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종신 운전수와 평생 식모 (마 5:16)

조회 수 3039 추천 수 156 2003.06.16 23:52:01
마태복음 강해 (51), 1/26/2003

“이 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암 치료 연구소

성경은 분명히 신자더러 빛과 소금이 되려고 노력하라고 권하지 않고 이미 빛과 소금이 되어 있다고 했다. 신자란 세상과 죄악과 사단 앞에 당당히 맞서기만 하면 승리하게 되어 있는 자들이다. 그래서 신자가 어떤 현실적 환난과 시련 가운데도 그 시련과 죄악을 당당하게 이겨내는 모습을 불신자가 보기 때문에 과연 하나님을 아는 신자가 다르긴 다르구나 하는 인정을 받아야 하고 또 필연적으로 받게 된다. 신자란 가는 곳 마다 만나는 사람 마다 내가 똑똑하고 선해서가 아니라 나를 통해 주님이 향기를 뿜어내시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야 할 문제는 아무리 신자가 예수님이 함께 함을 믿고 당당하게 시련과 죄악 앞에 나선다고 해도 예수님이 도깨비 방망이 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슈퍼맨이 되어 그 죄악을 무찔러 주는 것도 아니다. 선한 행실을 할 행동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신자다. 본문에서도 “비취게 하여”라고 분명히 신자의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본문 다음에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에도 “너희의 의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보다 더 낮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까지 하셨다.  

복음 안에서 신자가 비록 어떤 죄와 시험에 넘어지더라도 용서하시고 회복시켜 주시는 것은, 어디까지나 믿음 안에 들어 온 자가 누리는 축복이자 신자가 주님과 일대일로 해결할 문제이지 불신자가 알 수 있거나 관여할 바가 아니다. 대신에 신자가 하는 행동은 무엇이든 세상 사람의 주목과 시기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불신자들 모두 사실은 불안하고 초조하며 죄에 찌들어 있어 스스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고 있고 심지어 믿고 있기조차 한다. 최소한도 하나님을 믿고 싶거나 믿어야 할 필요성은 느낀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으며 과연 죄악을 이기고 시련 앞에 당당한가 항상 주시하고 있다. 정말 믿을 만하다는 확신이 들면 자기들도 믿어야지 하며 신자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신자는 일부러 선행을 보이려고 할 필요까진 없지만 저들이 항상 보고 있다는 것만은 잊지 말아야 하고 그래서 착한 행실이 저들 앞에 보여져야 한다.  

전도란 것이 십자가 구원의 은혜를 전한다고 해서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염려한대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므로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면서” 불신자 앞에 우리의 실패하고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면서 예수님은 우리의 어떤 죄도 용서 해주십니다 그러니 당신의 죄도 용서 받으시기 바랍니다라고 할 수는 없다. 안 그래도 주님의 십자가가 이해가 안 되던 차에 신자를 완전히 광신자 취급할 구실만 주는 셈이다. 물론 우리가 믿는 바의 복음의 핵심과 은혜가 은혜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은 우리 죄를 언제나 씻어주시는 주님의 보혈임에는 틀림 없지만 불신자들 앞에선 백설같이 희어진 모습으로 나서야지 그들과 같이 진흙탕에 뒹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논할 수 없다. 신자들이 죄는 동일하게 짓고 있으면서 교회에서 하는 것이라곤 기껏 기도해서 암이 나았다는 증거뿐이면 전도도 암에 걸린 사람만 찾아가야 되고 교회의 이름도 암 치료연구소로 바꾸어야 한다. 신자가 본문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할 뿐 아니라 이미 우리가 빛과 소금이 되었다고 하신 예수님을 거짓말 장이로 만드는 결과가 된다.    
        
