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상 주심을 정말로 믿는가? (행7:9-16)

조회 수 1672 추천 수 125 2009.04.15 14:5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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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상 주심을 정말로 믿는가?
사도행전강해(29)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사 애굽 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그 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들어 큰 환난이 있을쌔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러나게 되니라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하였더니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 주고 산 무덤에 장사 되니라.”(행7:9-16)

선지자를 계속 몰라보는 이스라엘

모세의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죄목으로 유대 공회의 재판을 받고 있는 스데반의 피고인 진술이 이어지고 있다. 그의 변론의 초점은 과연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율법과 성전을 허락하신 뜻이 무엇인지 역사를 통해 반추해 보자는 데 있었다. 자기들 혈통과 믿음의 시조이었던 아브라함에 이어서 그 아들 야곱과 손자 요셉의 일생에 간섭했던 하나님의 손길이 어떠했는지 살펴보자는 것이다. 그가 족장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 이유는 물론 모세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였다.    

여전히 그의 변론의 핵심은 유대교 신앙의 전통과 유전은 율법을 수여 받고 성전 제도가 확정되기 전부터 이미 형성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려는 뜻이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겠다는 것은 아브라함을 불러낼 때에, 아니 그 훨씬 전부터 이미 계획한 바였다. 한마디로 구약의 교회도 믿음으로만 은혜를 받아 누리는 원리가 적용되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그 교회는 야곱과 그의 열두 아들을 통해 이어졌다. 가나안에 기근이 들어 굶어죽게 생겼어도 당신께서 애굽으로 먼저 보내 놓은 요셉을 통해 신실하게 그 교회를 보호하고 인도하셨다. 당신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반드시 지키셨던 것이다.

스데반이 특별히 야곱 일가가 요셉을 통해 구원 받은 이야기를 강조한 이유는 여럿 있다. 지금 유대 공회원과 제사장들은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종교적 우월의식으로 잔뜩 교만해 있었다. 율법대로 살며 제사를 성실히 드린다는 것이다. 나아가 온갖 경제적, 정치적 기득권을 누리며 호의호식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믿음의 조상들의 형편은 어떠했는지 따져보자는 것이다. 시조 아브라함은 죽을 때에 발붙일 땅도 없었고, 손자 야곱을 비롯해 열두 지파의 선조들 모두가 외방인 애굽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 출발은 너무 미약했다는 것이다.  

또 모세가 비록 민족의 구원자이자 하나님이 얼굴로 대면한 위대한 선지자이긴 했어도 요셉도 그에 못지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요셉이 기근에서 선조들 70여명을 살려내지 않았다면 모세와 지금의 이스라엘은 없었다는 뜻이다. 무엇보다도 모세든, 요셉이든 하나님이 계획하고 택하여 세운 그분의 종이었지 스스로 잘나서 구원의 큰일을 성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표상일 뿐이지만 나사렛 예수야말로 죄와 사단과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 모두를 해방시켜 주신 진정한 구원자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사흘 만에 부활하여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완성함으로써 율법과 성전의 역할이 종료되었음에도 아직도 말꼬리를 잡아 정죄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요셉의 형들은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전혀 알지 못하고 은 20에 동생을 미디안 상고들에게 노예로 팔아넘겼듯이, 너희들 또한 예수의 그리스도 됨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은 30에 팔아넘기도록 가룟 유다를 부추겼지 않느냐고 따진 셈이다. 이제 예수가 삼일 만에 부활하여 그리스도임이 확인 되었으니 지금이라도 너희들 죄를 회개하고 그분을 구주로 받아들이라고 촉구한 것이다.

물론 스데반이 모세를 아브라함이나 요셉에 비교해 깎아내릴 의도는 전혀 없었다. 그의 변론의 대부분을 모세 이야기에 할애했다. 모세를 통해 율법을 수여하고 성전제도를 가르친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 사전 정지 작업을 한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민족에게 간섭하신 배경과 의도에 비추어 율법과 성전제사도 해석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스데반이 강조하고 싶은 핵심은 이스라엘이 잘나서 하나님의 구원해주신 것도, 율법과 성전을 허락하신 것도 아니라는 데에 있다. 오직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베푸신 일방적 은혜 언약을 당신의 절대적 주권에 따라 완벽한 섭리로 당신께서 이뤄나가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은혜의 절정에는 나사렛 예수가 있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언약이 완전히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제사장과 공회원들이 그분의 정체성을 몰라보고 또 종교적 특권을 유지하려 그분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들어 있었다는 것이다. 또 그런 잘못이 구원 받는데 장애가 되는 것이 전혀 아니니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제발 예수를 영접, 최소한 인정이라도 하라는 뜻이었다.        

