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정 교리는 예수님이 제정했다.

조회 수 197 추천 수 3 2013.04.16 19:23:24
예정 교리는 예수님이 제정했다.
마태복음 강해(162)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에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이에 제자들이 나아와 가로되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이 된 줄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심은 것마다 천부(天父)께서 심으시지 않은 것은 뽑힐 것이니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마15:10-14)


교리와 신앙

기독교 신앙의 요체는 살아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나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이다. 그분이 죄 중에 있던 자기에게 베푼 구원의 깊은 의미와, 또 지금 자기를 보호 인도하고 있는 은혜의 풍성함과, 나아가 장차 자기를 이끄실 천국의 영화로움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앎이 다르면 신앙의 내용도 달라진다. 이단은 예수를 믿기는 믿되 잘못 알고 믿는 것이다. 예수에 대한 잘못된 앎 중에 하나는 예수가 교리를 제정하지 않았기에 구태여 신학과 교리를 가르치고 배울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는 아주 잘못된 생각이다.

비유컨대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처용가나 용비어천가를 배운다. 그런데 그것만 수십 번을 읽어도 어렴풋이 짐작은 해도 정확하게 어떤 내용인지 알지 못한다. 시간, 문화, 관습, 언어 등에서 수백, 수천 년의 간격이 있기 때문이다. 반드시 자세한 해설서를 참조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 해설서가 정교하고 재미있어도 원전과 별도로 제작된 것이 아니며 또 원전의 내용에서 절대 벗어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신학과 교리의 출발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과 생애다. 오늘날의 독자와는 이천 년의 갭이 있어서 온전히 이해하기 어려우니까 신앙의 선각자들이 성경에 기록된 그분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일종의 자습서로 만든 것이 신학이요 교리다. 그분 없이는 신학도 교리도 없다.

신학과 교리 자체가 구원은 물론 은혜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모르면 예수님을 잘 모르게 된다. 또 그분을 잘 모르면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제대로 받지 못한다. 그분과의 개인적 교제가 깊어질 수 없어서 신앙이 무미건조해지고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  본문에선 기독교의 한두 가지 핵심적인 교리를 예수님이 직접 가르친 모습을 볼 수 있다.  

산헤드린에서 파견된 이단 조사단은 예수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 따져야 함에도 기껏 밥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만 문제 삼았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수여한 거룩한 계명보다 자신들이 제정한 규정을 더 우선시 했다. 예수님은 그런 너무나 시시한 질문에도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로 대꾸했다. 말하자면 이단 조사를 하러온 그들에게 오히려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지 따진 것이다.  

예수님의 폭탄 발언

먼저 무리를 불러 이르셨다고 한다.(10절) 조사단이 아니라 그들과 조금 떨어져서 서있던 제자들과 일반 유대인들이었다. 사람의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손을 안 씻고 밥을 먹었다고 해서 인격체로서의 사람 자체가 더러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에 참여했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장로의 유전을 범했다고 해서 하나님이 야단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다고 한다. 참으로 예리한 풍자요 견책이다. 지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기껏 장로의 유전을 갖고 말로써 꼬투리 잡으려는 행태가 바로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이다. 입술로만 하나님을 존경하지 그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기 때문이다. 그들의 종교적 언행이 아무리 경건하고 신실해보여도 진짜 속내는 자기들을 하나님보다 앞세운 너무나 큰 죄를 범했던 것이다.

제자들은 비유를 다시 설명해달라고 요청했듯이(15절), 예수님의 비유의 의미를 온전히 깨닫지 못한 것 같다. 그러나 그 말씀이 야기할 파장이 심각할 것은 눈치 채었다. 예수님 당시 장로의 유전은 아직도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었고 계속 신규 규정들을 추가하는 중이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만 그 유전을 숙지했었기에 유대인들이 율법을 현실의 삶에 적용할  때마다 찾아가 해석을 요구했다. 규정을 가르쳐주고 율법을 해석해주는 그 자체로 자연히 그들에게 영적 권위가 생겼다. 또 그들은 구제, 기도, 금식, 십일조 등을 성실히 수행하며 하나님을 열심히 경배했기에 실제로 일반인들의 존경도 받았다. 그런 존경의 표시로 지금 유대인들과 제자들은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은 하나님께 헛되이 경배한다고 일반적인 통념을 깨트려버렸다. 거기다 그들이 더럽고 너희들이 깨끗하다고 하면서 신분 체계마저 뒤엎어버렸다. 유대 대중에게 자신들의 영향력을 재확인하고 회복하려 왔었는데 도리어 사람들 앞에서 완전히 창피를 당한 것이다.  

