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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새 노래의 찬양 시리즈 -6/6 完)



할렐루야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성도의 회중에서 찬양할찌어다. 이스라엘은 자기를 지으신 자로 인하여 즐거워하며 시온의 자민은 저희의 왕으로 인하여 즐거워할찌어다. 춤추며 그의 이름을 찬양하며 소고와 수금으로 그를 찬양할찌어다.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며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심이로다.”(시149:1-4)


시편은 총 150편으로 이뤄졌습니다. 비록 후대의 사람들이 수집 편집한 것이지만 마지막 시편의 마지막 절은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찌어다 할렐루야!”(150:6)라고 끝납니다.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항상 기뻐하며 찬양하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살아가는 첫째 목적이자 궁극적 의미가 바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친밀하게 교제 동행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바로 앞의 149편에선 새 노래로 찬양하라고 합니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성경의 편집에도 성령님이 역사하신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신자가 평생을 찬양하되 단순히 하나님의 구원과 복 주심을 감사하는 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실은 저부터도 그런 찬송마저 온전하게 하지 못하지만 말입니다.

감사할 일에 감사하고 사랑할 자를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영생의 선물을 주시고 일생을 보호 인도하시는 하나님에게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함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가 연약하고 나태하여 때로는 하나님에 대해 오해, 불만, 불신, 심지어 분노마저 품을 때가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더러 호흡이 있는 동안 단순히 신자로서의 의무적인 찬양이 아닌 새 노래로  찬양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온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신자 또한 당신을 닮아 온전하고 거룩해지길 당신께서 더 간절히 원하신다는 뜻입니다.  

본 시편을 자세히 살피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렇게 요구할 근거가 차고도 넘칩니다. 인용한 본문만 봐도 오히려 “여호와께서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겸손한 자를 구원으로 아름답게 하셨다고 합니다. 죄악에 찌들어 당신과 원수 된 자를 그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해주셨습니다. 당신의 일방적 사랑으로 영생을 주시면서 죄의 형벌을 면제 해준 것 뿐 아니라 장차 아름답게 바꾸어질 신자의 모습을 기대하며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는, 말하자면 이 시편이 작성될 때까지는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족속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도 실은 여호와를 가나안의 우상들과 함께 섬기는 영적 간음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또 포로기 이후에는 복잡한 율법의 멍에에 묶여 있었습니다.

바꿔 말해 인간은 신의 노여움을 달래려 무엇이든 바쳐야만 했지, 하나님이 오히려 기뻐하신다는 인식은 아예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께서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당신께서 지으시고 당신의 언약 가운데 품은 자기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축복이자 은혜입니까? 어찌 새 노래로 찬양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정작 더 중요하고 너무나 감사한 이유는 후반부에 나옵니다.

“성도들은 영광 중에 즐거워하며 저희 침상에서 기쁨으로 노래할찌어다. 그 입에서는 하나님의 존영이요 그 수중에는 두 날 가진 칼이로다. 이것으로 열방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하며 저희 왕들은 사슬로, 저희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하고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찌로다. 이런 영광은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5-9절)

기자는 먼저 영광 중에 즐거워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해서 찬양하는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는 선언입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영광 중에 거하는 자입니다. 또 하나님은 성도에게 단순히 침상의 단잠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영광스럽게 만드시는 분입니다. 우선 그분이 신자를 개인적으로 아시고 당신의 은혜와 권능을 일생을 이끌어주시는 것만으로도 큰 영광일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다 당신의 동역자로 부름 받아서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일에 쓰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의 입에는 하나님의 존영이 붙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고귀한 이름과 품성과 역사를 열방에 선포할 수 있는 자는 성도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영원한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십자가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이웃을 초대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베푸신 기이하고도 풍성한 은혜와 권능들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신자는 그 수중에 두 날 가진 칼을 품고 있다고 합니다. 또 그 칼로 “열방에 보수하며 민족들을 벌”할 수 있다고까지 말합니다. “저희 왕들을 사슬로, 저희 귀인은 철고랑으로 결박”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더러 이웃 나라를 침공해 국토를 넓히고 세계의 패권을 잡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신자더러 폭력을 쓰더라도 이웃의 부를 수탈하여 재벌이 되라는 적용도 정녕 아닙니다.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 “기록한 판단대로 저희에게 시행할찌어다”라고 했습니다. 이 기자에게 “기록한 판단”이라면 성경, 특별히 모세오경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거룩하게 다스리는 그 뜻대로 이웃 나라를 판단하고 시행하라는 것입니다. 이미 제사장 나라로 부름 받았기에 하나님을 증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나라의 죄악도 여호와 앞에 나아가 중보해야 하며 또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전해주어 회개토록 만들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적용하자면 신자는 공중 권세를 잡고 있는 악한 세력을 사슬과 철고랑으로 결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온전한 신앙고백을 하는 교회(신자들의 모임과 신자 개인)는 이미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권능을 받았습니다.(마16:18) 그래서 땅에서 무엇이든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며 땅에서 무엇이든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게 됩니다.(마16:19) 신자가 자기 속에 그리스도를 보배이자 큰 능력으로 모시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깨달을 수 있고 또 그 말씀으로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세력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히브리서 기자도 말씀을 두 날 가진 칼에 비유하며 그 권능은 모든 만물과 사람을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기록한 판단으로 하나님은 심판하시는데 그 일을 신자가 대행할 수 있고 또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신자가 직접 심판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죄악의 세력을 이길 권능을 이미 받았기에 하나님께 간구하여 이 땅을 깨끗하게 고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대하7:14)

