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조회 수 33 추천 수 0 2017.08.13 01:58:21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출애굽기 강해 (26)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물러가서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출12:21-28)

 

출애굽에서 간과하는 두 가지 중요 요소.

 

하나님은 당신을 완악하게 거역하는 애굽을 아홉 번이나 참아주셨으나 인내의 한계에 다다른 마지막 열 번째는 엄중하게 심판을 하셨다. 아홉 번의 재앙은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분하여 고센 땅에는 전혀 피해가 없었기에 이스라엘이 따로 할 일이 없었다. 애군 관원의 더 가혹해진 채찍만 견디면 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어린 양을 죽여서, 그 피를 우슬초 묶음으로 문의 인방과 설주에 발라야 했고, 한 사람도 집 밖으로 나가선 안 되었다.(21/22절) 지금 시간 관계상 성경 전문을 살피지 않고 중요 부분만 다루고 있기에 자칫 모르거나 오해하고 넘어갈 소지가 있다. 오늘 본문에도 그럴만한 중요한 내용이 둘 있다.

 

우선 첫 번째 유월절 즉, 출애굽 하는 당일 저녁에는 어린 양을 먹지 않았다고 판단해야 한다. 발효되지 않은 반죽을 담은 그릇 채로 어깨에 메고 출발했다.(34절) 결정적으로는 지체할 시간이 없어서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했다고 한다. 또 그래서 출애굽 한 후에 무교병을 구워 먹었다.(39절)

 

시간관계로 건너 띈 12:1-14에서 어린 양을 잡아먹으라는 지시했지만, 오늘 본문의 24,25 절도 그런 뜻이듯이, 둘째 유월절부터 출애굽 구원을 감사 기념하는 예식에 대한 규정이다. 막상 그날 밤에는 빵을 구을 시간도 없었는데 양을 굽고 삶을(12:9)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고 봐야 한다.

 

둘째는 죽음의 심판을 하나님이 보낸 사자가 대행한 것이 아니다.(23절) 하나님은 내가 밤중에 애굽에 들어가겠다고 이미 선언했다.(11:4) 본문 27절에서도 여호와가 재앙을 내렸다고 재확인 하고 있다.

 

사람이, 아무리 여호와의 택한 백성과 그 종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본체를 보면 즉사한다. 모세에게도 그 등만 보여주셨다. 감히 하나님을 쳐다본 것이 패역 행위라는 뜻도,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시기 싫다는 뜻도 아니다. 하나님은 100% 완전하신 진선미(眞善美) 그 자체이시다. 조금이라도 진실하지 않은 거짓이나, 조금이라도 선하지 않은 악한 것이나, 조금이라도 아름답지 않은 추한 것과는 단 일초라도 공존하지 못한다. 죄에 찌든 인간이 그분 앞에 서면 곧바로 소멸된다. 그래서 지금 집밖으로 절대 나가지 못하게 한 것이다. 구약성경에 여호와의 사자와 자주 만났지만 죽지 않은 경우와는 다르다.

 

엘에이 폭동과 출애굽 심판

 

오래 전에 로드니킹 사건으로 LA폭동이 났을 때 일이다. 평소에 흑인 손님들에게 친절했고 흑인 사회에 봉사했던 그로서리 가게는 갱들이 24시간 보초를 서며 보호해줬다. 반면에 평소에 불친절하고 흑인들을 인종차별까지 한 가게는 스프레이로 자기들만 아는 표시를 해서 전부 약탈 방화했다.

 

지금 전지전능한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심판하시기에 히브리인은 표시를 하지 않아도 아신다. 또 이왕에 아홉 번의 재앙에서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별해왔다. 그대로 심판하면 되지 꼭 표시를, 그것도 피로 그래야만 하는가? 구약성경에 피의 제사가 너무 강조되니까 현대의 신자들이 볼 때는 조금 두렵고 괜히 원시 미개 종교 같은 냄새가 난다. 기독교 외부에선 이방 종교를 흉내 낸 것이라고 비방까지 한다.