제자들이 “바리새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걸림돌이 된 줄 아시나이까?”(12절)라고 염려할 수밖에 없었다. 산헤드린의 미움을 사는 큰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장래의 사역에 온갖 심한 훼방을 받을 텐데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예 한술 더 떴다. 엄청난 폭탄 발언을 했다. 그들은 천부(天父)께서 심지 않았기에 뽑힐 것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안의 가라지로서 마지막 심판 때에 뽑혀서 영원한 불 못의 심판에 떨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또 그냥 두라고 했다. 우리를 비방, 방해, 핍박한들 신경 쓸 것 하등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진리를 보지 못하는 소경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대중들을 현혹시킨다고 한다. 유대사회에서 현실적인 손해를 볼 것이 두려워서 그들이 시키는 대로 맹종하면서, 참 빛으로 오신 당신을 외며 거부하는 일반인들 역시 소경이기에 함께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조금 심한 것 같지 않는가? 바리새인들은 밥 먹기 전에 손 씻었는지 여부만 물었다. 또 고르반 서약을 엄격히 지키라고 가르쳤다. 그 부작용으로 돈이 있으면서도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일이 나타났지만 엄격히 말하면 그렇게 하는 본인들의 잘못이지 않는가?

그러나 예수님이 문제 삼은 초점은 달랐다. 그들의 종교적 형식이 아무리 하나님께 가까이  가있어도 그 진정한 마음은 그분에게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경건을 자기들 권세를 유지하고 현실의 유익을 증가하는데 사용한 것이다. 쉽게 말해 하나님을 자신들 명예를 높이고 돈을 버는데 이용한 것이다. 성전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것이다.

죄의 본질과 구원예정

그럼 본문에서 예수님이 가르친 교리는 무엇인가? 우선 죄의 본질에 관해 가르쳤다. 인간이 제정한 규정들은 사회질서 유지 차원이기에 한 인간을 거룩하게 혹은 더럽게 하는 요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이 하나님께 가까이 있느냐 여부만으로 따져야 하는데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지 않는 것이 바로 죄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만약 외적 행동을 잘못한 탓에 죄인으로 정죄 받아야 한다면 그 악한 행동만 고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600개가 넘는 유대교의 유전들을 완전히 지켜낼 자는 아무도 없다. 예수님은 자기들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계명들을 만들어 사람들의 어깨에 멍에로 메게 한다고 바리새인들을 야단쳤지 않는가?(마23:4)

서두에 말한 대로 최근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기독교 교리는 배울 필요 없이 예수님의 가르침만 실천하면 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럴까? 주님 가르치신 대로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주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예쁜 여자를 보고도 정말로 돌처럼 대할 수 있는 남자는 없다. 말로써 상처를 줌으로써 인격적 살인을 다반사로 범한다. 그것도 배우자나 자기 자녀에게 죽을 때까지 자행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다.

인간 스스로 구원할 방도는 죽었다 깨어나도 없다. 하나님을 일대일로 맞대면 했을 때에 자신의 자격, 조건, 능력, 공로에 의거하여 자기 얼굴을 똑바로 쳐들 수 있는 인간은 인류 역사상 단 한 명도 없다. 또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구원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다.

