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신자는 좁은 문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 (마7:13,14)

조회 수 2793 추천 수 111 2004.02.24 20:19:22
마태복음 강해 (96) 2/22/200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고무 장갑의 부피를 재어라

토마스 에디슨이 젊었을 때의 일이다. 다른 과학자와 함께 있는데 어떤 사람이 고무 장갑을 가져와 부피를 계산할 수 있겠는가 물었다. 그 과학자는 불가능하다고 답했지만 에디슨은 장갑에 물을 가득 채워 물의 부피를 측정해 장갑의 부피를 계산해내었다. 그 과학자는 수학공식으로 문제를 풀려 했지만 공식이란 직육면체, 원통 같이 규격이 일정한 경우에만 적용될 수 있지 장갑처럼 불규칙한 모양에는 적용할 수 없다. 반면에 에디슨은 물의 성질과 부피의 기본 원리를 이해했기 때문에 어떤 이상한 모양도 부피를 측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자의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다. 믿음이 갖는 내면의 깊은 진리는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꾸 믿음을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 내지 공식으로 사용하려 든다. 미국의 대학교나 대학원으로 레벨이 올라갈수록 한국 학생의 성적이 미국 학생에 비해 떨어진다. 원리를 이해하지 않고 공식만 암기하는 방식으로 공부해서 그렇다.

이처럼 한국 신자도 암기식 성경 실력이나 신앙 행태는 우수하지만 실제 삶의 어려운 경우에 부딪히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기도는 최고로 뜨겁게 하고 말씀은 줄줄 외우며 교회 봉사에 열성이고 행사와 모임으로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는 것으로는 세계 최고다. 그러나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는 것으로는 아마 제일 못할 것이다. 나아가 신자 개인 스스로도 평강과 위로와 자유함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분명하게 “예”라고 대답할 자 드물 것이다.  

한국인들은 몸이 아프기만 하면 마이신을 먹듯이 신앙상의 문제도 공식을 적용해 쉽게 해결하는 길로 찾는다. 응답 받는 기도의 비결이나 제자 훈련 몇기 수료 하느냐는 데만 신경을 쓴다. 기도와 말씀은 그 자체가 문제 해결의 수단이 아니다. 힘든 일 뒤에 있는 영적 진리가 무엇인지, 눈에 보이는 현상 대신에 보이지 않는 실체의 진실이 무엇인지 보기 위한 수단이다.  

구원에의 초대

오늘의 본문이 신자가 말씀을 원리로 이해하지 않고 방법론적으로만  적용하려 드는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에 해당된다. 예수님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그 길은 협착할 것이다”라고 했을 때 대부분의 신자들이 어떻게 해석하는가? 삶의 과정 중에 여러 대체 방안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할 때에 신자가 되었으므로 편하고 풍요롭고 부유하고 재미있고 신나는 쪽으로 선택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반드시 어렵고 고통이 따르며 가난하고 검소하고 절제 되고 거룩하고 신령한 쪽의 길로만 가야 한다.

그러다 보니 신앙 생활이 언제나 도를 닦듯이 심각하고 힘이 든다. 열심과 정성은 분명히 있지만 승리와 재미는 없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은 애당초 고통이 따르고 재미가 없는 쪽을 택했으니 신이 날 리 없고 승리할 수도 없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너희가 세상을 사는 동안 만나는 사건 하나하나마다 좁은 문을 선택하라고 말씀한 적이 없다.    

마태복음 5:1-7:12까지 산상 수훈을 설교 하신 후에 예수님은 7:13-7:27까지 네 가지 비유를 들어 결론을 맺는다. 특이한 것은 네 가지의 비유 모두 대조되는 2가지 사물을  상호 비교하는 형식을 택했다. 본문의 좁은 길과 넓은 길, 좋은 나무와 나쁜 나무(15-20절), 주여주여 말만하는 자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21-23절),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24-26절)이 그것이다. 네 비유에서 각기 대조되는 두 사물은 모두 구원을 얻은 성도와 그렇지 못한 불신자를 상징한다.