 

물론 성경공부를 통해 본문과 십자가구원과 연결되는 의미는 잘 알고 있다. 인방은 가로 대들보이고 설주는 세로 기둥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를 예표하고 어느 누구도 주님의 그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지 않고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익히 배워왔다. 그러나 당시 히브리인들은 예수님의 ‘예’ 자(字)도 모르고 십자가 구원은 상상도 못했다. 그 날 밤 피를 발라야 했던 그들에게 주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오직 4백 년의 노예살이를 청산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선조들의 땅으로 돌아가서 마음껏 그분께 제사드릴 기대와 기쁨에 잔뜩 부풀어 있었다. 또 빵을 구워먹을 시간도 없이 긴급했는데 굳이 꼭 이런 번거롭고도 어떤 면에선 기괴하고 잔인한 절차를 거쳐야 하는가?

 

엘에이 폭동 때는 South LA에서 다운타운까지 흑인들이 한 집 한 집씩 불을 지르며 올라오려니 어느 집을 제외해야 할지 알아야 하니까 표시가 필요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누구인지 잘 아시지 않는가? 꼭 피를 보고서야 넘어가셔야(23절) 하는가?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 말씀이지 않는가?

 

고센 땅의 형편

 

히브리인들이 보행하는 장정만 60만이라고 했다.(37절) 이십 세 이상의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남자를 말한다. 전체 인구를 그 네 배로 추정하면 이백만이 되는데 나중에 민수기의 인구 조사한 수치와 일치한다.

 

고센 땅에 히브리인들이 이백 만이나 살고 있었다. 철조망이 쳐진 포로수용소에서 쇠사슬에 묶여있는 그런 장면을 상상해선 안 된다. 아주 넓은 땅에 자율적으로 일상적인 경제 사회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일제 강점기시대의 한국처럼 일종의 식민지라고 여기면 된다.

 

그럼 경비하는 군대와 공사감독관은 물론 장사를 하는 자들까지 많은 애굽인들도 함께 거주했다. 또 중다한 잡족들이 따라 나왔듯이(38절) 타인종들도 많이 살았다. 히브리인들이 이백만이면 그에 상응하는 애굽인과 타인종이 살았다고 봐야 하며 가구 수로 따지면 최하 수십만은 된다.

 

칼을 든 여호와의 사자가 한 집씩 히브리인을 찾아들어가 심판을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랬다면 몇날 며칠 걸렸을 것이고 히브리인들이 밥 먹을 시간도 없을 리가 없다. 자기들의 원수대적이었던 애굽이 처참하게 패배하고 그 장자들이 한 집씩 차례로 죽는 것을 보고 통쾌하게 여기며 잔치를 벌이고도 남는 시간이다.

 

당신의 백성들더러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명하시는 하나님이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실 리가 없다. 당신의 백성들이 죄를 지을 수 있는 여건과 사건까지 미리 막아주시는 하나님이다. 집안에만 있고 절대 밖에 나오지 말라고 명하신 또 다른 이유다.

 

하나님은 애굽의 장자들이 집 안에 있던 집 밖에 있던 모두를 직접 순간적으로 숨을 끊으셨다. 따라서 피를 보시면 넘어가신다는 것이 심판의 과정과 행동을 묘사하는 말이 아니다. 그 심판의 의미를 표현한 것이다. 그것도 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추어서 말이다.

 

고센 땅에 거주하는 애굽인들은 독종, 이, 메뚜기 떼 재앙 등이 그곳을 비켜갔기에 히브리인들로 인해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아홉 번의 재앙을 미처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심판은 그들을 결코 건너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문에 피를 바른 첫째 이유

 

그럼 문에 피를 발라야 하는 첫째 이유가 간단히 도출된다. 하나님의 심판이 애굽과 이스라엘을 얼마나 철저하게 구별하는지 애굽인들로 보게 하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피를 바르고선 문 밖으로 일절 나갈 수 없어서 집밖의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 수 없다.

 

문 밖에선 순간적으로 동시에 모든 하나님을 거역하는 집의 장자들이 죽었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모두 꽥하고 그 자리에서 고꾸라졌을 것이다. 곡성이 한 집씩 들리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모든 집에서 고센 땅을 집어삼킬 정도로 터져 나왔다.

 

문에 피를 바른 것은 애굽과 이스라엘 두 집의 차이를 정반대로 극명하게 대조한 것이다. 애굽인들에겐 얼마나 심판이 철저하고 엄격한지 판단하라는 것이며, 이스라엘은 그래서 더더욱 자신들의 구원에 감사하라는 것이다.

