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공자가 죽어야 신자가 산다. (마8:21-22)

조회 수 2200 추천 수 238 2004.06.18 16:02:42

마태복음 강해(105) 6/13/04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공자가 죽어야 신자가 산다.

한국에서 몇 달 전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나와 인기를 끈 적이 있다. 그 책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틀림 없이 인륜도덕과 예의범절을 도가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니 사회 모든 부분에 허례허식과 체면치레의 낭비가 심하니 그것을 고쳐야 생산성이 향상 될 수 있다는 뜻일 것이다.  

저는 그 제목을 본 떠서 “공자가 죽어야 신자가 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기독교와 유교간에 어느 종교가 낫는가 그 우월을 따지자는 말이 아니다. 한국인의 정서와 사상적 배경에 유교가 너무 뿌리 깊게 박혀 있어서 신자마저 성경 말씀을 볼 때나 기독교 진리를 이해할 때에 방해가 된다는 뜻이다.

본문은 유교적 관점에선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싶어 하는 사람이 부친을 장사 지낸 후에 따르겠다고 하는 데도 예수님은 다른 사람을 시키라고 대답했다. 어떻게 자식이 부모 장례 치르는 것조차 못하게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마태복음 10:34-36에서 당신이 오신 뜻을 세상에 화평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검을 주러 왔고, 아비와 아들이 불화할 것이며, 사람의 원수가 집안에 있고, 당신보다 자기 부모를 더 사랑하는 자는 자신의 제자로 합당하지 않다고 까지 말씀했다. 본문과 함께 삼강오륜과는 완전히 배치 되는 가르침 같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틀린 해석이다. 상식적으로만 따져도 전혀 이치에 닿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아무리 한 젊은 랍비가 권세 있게 가르치고 온갖 불치병을 낫게 하는 이적을 보인다고 해도 아버지가 죽었는데 구경 나왔을 리 만무하다. 당장 오늘 내일 죽을 지 모르는 위독한 상태에 있어도 병석을 떠날 수 없어 외출하지 못한다.

22절을 다시 자세히 보면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하라고 했다. 문자적 의미로 따지면 시체더러 시체를 장사 지내라는 것인데 말이 안 된다. 예수님이 죽은 자라고 표현한 것은 문자적으로 육신이 죽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따라서 이 사람의 아버지도 죽었거나 곧 죽게 될 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본문은 예수님을 따르고는 싶은 데 부친이 연로(年老)하여 몇 달 혹은 1-2년 안에 돌아가실 가능성이 다분히 있어 그것을 걱정한다는 뜻이다. 요즘 식으로 따지면 교회 나가서 신앙생활을 하고는 싶은데 부모님이 아프거나 눈치가 보여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 믿어도 될까요 하는 식의 질문이다. 예수님은 부모를 모시지 말고 내팽개쳐도 된다든지 종교생활이 사회생활보다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주신 적이 결코 없다.

그럼 예수님의 답변은 곧 2-3년에 자신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예정으로 시간이 급하니 당장 따르라는 것인가? 아니면 제자로 따르려는 자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뜻으로 대답하신 것인가? 본문은 그런 현실적 이유가 아니라 굉장히 심각한 말씀이다.

타이타닉호 구조본부의 최후의 벽보

타이타닉호의 침몰사건이 났을 때 사고 수습 본부에 시시 각각 급보가 나 붙었을 것이다. 그 벽보판에 최후에 붙은 소식이 무엇이었겠는가? 한 쪽에는 이천 명이 넘는 사망자와 반대 편에는 수십 명에 불과한 생존자의 명단이다.

모든 인생의 궁극적 결과는 죽음이다. 그 명단에서 생과 사의 두 가지 갈래 길로 나뉘게 된 절대적 기준은 무엇이었겠는가? 돈이 많고 적은 것인가? 몸이 건강하고 약한 것이었는가? 착하게 살고 악한 짓을 많이 했던 것인가? 똑똑하고 못 배운 것인가? 종교심이 뜨거웠고 종교가 없었던 것이었는가?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오직 구명 보트를 탈 수 있었고 그렇지 못한 차이 뿐이었다.  

