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절 제사로 한해를 마무리하라.

조회 수 23 추천 수 0 2019.02.24 10:01:22

(민 9:9-14) 유월절 제사로 한해를 마무리하라.

구약성경강해 (15) / 민수기강해 (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나 너희 후손 중에 시체로 말미암아 부정하게 되든지 먼 여행 중에 있다 할지라도 다 여호와 앞에 마땅히 유월절을 지키되 둘째 달 열넷째 날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 아침까지 그것을 조금도 남겨두지 말며 그 뼈를 하나도 꺾지 말아서 유월절 모든 율례대로 지킬 것이니라 그러나 사람이 정결하기도 하고 여행 중에도 있지 아니하면서 유월절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이런 사람은 그 정한 기일에 여호와께 헌물을 드리지 아니하였은즉 그의 죄를 감당할지며 만일 타국인이 너희 중에 거류하며 여호와 앞에 유월절을 지키고자 하면 유월절 율례대로 그 규례를 따라서 행할지니 거류민에게나 본토인에게나 그 율례는 동일할 것이니라.”(민9:9-14)

 

율법의 유일한 예외 조항

 

생일같은 기념일은 미리 거행할 수는 있어도 뒤늦게 지키면 별로 감동과 의미가 없습니다. 미리 지키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 기억하고 있었고 어서 빨리 기쁨을 누리고 싶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지난 후에 지키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기기에 잊고 있다가 어쩔 수 없어서 의무적 형식적으로 지키게 됩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이 애굽의 모든 장자를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탈출 시킨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유대력으로 1/14일에 지켜야 하나 시체를 만져 부정해졌거나 멀리 여행을 떠나  참석할 수 없었던 자들이 생겼습니다.(10절) 정확하게 한달 후인 2/14에 불참자들만 따로 모여 절기를 지내도록 했습니다.(11절) 율법에 규정된 절기 중에 추가 벌칙 없이 뒤늦게 지켜도 된다고 허용한 유일한 예외 규정입니다.

 

한달 뒤에 절기를 지내도 된다는 것은 사건에 내포된 의미가 너무나 중요하기에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시기와 상관없이 항상 기억하라는 뜻입니다. 평생토록 다른 것은 잊어도 절대로 이 절기만은 잊지 말라는 뜻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 애굽에서의 사백 년간 종살이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되었고 밀린 임금 조로 애굽의 금은보화까지 얻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으로 지시하기 전에 잊으려야 잊을 수 없기에 자발적으로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모든 기념일은 당시 상황을 재연함으로써 그 의미를 정확히 되새기게 됩니다. 유월절에는 그런 의미로 세 가지 음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먼저 어린 양을 먹되 아침까지 남기지 말고 뼈를 꺾지 말라고 합니다. 출애굽 때는 양의 피를 문에 발랐으나 지금은 성막이 완성되었고 광야 여행 중이라 번제단에 피를 뿌리는 것으로 대신했는데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제물을 남기지 말라는 것은 거룩한 희생 제물을 짐승이나 다른 종족이 먹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또 완전히 먹어 치움으로써 하나님께 자신을 전부 드려서 헌신하겠다는 상징입니다. 양의 뼈를 꺽지 말 것은 하나님에게 바쳐지는 대속제물은 흠이 없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 처형을 당할 때에 뼈가 전혀 꺾이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고안한 처형 중에 가장 고통이 극심한 것이 십자가 처형입니다. 빨리 죽게 해서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어서 사형수에게 마지막 동정을 베풀려고 뼈를 꺾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러기 전에 이미 탈진하여 운명하셨기에 뼈가 꺾이지 않고 흠없는 완전한 제물로 바쳐쳤다고 요한복음 19:32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누룩을 넣지 않은 무교병을 함께 먹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에게 거룩하게 성별된 민족으로서 언제 어디서나 율법을 준행하여 죄를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뜻입니다. 셋째로 쓴나물도 함께 먹는 것은 애굽에서 노예로 겪은 고난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원망을 품고 제사를 드릴 수 있는가?

 

문제는 14절의 너희 중에 우거하는 타국인들도 원하면 본토인과 동일한 방식으로 유월절 제사에 참여해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방인은 출애굽의 직접 수혜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여호와와 당신의 백성들의 대적이자 원수였습니다.