 

지난주에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개는 혀도 움직이지 않게 하셨다고 했는데, 사실 이는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의 뻥이다. 그 큰 곡성에 어떻게 개들이 짖지 않을 수 있는가? 이 또한 인인간의 이해 수준에 맞춘 표현이다. 문밖의 그 큰 심판과 대조하여 문 안의 구원이 그만큼 평안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뜻이다. 심판을 받을 자에겐 전무후무한 곡성이, 구원을 얻은 자에겐 전무후무한 평안이 임했던 것이다.

 

애굽의 장자가 죽음으로써 애굽 전 국민이 심판받은 셈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 그 후는 심판이다.(히9:27) 이처럼 하나님의 인내 한도가 차서 심판을 행해야 할 때는 단 한 치의 유보, 수정, 타협, 취소 등의 제 2의 기회란 없다.

 

인간 개인으로 따지면 죽음이 언제 임할지 모른다. 신자는 때를 얻든 못 얻든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또 인류 전체로 봐선 예수님이 언제 큰 영광중에 다시 오실지 모른다. 신자는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소명에 죽기까지 헌신해야 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에 대한 소망을 키워나가야 한다.

 

피가 이스라엘에게 주는 메시지는?

 

지금 문에 바른 피가 하나님에게 주는 신호가 아니었다. 거기다 이스라엘이 양을 잡아먹을 시간도 제사를 드릴 여유도 없이 황급하게 잡아서 문에 피만 바르라고 했다. 그럼 그런 절차 가운데 이스라엘에게만 주는 중요한 하나님의 메시지가 있다는 뜻이 된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이브가 사탄의 꾐에 빠져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는다는 하나님의 금령을 어겼다. 당연히 하나님은 죽음의 벌을 내려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했는가? 짐승을 그들 보는 앞에서 죽였다. 아담과 이브로선 동물의 죽음은 물론 피를 흘리는 것도 처음으로 목도하는 광경이었다.

 

짐승이 숨이 끊기자 나무토막이나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그들은 숨이 막힐 정도의 엄청난 공포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그 전에 피의 강렬할 붉은 색 때문에 이미 정신이 혼미해졌을 것이다. 정녕 죽음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실감했을 것이다. 그럼 다음에는 우리를 이렇게 죽이겠거니 예상하고 사시나무 떨 듯이 떨고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 말씀을 어긴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 절감했을 것이다. 부부끼리 서로 네 탓이라고 비난했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었으며 서로를 못 쳐다볼 정도로 부끄러워졌을 것이다. 그 죄들을 회개하고 오로지 하나님이 긍휼만 바라며 그 앞에 저절로 무릎 꿇고 엎드렸을 것이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너무나 놀랍게도 하나님은 자기들을 죽이지 않았다. 그 짐승의 가죽을 벗겨 옷을 만들어 자기들이 만들어 입고 있던 무화과 잎을 벗기고 직접 입혀 주었다. 죽음의 형벌은 짐승이 대신 받았다. 죽어 마땅한 자기들은 살려주었다.

 

그럼에도 이미 죄로 타락된 본성인지라 그대로 지닌 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죄에 찌든 채로 이 땅을 살아감으로써 세상은 죄가 만연하고 또 종종 죄에 넘어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다른 어떤 죄는 지어도 다 용서해줄 수 있지만 절대로 가죽 옷은 벗지 말라는 뜻이었다. 다시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는 짓지 말라고, 그 죄만은 절대 용서하지 않고 죽음의 형벌을 내릴 것이라고 선악과 금령을 다시 확인해준 것이다.

 

그 가죽옷을 볼 때마다 이 땅의 참 주인이 누구인지 생각하라는 것이다. 진정한 통치자가 따로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너희가 당분간 죄의 본성을 지닌 채 살아야 하는 것과 또 타락한 세상에 대한 문제는 언젠가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밟음으로써 해결해 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 아들이 너희를 죄에서 구원해준다는 것이다.

 

문밖과 문안은 같은 상황

 

하나님은 당신을 끝내 거역한 애굽을 심판하면서 그 장자를 온 가족이 보는 앞에서 죽였다. 결과적으로 장자는 애굽을 대표하였고 그들 백성의 죽음을 대속하는 희생양이 된 셈이다. 그들이 죽음으로써 나머지 애굽 사람들은 목숨을 즉, 단순히 육체적 생명만 건졌다.