예수님이 죽은 자로 죽은 자를 장사하라는 것은 보통 사람이 선뜻 이해도 할 수 없지만 보통 인간으로선 감히 할 수 없는 말이다. 효성이 지극한 한 착한 사람 앞에서 할 말은 더더구나 아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면 살고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고 말했다. 자신이 인간의 절대적 운명을 좌우하는 구명보트라고 선포한 것이다. 영국의 저명한 신학자 C. S. 루이스가 지적한 대로 예수님은 완전히 미쳤거나 정말 하나님 본인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예수를 따르지 않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죽은 자들은 인륜과 도덕을 삶의 가장 고급한 가치로 여기며 그 중에서도 장사(葬事)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보다 더 급하고 더 중요한 일, 사람이 진짜 죽고 사는 일은 당신을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 예수를 믿지 않고 그 분의 제자가 되지 않은 자는 인생에서 실패 중의 실패를 한 것이며 영원한 죽음의 저주 아래 들어 갈 수밖에 없다.  

본문이 특별히 이미 믿은 신자에게도 심각한 말씀이 되는 까닭은 내가 제대로 예수를 믿어 그 분의 제자가 되었는가를 가름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예수 믿고 난 후에 “휴-! 정말 살았다. 예수 안 믿었더라면 진짜 큰 일 날 뻔했다. 아버지 장례 치르는 일보다 훨씬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었다”라는 것을 확신하고 실감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은 과연 그러한가? 지금 그런 고백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가?

그럼 도대체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이길래 그런 정도로 크나큰 의미를 갖는 것일까? 사대 종교를 창시한 한 성자에 불과한 것 아닌가? 왜 꼭 예수를 믿어야만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바뀌는가?
  
문둥병자의 두 가지 평생 소원

문둥병자에게는 두 가지 간절한 평생 소원이 있다. 무엇인지 아는가? 두말 할 것 없이 병이 낫는 것일까? 몇 년 전에 ‘Face Off’라는 영화에서 나왔듯이 최근에는 정체성과 윤리성 시비가 분분하지만 화상으로 심하게 망가진 환자의 얼굴 전부를 방금 죽은 시체의 얼굴로 바꿀 수 있을 정도로 의술이 발달되었다고 한다. 그처럼 문둥병자도 병이 낫고 성형외과에 가서 자기 얼굴을 제 모습으로 고치는 것이 평생의 소원이겠는가?

그렇지 않다. 지금이나 예수님 당시나 문둥병자는 자기 병이 나을 수 있으리라고는 아예 꿈도 꾸지 못한다. 그들은 “도대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팍 죽어 버릴 수 없어 그저 그냥 살고 있을 뿐이다. 그들의 인생은 하루하루 순간순간이 오직 죽음을 기다린다는 뜻 말고 다른 의미는 전혀 없다.

그들의 첫 번 소원은 제발 고통을 느껴 보는 것이다. 문둥병은 흔히 오해하듯이 살이 썩어 들어가는 바이러스에 감염된 병이 아니다. 신경 세포를 파괴하는 병균이 특별히 고통을 감지하는 신경이 작동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병이다. 몸에 이상이 생기거나 균이 침범하면 신경 세포를 통해 뇌에 고통이 전달 되고 뇌는 힌 피톨의 동원 명령을 내린다. 백혈구가 감염된 부위를 집중 포위하여 살균 작용을 하여 병을 이겨낸다. 그 전투에서 병균을 삼키고 죽은 힌 피톨의 시체가 모인 것이 고름이다.

그런데 인체의 면역 및 항균 작용이 일체 중단됨으로써 공기 중에 수도 없이 많은 바이러스나 부상으로 침범한 병균에 저항 한 번 못하니까 살이 썩고 코와 귀가 떨어져 나간다. 어떻게 하든 고통을 한 번 느껴 보려고 불에 지진 인두로 허벅지를 태워도 살은 타 들어가는데 전혀 고통을 못 느낀다. 살이 타는 냄새도 맡지 못한다. 이미 코가 떨어져 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형태라도 고통을 조금이라도 느껴  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다. 그들에게는 고통은 오히려 몸이 정상이라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소원이 사실 따로 있다. 이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고통에 비하면 육신적 병은 어쩌면 그들에겐 고통이라고 할 수도 없다. 육신적 고통은 병의 성격상 전혀 느끼지 못하니 사실 고통스럽지 않다.  단지 하루 밤 자고 나면 손가락이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것이 탈이지만….

더 큰 소원은 다른 사람과 포옹 한 번 해 보는 것이다. 문둥이는 인간 사회에서 완전히 격리되어 문둥이 굴에서 오직 문둥이들끼리만 모여 살아야 한다. 정상인과 악수라도 한 번 해 봤으면 하는 것이 이들에겐 전 인생을 걸만한 절실한 소원이다.