아브라함 언약에 이미 들어 있는 모세

그래서 스데반은 하나님이 당신만의 절대적 주권과 완벽한 섭리로 당신의 언약을 당신께서 이뤄나간 대표적 예로 요셉을 들었다. 하나님이 특별히 크게 쓰셨던 종으로 평탄하고 안락한 삶을 살다 죽은  사람은 아주 드물다. 항상 그 일생이 아주 파란만장하다. 역설적이긴 해도 그럴 수밖에 없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이 돋보이는 증표가 되어서 믿음의 후진들에게 본이 될 것 아닌가?

하나님이 큰일을 시키기 위해서 일부러 고생을 시켰다는 뜻은 아니다. 우선 그 본인이 온갖 시련을 겪어야 고난 가운데 주의 율례를 배워 믿음이 성숙해지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길과 생각은 항상 인간의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인간적 이해로는 당연히 오묘하고 신기해 보이기 때문이다. 요셉의 일생은 정말로 그랬다.

간단하게 살펴보면 우선 범상치 않는 꿈을 두 번이나 거푸 꾸었다. 아비 야곱이 총애하는 데다 본인마저 시건방져 시기한 형들이 죽이기로 했다. 맏형 르우벤의 설득으로 직접 죽이느니 구덩이에 빠트려졌는데  마침 애굽으로 가는 미디안 상고가 그 곁을 지나갔다. 이젠 또 노예로 팔자는 유다의 제안에 따라 바로의 시위 대장의 집에 팔려갔다. 음란한 시위대장의 처 때문에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고 감옥에서 바로의 관원들을 만나 해몽을 해주었다. 풀려난 관원이 요셉의 은혜를 이년이나 잊고 있다가 바로가 꿈을 꾸자 비로소 생각해내고 출옥하게 되었다. 온갖 시련을 겪는 동안에 믿음이 성숙한 요셉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바로의 꿈을 잘 해몽하고 해결책까지 제시해 일거에 총리가 되었다. 그 후 가나안에도 극심한 기근이 닥쳐 곡식을 구하러 온 형들을 극적으로 재회했다. 결국 야곱과 그 자손은 애굽으로 이주하였고 그 후 이스라엘 민족 전부가 사백 년간 애굽의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가만히 따져 보라. 모두가 언뜻 우연의 일치처럼 보이지만 한 사건과 그 다음 사건으로 연결되는 중간에는 반드시 “마침”, “하필 바로 그 때에” 같은 이음말을 넣어야만 해석이 자연스럽고도 완벽해지지 않는가? 또 그런 ‘마침’이 얼마나 많은가? 일반인이라면 평생에 한 번 겪을까 말까한 큰 사건을 연속해서 당했다. 시공간적으로, 상황적으로 그런 ‘마침’이 없었다면 도무지 다음 사건과 연결되지 않지 않는가?

형들과 주변 사람들을 비롯해 요셉 본인의 의지와 뜻과도 전혀 상관없이 사건들은 진행되었다. 그것도 예상은커녕 아예 꿈도 꾸지 못하는 방향으로 말이다. 요셉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과 상황을 주관하시는 절대자가 따로 있었다는 뜻이다. 특별히 결정적 순간과 상황에선 반드시 그분이 개입하셨다.  하나님이 당신의 종으로 택한 요셉의 일생은 그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당신의 일을 중심으로 오직 그분에 의해 진행되었던 것이다.  

수많은 우연들이 이어졌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일관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절대로 요셉이 처한 상황이 다급해서 임시방편으로 하나님이 개입한 것이 아니었다. 요셉의 일생에 대한 청사진을 당신께서 이미 다 그려놓고 그 일정표에 따라 진행시켰다. 그 안에는 어린 나이의 요셉으로선 도무지 감내할 수 없는 크나큰 현실적 고난과 정신적 어려움마저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을 그 고유의 사역에 걸맞게 당신의 방식으로 준비 훈련시켰던 것이다.

