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누가 복 있는 자인가? (시편 1편)

조회 수 2106 추천 수 36 2011.07.26 19:3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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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복 있는 자인가?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이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로다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시편1편)


구약성경 해석의 기본 원칙

시편은 감사, 찬양, 간구, 회개, 헌신 등 그 내용이 각기 다른 150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자라는 설명(1:1)으로 시작해 호흡이 있는 자마다 찬양하라(150:6)면서 마친다. 한마디로 복 있는 자는 여호와를 찬양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럼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까 자연히 찬양이 나오게 된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또 그 받은 복의 종류는 무엇인가?

그러나 이렇게 따지는 것부터가 사실은 모순이다. 본문은 분명히 어떤 사람을 두고 복이 있다고 했지, 어떤 특정한 복을 받았기에 복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비유컨대 어떤 아이가 특별히 착한 행동을 한 적이 없어도 통실하고 귀여운 모습만 보고 복스럽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특정 행동을 해야만 반대급부로 하나님의 복이 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본 시편은 복 있는 사람의 모습에 관해 다섯 가지 특성을 들고 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않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않지 않고,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한다.

그런데 구약성경을 읽을 때에 제일 먼저 감안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동일한 내용을 점진적 혹은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기법이 아주 자주 사용된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이 구전으로, 또 기록된 후에도 그 사본의 희소성 때문에 암송해서 전해져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슷하거나 같은 뜻의 말을 반복하거나, 정반대의 뜻을 비교 대조하는 방식을 통해 외우기 쉽도록 했던 것이다. 당연히 기록된 내용도 실제 일어난 이야기 중심이다.  

히브리어의 문법구조 또한 그에 걸맞게 특이하다. 아주 단순하며 구체적이고 사실적 언어다.  인위적 관념적 수사법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관념적 내용은 외우기도 힘들고 전래되는 동안 변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어미변화나 발음 등에 운율이 있어서 외우기 쉽게 되어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성경을 기록 보존 계승시킬 목적으로 유대인들의 입술마저 주장한 것이다.

히브리 어법의 이런 특성 때문에 구약성경을 해석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이 도출된다. 우선 반복되는 표현은 전부 비슷하거나 같은 뜻으로 봐야 한다. 구태여 세밀히 구별해서 해석할 필요가 없다. 또 서로 반대되는 개념이 대조되어 있는지 잘 구분해야 한다. 나아가 신앙 성장을 위한 간접적 적용을 제외하고는 영적으로 너무 심오하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

뜻을 함축해서 드러내야 하는 시편에선 이런 특성들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 1편에도 반복법과 대조법이 사용되었고 그 의미 또한 아주 간결하고도 실천적이다. 이런 기초적인 상식을 갖고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자.    

꾀하고, 걷고, 앉기

무엇보다 복 있는 의인과 복 없는 악인을 대조하고 있다. 복 있는 자를 악인이 행하는 일을 하지 않는 자 즉, 반대의 모습으로 묘사한다. 나아가 악인의 악행도 점진적으로 발전하는 모습으로 전개하고 있다. 일종의 반복법인 셈이다.

악인은 먼저 악한 꾀를 낸다. 의인은 당연히 악인이 도모하는 악한 위계나 모략에 동참하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자다. 또 의인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한다고 했다. 길에 섰다는 것은 도모한 악한 꾀를 직접 행동으로 옮겨 죄를 짓는 것이다. 나아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 자리에 앉았으니까 그 악행이 몸에 배여 자연스레 죄가 나오며 그것이 아주 당연하거나 옳은 것처럼 여기는 것이다. 이 셋을 행하지 않는 자 즉, 악을 도모하여 실행하고 습관화하지 않는 자가 의인이다.

살펴 본 대로 악인의 모습을 차츰 강하게 드러나는 표현법을 구사했다. 꾀, 길, 자리가 한 쌍이며 또 그에 따르는 행동으로 좇는 것과, 서는 것과, 앉는 것을 들었다. 우리말 성경도 원문의 시적 어감과 대조 반복법을 살려 번역했다. 이처럼 간단한 분석만으로 그 내용이 명료하게 이해되고 또 낭송하고 암기하기 쉽다는 점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짧은 구절에 대조와 반복 기법이 또 나온다. 의인의 다섯 특성에서 앞의 셋은 소극적으로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고, 이제 나머지 둘은 적극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Don't 와 Do의 대조인데다, 그 두 가지 Do 에마저 반복법이 사용되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한다. 즐거워하는 것과 묵상하는 것은 같은 뜻이다. 율법을 즐거워하니까 묵상하게 되는 것이고, 또 묵상하니까 즐거워지는 것이다.