그들이 처음 그 병에 걸렸을 때의 심정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어느 날 갑자기 자기 몸에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진물이 나는 데도 전혀 아프질 않고 부상당해 피가 나 보기에는 징그러운데도 고통이 전혀 없다. 도대체 어떤 연유인가 무슨 병인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차츰 며칠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나면서 드디어 자기 몸의 이상 현상이 천하의 저주 받은 문둥병이란 것을 알았을 때의 그 심정 말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이 서서히 자기를 피하기 시작한다. 바로 쳐다 보면서 이야기 하는 법이 없다. 이전에는 레슬링 하면서 방바닥을 뒹굴며 함께 장난 치던 막내 아들이 아빠를 보기만 하면 울고 도망친다. 아내와의 잠자리는 꿈도 못 꾼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집안 식구 모두 모여 아버지에게 최후 통첩을 했다.

“여보 우리 잘못이 아니잖아요. 우리도 이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음을 잘 아시지요. 당신이 우리 입장이 되어도 이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해 주셔야 해요. 여기 그 동안 우리가 최선을 다해 마련한 돈 얼마하고 먹을 것 준비 해 놓았으니 문둥이 마을로 떠나셔야 하지 않겠어요? 두 번 다시 우리를 찾지도 말고 서로 아는 체도 말기로 합시다. 제 혼자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지만 (진정인지 지나가는 말인지 모르지만) 저 어린 자식들이 무슨 죄가 있어요? 저 아이들도 시집 장가 가야 할 텐데 아버지가 문둥이라면 누가 결혼하려 하겠어요. 우리도 이 동네를 오늘부로 떠나 아주 먼 곳에 가서 살 테니 괴롭지만 이젠 서로 완전히 남남이 되기로 해요. 그래도 우리가 당신을 사랑했다는 것을 아시잖아요? 우리가 어디에서 살든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만은 잊지 말기로 해요.”  

그 때까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정말 열심히 일 해 쌓아 왔던 모든 것들이 일 순간에 와르르 무너지고 완전히 휴지조각으로 변했다. 자기 인생이 발 밑에서부터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하며 자기 존재가 천길 낭떠러지 구덩이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 그는 그 구덩이에서 단 일 센티미터라도 사람들에 의해 위로 끌리어 올려진 적도 스스로 올라 올 수도 없었다.

단 한 번이라도 정상인과  포옹 한 번 해보는 것이 그들의 첫째 가는 소원이다. 아니 포옹까지는 안 해도 좋다. 악수라도 한 번 해봤으면, 악수는 못해도 따뜻한 미소라도 한 번 받아 봤으면, 미소는 몰라도 사람들이 자기를 외면하지 않고 똑 바로 쳐다 봐 주기만 한다면 여한이 없다. 똑 바로 쳐다 보지 않아도 상관 없다. 돌이라도 안 던지면 다시 힘을 내고 열심히 살아 보겠는데…

자기가 아무 잘못이나 손해를 끼치지 않은 생판 남에게서 돌 팔매질 안 당하는 것만이 문둥병자의 평생의 유일한 소원이다. 그런 소원 조차 못 들어주고 자기와 아무 관계 없는 문둥병자만 보면 돌부터 던지고 보는 자가 우리 모두, 소위 정상인이라는 자들이다. 그것도 신앙인들을 포함해서 말이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지는가? 누가 진정 돌을 맞아야 할 사람인가?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마태복음 8:3에서 성경은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예수님이 문둥병자를 포옹하고 악수했다는 뜻이다. 자기 아내와 자식의 손을 만져 본 지가 도대체 언제인지 기억조차 못하는 그였다. 가족도 아니요, 친척도 아니요, 친구도 아니며, 단 한치의 이해관계도 걸리지 않은 생판 남인 예수님이 그에게 손을 대신 것이다.

문둥병자가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2절)라고 말한 것이 “혹시 고쳐 주길 원하시지 않는가? 귀찮아 하는가? 아니면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를 묻는 시시한 질문이 아니다. 예수님은 못 고칠 병이 없으며 고통 중에 있는 자를 거절 할 리 없다.  

그 말의 뜻은 “예수님 당신이 구세주가 맞습니까? 이 땅을 구원하실 메시야입니까? 제 평생의 유일한 소원인 제가 깨끗하게 되어 남들과 악수 한 번 해 보는 것을 들어 줄 수 있습니까? 당신이 진정 나의 고통과 슬픔을 없애주며 이 갈급함과 공허함을 생수로 채워주어 이 땅에 살아갈 의미와 가치를 다시 갖게 해 주실 분이 맞습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나아가 “저는 정말 남에게 죄라고 지은 적이 없으며 싫은 소리 한번 안 들었는데 왜 이런 병에 걸려야 합니까? 주위에서도 법 없이 착하게 살 자라고 칭찬만 들었는데 도대체 이런 흉측스런 병에 걸린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병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표시입니까? 제가 왜 세상 사람들로부터 아무 죄도 없이 돌팔매질을 당해야 합니까? 이 땅에서 이런 취급을 받더라도 천국에서만은 참 안식을 얻고 싶습니다. 정말 저에게 구원의 희망이 영영 사라진 것입니까?”라고 호소한 것이다.  