 

당시의 타국인은 대부분 노예살이 중의 히브리인들과 결혼한 애굽인들이었습니다. 출애굽 때에 가족을 버릴 수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조국을 등지고 따라나선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애굽의 모든 장자들이 죽었기에 그들의 친척이나 친구들도 줄초상을 당했습니다. 아무리 가족이 소중해도 히브리인들의 신인 여호와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제사 드릴 입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잔뜩 원망과 의심을 품고 제사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뭔가 불합리한 것 아닙니까? 그렇다고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은 턱없이 부족합니다.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지 않는 제사는 받지 않습니다. 아론의 아들들의 예에서 봤듯이 이스라엘 사람이 그것도 제사장이라도 제사를 잘못 드리면 즉사하는 심판을 내리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출애굽 특별히 애굽의 장자가 죽음의 심판을 받는 재앙에서도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인들조차도 당신을 참 하나님임을 깊이 깨달아 진정으로 항복시킨 은혜를 베풀었다는 뜻이 됩니다. 말하자면 오늘날의 신약 신자들도 유월절 절기만은 반드시 기념하라는 뜻입니다.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은 양의 피를 문의 인방과 설주 문을 지탱하는 문틀(frame)에 가로 세로로 바른 후에 집안에 거하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피가 발린 집을 제외하고 심판을 내렸습니다. 문자 그대로 죽음이 유월(passover)했습니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혹시라도 이스라엘 사람이 모세의 말을 신뢰하지 않고 그대로 따르지 않았으면 심판을 받았을 것입니다 반대로 히브리 여인과 결혼한 애굽 남자라도 그간의 아홉 재앙을 통해 여호와의 권능을 익히 알고 아내가 전해주는 그들의 신앙을 인정하고 모세의 지시대로 했다면 구원 받았을 것입니다.

 

출애굽은 보름날 밤에 급히 이뤄졌습니다.(출12:30,31) 모세가 바로에게도 애굽의 장자가 다 죽게 될 것이라고 미리 경고했습니다. 누구라도 모세의 말을 신뢰하지 않고 여호와를 시험해볼 양으로 밖에 나다니다간 심판 받아 즉사하는 모습을 집안에서 훤히 보였을 것입니다. 물론 성경이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아 아무도 정확히 모릅니다.

 

성경은 “밤중에 여호와가 치셨다”(출 12:29-30)라고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죽음의 사자가 하늘에서 내려와 집집마다 들어가서 칼로 도륙하며 심판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집 밖에 있던 집 안에 있던, 히브리인이던 애굽인이던 양의 피가 없으면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처럼 즉사하는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추정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날 밤에 뿌려져야 할 피는 오직 어린 양 대속의 피뿐이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피만이 구원과 심판을 가르는 기준이었습니다. 피 자체에 그런 능력이 있을 리는 없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과 애굽을 구분하는 표시도 아닙니다. 애굽의 장자만 골라 심판하신 하나님이 그것을 구별 못할 리는 없습니다. 모세의 말을 믿었느냐 아니냐, 다른말로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인정하고 순종했느냐 아니냐만 구원과 심판을 나누는 기준이었습니다.

 

뼈가 꺾이지 않은 애굽의 장자들

 

애굽의 장자가 피를 흘리지 않고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심판을 받았다는 것을 오늘의 본문과 연결하면 어떤 의미가 됩니까? 그들도 뼈가 꺾이지 않고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가 하나님에게 거룩하게 구별되어 바쳐졌습니다.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들만 따로 떼어서 특정한 방식으로 심판했기에 거룩하다 즉,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장남이 더 악해서 심판하되 십자가 처형에서 뼈를 꺾는 것처럼 죽음의 고통을 덜어주려 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애굽인 모두를 대표해서 희생당한 것입니다. 애굽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되 뼈가 꺾이지 않은 셈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뼈가 꺾이지 않은 것은 흠없는 완전한 제물로 바쳐지기 위한 것이 첫째 뜻입니다. 거기다 본문과 연결하면 출애굽의 애굽인들, 다른 말로 이방인의 위치에까지 자신을 낮춘 셈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구원도 간절히 소원하셨던 것입니다.