히브리 표현은 또 아주 구체적 사실적인지라 관념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이제 과연 그러한지 살펴볼 차례다. 먼저 주목할 사항은 우리말 번역에 일부 결정적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악인을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자라고 했지만 원어의 의미는 아주 다르다. 히브리 원어 ‘루쯔'는 조롱하다, 비웃다, 희롱하다, 거만하게 말하다 등의 뜻이다. 영어 번역에는 그 뜻을 살려 ’scornful'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우리말로 번역할 때에 그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없지만 아마도 비웃고 거만하게 말하는 것이 바로 오만함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간주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단지 오만하다고 하면 마음의 상태까지 포함된다. 히브리 어법이 구체적, 사실적이기에 여기선 그냥 남을 말로써 조롱 내지 비방하는 자라고 해석하면 된다. 또 그것이 전체 문맥에 들어맞는 정확한 번역이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이 시편은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는데, 그래야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묵상하는 의인과 반대 되는 개념이 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묵상은 마음속으로만 추상, 해석, 이해, 적용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실제로 입술로 소리 내어 중얼거리는 것이다. 묵상의 히브리어 ‘하가’에 신중히 생각하다는 뜻도 있지만 기쁘거나 화가 나서 중얼거린다는 의미로 주로 사용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사람들은 율법(모세5경)을 항상 낭송하며 외웠지 속으로만 생각하지 않았다. 그 많은 내용을 소리 안내고 속으로만 기억해 내어 따라 읽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당시에는 구약성경이 오늘날처럼 가정마다 비치되지 않았다. 모세오경을 기록한 양피지 두루마리의 길이만 100미터가 넘는데 집집마다 소유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당연히 회당에서 열심히 배우고 외웠다. 또 그래서 히브리 어법 자체가 외우기 좋게 반복과 대조법이 자주 등장하며, 간결하고 사실적 묘사가 주를 이루는 것이다.  

결국 악인은 남들을 근거 없이 비방하지만, 의인은 같은 입술로 율법을 외우는 자다. 한 입술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이웃을 비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의인과 악인을 구체적 실제적으로 대조했다. 악인은 여호와의 율법을 기뻐하지 않고 또 묵상 즉, 외우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에 다른 이들을 조롱하기 바쁘다. 의인은 이웃을 전혀 비방하지 않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만 외우는 자인데 바로 그런 자가 복 있는 자라고 한다.  
  .  
묵상은 바로 실천이다.

입술로 외운다고 해서 그냥 암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로 따르고 실천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문자적 의미 그대로 말이다. 모세 오경을 구태여 관념적, 철학적으로 심오하게 해석해 적용할 필요 없이 기록된 그대로 지켰다.  

우리가 모세오경 전부를 외우고 있고 매일 몇 장씩 소리 내어 낭송한다고 가정해 보라. 소리를 내려면 두뇌의 기억 저장창고에서 회상해내는 절차가 우선이다. 또 소리를 내고나면 다시 자기 귀를 통해 그 내용이 두뇌에 재차 입력되어진다. 중고등학교 시절 공부할 때에 소리를 내면 암기나 이해가 쉬웠던 이유가 바로 이런 의미 전달이 인간 기억 메커니즘에서 계속 순환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성경 구절을 다 외운다는 것은 엄청난 능력이 발휘된다는 뜻이다. 말씀 자체가 가지는 권세도 엄청난데다 인간 두뇌의 반복 연상 작용이 더 보태지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그렇게 외우면서 그대로 순종하지 않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자연스레 말씀에 따라 살게 되며 혹시라도 그러지 못할 때는 저절로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게 된다.        

역으로 따져도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라면 율법 자체도 당연히 기뻐하게 된다. 소리 내서 반복 암송하면 공부가 신나 성적이 오르기에 그 과목을 유난히 좋아하게 되는 것과 같다. 또 항상 여호와의 율법을 기뻐하고 묵상하는 자라면 이웃을 비방 조롱하지도 않는다. 이미 율법 자체를 기뻐하고 있는데 그대로 살지 않을 리는 없다. 다이어트나 요리에 심취하여 그 비법을 줄줄 외우는 자가 그 비법을 위반할 리는 만무하지 않는가?.

결국 복 있는 사람과 그러지 못한 사람으로 갈리는 기준은 여호와 율법을 묵상하는지 여부다. 여호와 율법을 잘 외웠기에 하나님이 보상으로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서두에도 밝혔듯이 율법을 묵상하는 자가 복 있는 자이지, 묵상하여 복을 받았기에 복 있는 자가 된 것이 아니다.  