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3절)였다. “네가 그렇게 된 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며 네 죄 때문에도 아니다. 구원은 착하고 악한 것과 상관이 없다. 설령 네 잘못으로 그렇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고 구원해주지 않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네 눈물을 보았고 네 한숨을 들었다. 이제 내가 네 근심 대신 찬송의 옷을 입혀 줄 것이며 슬픔 대신에 희락의 기름을 부어주겠다. 내가 너를 깨끗케 하여 사람들 사이에 더 이상 배척당하지 않고 세상 사람과 악수하고 너 사랑하는 식구들과 포옹하고 뒹굴게 해 주겠다.”

예수 믿는 신앙의 본질이 원수를 사랑하고 왼 뺨을 맞으면 오른 뺨을 갖다 대는 최고급의 도덕을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힘든 문제와 병든 것을 정성껏 기도하여 해결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 사이에 자존심이 상하고 상처 받은 것을 말씀 보고 묵상하여 마음의 평온을 얻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들은 예수를 믿어 얻는 부수적 결과 수천 수만 가지 중의 대표적인 것 몇 가지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 모두 육신은 아닐지라도 영혼은 문둥병에 걸렸던 자들이다. 이 세상의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권세에 눌려 신음하고 있던 자들로 본질상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죄의 병균이 침범해도 감지도 못하고 아무런 고통도 없이 온 육신과 정신이 썩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 병을 어느 누구도 고칠 수 없으며 그 죄의 삯은 오직 죽음 뿐이었다. 어느날 예수님이 그런 우리에게 먼저 찾아 오셔서 손을 대시며 깨끗케 해 주셨다. 우주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 삶과 인생과 존재의 주인이 되어 주시고 지금도 우리를 사랑과 권능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이제 우리는 그 분과 함께 매일의 삶에서 교제하며 인도와 보호를 받으며 남은 평생을 동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또 이 땅을 떠난 후에는 천국의 어린양의 보좌 앞에서 거룩, 거룩, 거룩하며 세세토록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할 것이며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을 예수님처럼 영화로운 존재로 변화 시켜 주실 것이다. 이 땅에서 사는 인생의 목적과 가치를 하늘에 두고 있고 영광된 궁극적 생명을 소망으로 갖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우리가 가는 곳마다 어떤 더럽고 추한 죄악이라도 이기고 사탄의 세력을 짓밟을 수 있다. 이제는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에 속하지 않은 것이라면 이 땅의 어떤 것으로도 우리의 삶과 존재를 흔들거나 훼방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 주위에 아직도 그저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매어 달려 그 힘으로 조금 더 편하고 여유롭고 재미있게 살려는 사람들, 자기 마누라와 아이들의 형통 외에는 관심이 없는 죽은 자들 앞에 예수를 따르는 산 자로 서야 한다. 죽은 자를 장사 지내는 것만이 인륜과 도덕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그 죽은 자들에게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그로 말미암지 않고는 인간이 살 수 없음을 증거하고 선포하고 실제로 그렇게 사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빠삐용과 데미안

본문은 역으로 따지자면 예수 믿는 자들이 오히려 문자적으로 죽은 자라는 해석이 된다. 예수님을 따르지 않은 자는 서두에 살펴 본 대로 아무도 육신적으로는 죽지 않은 자들이다. 반면에 바로 앞 8:20에서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자는 세상에 머리 둘 곳도 없이 떠돌아 다녀야 한다. 또 가족끼리 원수가 될 것이라고 경고한 예수님 말씀의 결론은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고 하셨다. 예수를 따르려면 육신적으로 죽는다고 했다. 세상에서 형통한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따라서 본문은 나를 따르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반드시 죽을 텐데 그래도 따를 것이냐고 예수님이 역설적으로 질문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죽지 않고 형통할 세상 사람들을 향해 오히려 죽은 자라고 표현했다. 그 이유는 저들은 잠시 살지만 영원히 죽을 자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부친의 장사를 뒤로 하고 예수를 따르는 제자는 잠시 죽을지라도 영원히 사는 자라는 것이다.