본문에서 좁은 길을 가는 자는 산상수훈을 듣고 그대로 따른 자로 생명으로 인도되어 구원을 얻은 자이며 넓은 길을 가는 자는 반대로 산상수훈을 듣고도 따르지 않아 멸망으로 떨어지는 자다. 그렇다고 해서 오른 편 뺨을 맞으면 왼 편 뺨을 대고 억지로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주고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야릇한 생각이 들면 눈을 빼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어떻게 시작했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했다.(마5:3) 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가 천국을 차지한다고 했다. 선행을 해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온전히 겸비한 마음으로 항복하여 자신을 내어드리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고 예수님은 분명히 선언하셨다.  

그 뒤를 바로 이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5:13)라고 하시며 구원을 얻은 자는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의 통치 아래 들어간 천국 백성임을 선포하셨다. 그래서 마5:13부터 7:12까지는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어떻게 변화되어 살아야 할 것인가에 관한 설명이다. 그 마지막이 지난 주에 배운 바 대로 신자가 하나님과 진정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맺으면 이웃과도 참된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본문부터 시작하는 네 비유의 결론을 통해 예수님은 다시 한 번 영생을 강조하셨다. 두 가지 비유는 바로 “너희가 겸비하게 되어 하나님의 품 안으로 들어 올 것이냐 아니면 이전과 같이 하나님 앞에 교만하고 완악하게 서서 바리새인들처럼 인간의 의를 자랑하며 이방인처럼 먹고 마시고 입을 것만 걱정하고 살고싶느냐”는 뜻이다. 영생과 멸망 둘 중 하나를 확실하게 택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산상수훈은 처음부터 끝까지 천국에 관한 말씀이다. 단순한 도덕적 계명이 절대 아니다. 본문의 일차적인 뜻도 당시 산상수훈을 듣고 있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심령이 가난해져 천국을 소유하라고 구원으로 초대하는 말씀이다. 이미 신자가 된 후에 겪는 일상의 삶에서 선하고 거룩한 쪽으로 택하라는 권면의 말씀이 아니다.

물론 신자의 매일의 삶은 죄악과 사탄이 설치는 세상 쪽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선과 의와 거룩이 넘치는 하나님 쪽에 설 것인가 둘 중 하나를 택하는 싸움이다. 또 이 말씀도 그렇게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으며 그런 해석이 틀린 것도 아니다. 신자는 죄와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고(히12:4)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딤전4:7)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뤄야(빌2:12) 한다. 그러나 그것은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원리가 아니다.

좁은 길로 이미 들어선 신자

예수님이 본문에 의도하신 대로 따지자면 신자는 어떤 자인가? 이미 좁고 협착한 길로 들어선 자다. 더 이상 선택하거나 변경하거나 포기하거나 되돌아 갈 수 없다. 항상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런 부분을 신자들이 믿음으로 갖고 있지 않고 있으며 이해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그런 인식조차 없다는 점이다.

본문에서 신자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세 가지다. 문과 길이 일치 한다는 것이 그 첫째다. 길이 좁으니 문도 좁다. 반대로 넓은 길이니까 문도 넓다. 말하자면 좁은 문을 열었더니 넓은 길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믿기로 했으니 이제 형통과 복을 주셔야지가 아니다. 믿은 표시가 나게 하나님이 나를 편하게 살게 해달라는 것은 기독교에는 없다. 그 반대로 문은 넓은데 좁은 길로 바뀌는 것도 아니다. 예수를 믿기로 간단히 영접한 후에는 엄격한 율법적 계명을 지키며 착하게 사는 것이 신앙이 아니다. 신자라고 해서 억지로 쥐어 짜듯이 내키지 않은 일들을 손해 보아야 하는 법도 없다.          

둘째는 그 좁은 길에 따로 샛길이 있거나 다른 문이 붙어 있지 않다. 간단하게 좁고 길다란 복도를 상상하면 된다. 믿은 후에 예수 그리스도 외의 다른 대안이 있거나 혹은 신자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천하 인간에게 주신 적이 없다.(행4:12) 그 분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마지막으로 협착한 그 길의 끝에는 반드시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 신자의 삶은 영광스런 완성으로 종결되어 진다. 이것 외의 마지막은 있을 수 없다. 절대로 신자의 종국적인 운명이 충만하지 않거나 미완성인 상태로는 끝나지 않는다. 완성되어 끝나는 것은 아닐지라도 반드시 완성으로 넘어가게 되어 있으며 그렇게 넘어가야 끝이 온다.  