 

여호와가 애굽에는 열 번의 엄청난 재앙을 내리고 이스라엘은 머리털 하나 다치지 않고 구원해 주셨다고 이스라엘을 편애하고 애굽을 저주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애굽은 하나님의 큰 일을 수행하게 하려고 하나님이 택한 당신의 종이었습니다. 누차 강조한 대로 이스라엘을 창성케 하는데 제일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고대에는 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한 민족을 이루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습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략해 정복하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한국 고대사에서 광개토대왕을 칭송하듯이 영웅적 행위이자 미덕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남미 캐러번이나 국제적 난민 겨우 몇 백 명도 순순히 받아주는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유대인들이 그러듯이 선조 야곱을 닮아 영악하고 이재에 밝은 후손들은 금방 부자가 되었을 것이고 그럼 또 금방 강도들에게 멸망당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큰 기근을 내려 야곱 가문을 애굽으로 피신시켰습니다. 그전에 요셉이 먼저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러나 천신만고 끝에 요셉이 애굽에 큰 공을 세우고 총리가 됩니다.

 

기근이나 요셉의 실종 사건은 그들 가족에게 큰 재앙이었으나 전화위복이 되어서 애굽에서 요셉 가문은 대우 받으며 편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요셉을 모르는 바로가 탐욕으로 이스라엘을 노예로 부려먹었지만 이스라엘의 생명에 지장은 없었고 도리어 바로가 두려워할 정도로 창성해졌습니다.

 

구약시대에 모든 이방족속들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징계 심판하는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현실적으로 이스라엘을 돕고 보호해주는 역할을 맡은 경우는 애굽이 유일합니다. 동일한 맥락에서 하나님은 나중에 아기 예수도 헤롯의 박해를 피해 애굽으로 피신시켰습니다.

 

인간의 윤리는 물론 상식만으로도 애굽을 무조건 심판해선 안 될 것입니다. 여호와도 애굽에게 아홉 번이나 기회를 주었습니다. 약간의 경제적 손실만 있었지 인명 피해라곤 전무했습니다. 바로가 잘못을 시인하자마자, 금방 번복할 거짓말인줄 뻔히 아시고도 곧바로 재앙을 중지시켰습니다. 아홉 번의 재앙은 심판이 아니라 차고도 넘치는 애굽을 향한 하나님만의 긍휼이었습니다.

 

미리 경고 받은 바로

 

아홉 번의 재앙이 내포하는 또 다른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어서 빨리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당신을 믿고 경배하는 것까지는 안 가도 겸손히 항복하고 이스라엘을 풀어주라 그러면 지금까지처럼 생명에는 손을 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열번 째는 반드시 죽음의 심판을 내린다는 것입니다. 거짓말을 알고도 아홉번이나 속아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열번 째 재앙도 모세가 바로에게 미리 정확하게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바로는 사백 년간 자신들의 노예였던 히브리인들을 거지 취급했고 아니 속으로는 인간으로도 여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신인 자기가 80먹은 노인에게 절대 항복할 수는 없었습니다.

 

번듯한 신상은 물론 이름도 없는 히브리 신도 마찬가지로 신 취급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동안의 재앙은 노인이 말 장난했거나 우연의 일치로 여겼을 것입니다. 설령 그 배후에 히브리 신의 능력이 작용했다 할지라도 최고 우수한 애굽인이 열등한 히브리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일은 죽었으면 죽었지 절대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애굽에게 유일하게 이스라엘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겼습니다. 더 중요하게는 열 번까지 경고하면서까지 참아준 유일한 민족입니다. 이스라엘에게도 그렇게 행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한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낼 때에 후손을 하늘의 뭋별처럼 창성하게 해주지만 사백 년간 다른 민족의 종살이를 한 후에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언약을 맺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당신의 이름을 걸고 그대로 성취한 것입니다.

 

어린 양의 피로만 구원의 기준을 삼았다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구원 받기에 합당한 자격 조건 공로가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애굽에게도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만 하는 더 악하고 추한 죄를 더 많이 범한 것도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선 이스라엘이나 애굽이나 당신의 진노 아래 죽어 마땅한 똑같은 죄인들이었습니다. 출애굽은 이스라엘만 구원한사건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단지 먼저 구원했을 뿐입니다. 그들로 복의 통로가 되고 제사장 나라로 서서 모든 이방을 예수 십자가 은혜로 인도하고 그 거룩한 이름을 부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유월절은 구약이나 신약시대의 하나님과 그 구원이 동일하다는 뜻입니다. 민족 인종 문화 윤리 종교의 구분 없이 모든 이를 죽기까지 사랑하신다는 그 사랑의 고백을 하나님이 먼저 일방적으로 행한 것이 유월절 사건입니다. 그 사랑을 생생하게 그림 언어로 3500년 전에 세계 최고 강대국과 최고 약소국에 동시에, 다른 말로 전 인류에게 계시했습니다.  