하나님이 젊은 요셉을 일국의 총리로 세워 형통케 했다는 사실에만 주목하면 안 된다. 총리가 된 것도 하나님 계획의 일부분이었을 뿐이다. 단순히 요셉을 출세시켜 야곱 가문을 호강시키려면 다른 손쉬운 방안이 얼마든지 많다. 정작 하나님은 그를 이방 애굽의 총리로 세워 오히려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사단의 왕국에서 오래 동안 노예 생활을 하게끔 했다. 구원자 모세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가나안으로 입국시키려 하신 것이다. 또 그 결국은 골고다까지 이어지는 것이었다. 모세의 출애굽 구원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예표였던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가운데는 이런 내용이 있었다.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에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창15:13-16)

말하자면 요셉의 할아버지와 약속했기에 그를 애굽의 총리로 삼은 것이다. 또 그 약속은 요셉뿐 아니라 그 이후 사백 년간의 후손에게도 해당되었다. 결국 모세도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가 될 것은  아브라함과 언약할 때부터 하나님의 계획안에 이미 들어 있었던 것이다.    

겹치는 우연의 뒤에는 하나님이 있다.  

세상만사에는 네 가지 연(然)이 있다. 자연(自然), 당연(當然), 우연(偶然), 필연(必然)이 그것이다. 자연은 말 그대로 창조주가 피조세계 안에 내포시켜 놓은 법칙과 원리대로 이뤄지는 일이다. 간단한 예로 구름이 모이면 비가 오고 1+1=2가 된다는 것이다.

나머지 셋은 특별히 인간사에 관계가 있다. 당연은 열심히 공부하면 성적이 오르듯이 특정 원인이 있어서 그에 상응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우연은 길가다 지나가는 차가 튀긴 흙탕물을 뒤집어쓰듯 특정 원인과 전혀 상관없는 결과가 나타나거나 아무 원인이 없는 데도 큰 결과가 생기는 것이다.

필연은 앞의 셋 중에 어떤 연이 되었든 반드시 그렇게 되었어야만 하는 일이다. 이왕에 발생한 일이 우연처럼 보여도 아주 큰 의미가 있고 상당한 여파가 발생하는 경우다. 나치 독일이 멸망한 데는 수많은 당연과 우연이 겹쳤겠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했지 않는가?

우연이 자꾸 겹치고 또 어떤 일관된 맥을 갖고 있으면 필연으로 보아야 한다. 거꾸로 일관된 맥을 갖고 있다면 절대 우연이 아니다. 어떤 지성적 존재가, 그것도 인간과 그 수준에서 도저히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 지성으로 계획하고 이끌었다는 뜻이다. 세상만사의 필연은 하나님의 몫일 수밖에 없다.

본인을 비롯해 과연 어떤 인간이 요셉의 일생과 그 수백, 수천 년 뒤에 미치는 영향까지 감히 계획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 외에는 아예 불가능하다. 또 그 사건의 개요와 일관된 뜻을 정확하게 계시해 놓은 책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의 말씀임에 틀림없지 않는가?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자연과 당연을 빼고는 전부 우연의 소치로 돌린다. 필연이 없다. 당연히 하나님을 인정치 않는다. 세상만사를 오직 인간의 지성과 이성의 틀 안에서만 바라본다. 자기 일생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면서 과연 인간이 무엇을 알 수 있다는 말인가? 또 그 무지했던 관찰 결과를 순전히 자기 편견과 일시적 감정에 맞추어 해석한다. 자기 외의 존재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인생에 대한 온전한 해답은커녕 자신의 정체성마저 제대로 발견하지 못한 주제에 자기만 믿고 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아나톨 프랑스라는 19세기 평론가는 "인생에서 우연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우연이란 필경 하나님의 것이 된다.“라고 말했다. 우연 자체가 인간의 이해와 능력 밖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것이 일정 방향으로 연거푸 일어나는데도 그 모든 것을 주관하는 하나님의 필연은 때려 죽어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정말 때려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지 않겠는가? 그럼에도 그들을 사랑해서 십자가에 당신이 대신 죽으셨다. 오직 당신께서 지으신 피조물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말이다.