신자라면 다들 잘 알고 있는 너무나 당연한 내용인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삶에서 손해 보고 희생을 감수하며 불편과 고통을 겪고 있지만 하나님을 위해 이 길을 택했다라고 신자들이 생각하는 것이 틀렸다는 뜻이다. 신자가 주일 성수를 꼬박꼬박 지켰고 십일조를 성실히 냈으며 기도와 말씀에 전무했는데도 세상에서의 형통은 커녕 인격적 신앙적인 성숙에서도 도저히 자신 없어 하는 것은 잘못이다. 믿음을 갖고도 혹시 세상에 지면 어떡하나, 심지어 지고 나면 이 땅에서의 축복이나 나중 천국에서의 상급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신자가 자꾸 겪는 사건 하나하나마다 어떻게 그 어려움과 죄악을 이겨나갈 수 있는지 방법에만 집착하고 연연해선 안 된다. 혹시 내가 넓은 길을 가고 있지나 않은지, 하나님 보시기에 나쁜 길로 들어 선 것은 아닐까 염려하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 신앙이란 좁고 길다란 복도를 따라 계속해서 한걸음씩 묵묵히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때때로 너무 크고 긴급한 일이 생겨 금방 숨이 넘어갈 듯한 일도 생기고 말도 안되고 이해도 안 되는 뒤엉킨 이상한 경우도 있으며 세상과 사람 앞에 완전히 병신 바보 취급을 당할 수도 있다. 그래도 신자는 이미 좁은 길 위에 들어서 있다. 예수님과 동행하는 좁고 길다란 복도 안에 있다. 이 사실을 절대 놓치거나 잊어선 안 된다.      

제발 사건 하나하나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당황해 하지 말아야 한다. 정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상처 받고 자존심 상한 것으로 신앙뿐 아니라 일상 생활마저 up and down 해선 안 된다. 혹시 내가 기도 적게 해서, 말씀을 보지 않아서, 잘못된 선택을 해서 이 모양 이 꼴이 아닐까라고 생각하는 것 만큼 예수님의 십자가를 모욕하는 죄는 없다.

신자가 설령 시험과 유혹에 빠져 있거나 죄악을 저지르고 있더라도 넓은 길로 다시 되돌아 갈 수는 절대 없다.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허락하거나 방치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필요하다면 두들겨 패서라도 죄에서 빠져 나오게 하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리 죄 가운데 있어도 신자는 여전히 좁은 길 위에 있다는 것이다. 단지 좁은 길로 가던 그 자리에 넘어지고 쓰러져 있는 것일 뿐이다. 어쨌든 그 자리에까지는 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더 중요한 사실은 완성의 자리에 그 만큼이라도 가까이 왔고 한 걸음씩 더 가까이 나가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완성의 자리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 실력과 인격으로 완성의 자리에 내 힘으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행하시는 예수님이 기필코 우리를 그 자리에 세우시고야 만다.

물론 믿고 난 이후에도 신자의 체질은 연약하고 죄의 본성은 남아 있으며 사탄과 세상의 유혹은 달콤하고 집요하다. 사건 하나하나마다 그런 것들을 이겨내어 선한 쪽으로 선택하여 그 곳으로 가려고 노력할 때에 고통이 따르며 세상의 멸시를 불러 온다. 그런 경건의 연습과 훈련의 가치는 절대 과소 평가 될 수 없다. 그러나 그 훈련 자체가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이나 공식이 될 수는 없다.

신자가 겪는 모든 영적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갖고 있는 십자가 복음의 원리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원리는 다른 것이 아니다. 신자는 이미 좁은 길 위를 가고 있으며 그 길의 끝에는 빛과 생명이 확보되어 있다는 바로 그것이다. 지금 내가 가고 있는 그 길이 바로 최종적 완성의 길, 영원한 생명의 길, 궁극적 영광의 길, 완전한 승리의 길이라는 것을 확신해야 한다.

