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게 손자는 없다.

조회 수 471 추천 수 14 2009.11.08 00:3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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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에게 손자는 없다.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3-5)


너무나 신비한 우연의 일치

한 기독교 전도사역 팀이 1994년 러시아 스타브로폴 지역에 성경책을 배포하려고 방문했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그 지역의 오래 된 창고에 성경이 많이 쌓여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스탈린이 1930년대 기독교 신자들을 강제 수용소로 보낼 때에 압수해 놓은 것인데 어떤 연유인지 모르지만 불에 태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이다. 주민들로선 공산독재 치하에선 그 성경을 보지도 아니 있다고 말도 못 꺼내다가 그때서야 생각났던 것이다.

창고의 성경과 물건들을 트럭으로 실어 오기 위해 동네의 인부를 모집했다. 한 무신론자 청년이 일당이라도 벌 욕심으로 자원해 따라 갔는데 일하다 말고 갑자기 사라졌다. 사방으로 찾아 봤더니 한쪽 구석에서 아주 낡은 가죽 성경을 읽으면서 펑펑 울고 있었다.

골동품으로 값이 상당하리라 보고 훔치다 들킨 것이 아니었다. 그 성경에서 자기 할머니의 친필 사인을 발견한 것이다. 너무나도 교묘한 우연의 일치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엄청난 신비 앞에 항복한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사랑해서 이런 모습으로까지 구원을 이미 예비해 놓으셨다고 깨닫고 그 동안의 불신앙의 죄를 뉘우쳤던 것이다.  

참으로 신비하지 않는가? 할머니의 기도가 본인이 죽은 후에 어김없이 응답 되었다. 할머니가 자기 가족과 예수를 모르는 동네 주민들을 위해서 얼마나 눈물로 기도했겠는가? 그녀로선 자기 손 때 묻은 성경이 핍박을 피해 끝까지 보관되리라고는, 거기다 친손자의 손에 제일 먼저 전해지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 아닌가?

할머니의 믿음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신 것이다. 어쩌면 할머니가 손자를 제대로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태어나지도 않은 후손들을 위해서 기도했을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이 일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하나님이 태중에서부터 이 청년을 선택하시고 미리 다 마련해 놓으셨던 구원의 방도가 때가 차매 실현된 것이다. 쉽게 말해 믿음이 신실했던 할머니의 손자로 태어나게 한 것부터가 이미 이런 우연의 일치는 계획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이 일어난 당시 할머니는 당연히 없었고 청년을 위해 전도하거나 기도해줄 자도 없었다. 비록 전도사역 팀이 와있었지만 아직 청년에 대해 개인적으로 전혀 알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 시간 그 장소에는 오직 하나님 혼자서 역사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성경이 수십 년간 전혀 훼손당하지 않고 보존되어 있다가 이제 곧 친손자의 손으로 넘어가길 기다리는 그 현장에 말이다.

성경이 압수되었던 때와 전도 팀이 그곳에 간 것과는 60여년의 시차가 있다. 청년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 기독교에 대한 핍박은 시작 되었다. 할머니가 즉시 수용소로 끌려갔는지 혹은 성경만 압수당하고 계속 그 동네에서 언제까지 살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어쨌든 반세기를 뛰어 넘어서 아무도 꿈도 꾸지 못한 신비한 일이 일어났다면 하나님이 태중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부터 그 청년을 택한 것만은 분명하지 않는가?  

남의 일이 아니다.

지금 그 청년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모두 그와 비슷한 아니 더 놀라운 은혜가 포함된 구원을 받았다. 모든 사람이 초자연적이거나 극적 체험을 통해서만 구원 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지금도 운행하시는 광대하신 하나님이 나 같이 미천한 자를 태중에서부터, 아니 태어나기도 훨씬 전부터 예정하셔서 당신의 완전한 주권으로 구원으로 인도하신 놀랍고도 신비로운 은혜를 입었다는 뜻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3-6)

또 그 청년의 경우처럼 누군가 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 주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도에 응답을 해서, 즉 기도하지 않았다면 구원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의미로,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하시려고 한다면 당신 혼자서 어떤 방식으로든 구원해 주신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기도하는 자,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당신만의 계획과 일정표에 따라 내 주위에 붙여 주었다는 것이다. 구원 받는 자와 기도 전도하는 자들에게 모두에게 더 큰 은혜가 임하고 그래서 당신의 아름답고도 거룩한 공동체를 함께 만들어 가라는 뜻이다.

