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블랙홀이 사라진 까닭(마5:17)

조회 수 2291 추천 수 115 2003.06.16 23:53:48
마태복음 강해 (52)  2/2/2003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함이로라.”(마5:17)

예수님이 가장 좋아 한 음식

예수님이 가장 좋아한 음식이 무엇이었을 것 같은가? 추측건대 아마 돼지고기 삼겹살이 아니었는가 싶다. 실제적 근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조크에 불과하지만 그  뜻을 알고 웃을 수 있다면 상당한 성경 실력을 가진 자다.  

기독교를 모르는 외부의 제 삼자들이 예수님에 대해 크게 오해 하는 것이 하나 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모든 인간, 특별히 신자가 배우고 따라야 할 윤리적 삶의 표본을 제시하러 왔다고 생각한다. 마치 군대의 숙달된 조교가 시범을 보이듯이 자신을 희생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끝까지 고난을 감수하는 삶을 실천해 보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가장 인간다운 삶의 모범답안을 공표한 것이다. 그래서  불신자들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신자를 위선자 혹은 사이비 신자라고 매도한다. 물론 예수님은 인격적, 도덕적으로 완벽한 삶을 사셨고 신자는 그 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몸을 쳐서 복종하며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역할모델(Role Model)로 온 것이 아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스스로 자신이 이 땅에 온 목적을 밝히고 있다.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려고 왔다고 하셨다.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만족시키러 왔다는 것이 도덕적 삶의 본을 보이러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성경 말씀의 앞 뒤 순서를 보더라도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라는 권고 뒤에 본문이 위치해 있고, 이어지는 20절에 우리더러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의롭게 살아라고 요구하고 있지 않는가? 그래서 신자 또한 세상에서 선지자처럼 핍박을 받더라도 율법을 완전히 지키라는 말씀이기도 하지 않는가?

예수님이 도덕적으로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완벽한 삶을 사신 것은 분명하지만  본문은 그런 차원을 넘어서는 말씀이다. 본문에서 율법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받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또 선지자도 온갖 핍박을 받으며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  이사야, 에레미야,  하박국 같은 인간으로서의 선지자들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다. 즉 예수님이 모든 선지자들이 받았던 핍박보다 더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도 율법대로 사셨다는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예수님 당시에 ‘율법과 선지자’라고 붙여서 표현할 때는 항상 모세 오경과 선지서 전부를 포함하는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다. 아직 신약 성경이 쓰여지기 전이기 때문에 성경,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이다. 만약 앞에서 지적한 대로 예수님의 삶이 율법에서 요구하는 도덕적 삶의 완성으로 해석하려면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만 하면 되지 선지자라는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율법으로 따져도 예수님은 몇 가지 분명하게 어기셨다. 대표적으로 안식일을 율법의 규정대로 지키지 않았고 이혼에 관한 모세의 규범을 거부하셨고 먹지 못하는 음식 규정은 완전히 폐기 시켰다. 삼겹살을 좋아하셔서(?) 돼지고기를 마음 놓고 먹게 하셨다. 본문 전반에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고 한 말은 무슨 뜻인가? 당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율법을 폐하러 온 것처럼 생각했다는 뜻이다. 그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도대체 율법과 상관 없이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 것이다.  

떨기 나무 불 꽃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신 참 의미는 따로 있다. 요한 복음 5장39절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고 했다. 본문식으로 이 말씀을 바꾸어 풀어 보면 “너희가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해야, 즉 성경에 적힌 율법대로 살아야 영생을 얻는 줄로 생각하지만 성경은 영생을 얻는 방법, 모범적 삶을 사는 법을 적어 놓은 책이 아니라 오직 나에 관해 적어 놓은 책이다”가 된다. 따라서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는 것이 예수님이 율법의 규정대로 완벽하게 실천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라 구약 성경에서 그에 관해 적힌 것을  완성하셨다는 뜻이 된다. 신학자 Banks의 말대로 “율법에 대해 예수님이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가가 아니라 예수에 대해 율법이 어떻게 관계하는가”의 문제이다.