결국 모든 인간은 예수님 말씀대로, 하나님이 심은 자와 심지 않은 자 둘로만 나뉜다. 말하자면 인간의 영원한 운명을 하나님이 구원과 심판으로 예정하셨다는 교리는 바울이나 칼빈이 창안한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처럼 예수님이 제정 선포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최근에는 이를 인정 수긍하지 않고 반발하는 자들이 훨씬 더 많아졌다. 그 이유는 하나다. 하나님이 인간이 태어나기도 전에 즉, 아무 짓도 저지르기 전에 심판으로 예정할 만큼 냉정한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그렇게 피도 눈물도 없이 독선적일 수 없기에 예정은 틀렸고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언뜻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그 반발이 타당한지 알려면 과연 하나님이 심판으로 예정했는지 성경에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어려서부터 악한 인간

창세기 8장에 노아 홍수 후에 하나님이 노아의 가족은 물론 그 후손 즉, 인간과 무지개 언약 맺는 내용이 나온다. 다시는 인간으로 인해 땅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다. 그 이유는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때문인데 “내가 전에 행한 것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아니하리니”(21절)라고 약속하셨다.

이 말씀이 조금 이상하지 않는가? 사람이 악하면 사람의 심판에 대해 말씀하셔야 하는데 그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고 엉뚱하게 땅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니 말이다. 우선 문자적 의미는 사람 때문에 동식물이나 자연 세계에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 더 깊은 이면의 뜻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자연세계를 인간을 위해서 창조하셨다. 인간이 생존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완비한 후에 사람을 만드시곤 심히 기뻐하셨다. 지금 하나님이 사계절이 중단되는 일이 없고 자연을 계속 보존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도 인간을 보호하겠다는 뜻이다.  

사람이 어려서부터 악하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죽을 때까지 그렇다는 뜻을 내포한다. 또 어려서부터 마음으로 계획하는 바가 악하다는 것은 인간은 그 본성이 죄에 지배되고 있는 죄의 노예라는 뜻이다. 스스로는 절대 그 마음을 바꾸어 구원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어려서부터 악하기만 한 인간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겠다고 한다. 지금껏 인간이 기대해왔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말이다.    

요즘 젊은 부부들 사이에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경향이 생겼다. 자기들끼리 인생을 즐기겠다는 뜻도 있지만, 그보다는 양육하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뜻이다. 현실에서 경쟁이 너무 심해 영악해져야만 겨우 승리 내지 생존할 수 있는데 자기 아이에게 그런 고통을 주기 싫다는 것이다. 아이를 올바르게 키울 자신도 없고 부모를 돈만 벌어주는 머슴 내지 기계로 간주할까 싫은 것이다. 노년에 제대로 부모 대우해주지 않을까도 염려한 것이다. 어쩌면 자기들이 부모를 대할 때의 심정이 그대로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하나님은 최초 인간 아담이 당신을 거역할 줄 미리 아셨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고 자기가 그 자리에 오르려 할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를 창조했다. 또 선악과 금령을 어겼음에도 바로 죽이지 않고 살려두었다. 비록 징계는 했을지라도 그가 스스로 지어 입은 보잘 것 없는 무화과 잎 옷을 벗기고 당신께서 직접 짐승을 죽여 가죽 옷으로 바꿔 입히셨다. 앞으로도 당신이 인간을 계속 보호 인도하시겠다는 뜻이다.

그 마음에 이미 사탄의 영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당신께 등을 돌릴 아담의 후손들에게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밟을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당신을 배반할 확률이 100%인데도 인간을 창조하셨고 또 이런 약속을 하셨다면 그분의 뜻이 심판인가 구원인가?  

진흙탕이 더 좋은 인간들

하나님은 인류를 심판으로 예정한 적은 태초부터 영원까지 단 한 번도 없다. 그분의 심판은 인간이 자초(自招)한 결과일 뿐이다. 참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은 어둠이 더 좋아 캄캄한 중에 소경으로 지내길 고집했다. 인간들은 자신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그 창조주 하나님께 얼마나 큰 배역을 했었는지, 지금도 계속해서 얼마나 완악하게 거역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 인간의 모습을 하늘에서 바라보는 하나님의 심정이 얼마나 쓰라리고 안타까울지 아예 관심이 없었다. 아니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하고, 또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그들의 마음을 돌리려 역사 속에 개입하시고 선지자들을 계속 보냈으나 인간은 철저히 외면했고, 급기야 마지막으로 보낸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버렸다.