모든 신자는 스스로 구원에 대한 계획, 소원은커녕 꿈조차 꾸지 않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그분의 일방적 사랑과 긍휼의 은혜에 들어 있었다. 구원 받은 후에 그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 지난 모든 경과를 곰곰이 회상해보면 경이롭지 않은 것이 단 하나도 없다. 필연적으로 그분께 완전한 항복으로 이끌게 된다. 어떠한 불만, 부족, 의심, 조건들을 달 여지라고는 전혀 없음을 절감한다. 그분을 향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 밖에 나오지 않는다.  

참으로 흥미롭지 않는가? 누군가 말했듯이 하나님에게는 아들은 있어도 손자는 없다는 것이 말이다. 우선 한 죄인의 구원에 개입되는 근거나 요소가 당신의 독생자의 십자가 보혈 외에는 단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직접 복음을 전하는 자나, 구원을 위해 기도해주는 자의 공로 때문에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죄인으로 예수께로 관심을 갖게 하여 굳었던 마음을 여는 데는 일조(一助)할지라도 실제 구원은 오직 예수님의 의로만 유효해진다는 뜻이다. 당신의 독생자로 부패했던 이 땅이 구원되어 완성됨에 전혀 부족하지 않고 충분하다.

나아가 하나님은 모든 구원 받은 신자를 당신의 아들과 딸처럼 일대일의 관계로만 대우하겠다는 뜻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이을 자니라.”(갈 4:4-7)

흔히 하는 말처럼 남편이 마누라 치맛자락 잡고선 천국 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지위, 권세, 재물, 학식, 인품, 의로움, 선행 등이 아무리 뛰어난 자라도 하나님을 직접 인격적으로 대면하여 진정 겸비한 자세로 엎드려야만 구원은 가능해진다. 제 삼의 인물의 개입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한 죄인이 자신의 실체를 그분께 철두철미하게 완전히 드러내 보여야 한다. “당신의 독생자의 십자가 공로 없이는 오직 절망, 아니 죽음뿐입니다. 저에게 필요한 것은 당신의 무한한 긍휼입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나를 깨끗케 해주시고 성령으로 인 쳐 주시옵소서.”라는 고백의 진정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순간 비로소 하늘에 있는 그분의 생명책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  

디모데의 경우도 외조모와 어머니의 믿음을 물러 받았지만, 그들이 구원에 힘을 보탠 것이 아니라 단지 구원 받고 믿음이 자라도록 기도했을 뿐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의 구원 예정에서 그를 제외시켜주지 말아달라는 간절한 청원이었다. 예의 할머니도 손자가 구원을 받는 현장에 없었기에 그녀가 한 역할은 눈물로 기도함으로써 수십 년 후 손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전해지는 예정된 통로였을 뿐이다.

믿음의 첫 세대가 되어라.

하나님에게 손자가 없다는 말은 신자에게도 믿음 안에서는 아들만 있지 손자는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육신적인 자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 자체를 대대로 물려 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아니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하나님이 되었고 먼 훗날 다윗을 통해 결국 아기 예수에게까지 이어졌는데 무슨 말인가 싶은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각자 개인의 죄와 믿음에 연관된다. 인간 중보자는 결코 개입되지 않는다. 아무리 아버지, 할아버지라도 예외가 아니다. 그래서 모든 구원 받은 자는 하나님에게 아들과 딸의 관계로만 부름 받을 뿐이라는 뜻이다. 믿음 안에선 신자와 신자끼리도 아버지와 아들은 있어도 할아버지와 손자의 관계는 없다.

알기 쉽게 말해 아버지가 믿었다고 아들이 자동으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며, 아들이 아버지 따라 교회에 성실히 출석한다고 아들에게 신앙이 생겼으리라 섣불리 판단해서도 안 된다. 자식에게 믿음을 전해 주는 일을 등한히 하거나 그럴 책임이 없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구원 받은 모든 신자는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로만 그 믿음이 시작되고 또 완성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아비가 아들을 믿게 만들 수는 없다. 아들이 스스로 믿어야만 한다. 아들에게도 구원은 오직 자신과 하나님과의 일대일의 관계에서만 유효해질 뿐이다. 아비는 물론 아들에게 복음을 쉽게 풀어서 설명해주는 것과 동시에 제발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눈물로 간구해야 한다. 또 그러기 위해선 아비부터 아들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 않고는 아무 소망이 없고 죽음뿐임을 절실히 깨달아 죄에서 구원이 아들 일생에서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로 여겨져야만 한다.