벙어리 하인과 집사장

그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질문을 바꿔보자. 신자가 빛과 소금의 역할 즉 착한 행실을 하라고 할 때에 가장 먼저 어떤 행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가?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 도와 주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맞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인가? 도와줄 능력과 여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항상 문제다. 시간, 돈, 실력이 있던지 정 안 되면 몸으로라도 때워야 한다. 아무리 우리 형편을 둘러봐도 내 코가 석자다. 우리에게 남을 돕고자 하는 소원과 선한 마음이 없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가 유별나게 사치스럽거나 탐욕을 부리는 것도 아니다. 특별히 우리처럼 미국에 사는 자들의 형편이 그렇다. 정신 없이 할부금 갚아나가기도 힘에 벅차다. 그럼 우리는 평생 빛과 소금의 역할은 감당도 못해보는가?

‘벤허’ 영화에 보면 주인공 벤허가 억울한 누명을 쓰고 노예선에 끌려 갔다가  천신만고 끝에 로마 고관귀족의 양아들이 되어 고향인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다. 그 동안에 충실한 늙은 집사장이 로마의 예루살렘 경비대로 끌려가 갖은 고문 끝에  다리를 완전히 못쓰게 되었다. 그런데도 주인의 집을 잘 관리하며 지키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겠는가? 감옥에서 만난 한 젊은 종을 데리고 와서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종은 신체만 건장하지 일자 무식에 벙어리였다. 젊은 종은 늙은 집사장의 다리와 신체 노릇을 해주었고 늙은 집사장은 그 종을 가르치는 스승 노릇을 해주었다.

신자더러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면 테레사 수녀처럼 어렵고 힘든 사람을 찾아 나서 내 자신이 가진 것 모두 바치고 희생하고 순교까지 해야 한다고 자꾸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중에 몇 되지 않으며 하나님은 우리더러 그렇게 요구하지 않는다. 테레사 수녀를 성화의 표본으로 삼고 존경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반드시 두 가지 부작용 중의 하나가 우리 같은 평신도에게 나타나기 마련이다.  우리가 그렇게까지 하지 못하는 데 대한 죄책감만 늘어나거나 아니면 믿음의 수준이  아직 그 정도가 되지 않았으니까 아예 안 하거나 나중에 천천히 할거라는  핑계거리로 써 먹는 것이다.

예수님이 너희가 빛과 소금이니 라고 하신 말씀은 우리가 신령한 능력과 수준에 도달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믿음을 갈고 닦아야 빛과 소금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의미다. ‘너희는 소금이니, 빛이니’ 둘 다 현재 시제를 사용했음에 주목해야 한다. 지금 당장 그 역할을 감당하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선한 행실을 하는 데는 믿음의 수준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13-15절의 말씀의 초점이  “피하지 말라, 숨지 말라, 당당하게 맞서라” 에  있는 이유다. 현재 너가 서있는 바로 그 위치, 신분, 소속, 지위에서 빛을 발하고 소금의 구실을 하라는 말이다. 장소, 시간, 사람, 환경에 구애 받지 말고 신자답게 서 있는가, 정말 네가 바로 그 순간에 맡겨진 너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고 있는가 아닌가의 문제다. 남편이면 남편으로 아내면 아내로서, 부모면 부모로서 자녀면 자녀로서, 선한 이웃으로, 성실한 직장인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으로, 정의를 구현할 한 사회인으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할 한 성도로, 정말 부족함 없이 서 있다면 바로 그것이 빛이자 소금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절대 혼자만의 열심과 정성과 실력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남편이란 아내가 있어야 남편이고 부모는 자녀가 있어야 부모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남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맡은 역할, 상대에게 반드시 해 주어야 할 것을 서로가 서로에게 제대로 하라는 것이다. 아까 예를 든 늙은 집사장과 젊은 하인의 경우에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선 안 될 존재였다. 하나가 하나로서 서 있으면 절대 완전할 수 없고 부족하다. 둘이 함께 있어야 제대로 구실을 하고 완전해진다.