 

그런 와중에, 사실은 그 전에 이스라엘 모든 집은 가장은 전식구가 보는 앞에서 어린 양을 죽였다. 히브리인들은 예수와 그 십자가는 전혀 알 길 없었지만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이브를 타락에서 어떻게 구원했는지는 알고 있었다. 심판 받아 마땅한 그들이 오직 하나님의 긍휼만 의지하여 구원의 은혜를 받았던 사실을 이날 저녁에 분명 기억했을 것이다.

 

결국 지금 어린 양의 피가 발라진 문 밖이나 문 안이나 그 의미만 따지면 동일한 상황이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고 애굽과 이스라엘 모두에게 하나님 당신께서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죽어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구원과 심판의 원리는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창조에서 주님의 재림 때까지 단 하나 변하지 않는 영원하고 절대적인 진리라는 것이다.

 

인방과 설주에 어린 양의 피를 바른 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한다. 그러나 문 한복판에 십자가 모양을 그리지 않았다. 가로 세로 기둥의 테두리에 발랐다. 문 전체를 피로 바른 셈이다. 그 문을 양의 피로 인봉(印封, sealed)한 것이다. 심판과 구원을 구별하는 것은 양의 피 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이 가능하지 않다. 구원 받을 수 있는 조건 자격 능력이 인간에겐 전무하고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피는 죽음이자 생명을 상징한다. 문밖 즉, 예수의 피 밖에는 심판이다. 문 안 즉, 예수의 피 안에는 구원이다.

 

그리고 이 피를 바른 사건에는 하나님의 당신 백성을 향한 세심한 배려까지 내포되어 있다. 벳세마스 사람들이 십계명의 두 돌 판과 아론의 싹이 난 지팡이와 만나가 담긴 항아리 즉, 여호와가 임재하지 않고 상징만하는 물건들이 들어있는 언약궤를 단순한 호기심만으로 뚜껑을 열어보다가 많은 이들이 엄청난 죽음의 벌을 받았다.(삼상6장)

 

지금도 밖에서 엄청난 심판이 자행되고 천하가 진동하는 곡성이 들리는데 호기심이 안 생길 수는 없다. 저라도 보고 싶어 미쳤을 것이다. 그들이 아무리 조금이라도 배꼼 내다보더라도 동일하게 엄중한 심판을 받는다. 본인만 아니라 집안에 있는 식구까지 몰살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지금 여호와의 사자가 집집마다 다니며 심판의 칼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죽음의 벌을 내리고 있다. 문밖에 나가면 바로 죽음이다. 문에 발린 어린 양의 피로 심판도 봉인되었다. 죽음이 결코 집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반면에 어린 양의 피가 발려져 있지 않는 세상을 지배하는 유일한 힘은 바로 죽음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의 궁극적 운명이다. 그들에겐 어떤 유보도 없는 심판만 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방금 양을 잡아서 그 피로 황급하게 문에 발랐다. 두려워서라도 문 밖으로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의 구원을 이처럼 완벽하게 당신께서 보장하신다. 한 명도 구원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신다.

 

가장 주목해야 할 사항

 

이 밤에 가장 주목해야 할 사항은 다시 강조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이 땅에 오셔서 심판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기 전에, 정확하게는 애굽을 심판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전에 양의 피를 바르라고 하셨다. 그 피를 바른 문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구원의 새 생명을 주셨다.

 

말하자면 어린 양의 피는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었다. 하나님 쪽에서 말하면 양의 피를 바른 후에야 심판과 구원을 집행했다. 어폐가 있지만 그 피가 없었다면 하나님은 그날 밤에 이 땅에 오시지도 않았고 오실 수도 없었다. 하나님 그분마저 양의 피에 힘입어 구원을 주셨다.

 

당신의 백성들 집의 문 전부에 양의 피가 발린 상태에서 오셨다. 여호와의 사자가 온 것이 아니라 당신께서 오셨다. 하나님마저 제한시키는 어떤 존재나 힘이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 대속의 피가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용서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분께 용서 받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죽어 마땅한 자임을 진정으로 겸손히 인정하지 않은 것만이 유일한 이유라는 뜻이다.

 

이날 저녁으로부터 약 1500년 후에 또 다시 하나님 그분이 구원과 심판을 나누려고 직접 이 땅에 오셨다. 이번에는 모든 인간들이 그분의 실체를 직접 대면해도 죽이지 않는 하나님으로 오셨다.