세상의 어떠한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도 우리를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서 끊을 것이 하나 없다.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품 안에서는 더 이상 두려운 마음이 없다. 신자는 이미 영원한 정답을 알고 소유하고 누리고 그것에 반응하여 살고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좁은 길에서 보석을 캐어라

따라서 신자는 매일매일 좁은 길을 걸어가며 그 길 위에 숨겨져 있는 보석을 캐어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신자가 넓은 길을 마다하고 좁은 길을 선택하여 선행을 했으니 하나님이 기뻐서 축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비록 우리 눈에는 어렵고 힘들며 상처와 멸시가 따르는 것 같지만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권능은 보석처럼 숨겨져 있다. 모든 것을 제쳐 두고 그 보석을 찾아내는 자가 신자다.  

신자가 매일 켜내는 그 보석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보물이라고 해서 특별히 신령하고 거룩한 것이 아니다. 나아가 거창하거나 위대하지도 않다. 예수님이 이미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셨다. 먹고 마시고 입는 축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행복이다.(마6:33) 그 구체적인 내용은 팔복강화로 이미 다 밝혀 놓으셨다.(마5:3-12)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이들이 함께 모여 믿음 안에서 위로하고 권면하고 도전하여 서로 손을 잡고 세상과 죄악을 이겨나가는 바로 그것이다.           

내가 당한 환난으로 인해 환난 중에 있는 다른 성도에게 예수님 대신에 생명으로 쓰임 받는 일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이다. 함께 모여 찬송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넘치는 통치와 섭리를 서로 맛보고 나누는 것이다. 기도하고 찬양하여 사탄이 하늘에서 벼락 같이 떨어지는 것을 보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더럽고 추한 세력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멸망 당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으로 변화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되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영혼이 너무나 불쌍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었듯이 우리도 그들이 너무 안타까워 복음을 증거하고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복음의 소식을 전해들은 영혼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 오는 모습을 보는 것이 세상의 그 어떤 일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되는 것이다.  

좁은 길로 걸어 가는 자는 만나는 사람과 사건 하나하나마다 주님의 십자가 사랑이 필요 없는 곳이 단 한군데도 없다는 것을 절감한다. 그래서 정말  미약하고 별 볼일 없으며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는 존재라도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안다는 한 가지만으로 하나님의 일에 부름 받았다는 확신이 있다. 그리고 그 일에 쓰임 받는 것만이 삶의 즐거움과 재미가 된다. 모든 인생살이의 의미와 목표와 가치가 십자가 사랑이 필요한 사람과 장소와 사건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된다. 그렇게 살아가는 삶에서 누리는 평안, 위로, 능력은 세상의 어떤 것도 흔들지 못한다. 혹시라도 그것들을 방해하는 세상과 죄악과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불러도 벌벌 떨면서 놀라 자빠지는 것을 순간순간 경험한다.

신자란 이미 기쁨과 즐거움으로 기꺼이 좁은 길에 들어서 있는 자다. 하늘의 신비스런 영광과 권능 속에서 좁은 길을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따라가고 있는 자다. 여호와의 궁정에서의 하루가 세상에서의 천 날보다 좋으며 성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왕궁의 보좌에 앉아 있는 것보다 나음을 알게 된 자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없어질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만은 포기하지 않는다.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만이 최고의 기쁨으로 이미 바뀌어져 있기에 아무런 부담과 희생과 수고와 고통 없이 즐겁게 그 길을 걸어 간다. 신자에겐 따로 선택할 길도 없고 이미 선택되어진 길을 가고 있을 뿐이다.

불평은 패자의 몫이다           

하나님은 신자를 예수님의 피 값으로 사셨다. 독생자의 생명과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과 맞바꾸었다. 신자란 세상에서 가진 것 하나 없이 가장 가난한 것 같지만 가장 부요하고 천하의 모든 것을 다 가졌다.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크신 능력과 은총을 우리 속에 보배로 간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과 교제하고 동행하는 삶이 세상의 어떤 사귐과 교제뿐 아니라 어떤 일의 성취나 업적보다 더 귀하다.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마지막 당부를 하셨다. 신자들에게 주는 유언이나 다름 없다. 유언이란 남아 있는 자에겐 가장 중요하며  절대 잊지 말고 그대로 따라야 하는 당부다.  