둘이 함께 있어야 제대로 구실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전제로 하는가? 둘 다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말이다. 어느 쪽도 실력이 뛰어난 것 없다. 단순하게 서로가 각자의 장단점을 보완해주라는 정도가 아니다. 한 사람은 돈은 많은데 지혜가 모자라고 다른 사람은 돈은 없는데 지혜가 많아서 서로의 장점으로 상대의 약점을 카바해주는 정도가 아니다. 늙은 집사장이 걷지 못하고 앞을 못 보는 것은 단순한 결점이나 약점이 아니라 핸디캡이다. 약점은 스스로 노력해서 고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도움이 꼭 없어도 된다. 집사장이나 벙어리 하인이나 한마디로 말해  둘 다 병신이다. 하인에게 집사장이 없으면 정상 생활을 못하고 집사장에게 하인이 없어도 사람 구실 못한다.

우리가 현재 서 있는 자리 그 신분과 위치를 제대로 지키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남편이면 자기 아내에게 내가 손 잡고 이끌어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무서워 집 밖에 한 발자국도 못 나가는 병신이며 아내도 자기 남편에게 내가 격려하고 사랑해주지 않으면 그 사람은 밖에 나가 아무 일도 못한다는 확신이 있고 그렇게 실천하고 있는가? 남편이 나는 돈만 벌어주면 되니까 아내더러 너는 무조건 나에게 순종해 이런 법은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요리 못하는 여자들이 간혹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요리학원에 보내기도 해야 하지만 남편이 대신 요리하면 된다. 요리 부문에 병신인데 어떻게 할 것인가? 항상 말이 많아 푼수를 떠는 마누라들이 있다. 푼수가 병신인데 그것을 사랑해야지 무조건 사람을 못 만나게 하기 위해 손발을 쇠사슬로 묶고 집 안에 가두어 놓을 수는 없다.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필자가 큰 병이 있어 혀를 일부 잘라내는  수술을 받고 난 후에는 자극성이 있는 음식을 전혀 먹지 못한다. 그래서 제 아내는 항상 음식을 따로 준비해야 하고 심지어 어디 초대 받아 음식을 대접 받으면 마치 이전에 임금 수라상에 독이 들었는가 검사하는 사람이 있듯이 먼저 음식을 맛보아야 한다. 대신에 제 아내는 길 눈이 너무 어둡다. 좌회전이나 우회전 한 두 번만 해 버리면 방향을 종잡지 못한다. 혼자 차를 몰고 이곳 LA 프리웨이에 내어 보낼 수가 없다. 그래서 하루는 제가 아내에게 “여보 어쩔 수 없소. 당신은 나에게 식모로 평생 취직했고 나는 당신에게 종신 운전수로 고용됐소”라고 진지하게(?) 농담을 했다. 나는 아내가 없으면 밥을 못 먹고 아내는 내가 없으면 외출을 못한다.

우리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병신이 되었고 병신들끼리 모여서 병신 육갑 뜨는 꼴이다. 사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부부 관계가 그렇다. 아니 우리 모든 인간 관계가 다 그렇다. 우리 자신과 주위를 둘러 보라. 무엇이 그렇게 잘나고 뽐낼 것이 있는가? 다들 도토리 키재기다. 똑똑하다고 뽐내 봐야 장점이 열 손가락을 채울 수 있는가? 다섯 손가락으로 꼽아도 남을 것이다. 그 장점도 세계 최고의 수준이 아니라 겨우 평균 수준을 조금 넘은 정도 밖에 더 되는가? 그래서 남편이 아내에게 돈 몇 푼 벌어 준다고 무조건 순종하라고 고함지를 수 없고, 아내는 겨우 이 돈 갖다 주고 큰 소리치느냐고 바가지 긁을 수 없다. 부부 두 사람끼리야 서로 싸워 가재도구를 깨든 말든 어차피 병신들 끼리 치고 받는 것에 불과하지만 무엇이 잘났다고 이웃을 시기하고 질투하며 무시하고 폼 잡을 것 있겠는가? 설사 사람들 사이에야 서로 제 잘난 맛에 산다 치더라도 무엇을 믿고 예수가 십자가에 할 일 없이 죽기는 왜 죽어 비아냥거리며 하나님 앞에 감히 고개를 당당히 쳐들 수 있는 자 있는가?  제 뿔도 잘난 것 하나 없는 사람들이 더 큰 소리 친다. 자기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들킬까 봐 큰 소리 치는 것 뿐이다. 항상 구린 사람이 큰 소리 치게 되어 있다.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 절대 우리 실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특별한 은사와 재능을 갖고 시간과 여유가 있을 때에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위치를 찾는 싸움이다.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자기가 어디에 서 있어야 될지 그 자리에 가 있는 것이다. 크게 어려울 것이 없다. 상대가 부족하고 불완전한 곳에 가 있으면 된다. 상대가 나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그 장소에 가 주기만 하면 된다.