이 말씀을 하시게 된 발단도 요한복음 5장18절에 “유대인들이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만 범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고 설명한 대로 예수님이 안식일 규정을 어긴 것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율법 대로 사셔서 성경을 완전케 하신 것이 아니라 성경에 예언된 모든 구원 사역을 성취하므로써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46절에서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고 부연 설명하고 있다. 모세는 예수님 오시기 1500년 전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고 심지어 예수님이 오시리라고  개인적으로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람이다. 그가 기록한 구약성경 첫 5권 모세 오경 어디에도 예수님에 관한 명시적인 이야기는 일절 없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 뿐만 아니라 모세에게 있었던 모든 일들과 나머지 세세한 모든 규정도 예수님  자신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구약 성경은 예수님에 관한 책이다. 이스라엘의 역사책이 아니다. 예수님 없이 구약을 읽으면 종교의 경전이라고 어디 갖다 내 놓을 수도 없다. 그 속에는 온갖 추잡한 죄악의 기록뿐이다. 아버지가 두 딸, 시아버지가 며느리와 관계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온갖 음란한 냄새와 피 비린내가 진동을 한다. 거기다 공상 과학 만화 같은 이야기는 왜 그리 많은가? 그러니 신자마저 구약은 잘 읽지 않고 신약만 읽는다. 그것도 지금 우리가 배우고 있는 산상수훈을 가장 고차원적인 성경으로 간주한다. 바로 본문의 뜻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예수 믿는 것이 도 닦고 수양하여 그 분이 보여주신 삶의 본을 얼마든지 따를 수 있다고 큰 소리치면서 읽는다. 이야말로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식밖에 되지 않는다.

구약 성경 전체에 예수님은 숨어 계신다. 아니 믿음의 눈으로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 읽으면 숨어 있지 않고 어느 부분에서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그 분은 찬란한 광채를 뿜어내며 나타난다. 차라리 딱딱한 교리와 교훈이 주를 이루는 신약 성경보다 더 재미 있고, 더 은혜로우며, 더 능력이 넘치는 말씀이다. 십계명의 구조만 해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상징하고 출애굽과 홍해 사건은 신자의 구원과 영생을 구체적 역사에서 보여준 실례다. 이 외에도 모세 오경 곳곳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예수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기로 하자.

애굽의 왕자로 호의호식 하던 모세가  40세 때 자기 동족 이스라엘 사람이 애굽 관원에게 학대 받는 것을 보고 의분에 못 이겨 그 관원을 살인하고 도망자 신세가 되어 미디안 광야로 피신한다. 그곳에서 40년간 양치기로 숨어 살았는데 80세가 다 된 노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애굽에서 여전히 노예 살이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원해 오라는 소명을 준다. 그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나타나시는 장면에 아주 특이한 현상이 나타난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 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 하는지라.” (출3:2)  

불이란 반드시 어느 물체든 태우면서 타야 하는데 떨기 나무는 타지 않고 불꽃만 타고 있는 기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무쇠도 타게 마련인데 광야에 바싹 마른 덤불에 불과한 떨기 나무는 불 쏘시개로 쓸 만큼 인화력이 강한데도 타지 않았다. 타 없어져야 할 대상에는 전혀 손상이 없고 불 꽃 혼자 스스로 타고 있었다. 죄에 찌들은  모든 인간은 6절에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면 불에 타 죽기 마련이다. 광야의 덤불 나무 같은 인생이 소멸하는 불이신 하나님 앞에 나서면 타 없어져야 할 대상은 나무인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꽃 혼자만 타고 있다. 하나님 스스로 타 없어지고 있다.

하나님이 당장에는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멀게는 전 인류를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구원하실 방법을 예표하신 것이다. 애굽에서는 전 백성의 죄를 전가 받은 유월절 어린 수양의 피로만, 또 골고다 언덕에서는 십자가에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인간을 구원하시겠다는 뜻이다. 죽어 없어져야 할 죄인은 우리인데 타 없어져야 할 떨기 나무는 인간인데 불꽃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스스로 타 없어진 것이다.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면 블랙홀이 그 무한대인 중력으로 가까이 가는 모든 물체는 무엇이든 다 흡수해 삼켜 버리는데 블랙홀 스스로 그 소멸되어지는 물체들이 불쌍하고 안타까워 자기가 자기를 흡수해 소멸된 것과 같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전 우주를 통 털어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런 기적이 없고 이런 은혜가 없다.