본 기자는 “이런 영광은 그 모든 성도에게 있도다 할렐루야”라고 찬양하지 않습니까? 모든 신자가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해서 단순히 하나님의 일을 옆에서 도와주는 역할만 하거나, 하나님이 시킨 일을 그저 의무적으로 수행해선 부족합니다. 적극적, 능동적으로 이 땅의 더럽고 추한 곳이나 사람들을 스스로 기꺼이 찾아가서 이미 받은 권세로 아름답게 고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그럴 때에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권능이 넘치도록 임합니다. 예수님처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대신하고 심지어 그분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생을 선물로 받은 것, 또 그 후에 자신의 인생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보호 인도함을 받는 것, 하나님의 일에 종으로써 쓰임 받는 것까지는 많은 신자가 그런대로 알고 있으며 또 감사함으로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 민족들을 멸하고 왕들을 결박하는 권세를 이미 갖고서 그대로 시행할 수 있다는 사실은 잘 모르거나 잊고 있습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기자는 모든 신자가 그런 영광을 이미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신자들이 자신이 이 땅에선 하나님의 영광 중에 거하며, 또 언젠가 천국에 가면 그 완성된 영광의 모습을 볼 것이라는 정도만 이해해선 부족합니다.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만 속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도 기본적인 진리입니다.

세상을 하나님 말씀으로 판단하는 영광을 신자가 소유하고 있다고 바울 사도도 선언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자들끼리 분쟁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에 대고 어떻게 말했습니까?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고전6:2)

하나님의 관심은 신자에게만 온통 쏠려 있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신자를 통해 이끄십니다.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모습들이 정치가 재력가들이 선도하는 것 같지만 역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절대적 주체이신 하나님은 그런 겉모습과는 별개로 당신만의 계획과 뜻대로 이 땅을 통치 주관하십니다. 그리고 그 통치의 초점과 방향은 오직 죄인들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구속하여 이 땅에서의 당신의 거룩한 나라의 확장으로만 모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신자가 열방을 결박하는 모습으로 이 땅을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에게 그 영광스런 권세를 주셨기에 신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흑암의 세력에 적극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불신자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 속의 하나님과 반대되는 모든 성향과 사조 등을 올바르게 고칠 수 있어야 합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잘 감당해서 이 땅이 더 사악해지지 않고 더 나아가 거룩하게 바뀌도록 자신부터 썩어 없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미혹한 영에 붙들려 있는 이웃들을 그 묶임에서 풀리도록 기도와 말씀과 사랑으로 적극적 지속적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어떤 찬송을 합니까? 단순히 자신의 안락이 충족되면 그 때서야 감사합니다. 물론 그것도 아주 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하여 우리 문제를 하나님으로부터 해결 받고 또 그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는 모습을 확실하게 보여줄 필요는 아주 크며 또 가장 우선입니다.

주님은 그러나 우리를 더 고귀한 목적으로 부르시고 그에 걸맞게 아주 큰 권세를 주셨습니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면 도무지 격에 맞지 않지만 당신의 영광 가운데 부르시고 그 영광을 세상 앞에 드러내라고 명하십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요 하나님의 친 백성이자 그분의 사랑받는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무엇보다 이 땅의 미혹된 형제들을 여전히 너무나 안타까이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신자가 그분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게 바꿀 소망과 열정만 있다면 하나님은 언제든 그렇게 되도록 이끄십니다.  

시편의 마지막 구절이 호흡이 있을 동안 찬양하라는 것이며, 그 바로 앞에 이렇게 놀라운 영광의 찬양을 하라고 합니다. 죽을 수밖에 없던 죄인이 아무 공로 없이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만도 평생을 감사 찬양해야 하지만, 구원 이후에는 이 땅의 더럽고 추한 세력들을 자기 주위에서부터 하나씩 하나씩 깨끗이 청소하면서 찬양해야 합니다.  

정말로 주님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에게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천국 열쇠를 이미 주셨습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던 열방과 이웃을 죄악과 사단의 묶음에서 풀어내는 일을 인생의 최우선 목적으로 삼아 헌신해야 합니다. 또 그런 주님의 구속의 영광이 나를 통해 드러나는 것을 보는 것이 삶의 제일 큰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12/12/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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