그런 자를 시냇가에 심은 나무에 비유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시냇가에 심겨져 있으니까 결코 물이 마를 일이 없다. 자연히 영양분을 흡수하고 자라고 또 과실이 맺힌다. 나무가 구태여 물이 좋고 많은 시내를 찾아다니면서 물을 흡수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다. 그야말로 시절을 좇아 과실이 맺힐 수밖에 없다.

성경은 그 내용을 숙지하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그대로 어김없이 실천해야 한다. 성경대로 살면 그 자체로 이미 복을 받은 것이다.  인간이 정말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이성경에 다 마련해 놓았기에 따로 복을 구할 필요 없이 그대로 순종만 하면 된다.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또 교회 봉사 잘하면 하나님이 보상해주시는 식이 아니다. “신자의 종교생활에 비례해 하나님의 은혜가 따라옴”도, “신자의 종교 생활 따로, 하나님의 은혜 주심 따로”도 아니다. 성경을 배우는 것은 그대로 살기 위한 것이지 교회 안에서 직분 올리고 성도들 간에 믿음이 좋은 신자 행세 하라는 뜻이 절대 아니다. 요컨대 성경대로의 삶이 바로 신자가 누리는 복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복은 신자가 적극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바꿔 말해 복이 있으려면 신자 스스로 적극적으로 복을 만들어 내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잘 믿었다고, 사실은 종교 생활에 충실한 것이지만, 별도의 복을 보너스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계명대로 사는 것 자체가 바로 신자의 복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자신이 적극적으로 그 말씀을 외우고 그대로 행하야 함은 너무나 당연 하지 않는가?  

신약 시대의 신자도 예수님처럼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 오늘날의 사화 문화적 상황과 부합하지 않고 성경도(히9:9,10) 그 폐지를 선언하고 있는 제사법, 정결법, 음식법을 제외한 나머지 계명들은 그 정신대로 온전히 지켜야 한다.  

반면에 시편 기자가 악인은 어디에 비유했는가? “그렇지 않음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라고 했다. 조금 이상하지 않는가? 의인과 대조하려면 당연히 시내와는 멀리 떨어진 사막에 심은 나무이기에 아무 열매가 없다고 말해야 수사법상 일관성이 유지되지 않는가?

바람에 나는 겨란 그 움직임이 제 멋 대로임을 상징한 것이다. 행동에 일관성이 전혀 없다. 정해진 목표가 아예 없다는 뜻이다. 인생을 살아가는 절대적 기준과 지침이 없다. 자동차로 비유컨대 GPS는커녕 지도도 하나 없이 완전히 생소한 지역을 운전하는 것과 같다. 그저 지그재그로 왔다 갔다 하다가 목적지에는 아예 도달하지도 못한다.

간혹 악인이 형통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같아 보여도 영원한 진노의 형벌이 기다리고 있기에 이 땅에선 하나님이 그냥 그대로 버려두시는 것이다. 정작 그 본인에게도 어떤 평강과 자유와 안락이 없다.

의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악인이 남을 비방했다고 하나님이 따로 벌을 주는 것이 아니다.  누구라도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자연히 인간다운 삶의 의미와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그분의 보호와 인도를 받지 못한다. 우주 만물을 지으시고 인생 만사를 주관하시는 분과 아무 관련이 없는 자에게 인생의 참 열매가 맺힐 리도 만무하다. 악인 스스로 적극적으로 복을 차버리고 대신에 자기 머리 위에 하나님의 진노만 쌓고 있는 형국이다.

본 시편의 결론을 보라. “대저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6절) 기자가 의도적으로 시작하는 1절과 마찬가지로 ‘길’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의인과 악인은 각기 다른 길을 걸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길이란 항상 출발지와 목적지가 있는 법이며 한 번 들어서면 계속 가야한다. '길'은 하나님이 이미 인정하는 복 있는 자와, 그 반대로 인정치 않는 자의 상태를 대변한다. 여호와의 율법을 순종하고 있는 자와 그에 전혀 관심이 없는 자가 궁극적으로 도착할 지점도 전혀 다를 것은 너무나 빤한지 않겠는가?    