지금 요셉의 일생은 바로 우리들에게, 아니 모든 세대의 인간에게 다 해당되는 이야기다. 모든 이의 인생은 알게 모르게 우연이 겹쳐서 필연으로 가고 있다. 그러나 우연으로만 알고 그치면 하나님과 무관한 인생을 살다가 끝난다. 반면에 그 우연들 속에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 과연 이렇게 살다 끝인가, 자꾸 이런 생각이 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 문제와 환난들이 이 생각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우연한 일들이 한두 번도 아니고 자꾸 생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래서 내 인생을 이끄는 이가 따로 있는 것 같다고 여겨질 때에 하나님과의 접촉점이 생기는 것이다. 아니 그분의 크신 은혜 가운데 이미 초대 받은 것이다.

모태 신앙이나 어려서부터 교회 간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 신앙을 갖게 된 경우의 대부분은 반드시 자기를 이끌어주신 필연의 손길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기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들이 겹치고, 또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해도 사방으로 꽉 막혀 옴짝 달싹도 못했던 체험이 있다. 꼭 현실적 실패가 아니라도 정서적, 영적 절망의 나락에 떨어져 어쩔 수 없이 하늘을 쳐다보게 된다.

그래서 지금껏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했던 모든 것들, 예컨대 재물, 건강, 외모, 가문, 학벌, 교양, 명예, 권세 등이 사실은 자신에게 온전한 능력, 만족, 지식, 행복, 안전을 결코 가져다 줄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어느 순간 진정으로 소중한 것들이 전혀 아님을 알게 된다. 오직 천지를 지으시고 지금도 세상만사를 운행하시는 하나님 그분이 계심을 시인하게 된다. 지금껏 우연처럼 보였던 그 모든 일들이 자신을 당신의 사랑과 은혜 가운데로 인도하시려는 그분의 필연이었음을 확실히 깨닫게 된다.  

그러나 우연이 겹쳐서 필연이 되는 것을 두고 단순히 하나님의 섭리라고 해석하면 부족하다. 신자가 ‘마침’이 일어난 당시에는 이해는커녕 전혀 깨닫지도 못했음에도 그분께서 지금의 자리에까지 보호하고 인도하셨다. 그래서 모든 ‘마침’은 오히려 능동적 적극적으로 행동하시는 하나님을 뜻한다. 그것도 당신만의 일방적 사랑과 권능과 함께 말이다. 다른 말로 우리 대신에 그분이 행하셨다. 반드시(必然)  그분의 자녀로서 진심으로 그분을 경배하고 순종하는 지금의 자리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스데반도 형제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계셔”(9절)라고 증언했지 않는가? 그 말은 또 9절 이하에나 이전이나 모든 일을 그분이 다 이루셨다는 것이다. 요셉으로 봐선 모든 일이 자신의 판단과 의지로 행했지만 실제로 전혀 계획은커녕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계속해서 겹쳤다. 마지막으로 총리가 된 계기도 자기 의사와는 아예 무관했다. 단지 2년 전에 감옥에서 우연히 꿈을 해몽해 준 사건 때문이었다. 그럼 모든 일을 결정하고 시행한 것이 오직 하나님의 몫이었지 않는가?

야곱 가문이 애굽으로 이주하고 난 후에 요셉이 뱉어낸 실토를 보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의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7,8)

모든 우여곡절을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기 인생에 그 괴로웠던 우연들이 겹쳐진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적극적으로 행동하시는 하나님이 가문의 막내가 가문 전체를 구원하는 자리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을 말이다. 그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여 오직 그분의 손에 자기 인생을 전부 맡겼기에 당신께서 그 큰일을 이루셨던 것이다.  