맥베드와 모세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한 것은 성경대로 하면 구원을 얻고 천국을 간다고 믿은 것이다. 즉 성경을 일종의 매뉴얼, 훈련 교범으로 본 것이다. 오늘날에도 똑 같이 그런 사람들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훈련 교범을 몸으로 직접 실현하며 보여 준 숙달 된 조교로 보고 우리 또한 그대로 따르자고 주장하는 자들이다. 예수는 한 사람의 위대한 선각자 중, 세계 4대 성인 중의 한 사람일 뿐이라는 주장이며, 신자들 가운데도 교회 나오는 목적을 오직 죄 안 짓고 착하게 사는 데 초점을 두는 자들이다. 예수님이 율법의 도덕적 요구를 완전히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가 따를 수 있는 숙달된 조교로 시범을 보인 것이라면 우리가 그를 따르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심지어 조교보다 더 잘하는 훈련 생도가 나와야 한다. 타이거 우즈도 코치를 두고 있지만 그 코치와 우즈가 시합하면 당연히 우즈가 이기지 않는가? 그러나  AD 원년 이래로 예수님이 보여 주신 시범을 제대로 따라 한 자가 한 명이라도 나왔는가? 스승을 뛰어넘기는 커녕 보여 준대로 그대로 흉내라도 낸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었는가? 테레사 수녀, 슈바이처 박사, 빌리 그래함 목사 이 땅에 아니 전 우주에 아무도 없다. 예수님은 도덕적 모범을 보여 율법의 요구를 완전케 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직 십자가에 죽으셔서 성경의 예언을 완성시키러 오셨다. 죄인의 죄는 몽땅 뒤집어 쓰고 함께 타 없어지기 까지 하면서도 그 죄인을 살리려고 오셨다.    

물론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뜻대로 완벽하게 실천하셨고 그래서 우리가 살아야 할 진정한 삶의 본을 보여 주셨다. 십자가에 죽는 모습까지 보여 주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삶과 죽음에서 무엇을 보고 배웠는가? “율법의 도덕적 요구를 완벽하게 지키면 세상은 절대 가만 두지 않는구나. 사람들은 무죄하고 선하게 살려는 자를 오히려 조롱하고 멸시하며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하는구나. 아무리 은혜와 사랑으로 베풀어도 끝에 돌아 오는 것은 배은망덕한 반역과 적반하장 격인 십자가의 죽음이구나.” 이 사실 하나만은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래서 다들 저렇게 살면 자기만 손해니까 그렇게 살지 않기로 다짐하고 실천하고 있다.

신자마저 그렇게 살지 않기로 했다. 세상에선 예수 믿는 것을 숨기고 교회에 와선 방관자가 되었다. 아니면 베드로가 실패했던 것처럼 입만 살아서 주여 주님을 위해 큰 일을 할 것 같이 설쳐대다가 막상 시련이 닥치면 그저 불안해 하는 겁쟁이가 되었고 더러움과 죄악은 냄새만 맡아도 뺑소니부터 치는 비겁자가 되었다. 적당히 한 발은 교회에 두고 다른 한 발은 세상에 두고 양쪽 다 눈치를 보느라 사팔뜨기가 된지 오래다. 그러면서도 말로는 기껏 하는 소리가 “저는 하나님 아시다시피 아직 믿음이 약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왜 저에게 달라는 돈과 시간과 여유는 주시지 않고 대신 자꾸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라고 독촉만 하십니까? 제가 하기 싫어 안 하는 것도 아니고 하고싶은 소원도 대단하다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조금만 그럴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면 언제든지 나서겠습니다”이다.

지금 예수를 믿는 신자의 형편도 겨우 이럴진대 예수님이 이 시대 이 상황에  처음 오셔도 십자가에 죽으시는 방법말고 어떻게 인간을 구원해 낼 수 있겠는가?  아무 말 없이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으로 죽으시는 것이 예수님의 낮추심과 순종의 모습만이 그 속에 있을까? 죄 아래 찌든 비겁하고도 교만하고 완악한 인간의 그 추하고 더러운 모습에 입이 열 개라도 도저히 할 말이 없지 않을까?  