신자는 세상에서 어렵고 험한 꼴을 당하게 되어 있다. 예수 믿었다고 세상에서 편해지리라 기대하는 것 만큼 큰 착각은 없다. 세상은 예수를 미워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미워할 것인데 신자에게는 예수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세상에 진 예수가 아니라 세상을 이긴 예수가 신자와 함께 한다. 그 말은 신자도 이미 영원한 승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의심하고 불안해 하며 불평하고 불만에 잠기는 것은 언제나 패자가 하는 일이다. 승자는 패자에 대해 불평하거나 불안해 하는 법이 없다. 신자는 세상에 대해 승자다. 세상의 환난과 핍박과 더럽고 추한 죄악이나 사탄의 유혹과 시험은 신자에 대해 패자다. 이 승부가 어떤 특정 사건 한 번으로 그치거나 때를 따라 달라지는 법이 없다. 영원토록 승리는 신자의 몫으로 확정되어 있다. 에디슨이 어떤 모습의 물건이라도 부피를 잴 수 있었듯이 신자는 원리와 정답을 이미 알고 소유하고 있기에 어떤 문제도 어렵지 않게 된 자다.    

그런데도 신자는 왜 그저 한 두 가지 일에 매어 달려 패자처럼 살고 있는가? 환난과 궁핍이 닥치면 불안하고 염려하며 불평과 불만이 끊이지 않는다. 승자가 패자에게 불평하고 불안해서 사정사정하고 있는 꼴이다. 승자로서 승자다운 행세를 하지 않고 있다. 속마음은 오히려 넓은 길을 소원하면서 신자 된 의무와 책임 때문에 할 수 없이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그저 불안해 하며 좁은 길이 어디인지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하나님을 위해 자기가 아주 큰 손해라도 감수하고 있는 양 가장하면서 말이다.

기도와 찬양을 뜨겁게 하고 성경 공부를 열심히 한 후에야 겨우 마음에 위로가 있고 감정이 평안해 지며 그래서 승리했다는 안도감을 잠시 잠간만 느껴선 신자라고 할 수 없다. 언제까지 갈 지(之)자로 좁은 길과 넓은 길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경건의 훈련이며 신앙 생활의 전부인양 착각하고 있을 것인가?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그 고귀한 이름을 부르는 순간 바로 영원한 승리와 궁극적인 영광의 길로 들어섰다. 기쁘게 좁은 문을 열고 협착한 길로 들어 온 것이다. 이 원리를 붙들고 있지 않으면 아무리 신앙적인 방법으로 경건을 훈련하고 연습해도 승리할 수 없다. 삶에 환난과 핍박이 없을 때는 그 방법이 그런대로 먹혀 든다. 그러나 특별히 이상한 모양의 문제가 나타나면 절대 풀지 못한다. 이상한 모양이라고 해서 꼭 미적분의 고차원 공식을 동원해야 할만큼 꼬이고 뒤엉켜 있지 않다. 자기가 예상치 못하고 기대하지 않은 문제는 아무리 별 것 아니고 사소해도 그저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른다.

이 시간 정말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자.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어느 쪽 길인가? 좁은 길 위에 있는가 넓은 길 위에 있는가? 아직도 좁은 길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넓은 길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가? 좁은 길에서도 기도하면 길이 넓어지고 편해질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는가? 넓은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종교적 행태만 취하면 그 길이 좁은 길로 둔갑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좁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진정으로 삶의 기쁨과 목표가 되어 있는가? 최소한 자기가 가고 있는 길이 어떤 길인지는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한 발자국이라도 더 앞으로 나갈 수 있지 않겠는가?

날마다순종

2020.09.03 16:31:24
*.14.99.253

아멘! 본문 말씀을 읽다보니 '천로역정'이 생각나네요. 승자로서 좁은길에서 보석을 캐어내며 그분의 나라를 항상 소망하며 한걸음씩 그분과 함께 걸어나기를 소망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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