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 것 다 팔고 예수를 좇으라.

조회 수 579 추천 수 20 2009.11.08 02: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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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nt color=blue>가진 것 다 팔고 예수를 좇으라.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가로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덕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그 청년이 가로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오니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찐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마19:16-22)


선행을 많이 했고 율법대로 살고 있는 한 부자 청년이 예수님에게 와서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는지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가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고 당신을 좇으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재산이 많아 근심하며 되돌아갔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덧붙였습니다.

많은 신자들이 본문을 아무리 잘 믿는 신자라도 행하는 믿음을 반드시 보여야만 한다는 뜻으로 쉽게 해석해버립니다. 지금 문답의 주제는 영생을 얻는 길이 무엇이냐는 것인데 신자가 행하는 믿음을 보이는 것은 이미 영생을 얻고 난 후이기 때문에 본문의 주제와는 벗어납니다. 그렇다고 자기 재산을 팔아 구제하지 않으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이 부분을 살펴보려면 본문을 세밀하게 분석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이 청년은 틀림없이 구제를 많이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켜야 할 계명으로 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 말씀에는 사실상 구제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또 율법은 이방인, 나그네, 과부, 고아들을 도와주라고 직접 명령하고 있습니다. 그가 정말 율법대로 살았고 남들보다 재산이 많았다면 구제한 실적도 평균 이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아주 큰 부자인지라 예수님이 가진 것을 ‘다’(누가에만 명시되어 있지만 마태와 마가도 앞뒤 문맥으로 동일한 의미임) 팔라고 하니 근심하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는 구제를 열심히 하겠지만 재산을 전부 처분하기는 아까워 아쉽지만 영생을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의도가 자기가 가진 것 전부 희생하더라도 남을 위한 삶을 살지 않으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과도 관계없습니다.  

이 청년의 잘못은 그가 한 질문 안에 이미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는가라고 물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해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미리 단정한 후에 단지 그 선한 일의 구체적인 종류와 시행방법만 물은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 모두가 가졌던 너무나 타당한 구원관이라 그 자체가 틀렸다고는 상상도 못했고 오직 어떤 선행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만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이 갖고 있는 그런 관심은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선행은 무엇이든 하면 됩니다. 선행에 등급이 있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하는  선행이라면 하나님은 어떤 것이라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런데도 어떤 선행을 해야 하는가 궁금해 하는 것은 그 중에서도 위대한, 말하자면 천국에서 더 많은 상급을 받을 수 있는 선행을  하겠다는 뜻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보상을 많이 받아내기 위한 욕심입니다. 보상을 바라고 하는 선행은 이미 선행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청년의 그런 의도까지 당장에 아시고 “어찌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 당신이 선하지 않거나 영생을 얻는 길을 모르니 당신에게 묻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영생은 선한 일을 하는 것과는 관계없으니 그 질문 자체가 틀렸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나아가 인간이 하는 어떤 선행에도 온전한 선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온전하신 하나님을 배제해서는 진정한 선행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예수님이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고 계명대로 사는 것이 영생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해석하면 안 됩니다. 청년은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 선한 일에 초점을 맞추어 질문했습니다. 그래서 “네가 선행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이미 정해 놓은 선한 일이 있지 않느냐? 구태여 그 종류를 나에게 다시 물을 필요가 없지 않느냐?”라는 뜻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런데도 청년이 어느 계명이냐고 또 다시 물었기에 구체적으로 설명해준 것뿐입니다.  

그 후 청년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그 모든 계명을 자기가 지켰지만 혹시 아직 하지 못 한 선행이 있는가라고 반문했습니다. 여전히 선행의 종류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지금 청년은 “행위 구원”이라는 선입관에 완전히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핵심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청년에게 영생에 들어갈 수 있는 바른 길로 가르쳐 주기 위해 당신의 페이스대로 토론을 이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주라”(눅18:22)고 덧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청년은 어떤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겠느냐고 물었고 예수님은 그가 듣고 싶어 했던 대로 선한 일중에 가장 선한 일의 종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제부터 그 선행을 바로 실천하겠습니다.”라고 해야 맞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가 어디에서 딱 걸렸습니까? 가난한 자를 도우는 것은 분명 선한 일이 맞지만 재산을 다 파는 것은 전혀 선하게 여겨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이 된 것입니다. 부자란 돈만이 자기 안전을 보장해준다는 확고한 인식이 있기에 열심히 일해 번 돈을 저축한 자입니다. 그는 자기 재산을 다 처분하면 그 다음부터는 무엇으로 자기 안전을 보장 받을 수 있을 것인지 걱정된 것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선한 일을 하겠다고 찾아 온 자가 영생보다는 현생에서의 안전에 매달린 것입니다.