계속해서 모든 일을 자기들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고 있다. 하나님과 예수가 무슨 필요 있는가? 내 주먹을 믿겠다고 큰소리친다. 혹시 죽은 후에 심판을 당해도 어디까지나 내 책임이라는 것이다. 예수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의 마음의 정확한 실상이다. 하나님으로선 이런 상태의 인간들을 그 마음을 고치지 않고 즉, 죄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무조건 몽땅 구원해줄 수는 없다.

밖에 나가 종일 진흙탕에 장난치며 노느라 아이들의 옷과 신발이 완전히 더러워졌다. 엄마로선 집안에 아이들을 그런 상태로 들여놓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밖에서 그 모습으로 놀도록 계속 방치해 둘 수도 없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빨리 옷과 신발을 깨끗이 씻고 집에 들어와 저녁을 먹으라고 고함을 쳤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계속 노느라 아무도 엄마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는 큰 아들을 억지로 끌고 와서 신발과 옷을 씻기고 맛있는 저녁을 먹였다. 동생들로 밥도 먹어야겠고 형의 깨끗해진 모습이 좋아 보여서 집안으로 들어오게 하려는 뜻이었다. 바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정이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게 되었는가? 여전히 진흙탕에서 노는 것이 집안으로 들어오는 것보다 더 신나고 재미있어서 밤새도록 밖에서 놀기만 했다. 그럼 엄마가 그 아들을 심판으로 예정한 것인가? 결코 아니지 않는가?

예정 교리 고유의 특성

예정 교리의 핵심이 하나님의 심판에 있지 않다. 중생한 신자가 마음이 어려서부터 악했던 자신이 진흙탕 속에 헤매느라 스스로는 도무지 깨끗케 할 방도가 없었음을 인정하는 데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했기에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는 진정한 회개의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내 인생은 오직 혼돈과 방황과 처참한 실패의 연속이었음을 실토하는 것이다.

그분의 십자가의 용서와 긍휼을 은혜로 체험하고 난 이후에는 이전의 너무나 갈급하고 허망했던 삶이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음을 아는 것이다. 어떤 힘든 순간에도 그분께 엎드리면 그분이 주시는 평강이 넘치고 참 기쁨을 누리게 된다. 만약 하나님이 예정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해두었더라면 영원한 죽음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음을 절감하게 된다. 그 동안 갖고 있던 인생에 대한 근본적인 궁금증을 주님의 십자가 긍휼에서 해답을 얻게 된다. 인생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비로소 발견하여 정말로 인간다운 삶을 회복하게 된다.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을 일대일 인격적으로 만나 구원의 은혜 안에 들게 된 자는 자기가 예정에 의해 구원 받았다는 사실에 일말의 의심도 하지 않게 된다. 지난 삶의 모든 과정을 되살펴보니까, 하나님이 너무나 크신 사랑으로 매순간 자기를 찾아와 터치하고 간섭하셨음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또 그렇지 않았다면 무참하고도 완전한 실패와 절망만 기다렸을 것을 확신하기에 주님 품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진정으로 안도하게 된다.            

예정 교리는 그래서 고유의 특성이 있다. 하나님의 영원하고 절대적 진리인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이에게 다 이해 적용되는 보편적 객관적 진리로서 역할은 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심지어 기독교인들 사이에도 그 의미가 온전히 이해되지 못한다. 예정이란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를 오직 자기 자신에게만 적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심판으로 예정된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길을 정확히 알지 못해 그 길을 스스로 거부하고 있는 자들과는 예정을 논의할 필요는 없다. 그래봐야 헛수고요 논쟁만 생길 뿐이다.

다른 말로 예정은 장로 시험의 과제도 아니요, 다른 교단과 교파와 토론할 이슈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작금 예정이 성경적으로 100% 맞다, 혹은 하나님이 절대 그렇게 매정한 분이 아니므로 100% 틀렸다고 논쟁만 하고 있다. 누가 맞고 틀리고 떠나 신학적 지식의 우월을 다투는 짓이다. 자기 교단만 옳다는 것이다.