이 시편의 메시지도 전 시편의 마지막 결론이 그러하듯 인간이 누릴 복은 하나님을 찬양함으로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율법을 묵상하는 것이 바로 그분을 찬양한다는 뜻이다. 소리 내어 암송해야 한다고 암기력으로 믿음이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드러낸 계시다. 그분의 거룩하신 속성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그분의 능력, 권세, 사랑, 인자, 긍휼, 섭리, 주권,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광대하심이 나타나 있다. 입술로 성경을 외우며 또 그 뜻대로 따라 사는 것이야말로 그 광대하심을 온전히 찬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말씀으로 교통하시기를 심히 원하신다. 우리의 찬양을 받으려고 우리를 당신의 형상을 닮게 창조하셨다. 비록 죄로 찌들었더라도 예수님의 보혈로 새롭게 하여서 새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은혜를 베푸셨다. 정말로 복 있는 자는 하나님을 가장 하나님답게 깊이 알고 교제함으로써 그분의 이름을 높이는 자다.

실제로도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만나도 그분을 기뻐할 수 있다면 그 이상의 복이 따로 없지 않는가? 호흡이 있을 동안에 그분을 계속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수십 년의 신앙생활을 했어도 그분을 향한 우리의 감사와 찬양이 얼마나 드물고 메마른지 알기에 항상 그분을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절감할 수 있다.  

죄의 본질

이사야 선지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 선지자로서 소명을 받을 때에 가장 먼저 어떤 고백을 했는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입술이 부정하다고 했다. 또 동일하게 입술이 부정한 백성들 중에 거했다고 한다. 선지자는 지금 분명 성전 안에 있었기에 율법을 소리 내며 낭송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입술이 부정하다고 고백했다.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사29:13) 분명 율법을 외워 낭송은 하되 그 진정한 마음은 그분께 순복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 그분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찬양한 것이 아니라 단지 형식적 의무적으로 종교 행사만 행했던 것이다. 율법을 외워도 그대로 살지 않았던 셈이다. 나아가 하나님은 감히 그렇게 못해도, 악인처럼 이웃을 비방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이 복 있는 자의 길에서 벗어나 악인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하나님이 택하여 세상의 어떤 민족도 받지 못한 은혜와 권능을 그렇게 넘치도록 체험하고도 당신 앞에선 입술로만 존경하는 척했을 뿐이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당신이 택하여 지금껏 그런 사랑을 베푼 백성에게 이런 한탄을 하셨겠는가?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사6:9,10)

차라리 영적 봉사 귀머거리가 되어서 내 눈 앞에 나타나지도 말라고 한다. 말하자면 입술로만 주를 외치는 자들은 아예 구원 받을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 심령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시는 그분께선 진짜 마음과 입술의 고백의 일치여부를 결코 모를 리 없으며 또 그것으로 구원의 기준을 삼겠다는 것이다.

놀랍지 않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 대한 심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악인의 길에 이미 들어섰기에 당신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입술로만 주여, 주여 했던 자라도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가면 고침을 받을 수 있다. 그분은 누구를 심판할 지에는 사실상 관심이 없다.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오로지 고침을 받아 복 있는 자의 길에 들어설 자만 찾고 계신다.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서자 마음과 입술이 따로 떨어져 있었던 자신의 죄를 철저히 깨달았다. 그 사실을 고백하자 하나님은 화저로 입술에 대고서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7절)고 선언해 주셨다.

죄를 하나님을 알되 진정으로 섬기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모든 인간의 상태를 설명하는 뜻도 바로 그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런 이사야에게  긍휼을 베푸시어 진정으로 “여호와의 율법을 기뻐하며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복 있는 자가 걸어가는 길로 다시 옮겨 주신 것이다.

혹시 입술이 부정하지는 않는가?

작금 우리 주위를 둘러보라. 여호와의 율법인 성경 자체를 기뻐하며 성경을 묵상하는 즉,  소리 내어 외우지는 못해도 읽고 진정으로 그대로 믿고 행하는 자들이 과연 얼마나 있는가? 성경의 일부 내용을 자기들 맘대로 빼고 인간의 계명을 별도의 책으로 만들어 대신하는 이단들이 창궐하고 있다.

또 성경의 일부만 인정하고 일부는 인정하지 않는 자들도 많다. 나아가 분명히 명시된 계명이나 뜻조차 틀렸다면서 인간의 의견을 앞세우는 경우마저 있다. 아예 성경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철학이라고 치부하는 자마저 생겼다. 거기다 그런 자들을 교회의 목사로 세우는 것이 옳다고 한다.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인간됨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분의 말씀을 기뻐하면서 묵상하는 것임조차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그런 자들을 비방하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그분과 아무런 관계가 형성되지 않듯이, 성경을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자도 어차피 성경의 경고는 물론 그 말씀이 갖는 권세와 은혜와도 아무 관계가 없다. 말하자면 그들은 성경의 이런 경고마저 믿지 않거나 고의로 무시하는 셈이다.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계22:18)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고 따르려 노력하는 자들 가운데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 누차 강조한대로 성경을 열심히 공부한 대가로 따로 복을 더 받으려는 행태다. 이것도 실은 그 마음과 다르게 입술이 부정해진 케이스다. 진정으로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여긴다면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그만이다. 성경은 기독교 경전이고 형통케 해주시는 하나님이 따로 있는 것처럼 여겨선 안 된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 뜻하는 바가 일관성을 유지한다. 모든 인간들 앞에 의인과 악인의 두 길이 갈라져 있다고 한다. 신명기 27장에서 모세는 순종의 산 그리심과 불순종의 산 에발 쪽으로 모이게 했다. 사람으로 나눈 것이지 각자가 행한 행동 한 둘로 나뉘는 것이 아니다. 복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구별이다. 한두 계명 순종한다고 복을 주는 것이 아니다. 한두 구절 순종하고 나머지는 멋대로 사는 것은 사실은 불순종이다.