오래 전에 나온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이 지옥 같은 섬에서 탈출할 배를 문둥이 굴에서 구하기로 했다. 그 때 문둥이 두목이 그에게 돈이 문제가 아니라 다른 것으로 시험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떤 것이었는지 기억하는가? 문둥이 두목이 피우던 시가 담배를 줘서 함께 나눠 피우자고 했다. 자신을 정상인 취급하는가 문둥이로 취급하는가를 시험해 본 것이다.

빠삐용은 용감하게 담배를 나눠 피우고 그 시험을 통과했다. 그러나 자기 생명이 살고 죽느냐 하는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아도 그럴 수 있었을까 의심스럽다. 아니 생명이 걸려 있지 않는 한 제 발로 문둥이 굴로 찾아갈 리도 없다. 이 세상에 예수를 모르는 자들, 인륜과 도덕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죽은 자들이 도달할 수 있는 의의 한계다. 자기들 먹고 살고 남은 여유를 가지고 강자의 아량과 자부심과 호기로 약자에게 적선하는 것 뿐이다.

네델란드의 데미안 선교사 이야기를 들으신 분이 있을 것이다. 문둥이 굴에 선교하러 갔지만 도저히 마음 문을 열지 않아 자기가 문둥이라면 복음이 잘 증거될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되었다. 그 때부터 문둥이들과 악수하고 포옹하고 함께 먹고 자며 뒹굴었다. 그러자 정말 자신도 문둥병에 걸렸고 십자가의 은혜가 전해지며 전도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그는 죽을 때에 자기 일생에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 문둥이가 되고 난 이후라고 고백했다.                   

왜 예수님이 인간의 절대적 운명을 책임지는 유일한 길이 되는가? 문둥이 굴 같은 이 땅에 문둥이와 같은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이다. 하나님 본체의 영광을 버리고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서 인간이 겪는 모든 시험과 유혹을 몸소 체휼하셨다. 이 땅의 영적인 문둥이들이 눌려 있고 매여서 허덕이든 모든 죄악과 고통과 공허와 갈급함과 수치와 멸시와 상처들을 몽땅 자신의 육신으로 감싸 안아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감당하셨다.

세상의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은 문둥병을 낫게 하는 능력이 있는지 여부는 둘째 치고 다들 한 목소리로 인간 스스로 깨끗케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너희들도 도를 닦고 착하게 살면 하나님의 의의 심판에서 합격점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한 마디로 말해 ‘착하게 살아야 천국 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솔직히 아이큐 두 자리만 넘으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고 가르칠 수 있는 내용 아닌가?

예수님은 정 반대였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했다. 너희 스스로는 절대 깨끗케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의 의는 누더기 같고 만물 중에 가장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솔직히 우리 속을 뒤집어 놓고 보면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자신 있게 설 자 아무도 없다. 자기가 자신을 보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본인만은 안다. 혹시 자기 마누라나 남편에게는 자기 실제 모습을 속일 수 있을 지 몰라도 예수님은 못 속인다. 자기 옛 자아가 죽고 하나님의 영이 대신 들어 오지 않은 자는 문둥이와 절대 포옹하거나 악수하지 못한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 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 분이 문둥이를 직접 만지신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모두가 문둥이를 제대로 쳐다 보지도 못한다는 것을 아시고 그것 때문에 우리를 책망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타락한 이후의 우리 체질이 얼마나 연약하고 진토인 줄 아신다. 우리가 만지지 못하는 문둥이를 자기 손을 대시고 낫게 해주시려 당신이 직접 오셨다. 또 우리 스스로는 문둥이와 악수하지 못하니까 우리 영혼을 깨끗케 해주어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로 바꾸어 주러 오신 것이다.

인륜 도덕을 쫓아 장사 지내는 것, 세상에서 죄 안 짓고 착하게 사는 것 정말 중요하다. 그러나 그 보다 더 급하고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생각해도 너무나 부끄러운데도 그 모습 그대로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항복하는 일이다. 세상 일을 뒤로 하고 심지어 인륜도덕적으로 급한 일이 있더라도 예수를 지금 당장 따르는 일이다. 이것 말고는 인간에게 절대 희망이 없다. 그렇지 않으면 전부 죽은 자일 뿐이다. 공자가 죽지 않으면 이미 신자가 된 자도 죽는다.  


낙타무릎

2011.02.21 02: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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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메세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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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신자는 좁은 문을 선택할 필요가 없다. (마7:13,14) [1] 운영자 2004-02-24 2793
49 마 7:12는 기독교의 황금율이 아니다. (마7;12) [1] 운영자 2004-02-17 7827
48 기도 하지 말고 기도하는 이가 되어라 (마7:7-11) 운영자 2004-02-11 2018
47 이단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 (마7:6) [1] 운영자 2004-02-02 27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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