병신으로 만드는 하나님

흔히들 신자가 빛과 소금이 되고 바리새인보다 더 의가 나아야 된다고 하니까 예수님이 선행의 질적, 양적 크기를 더 많이 요구하는 것인 양 착각한다.  불신자보다 더 착하고 죄를 덜 지어야 하고 그들 보다 더 희생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외형적 수준만 더 높이려고 한다. 더 착해지라는 것은 신자에게만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하고 신자이니 더더욱 그래야 한다. 사실 두말하면 잔소리고 강조할 거리도 못 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신자가 모르는 바도 아니고 구태여 주일날 귀한 시간 허비해가며 나와 듣고 있을 이유가 없다. 문제는 몰라서 못하는 것이 아니라 못해서 못한다는 것이다.

벤허의 집사장과 하인의 경우나 저와 아내의 경우에 단순하게 서로 사랑하라, 어려운 이웃을 도와라고 해서 그 말씀에 순종했거나 또 내 속에 있는 의로운 열심과 품성이 그렇게 하도록 한 것도 아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는 분명히 각자의 장점으로 상대의 약점을 보완 해준 것은 분명히 맞다. 일반적으로 모든 도덕과 종교에서 가르치는 선행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적으로 드러난 모습에 불과할 뿐이며 서로 모자라는 부분을 도와주는 정도로는 빛이 되는 것의 본질이 될 수 없다.

이렇게 생각해 보라. 늙은 집사장이 다리 병신이 되기 전에 그 덩치만 컸지 일자 무식인 젊은 벙어리 하인의 가치를 제대로 알았겠는가? 그를 온전한 사람 취급이나 해주고 나아가 그에게 도움 받을 일이 있으리라고 꿈에도 생각했겠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답은 틀림 없이 ‘노’(No)일 것이다. 필자가 아내에게 내가 당신에게 평생 운전수 노릇 해주겠소라고 한 것이 목사니까 특별히 인격이 고상해졌고 신앙 실력이 신령해져서 그렇게 된 것이 절대 아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온갖 종류의 사람을 만난다. 말이 앞서 자기는 선한 의도로 열심을 다했지만 교회에 분란만 일으키는 여자도 있다. 교회에 생긴 문제는 둘 째 치고 그럴 때마다 만약에 내가 저런 여자를 데리고 산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보기도 하는데 도저히 자신이 없고 당장 헤어졌을 것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던 자다. 목사로서 강단에서는 아내의 결점을 보지 마시고 장점을 보면서 주께 하듯 그 영혼을 사랑하시요라고 설교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자신의 문제로 부닥치면 전혀 그렇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던 제가 아내가 반찬과 음식을 항상 두 종류로 만드는 수고를 하고 또 집에서 저 때문에 싱거운 반찬에 길들여진 아내가 오랜만에 화끈하고 얼큰한 한식을 외식하고 돌아 오면 꼭 배탈이 나는 것을 보고서야 얼마나 고생이 많은가를 알게 되었을 뿐이다.  이전에는 마누라는 당연히 남편에게 맛 있는 음식을 만들어 주어야 된다고 생각했지 솔직히 단 한 번도 그 일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해 본 적이 없었다. 제 혀가 불편해서 일종의 핸디캡이 되기 전까지는 아내가 밥해주는 것에 대해 일상적인 감사는 있었지만 저 사람이 나에게 평생을 두고 특수한 간호원 식모가 되었다라고 생각이라도 했겠으며 더 나아가 내가 손발이 성해 운전할 수 있을 동안에는 저 사람에게 이 복잡한 LA 프리웨이의  평생 운전수로 섬겨야지 하는 생각이 꿈에라도 들었겠는가?