예수님의 요점은 그럼 무엇이 됩니까? 신자는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더라도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도 빠지지 않고 온전히 지키라는 것입니까?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돈, 계명을 지키는 것, 즉 선한 일을 하는 것과 영생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요컨대 영생을 얻으려면 유일하게 선하신 하나님 외의 어떤 것에서도 인생의 안전 보장을 구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 죄 씻음을 받고 구원을 얻으려면 오직 그분에게 자기의 전부를 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생을 얻는 길은 재산을 팔고 나눠 준 후에 자기를 좇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구제라는 선행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돈이 줄 수 없는 안전을 보장해주므로 모든 것을 포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당신만 따르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으려면 그분께 자기 돈 뿐 아니라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걸어야지 다른 곳에서 생명을 찾는다면 그분이 주시는 생명은 맛도 못 볼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의미가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그 청년이 예수님에게 그런 질문을 한 숨은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곰곰이 따져 보아야 할 아이러니이자 가장 중요한 이유입니다. 그는 계명도 다 지켰습니다. 구제도 했습니다. 선한 일을 해야만 영생을 얻는다고 믿고 있기에 영생을 얻으려는 목적으로라도 열심히 실행했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예수님에게 나아와 자기 선행에 뭔가 부족한 것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남보다 더 많은 선행을 했는데도 여전히 영생을 얻은 것 같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틀림없이 그는 세상적, 인간적, 현실적으로 남부러울 것 하나 없고 또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에게는 영적으로 아무 평강과 안식과 위로가 없고 오히려 허무와 갈증과 초조와 염려만 늘더라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재산을 다 팔라고 하지 않고 어느 정도 한계를 정해 주며 구제에 열심을 내라고 대답했다면 전적으로 수용하고 다시 그렇게 시도해 보려고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해 봐야 절대로 그에게 영적 안식이 없다는 것을 잘 아셨기에 아예 재산을 다 팔아 나눠주고 자신을 좇으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 둘 중에 하나를 분명하게 택하는 것만이 영생의 참된 의미이기에 영생을 얻는 길도 당연히 세상을 버리고 예수를 좇는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선행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매우는 길을 배우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과는 다른 가르침을 전파하는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전혀 차원이 다른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가르침의 핵심을 놓치고 돌아갔습니다. 현실의 형통과 신분과는 상관없이 영생을 얻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사단에 묶여 영적으로 파산 상태였지만 이제는 완전히 더 절망적인 상태로 떨어졌습니다.

다른 말로 예수님을 좇지 않는 자, 예수님으로부터 성령의 인 치심을 받지 못한 자, 즉 모든 자연인의 상태는 영적으로 파산 된 상태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지성, 교양, 인격, 도덕성이 뛰어나더라도 그렇습니다. 세상은 전혀 안전을 보장할 수 없고 참 평강이 없으므로 오직 하나님과 그 외아들 예수님을 알고 따르는 것이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의 예에서 보듯이 영적인 파탄은 결코  죄악에 빠져 있거나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줄어든 상태가 아닙니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도저히 자격이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인 줄을 전혀 모르고 인간의 노력, 특별히 선행으로 쟁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영적 파탄입니다.

이 원리는 정작 신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상처와 죄악과 환난으로 사방이 막히고 우울증과 비참함과 고통에 사로잡혀 기도나 찬송을 할 힘조차 없어지는 상태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영적으로 풍성해지는 전초 단계입니다. 신자로선 도저히 어쩔 수 없기에 다시 한 번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게 되거나, 정말 그럴 힘조차 빠졌다면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역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돈이 이 땅의 안전을 보장한다고 믿으며 그 도움을 하나님에게 얻으려는 것과, 선행으로 세상에서 이름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그것으로 하나님에게도 점수를 따려는 것이야말로 영적인 파탄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 일을 달성하기 위해 남들 보기에도 믿음이 좋다고 칭찬을 들을 정도로 기도와 말씀에 정말 열심인 자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라고 감히 말하는 자가 영적인 파탄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혹시 토색, 불의, 간음을 할지라도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실토하면서 가슴을 치며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 못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는 아닐지 몰라도 절대 파탄 상태는 아니며 오히려 그 영혼에 새싹이 움을 터고 돋고 있는 중입니다.

솔직히 지금 자문해 보셔야 합니다. 일부러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줄 필요까지는 없지만 욥처럼 정말 내가 쌓아 놓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잃는 경우가 생길지라도 예수님을 기꺼이 좇을 것인가를 말입니다. 아직도 주저가 되고 자신이 없다면 현재까지 내가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였다는 것을 진심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또 그것이 내 안전과 평강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그럴 수 있다는 것에도 확신이 없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알파요 오메가요 시작이요 끝입니다. 나라는 존재와 내 인생의 전부도 그 알파와 오메가와 시작과 끝이 예수님이라는 뜻입니다. 내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기에 그 소유권 자체를 그분께 기꺼이 내어드리지 못하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야말로 영적으로 파탄 내지 문제가 생겼다는 증거입니다. 영생을 마다하고 세상으로 되돌아간 부자 청년과 똑 같이 우리의 시선이 영원한 생명이 아니라 이 땅의 제한된 생명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9/18//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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