 

아무리 사악한 살인범이라도, 아무리 음란한 창녀라도, 아무리 돈 밖에 모르는 매국노 세리라도, 심지어 당신을 대적하는 귀신이 군대만큼 많이 들어있는 원수라도 그분께 긍휼을 구하면 죽이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이 먼저 그들을 찾아가, 이번에는 한 집, 한 집씩 골라 들어가 하나님을 대면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에게 거꾸로 구원의 새 생명을 주셨다.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부서트릴 것이라는 당신의 약속을 하나님은 일점일획의 차질 없이 그대로 실현하셨다. 여자의 몸을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 십자가에 스스로 달려 당신께서 죽으심으로 당신의 피로 당신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구원으로 인봉하셨다.

 

그분은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셨다. 천하를 삼킬만한 전무후무한 곡성은 사라지고 개도 짖지 않을 전무후무한 평강을 주시는 왕으로 오셨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셨고 꺼져가는 등불을 꺼지 않으셨다. 그분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로 인함이요, 그분의 상함은 우리의 죄악으로 인함이었다. 그분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분이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다.

 

보잘 것 없는 십자가 은혜?

 

하나님은 하늘 멀리에 계신 분이 아니다. 우리가 상한 갈대이자 꺼져가는 등불임을 아신다. 이미 상한 갈대인데 어찌 꺾을 수 있으며 이미 꺼져 가는 등불을 어찌 껄 수 있겠는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도무지 설 수 없는 허물 죄악 상처 눌림을 갖고 있음을 이미 다 아셨다. 세상에선 도무지 그것들을 용서 받을 수 없었고 오히려 정죄만 받았다.

 

주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음란한 여인이라고 손가락질만 하며 상대도 않는 남편 다섯을 둔 여인이나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당신의 긍휼로 품어서 용서해주셨다. 인간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그 죄를 해소할 수 없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선 도무지 용서는커녕 정죄만 당하는 모든 죄들을 당신께선 사해주셨다.

 

그런 분이 지금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세상 끝 날까지 우리가 가는 세상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해주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이자 권능인가? 그런데 왜 우리는 주일마다 염려와 불안에 찌든 얼굴로 교회에 나오는가? 왜 지난주에도 역시 실패했기에 용서해달라는 기도밖에 드리지 못하는가? 복음으로 세상을 이긴 감격에 찬 승리의 보고는 왜 드리지 못하는가?

 

하나님이 구해주신 귀한 생명에 오히려 죽어가는 듯한 그림자만 드리워져 가고 있다. 신자는 교회는 죽음이 지배하는 세상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엘에이 폭동 때에 피해보지 않게 오히려 막아줬다는 일화는 사람들에게 많은 각성과 삶의 변화를 일으켰다. 인간들의 간단한 선행에도 그랬다. 불 탄 가게는 언제든 돈을 벌면, 아니 보험으로 카버 되니까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데도 그랬다. 예수 십자가 구원이 그 정도 의미와 가치도 지니지 못하는가?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 죄악 눌림 슬픔 한숨 상처 분노 억울함 다 아신다. 한 사람씩 직접 그분이 찾아오셔서 당신만의 사랑으로 먼저 품어주셨다. 그 모든 것들을 우리가 해결 할 수 없음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이다. 잘 아시고 찾아오셨다는 것은 이미 그 해결책도 준비하셨다는 뜻이다. 더 정확하게는 그분이 처음부터 끝까지 주도적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또 처음부터 그러셨다면 당신만의 우리를 향한 영광스런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뜻이다. 그런데 왜 염려 불안해하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며 우리의 처음과 끝이다. 십자가의 긍휼이 우리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영원토록 그 사랑 안에 우리는 이미 들어왔다. 만약 그분이 우리를 중도에 포기할 양이었으면 십자가에 절대로 죽지 않으셨다. 또 우리의 잘잘못과 허물을 따지려 드셨다면 십자가에 달리시도록 끝까지 침묵을 지키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다. 이제는 우리가 그분을 죽기까지 사랑해야 할 차례다. 마음과 힘과 뜻을 다해 그분을 섬겨야 한다. 바울처럼 우리를 대신해 죽으신 그분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 우리에게 맡겨주신 소명에 충성 헌신하며 그분을 따라갈 때에 우리에게도 출애굽 같은 엄청난 승리가 임한다. 예수 십자가 외엔 신자에게, 아니 모든 인간에게 아무 소망도 없다.

 

8/6/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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