그 속내가 어쩌면 사람들 앞에 자신들의 영향력을 높이려는 것일 수 있다. 본질보다 형식을 앞세웠던 유대 장로들의 유전처럼 될 수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교리가 너무 복잡해서 싫고 그나마 배우고 싶어 하는 마음마저 없애버릴 수 있다. 이야말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을 재현하는 꼴이 된다.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비밀의 경륜

예정교리를 자기에게만 적용하라는 것은 나 혼자 그 깊은 의미를 이해했다고 자랑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에도 그분과 인격적으로 일대일로 만나고 교제하라는 뜻이다. 십자가의 사랑을 알수록 자신의 영적인 실체와 신분을 정확히 발견하고 그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를 구원하고 누구는 그대로 둘지 결정하는 이유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오직 그분만의 신비요 주권이다. 천국에 가서나 겨우 알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곳에서도 여전히 인간이 관심 둘 바가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나 같은 자가 왜 그분의 구원의 은혜에 들었는지도 영원히 알 수 없음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으려 계획, 의도는커녕 꿈도 꾸지 않았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분과 원수 되어서 세상 쾌락과 죄악을 쫓기 바빴다. 그랬던 나를 오직 당신의 주권과 은혜로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다. 이런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깨달아지면 예정은 무한한 은혜로 다가온다. 정말로 평생을 그분께 감사, 겸손, 헌신, 찬양, 경배코자 하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언제 어떤 일을 만나도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게 된다.

예정에서 진짜로 더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이 나를 심으신 이유는 모르나, 나를 심어야했던 그분의 목적은 정확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진흙탕에서 먼저 건짐을 받은 장자의 역할을 하라는 것이다. 그분의 거룩한 소수의 남은 자가 되어서 당신의 거룩한 나라를 땅 끝까지 누룩처럼 번져 나가게 하라는 것이다.

예정 교리가 둘 중 하나는 구원으로, 나머지 하나는 심판으로 미리 작정했다는 뜻이 아니다. 둘 중 하나를 먼저 구원시켜서 나머지 하나도 이미 구원된 자가 행하는 전도라는 미련한 방식을 통해 구원시키겠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창조 아니 태초터 계획된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비밀의 경륜이다.  

당신의 장자 백성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사백 년간이나 노예 살이를 시켰다. 그 후 이스라엘은 수천 년간이나 나라 없이 방황하였고 지금도 십자가 은혜에서 가장 멀지만 하나님은 두고 보고 계시는 것 같다. 아니다. 이방인들을 먼저 구원하여서 이스라엘의 시기심을 불러 일으켜서라도 구원하시겠다고 했다. 끝까지 그들을 포기하지 않고 사랑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그들을 구원시키겠다는 하나님의 안타깝고도 애절한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예정 교리를 믿는 자들 중에도 큰 잘못은 있다. 이미 구원으로 예정되어 천국이 보장되어 있으니 자기가 조금 죄를 지은들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또 어차피 예정된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니 구태여 불신자를 전도할 필요가 없다고 간주한다. 이런 자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제정한 예정 교리를, 바울과 칼빈 같은 인간이 고안한 장로의 유전으로 비하시키는 아주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예정은 죄 중에 있던 자들을 하나님이 원래 창조하신 형상으로 회복시키려는 그분만의 열심이요, 은혜요, 사역이다. 여전히 그분의 안타까운 마음을 전혀 알지 못하고 흑암 중에 있는 자들을 당신의 주권으로 소수를 뽑아 다른 모든 이에게 당신의 그 마음을 심으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할 따름인데도 말이다.

예정 교리를 제대로 알면 알수록 즉, 왜 십자가 보혈로 나 같은 자를 택하여 영생을 주셨는지 그 목적을 깨닫는다면 온전한 인간의 형상으로 회복되어져야 한다. 정말로 예수를 알고 믿는 자답게 풍성하고 활기차고 아름답고 진실하며 거룩한 인생을 살아야 하고 또 살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 구속의 경륜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예수를 모르는 영혼이 너무 안타까워서 전도에 힘을 쏟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2/24/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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