 

양의 피로 이스라엘이 거하는 집의 문의 틀에 칠했습니다. 요즘으로 비유하자면 공항검색대 같은 역할입니다. 작은 금속이라도 있으면 통과하지 못해 하늘을 나르는 비행기를 타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에 조금이라도 의심 불만을 갖고선 그 보혈의 필터를 통과하지  못합니다. 다른 말로 스스로 선해질 수 있다고 자신하거나 자신에게 하나님의 복을 받을 조건이 충분히 있다고 여기면 결코 천국가는 비행기에 탑승할 수 없습니다.

 

출애굽에서 특별히 유월절에서 생생한 그림으로 그분의 자비를 목격한 애굽이나 다른 이방인들로선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우상숭배로 타락한 흑암의 죽음의 땅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을 것이며 그럼 또 평생을 두고 유월절 제사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방인들이 오늘날 예수를 믿는 우리들입니다.

 

유월절의 엄청난 의미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스라엘을 따라 애굽을 탈출한 이방인들은 애굽인 전체로 보면 아주 극소수였습니다. 유월절 사건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너무나 중요한 사항이 하나 더 남았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만 구원하려면 구태여 열 재앙까지 필요 없었습니다. 눈만 한 번 깜빡하면 언제든 구출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가 애굽에게 열 번을 참고 속아준 것은 그들을 향한 애끓는 긍휼과 그들을 구원코자 하는 당신의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애굽의 엄청난 희생 위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심각하고 대단한 뜻입니다. 하나님의 십자가 구원의 경륜이 얼마나 은혜롭고 광대한 사랑인지 정확히 아셔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예수를 믿어 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내가 잘나서가 아님은 우리 모두는 익히 알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희생과 수고가 많았습니다. 심지어 다른 이의 심판과 맞바꾸어 구원 받은 것이며 그 심판에는 가족도 포함되었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따라 나선 애굽인들 중에는  친척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기 장남이 죽은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비록 자기 아들은 죽었으나 아홉 번의 재앙과 마지막 심판을 겪고는 히브리인들의 신이 정말 우주만물을 다스리는 유일한 참 하나님인 줄 늦게나마 깨닫고 새 삶을 시작하겠다고 결심했을 수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우리 중에 믿지 않는 부모를 둔 자들 있습니다. 아무리 십자가 복음을 전해도, 그냥 믿음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좋으니 교회라도 나가보시라고 아무리 간곡히 권해도 귀를 닫고 여전히 꿈쩍도 않으십니다. 어쩜 돌아가실 때까지도 그러실 수 있습니다.

 

가족의 희생 위에 믿게 되었다는 엄청난 말씀을 제 독단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목사의 양심을 걸고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을 대신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며 검을 쥐어주고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 합니다. 당신으로 인해 부모 자식 간에 분쟁이 일어나고 심지어 원수가 되는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눅12:51-53)  

 

그렇게 되어야만 예수 믿게 되고 그렇게 되는 것이 옳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그만큼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고 이 땅에서부터 참 생명을 누리며 기쁨으로 사느냐 아니면 흑암 안에서 죽음으로 지내느냐는 문제가 완전히 달렸습니다.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 가족보다 더 우선입니다. 그러니까 더더욱 가족이나 주변의 불신자들을 정말 모든 힘과 뜻과 사랑을 다해 섬겨야 합니다. 쉽게 말해 예수 믿는 일을 절대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안 됩니다. 미지근하게 믿거나 게으르고 주저할 수 없습니다. 수시로 세상을 향해 흘끔흘끔 눈치를 보거나 몸은 교회에 생각은 세상에 두어선 안 됩니다. 가족의 희생 아니 심판을 무릅쓰고 우리가 신자가 되었는데 어찌 그렇게 지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애굽의 모든 장자가 죽는 것을 감수하고 이스라엘을 건져낸 것은 그들로 제사장 나라로 세우려는 뜻이었습니다. 부모도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자식 때문에 다른 아이들이 영향을 받게 할 수 없습니다. 똑똑하고 착한 자식 하나 잘 키워서 그가 잘 되는 모습을 다른 형제들이 보고 도전 감동 받게 할 수 있습니다.