집사장이 병신이 되고서야 벙어리 병신의 하인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었고 저 또한 혀가 짧아진 병신이 되고서야 길눈이 어두운 병신 마누라의 가치를 깨닫게 된 것이다. 신자가 이미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의미다. 신자란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벌거벗겨져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하며, 무능하고, 죄가 많으며, 완악하며, 썩어 없어질 탐욕에 사로 잡혔으며, 까닭 모를 불안과 염려와 초조와 분노에 눌리고 사로 잡혀 있었던 천하의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음을 철두철미하게 깨달은 자다. 스스로 남보다 선하고 현재 내가 여유가 없어 그렇지 조금이라도 형편이 나아지면 나는 언제든지 남을 도울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자랑했던 그런 인간적인 의와 교만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난 자들이다. 다섯 손가락에도 꼽을 수 없는 그 장점을 가지고, 그것도 점수로 따지면 100점 만점에 겨우 53-55점짜리가 43-47점 짜리를 비난하고 멸시할 수 없으며, 심지어 매일 살을 맞대고 살면서 알 것 모를 것 하나 없이 서로 부끄러운 부분이 다 드러난 부부 사이에도 자존심, 위신, 체면, 고집 세우느라 상대를 무시하고 미워하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짓인지 그것이야 말로 병신 육갑 떠는 부끄러운 꼴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전에는 지금 돈과 시간과 여유가 없어서 그렇지 조금만 형편이 나아지면 내 식구들과 이웃들을 얼마든지 더 사랑할 수 있다고 큰 소리 치다가 막상 수입이 늘어나면 라스베가스로 달려가기 바쁜 수준 밖에 되지 못한 존재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약점도 있지만 그래도 장점이 많고 최소한도 이웃집 개똥이 아비보다야 어느모로 보나 내가 낮다는 알량한 자부심이 내 존재를 지탱하는 유일한 능력이었던 자들이다. 어느 날 십자가에 비추인 주님의 그 빛으로 인해 내가 병신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된 자들이다. 자아가 완전히 산산 조각이 나고 나니까 비로소 내가 병신이었고 또 남들이 얼마나 나에게 소중하고 귀한 존재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나아가 저들 또한 나처럼 불쌍하고 안타까운 병신임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저들에게 내가 없어선 안 될 존재이며 저들 또한 나에게 꼭 있어야 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빛과 소금이 되어라

신자들이 빛과 소금이 되려고 할 때에 마치 이 세상을 우리가 하루 아침에 개혁하고 뒤 엎는 것으로만 생각한다. 작정 기도 한 번하고 박수 치고 찬양 부르며 진군하면 단숨에 역사를 바꾸고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을 것처럼 믿는다. 자꾸 어떤 빛나고 멋지고 의롭고 선한 행위를 해서 그 목표를 달성 하려고만 든다. 그러나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간단한 일이다.
예를 들어 요리를 도저히 못하는 마누라를 만나면 맛이 없어도 참고 먹어 주는 것이다.  요리 못하는 병신이 불평하고 신경질 낸다고 고쳐지지 않는다. 돈 벌어 요리학원부터 보내든지, 요리학원을 다녀도 도저히 고쳐 지지 않으면 그때는 3가지 방법 밖에 없다. 끝까지 참고 자기 입맛을 마누라 요리 솜씨에 맞추던지, 매일 외식하든지, 남편이 대신 요리하는 수 뿐이다.  

