끝내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요?

아부와 찬양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실제 체험에서 나온 고백이면 찬양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아부입니다. 그런데 실제 체험한 것도 아닌데 왜 그런 최상급의 찬사를 늘어놓습니까? 오직 개인적 목적이 따로 있어서 그렇습니다. 대표 기도하는 분들이 교인들 앞에 자기 믿음을 자랑하려는 것도 개인적인 목적입니다. 기도 응답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빨리 풍성하게 받으려는 욕심이 은연중에 베여 있으면 찬양이나 기도가 자연히 아부로 변합니다.  

당연히 하나님은 찬양은 받으시지만 아부에는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도에서 자기 욕심만 빼버리면 그 표현 여부에 관계없이 바로 찬양으로 바뀝니다. 다윗처럼 아무리 많은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그 반대로 아무리 투박하고 짧게 기도를 마쳐도 찬양입니다.

꼭 노래로 찬양해야만 찬양이 아닙니다. 신자가 하나님 앞에 아무 가식 없이 개인적 욕심을 앞세우지 않고 하는 그 어떤 행위도 찬양입니다. 특별히 기도가 그런 찬양으로 바뀌면 하나님은 그 때마다 정말 생전 처음 겪는 전혀 색다른 체험을 통해 당신의 권능과 은총을 최상급의 기쁨과 감동으로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날마다 새롭고,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스럽고, 겪는 일마다 은혜가 넘칩니다.  

자기가 실제 체험한 은혜를 통해 기도하고 찬양하는 것은 자기 전부를 완전히 열어 보이는 행위입니다. 하나도 보태거나 뺄 것이 없습니다. 완전히 자신을 발가벗겨 있는 그대로의 실체를 그 분 앞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심장을 열어젖혀 보여드린 것입니다. 자기의 자기 된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그분의 은혜와 사랑 안에 완전히 잠길 때에 비록 우리의 표현력이 아무리 부족하더라도 이 땅에서부터 천국 언어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바로 다윗의 시편들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찬양이 어떻게 나왔습니까? 오직 환난에서 그분을 직접 만난 생생한 체험에서만 나왔지 않습니까?

혹시 지금 환난 중에 있습니까? 기도를 찬양으로 바꾸십시오. 찬양하면 구원이 빨라질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그 자체도 욕심입니다. 그런 욕심을 전부 빼어버립시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때와 방법으로 반드시 이뤄질 것입니다. 대신에 그 환난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새로운 은혜를 어떤 형태로든 체험하게 되기를 소원하십시오.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미사여구로 표현할 수 있게 해달라고 소원하십시오. 그럼 매번 다른 환난 중에도 틀림없이 매번 다른 새 노래로 그분을 찬양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12/4/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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