 

매일의 삶이 유월절 제사다.

 

우리가 이렇게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된 배후에도 아주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일들이 뗄래야 뗄 수 없는 연결고리를 갖고 작용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차고 넘치는 긍휼에 바탕을 둔 완벽한 주권과 섭리로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너무나 보잘 것 없고 더럽고 추한 죄인을 기어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게 만들어서 지금도 당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채워주고 계십니다. 제가 설명드릴 수 있는 한계입니다. 제 표현력으로는 이 정도로 밖에 설명 못하지만 어쨌든 하늘에서 뜻이 이뤄진 것이 땅에서 정말로  우리에게 이뤄진 것입니다. 전재산을 팔아서라도 사야할 땅에 묻힌 보배가 예수님인데 하나님은 그마저 선물로 아무 공로 자격 조건 없는 우리에게 공짜로 주셨습니다.

 

솔직히 믿지 않는 부모님이나 친구들이 저희보다 훨씬 더 선하고 의롭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런 와중에 왜 내가 택함을 받아서 이런 귀한 은혜를 누리는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어리석고 무지한 저희가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만의 오묘한 신비입니다. 그 신비를 알고 싶어서라도 천국이 저절로 소망스럽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애굽보다 이스라엘을 먼저 구원했고, 그것도 순식간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음에도 애굽에게 열 번이나 재앙을 내린 것은 애굽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로 제사장 나라로 세우려는 목적이었듯이 우리 또한 주변의 의로운 자들보다 먼저 구원받은 것뿐으로 그들 앞에 제사장 나라로 서야합니다.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 삶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의 살아계심과 그 사랑을 그들에게 증거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예수 십자가 은혜만 붙들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유월절을 기념하는 것이 매일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올해의 마지막 예배인 오늘도 유월절 제사로 드려져야 합니다. 올 한해도 유월절 은혜로 마감해야 합니다.

 

올해 동안에 하나님께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또 알게 모르게 지은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치지 말아야 합니다. 올해도 주변 성도들, 특별히 불신 이웃의 수고와 희생 위에 지금 이 시간 이곳에 이른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신비한 섭리를 깊이 묵상하고 은혜를 발견해 감사해야 합니다. 그전에 이웃들에게 감사하고 섬겨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 없습니다.  

 

그 섭리 중에는 나의 나쁜 대적이 나에게 분명히 나쁜 일을 행했음에도 은혜가 있었음을 깨달을 줄 아셔야 합니다. 단순히 내가 반성 회개 각성하는 계기로 삼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나쁜 일, 나쁜 사람 자체를 통해 주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노예로 잡혀 가고 그 전에 큰 기근이 일어난 것은 분명히 야곱 가문의 큰 불행이었으나 그 일들이 없었으면 이스라엘은 역사에 존재하지도 못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섭리가 아니고 내가 잘못했거나 죄를 지어서 얻게 된 문제와 고난 가운데도 은혜는 있습니다. 이 또한 단순히 반성 회개하거나 인내력을 키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 고난과 심지어 죄악 자체를 통해 하나님이 오묘한 은혜를 베풀고 또 반드시 나에게 선으로 작용하게 만드십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어리석고 무지해서 미처 모를 뿐입니다.

 

올해를 마감하면서 반드시 가져야 할 믿음의 자세는 다시 말하지만 유월절 어린 양의 구원입니다. 이 자리에 이르게 된 데에 하나님의 넘치는 긍휼이 없었으면 전혀 불가능했음을 겸손히 시인해야 합니다. 내 쪽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예쁜 모습은 단 한 치도 없었음을 절감해야 합니다.

 

그것에서 나아가 하나님이 불신자의 수고와 희생까지 들어 사용하셔서 은혜를 주셨음을 찾아낼 줄 아셔야 합니다. 나를 신자답게 살게 하려고 나아가 주변의 주님의 빛을 비추게 하려고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올해를 당신만의 주권과 섭리로 이끌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새로 시작하는 한 해도 주변 사람들의 희생과 수고는 물론 나의 실수 죄악까지도 그분은 당신의 영광의 자리에 기어이 나를 거룩하게 세우려는 당신만의 열심으로 나를 견고하게 붙들어 주시리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럼 내년에 내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자연히 알 수 있으며 또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 힘도 그분이 반드시 풍성히 채워주십니다.

 

12/30/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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