병신끼리는 서로 상대에게 무엇을 해 달라고 요구하고 명령하는 법은 없다. 상대가 못하는 것은 자기가 대신 다 해 주어야 한다. 병신이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기 때문이다. 앉은뱅이는 평생 가도 못 걸으니 항상 안아서 길을 같이 가야 하고 봉사는 아무리 해도 앞을 못 보니 손을 잡고 끌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봉사가 앉은뱅이를 안고 가고 앉은뱅이는 안겨 가면서 봉사에게 방향을 지시해 주는 것 바로 그것이 서로가 서로에게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신자가 빛이 된다는 것은 뒷골목에 외롭게 서 있는 가로등이 되는 것이다. 가끔 개가 와서 실례를 하기도 하고 술 주정뱅이가 오물을 쏟아 놓고 가기도 하고 동네 양아치들이 와서 낙서를 하고 가기도 하지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밤하늘에 별이 총총한 아름다운 밤이나 그 곳에 그렇게 언제까지나 홀로 서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신자들은 뒷골목의 가로등은 너무 초라해 보이고 별로 하는 일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전부다 모여서 운동장 나이트 게임이나 화려한 쇼 무대의 조명등이 되길 원한다. 수백 수천 개의 램프가 모여서 한 번을 비춰도 한 밤이라도 대낮 같이 훤하게 되어야 속이 시원해진다. 신자들은 그저 돌아 다니면서 불을 지르기를 좋아한다.  교인들이 허구한 날 교회에 모여서 그저 박수치고 눈물 흘리고 소리 지르고 기도하면 뒤로 넘어가야 제대로 믿는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교회를 두고 너무 눈이 부셔서 접근을 하지도 못한다.

운동장이나  무대의 조명등은 어떤 이벤트가 있어야만 켜지 매일 켜 놓을 필요가 없고 나아가 항상 켜져 있으면 자기 열을 못 이겨 금방 램프가 다 고장 난다. 신자들이 교회에 모일 때는 모여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뒷골목에서 일주일 내내 빛을 밝히다 보니 오물로 더러워지고 밧데리가 소모되어서 오물을 씻고 충전해서 다시 서 있던 장소로 가 서 있기 위해 모이는 것이지 우리끼리 교회에서 빛을 휘황찬란하게 비추라고 모이는 것이 아니다. 빛이 눈이 부셔버리면 벌써 빛이 아니다. 박수갈채를 받고 싶거나 더러운 구석을 샅샅이 덜 추어 낼 때만 그렇게 할 뿐이다.

반면에 가로등이란 그 성격상 외롭고 쓸쓸할 수 밖에 없다. 가로등이란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하나씩 띄엄띄엄 있는 법이지 모여 있는 법은 없다. 그래서 가능한 많은 거리에 흩어져 있고 거리마다 있어야 하고 구석진 곳에 있을수록 좋은 것이다. 가로등이 있다고 해서 그 거리가  당장 밝아지지는 않는다. 조는 듯 희미하게 비췰 때도 있고 때로는 깜박깜박 불이 들어 왔다 나갔다 할지라도 그곳에 서 있기만 하면 가로등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아무리 가로등이 서 있어도 여전히 어느 구석인가 에는 뒷골목이 남아 있을 것이다. 죄악에 물들고 부패한 이 땅이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전히 바뀌기 전 까지는 그렇다.

그럼 뒷골목이 밝아지지는 않는데 신자가 하는 역할은 무엇이며 신자로서 받는 보상은 또한 무엇인가 부질 없는 짓이 아닌가 할지 모르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만약에 가로등이 없다고 생각해보라. 모든 길 거리가 암흑 천지라고 가정해보라. 비록 아무런 칭찬과 갈채가 없어도 그 자리에 없다면 개는 온 길거리에 실례할 것이고, 주정뱅이는 잠시 서서 구토하고 정신 차릴 곳이 없어서 길바닥에 뻗어 드러누워 동사할지도 모르고, 젊은 갱들은 낙서할 곳이 마땅하지 않아 스트레스도 풀지 못하고 멀쩡한 가정집 담벼락에 갈겨댈지도 모른다. 단지 이런 이유만으로도 가로등은 가로등으로서 역할을 충분히 한 것이다.