흔히 그러듯이 아이가 교회 나가니까 나쁜 짓 하지 않고 성실히 공부해 일류대학과 좋은 직장에 들어갈 수 있겠지 기대하는 것은 믿음의 아비로서 첫째 소원이 될 수는 결코 없다.  거기다 부모도 기도하고 아들도 기도하니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마치 그분께 잘못이 있는 양 생각하는 것은 아예 아비부터 믿음, 아니 구원 안에 들어온 표가 절대 아니다.

믿음의 아비는 십자가 복음 안에서만 믿음의 아들을 낳을 수 있다. 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으로서 스스로 꿇어 엎드려야 한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이지 아비의 뜨겁고 극성스런, 혹은 바리새인 같은 율법적 믿음이 결코 아니다. 아비의 믿음이 정작 해야 할 역할은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예비해 놓으신 예수님의 은혜가 아들에게 막히지 않고 전해지는 앞뒤가 뚫린 통로가 되는 것이다.  

다른 말로 아비는 하나님이 아들을 구원시키기 위해 아들과 아비의 연으로 만나게 해준 그분의 도구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나도 하나님에게 아들이었듯이, 내 아들도 하나님에게 손자가 아니라 아들이라는 믿음이다. 나아가 천국에선, 아니 이 땅에서부터 나와 내 아들은 동일하게 그분 앞에 한 사람의 성도로 부름 받았음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 부름을 성취시킬 수 있는 공로와 근거는 오직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 안에 들어왔는지 여부여야 한다. 요컨대 주님의 십자가 안에선 모든 신자는 믿음의 첫 세대이자 마지막 세대다.  

바울은 디모데의 영적 스승이기 이전에 믿음으로 그를 낳는 아비의 역할을 했다. 그 후 그를 위해 계속해서 눈물로 간구한 바는 본문에서 보듯이 오직 “하나님의 은사가 더 불일 듯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 당신께서 그를 온전한 믿음의 터 위에 견고하게 세워달라는 간절한 청원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로 놀랍고 신기하다. 어떤 만남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친할머니의 사인이 든 성경을 수십 년 후에 꿈도 못 꾸었던 친손자로 발견케 하는 것 같은, 아니 그 이상의 하나님의 신비한 경륜이 다 개입되어 있다. 내 자녀들과의 만남부터 그렇다. 아브라함에게는 반드시 이삭이 있어야 했고 야곱도 이삭에게 마찬가지 존재였다. 교회 안에서 만나는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성도가 겪는 모든 인간관계와 모든 사건들에 그런 신비는 넘치도록 차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광대하신 신비와 은혜가 언제 어디서나 신자의 사방 전후를 두르고 있다.    

신자가 그런 신비와 은혜를 발견해 누리려면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경륜은 정말로 엄청나며 신비하다는 확신부터 있어야 한다. 지금 현재 내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범사가 하나님이 태초부터 준비하신 그분만의 완전하고도 거룩한 계획에 입각된 것임에 한 치의 의심도 없어야 한다. 비록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고 이해도 안 되지만 그분이 어떤 분인지에 대한 온전한 믿음은 있어야 한다.  

다른 말로 자신에게 하나님의 충만하고 한량없는 은혜가 계속해서 부어지고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나아가 그 확신이 도무지 은혜를 받을 자격과 조건이라고는 없는 자신의 모습으로 인해 흔들려선 결코 안 된다. 도무지 나로선 그럴 수 없지만 하나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기에 그 은혜를 입고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그러니까 더더욱 그 확신은 흔들리지 말아야 한다. 정확히 말해 절대 흔들릴 수도 없다.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하며 주시는 은혜인데, 인간의 시각으로는 몰라도 하나님의 입장에선, 절대 흔들릴 수 없지 않겠는가?

따라서 우리가 그분께 드릴 것이라고는 평생토록 어떤 처지에 있든 감사와 찬양과 경배뿐이어야 한다. 이미 믿음의 첫 세대가 된 나보다는 나의 아들로 이어질 세대와 또 내 주위에 아직 그 은혜를 모르는 자들도 나처럼 믿음의 첫 세대가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과 함께 말이다. 요컨대 하나님이 나에게 할아버지가 아니라 바로 아버지이며 예수님이 형제라는 사실 외에 또 다른 무엇이 더 필요한가 말이다.    

10/25/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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