모세는 엄숙하게 선언했다. “보라 내가 오늘 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곧 내가 오늘날 너를 명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얻을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신30:15,16) 순종의 길로 가면 자연히 복이 따를 것이라고 말이다.

모세를 닮은 선지자로 오신 예수님도 동일한 뜻을 선포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생명으로 가는 좁은 길과 멸망으로 가는 넓은 길, 두 길만 모든 사람 앞에 있다고 한다. 좁은 길로 들어서면 이미 생명을 얻은 것이다. 그 길로 걸어가기만 하면 이미 복 있는 자가 된 것이다.  

본 시편에서 복 있는 자의 특성을 행하지 않는 것 세 가지와 행하는 것 두 가지 총 다섯으로 설명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하나다. 같은 뜻의 말을 표현만 조금 달리 해 다섯 번이나 반복한 것과 같다. 그 하나는 물론 여호와 그분의 말씀을 진정으로 믿고 따르라는 것이다. 율법을 기뻐하고 묵상하면 악인의 꾀나 길과 자리에 동참할 수 없게 된다. 또 율법대로 살기에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자연히 결실이 맺힌다.  

다른 말로 신자의 신분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복 있는 자로 이미 변모되었다는 것이다. 복 있는 자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복 있는 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은 사실은 아주 훌륭한 신앙이다.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 자로 바꾸어 보려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거의 대부분의 신자들은 복을 받으려고만 시도하고 있다. 진정한 복이란 자신 밖에 있는 어떤 사물이나 여건이 아니다. 예수님 십자가 은혜 안에 온전히 들어와 있으면 이미 복 있는 자가 되었고, 또 좁은 문을 통과해 협착한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이미 얻었고 남은 일은 이 땅에서 주님의 인도에 따라 그 생명을 더 풍성하게 가꾸어서 주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뿐이다.

예수님도 바로 그런 자를 본 시편처럼 시냇가에 심겨져 자연히 열매 맺는 나무라고 표현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

다시 말하지만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하다. 인간이 빼고 보탤 종교 경전이 결코 아니다. 특별히 우리가 새벽마다 울부짖으면서 기도하여 그토록 받으려는 복에 대해선 더더욱 구약이나 신약이나 동일한 말씀뿐이다. 여호와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너희는 이미 복 있는 자가 되어 있다고 즉, 하나님 말씀을 이미 소유했기에 그대로 따르면 된다고 말이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생명이 영원토록 살아서 역사하는 신자가 살아야하는 실제적인 삶의 현장이다. 그 밖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단은 결코 없다.

여러분은 과연 복 있는 자가 되어 있다고 확신 하는가? 아니면 별도의 복을 추가로 받으려 노력 중인가? 최소한 복 있는 자가 되려고 노력은 하는가? 혹시라도 복 있는 자의 의미조차 무엇인지 제대로 모르는 것은 아닌가?

7/26/2011

김은영

2011.07.31 13:11:05
*.81.18.9

그저 말씀대로 사는 삶이 제게 이 땅에서 제게 가장 귀한 복인 줄 고백합니다.
주하나님 아버지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뻐하고 행하는 자 되기 원합니다.

김광민

2011.08.21 13:53:57
*.158.216.128

2011년 초에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구절이 시1편 이었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사라의 웃음

2012.03.21 22:22:56
*.109.85.156

복 있는 자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 나무는 자기가 좋은 물가를 찾아
가서 스스로 심겨질 수가 없는 것이기에 그렇게 좋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기가막힌 복을 받은 것임을 배웁니다.

말씀을 주시어 말씀을 들려주시고 가르쳐 주시는 복을 허락하여 주심이
너무도 많은 복을 이미 받고 있는 것이기에 감~~~~사를 하나님께 올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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