우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완벽하게 따를 수 있다고 손 들고 자신하는 자 과연 한 명이라도 있을까? 정말로 그렇게 자신하고 또 살고 있다면 하나님과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는 자다. 이 세상에 그런 자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겸비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지 않는가? 그런데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꼭 죽을 이유가 무엇이며 그 죽음과 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큰 소리치는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나님이 무서운 줄 모르는 사람이다. 매주 교회 나와 목사에게 야단 맞는 신자도 바르게 살지 못하는데 세상 속에 아무 제약 없이 사는 사람이 어찌 감히 선해질 수 있고 또 그렇게 살고 있다고 큰 소리 칠 수 있는가?  

신발을 벗어라.

쉐익스피어의 비극 멕베드에 보면 주인공 멕베드가 왕을 죽이고 자기가 대신 왕이 되었다. 아무리 손을 씻고 증거를 인멸해도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살인 죄의 흔적과 고통을 도저히 없앨 수 없었다. 왕좌에 올라 자기가 원하는 부귀영화 모든 것을 손 아귀에 넣었건만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고 날마다 그를 괴롭혀 오히려 병이 들었다. 그래서 의사를 불렀는데 그 의사가 자신이 고칠 병이 아니라 왕이 마음으로 스스로 고쳐야 된다고 진단했다. 그 소리를 들은 맥베드가 독백으로 한탄하기를 “오 아라비아의 향수를 다 가지고도 이 손 하나 말끔히 할 수 없단 말인가? 이것을 파내 버릴 망각제는 세상에 없는가?”라고 했다.  

우리의 죄는 절대 씻을 수도 잊을 수도 없다. 살인범 맥베드라고 해서 회개를 하지 않았을 리 없다. 날마다 밤마다 가슴을 쥐어 뜯으며 반성도 했을 것이다. 돈으로 보상된다면 그 만큼 가진 자도 없었고 손에 묻은 피자국과 냄새를 지울 수 있다면 아라비아에 있는 향수 전부를 사 모았을 것이다.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실패했고 마지막으로 무엇까지 실패했는가? 마음을 고쳐 먹고 스스로 잊어 보기로 까지 했지만 허사였다. 그가 탄식한 대로 이 세상에는 정말 그 죄를 씻을 방법이 없다.

애굽 관원을 살해 할 만큼 동족을 사랑했던 모세가 하나님이 그 백성을 구원해 내라는 소명을 주었는데도 몇 번씩이나 사양했던 이유가 무엇이었나? 나이가 80이나 되어 너무 늙어 힘과 자신이 없었던가? 아니면 자신이 말한 대로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해 말을 잘못하기 때문이었나? 아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조차 너무 속이 빤히 내다 보이는 거짓말을 했다. 바로의 왕궁에서 왕자로 40년간 지냈던 그다. 고대의 왕궁에서 왕자에게 시키는 가장 중요한 교육 과목이 웅변 내지 수사학이다. 말을 잘 해야 부하를 다스리고 조리 있게 법률적 판결을 내릴 것이 아닌가? 비록 40년간 배우고 훈련했던 것을 사용할 기회가 없었고 혹시 잊어 버렸을지라도 기억을 되살리면 얼마든지 말은 잘 할 수 있었던 그였다.

그가 이리저리 핑계를 댄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살인자요, 동족을 배반하고 도망쳐 온 비겁한 죄인입니다. 아직 내 자신의 죄 문제도 해결 못했는데 어찌 동족의 구원자로 나설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위인이 되지 못합니다.” 거기다 모세의 더 깊은 속내를 하나 보태면 자기는 돌아가면 살인자로 바로의 군대에 즉시 체포될 신세인 것에 겁을 집어먹고 있었다.  

광야의 목동 생활 40년 동안 그가 모든 수를 동원하며 그 죄 문제를 해결해 보려 얼마나 애를 썼겠는가? 또 주위 사람들에게 자기를 희생해 가며 얼마나 많은 도움과 섬김을 베풀었겠는가? 이것도 저것도 안 되면 맥베드처럼 잊어 버리려고도 온갖 애를 썼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모든 노력은 실패로 끝났다. 만약 지난 죄를 잊기라도 했더라면 하나님이 자기에게 이전의 실패를 만회하고 자기 평생의 소원이었던 동족 구원을 하나님이 화를 낼 정도로 사양했을 리가 만무하다.