빛과 소금이 된다는 것은 사회 안에서 신자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세상에 꼭 있어야만 할 존재로 있는 것이다. 신자가 없으면 세상이 망한다는 확신이 있는가? 신자만이 세상의 소금이요 빛임을 확신하는가? 신자가 실력을 쌓아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신자와 세상 사람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믿는가? 소금과 맹물이 다르고 빛과 어둠이 다르듯이 말이다.

신자가 이 흑암의 세상에 아무리 희미할지라도 가로등으로 빛을 비추고만 있으면 언젠가는 더 밝은 가로등이 설치되고 또 그 곳에 빛의 고마움을 알아 차츰 더 밝아지며 밝은 광명천지가 될지 모른다. 신자는 이 땅에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심판을 유보하게 만들고 십자가의 구원의 유효기간이 아직 끝이 나지 않았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는 너무나 단순하다. 자기가 병신인 줄 아는 병신이 신자이고 불신자는 자기가 병신인 줄을 모르는 병신이다. 병신은 어디까지나 병신일 뿐이다. 다 같이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필요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다. 그러나 신자는 휠체어를 이미 얻어 탓기 때문에 아직 휠체어가 무엇인지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모르는 자에게 가르쳐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신자다. 세상에 빛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리 컴컴한 뒷골목에 날마다 일어나는 일이라곤 더럽고 추한 일뿐일지라도 그것이 우리 삶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채엽

2010.10.29 04:17:25
*.134.17.92

병신이란 사실을 오늘 처음 깨닳은 참으로 어리석은 바보병신입니다
하지만 어두운 뒷골목에 희미한 가로등 이여야함을 깊이 묵상합니다

사라의 웃음

2011.06.02 12:02:23
*.169.8.52

아멘!! 제가 병신인 줄은 너무도 잘 아는데요... 제가 병신이라고 남들이 말하면 아직 화가 나서 어쩔 줄을 모르는 그런 병신입지요. 결국 빛을 더욱 빛내려고 하고 소금에다가 소금을 더 집어넣어서 짜게 만들고 싶어하는 이상한 병신입니다. 오늘 이 말씀 앞에 회개합니다.ㅠㅠ

김광찬

2011.06.02 13:19:17
*.169.140.199

개가 와서 실례를 하는데 잘 받아주다가도 때론 신경질내는 가로등.....왜 너는 이곳에만 실례를 하느냐고...
술주정뱅이가 오물을 토해내도 잘 받아주다가 때론 성질을 버럭 내는 가로등.....정말 계속 이렇게 밖에 못하느냐고...동네 양아치들이 와서 낙서를 해대도 잘 넘어가다가 때로 욱 하는 성질 못버린 가로등.....너 내가 여기 있다고 무시하냐고....하지만 그들이 모두 돌아간 깊은 밤 총총히 떠 있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변치않는 그분의 약속에 다시금 마음을 추스르게 되는 나는 나는 못난 가로등.

구자용

2011.08.14 06:38:17
*.55.190.132

목사님의 이 말씀에 많은 도전 받고 갑니다. 왜 아내한테는 그것이 잘 안되는지.... 내가 빛과 소금인데...꼭 남들에게 보일려고 하는 빛과 소금은 아니었는지?????

블루

2019.11.22 07:25:08
*.137.28.238

목사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고 또 올립니다. 매일 매일 저를 죄에서 일깨워주시고, 내 자체에 알려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도 베드로 같습니다. 계속 저를 치면 더 무시해서 나중엔 화를 확 내버리는...도대체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지를 묻고있는 일인입니다. 그러기에 아직도 계속 죽을때까지 그길을 가기위해 하나님앞에 가서 엎드리고 엎드리고 해야하는것 같습니다. 또, 무너지고 엎드리고를 반복하다보면 그 과정이 저를 단련하고, 단련하여 마지막에는 왜 더 주님을 사랑하지 못했을까를 고백하지 않을까 하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정말로 감사드리고, 나의 모든것들을 일일히 감찰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오늘도 주님께 기대며 제 삶을 살아보도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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