믿음의 본질

히브리서 기자가 믿음의 내용을 어떻게 표현했는가?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찌니라.”(11:6)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가면 상 주신다는 것이 단순히 어려운 문제를 기도하면 다 해결해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종교 활동을 성실히 하면 보상으로 형통케 해준다는 뜻은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이 무엇이며 또 그런 기뻐할 만한  믿음을 보고 하나님이 주시는 상의 내용이 무엇인지부터 제대로 알아야 한다. 히브리서 11장 전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천국의 상급에 관한 말씀이다. 간단히 말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천국이 상급으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 말씀은 아주 보편화 되어 있는 신앙상의 최소 두 가지 오해를 제거시킨다. 우선 신자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는 아주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믿음의 선조들인 아브라함, 야곱, 요셉의 일생을 보면 어려운 일의 연속이었지 않는가? 아브라함이 죽을 때에 발붙일 땅도 없었고, 야곱은 평생을 가나안 땅을 차지하길 원해 아비까지 속였는데도 이국 땅 애굽에서 죽었다. 요셉의 일생은 살펴본 대로 파란만장했다. 천국에 들어가기 합당하게 준비 변화 성숙시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신자가 이 땅에 사는 동안 믿음의 대가로 주시는 상이다.  

따라서 신자가 현실의 문제와 환난을 이겨내는 방안도 지금껏 생각하고 배워 온 것과는 달라져야 한다. 단순히 굳센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그분이 다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여기면 너무나 부족하다. 천국으로 들어가는 훈련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아니 계획하신 것인데 단순히 신자가 힘들다고 그만두게 하시지는 않을 것 아닌가? 훈련이란 소기의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계속되는 법이다.  

신자는 당연히 그런 훈련을 달게 받아 자신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데 더 주력해야 한다. 당장의 문제 해결이나 환난에서의 구원보다는 하나님의 자기 인생에 대한 궁극적 계획에 믿음의 초점을 더 맞추어야 한다. 물론 어려운 문제는 간절히 기도해서 구원을 요청해야 한다. 그러나 기도란 신자 주위의 만사를 형통케 하려는 목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신자를 변화시키고 또 그 변화된 신자를 통해 당신의 일을 이뤄나감에 신자는 기도로 동참할 뿐이다.  

다른 말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4)라는 말씀을 무조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면 안 된다는 뜻이다. 무슨 일에든 적극적 믿음으로 기도하면 다 이뤄진다는 식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자신의 믿음과 기도 자체가 능력이 되어버린다. 의지력이 강하고 뜨겁게 기도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자동으로 받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제가 불신자 시절에 인상 깊게 읽었던 책으로 “신념의 위력”이라는 것이 있다. 포커 게임을 하더라도 나는 딸 수 있다, 지지 않는다는 긍정적인 신념을 가지고 하면 돈을 딸 수 있다는 이론이다. 너무나 당연한 이치다. 아무래도 게임에 적극성을 띄게 되니까 열심히 집중하게 된다. 시쳇말로 돈 독이 오르게 되고 그러면 돈은 따게 마련이다.

믿음으로 기도만 하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면 신념이 기도라는 종교적 형식을 살짝 빌려 입은 것에 불과하다. 믿음이란 “하나님께 기도하면 응답해준다는 사실”을 믿는 것 즉, 히브리서 11:6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기에 그분께 기도하면 응답해주신다는 것을 믿지 못할 신자가 어디 있는가? 기껏 그런 믿음을 열심히 노력하여 키우려 드는 것은 너무나 우스운 짓 아닌가? “하나님 그분”을 온전히 믿어야 한다. 전자는 기도를 응답해준 일에만 하나님이 역사한 것이 된다. 후자는 응답되지 않았어도 여전히 그분의 섭리를 믿으며 무엇보다 그분을 사랑하는 열성과 세기에 전혀 변함이 없는 것이다.  

믿음이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나와 어떤 관계인지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아니 한 번에 다 알 수는 없기에 평생을 두고 알아나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분과의 관계부터 항상 올바르게 세워야 한다. 그런 관계 하에 그분의 자녀답게 그분께 제대로 반응해야 한다. 또 그런 자에게만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일을 이루시고 또 시키신다.  

정말로 감사해야 할 것은?