모세의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라는 핑계는 사실 제 속에 아직도 죄의 냄새가 진동합니다 라는 고백이다. “주님, 이 고귀한 사명을 주셨음에도 바로 순종하는 대답을 하지 못할 만큼 내 죄와 상처는 깊습니다. 당장 “예”라고 대답하지 못하는 것만 보아도 하나님은 제 혀가 뻣뻣하다는 것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내 속에 있는 이 죄책감, 자기 모멸감, 열등감, 교만, 상처, 흠집, 초조, 불안, 염려, 죄악, 분노, 눌림, 메임 그 모든 것들을 40년간 씻으려 해도 씻어지지 않았고 심지어 잊으려 해도 도저히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주여 저는 아직 죄인입니다. 제가 감히 어찌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보낼 자를 보내십시오.”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이 아니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가? 떨기 나무 불꽃으로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절대 타지 않는다. 내가 너의 고통을 안다. 네 슬픔과 눈물과 한숨과 탄식을 보았고 들었다. 겉으로는 강한 척 해도 너가 얼마나 진토이며 연약한 줄 내가 어찌 모르겠느냐? 내가 누구인가? 너를 지었고, 택했고, 사랑하는 하나님 아니냐? 너는 절대 타지 않는다. 대신에 내가 타겠다.” 그래서 네 입에 전할 말도 심어 주고, 말을 잘 하는 아론도 부쳐 주고, 내가 정녕 너와 함께 하리라고 굳게 약속해 주었다. 무엇보다 모세의 가장 큰 걱정 거리도 미리 해결 해 주었다. “여호와께서 미디안에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애굽으로 돌아가라 네 생명을 찾던 자가 다 죽었느니라.”(출4:19)

대신에 주님은 모세에게 오직 한 가지만 요구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 이제부터는 더 이상 네가 네 마음에 내키는 대로 가고싶다고 가지 말라. 네 신발을 벗고 내 신발을 신으라. 네 곁에 내가 항상 함께 한다는 것을 잊지 말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겸비하게 언제 어디서나 나에게 무릎을 꿇어라.  

우리 손에 묻은 피는 전 우주의 단 한 번밖에 없었던 기적,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아니고는 깨끗하게 되지 않는다. 기독교는 절대 경건한 도덕주의가 아니다. 인격적으로 다듬어지고 도덕적으로 성숙하고 신앙적으로 신령해지는 것에 만족하는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이 그와 원수 된 죄인을 용서하여 구원해 주시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에 불 타 없어졌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지금도 그 구원과 은총의 역사가 단 한시도 쉬지 않고 이 땅에서 이뤄지고 있다.

예수님은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에게  떨기 나무 불꽃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율법과 선지자로  자신에 대해 미리 말씀해 놓으셨다. 그 1,500년 후 골고다 언덕에서 정확하게 동일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그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케 하셨다. 그 2,000년 후인 지금도 예수님은 모세보다 하나 나을 것 없는 우리 모두에게 똑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신다. 십자가의 주님은 절대로 인간에게 도덕 과목에 A 학점, 나아가 숙달된 조교가 되라고 하지 않는다. “네 죄와 시련과 한숨과 상처를 내가 전부 짊어지고  내가 불에 타 없애주겠다. 너의 모든 것을 내 십자가 앞에 내려 놓아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이채엽

2010.10.29 05:12:12
*.134.17.92

귀하신말씀!
은혜로 받습니다

하태광

2011.02.21 14:01:56
*.32.182.220

너의 모든것을 십자가앞에 내려놓아라,,,참으로 인간에겐 영원한 숙제인듯합니다...100중에서 과연 얼마나 내려 놓을수 있을까요?..곰곰히....

사라의 웃음

2011.06.04 13:35:32
*.169.8.52

죽어 없어져야 할 죄인은 인간인데, 타 없어져야 할 떨기나무는 인간인데 불꽃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스스로 타 없어진 이 사건... 이 사건 앞에서 인간이 입이 열개
라도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을런지요.

그저 광야의 초막에 앉아 애굽에서 구원 해 놓으신 이 놀라운 사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게된 이 놀라운 일들을 목놓아 울며 울며 감사하는 시간들만으로도 부족한, 너무도
부족한 감사인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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