미국 독립 전쟁 당시에 뉴저지 국회의원이자 목사였던 위더스푼 박사에 관한 일화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에 대해 신나게 간증을 했다. 마차를 타고 가는데 언덕에서 바위가 떨어져 말이 갑자기 놀라서 뛰는 바람에 마차는 굴러 떨어져 완전히 박살이 났는데도 자기는 다친 데라곤 없이 멀쩡하니 얼마나 감사하고 놀라운 일이냐는 것이었다.

가만히 다 듣고 나서 위더스푼은 그런 일이라면 나는 그 동안 수천, 수만 번도 더 겪었다고 했다. 모두 놀라서 쳐다보니 같은 길을 자기는 수도 없이 지나다녀도 한 번도 말이 놀라 뛰거나 바위가 떨어진 적이 없었으니 얼마나 더 감사하고 놀라운 일이냐고 설명했다.

그렇다. 기도해서 문제를 해결 받는 것만이 믿음이 아니다. 그래서 예상치 않았거나 예상보다 더 큰 도움을 입는 것만이 은혜가 아니다. 하나님은 항상 당신만의 동일한 은혜와 권능으로 당신의 백성과 함께 하고 계신다. 인간이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과 문제들도 당신의 신실하심을 조금치도 손상케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신실하심의 더 명백한 표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이 계획해 놓으신 자리로  당신만의 방식으로 기어코 데리고 갈 것이며 또 그런 과정 중에 우리에게 가장 유익하고 합당한 방식으로 동원 된 것들이기 때문이다.

왜 우리는 기도하여 사업이 형통한 것만 믿음으로 승리한 표식으로, 또 교통사고에서 우연히 한 번 건져준 것만 평생의 감사거리로 갖고 있는가? 그 전과 후에 평생을 두고 사고가 나지 않게 해주신 것은 감사와 승리가 아닌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완벽한 섭리는 훨씬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요셉의 일생에서 배워야 한다. 우리 인생을 진정으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 전체를 연결해서 되돌아보아서 일관된 방향성을 반드시 감지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또 앞으로 그분이 어떤 자리로 이끌지도 그 방향성을 성경 말씀과 연결해서 묵상하여 정확히 깨달아야 한다. 신자가 정작 평생을 두고 그분과 교제하며 감사해야 할 믿음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가장 잘 비유할 수 있는 대상이 하나 있다. 심장이 띄는 모습이다. 나면서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동일한 박동 수로 뛰듯이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향한 사랑이 그러하다. 혹시라도 심장이 갑자기 쿵쿵 뛰거나 잠시라도 멈추면 바로 죽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의 믿음은 현실적으로 조금만 형통하면 그저 쿵쿵 뛰려하고 또 조금이라도 자기 기분에 들지 않으면 곧바로 휴식에 돌입한다. 당연히 신자의 영혼은 죽은 것과 방불해진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또 다시 변함이라곤 없다. 예수님이 제자들더러 믿음이 없거나 적다고 지적은 했지만 마지막까지 그들의 발을 씻기셨고 대신 죽으셨지 않는가?  
  
요셉의 일생을 볼 때에도 우리는 그저 일국의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에만 열광한다. 우리의 믿음 또한 그렇게 한 방에 대박을 터트려 주기를 기대하는 수준 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재차 강조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그를 총리를 시키는 것에 있지 않았다. 예수님의 선조들을 기근에서 구원하고 안전하게 보존시키려는 것이었다.

요셉의 영화 같은 인생의 모든 사건은 하나님이 마련한 각본대로, 그분의 연출에 따라 진행되었을 뿐이다. 인간의 눈에는 우연한 사건들 전부가 시계 톱니바퀴가 일초의 오차 없이 빈틈없이 물리듯이 하나님의 필연으로 엮어졌다. 오직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궁극적 목적이 달성되었다. 스데반의 변론이 마치 옛날이야기 하듯이 중요 사건들을 죽 이어서 설명하고 있지 않는가? 총리가 된 것 하나만 하나님의 은혜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그와 일생동안 동행해주신, 아니 당신의 계획대로 이끌어주신 하나님 그분이 바로 은혜라는 것이다.    

히브리서가 하나님이 상주시는 분임을 믿으라는 것을 흔히 해석하는 식으로 하자면 요셉이 믿음으로 열심히 기도하면 애굽의 총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 요셉조차 그렇게 기도한 적은, 아니 그렇게 기도할 것조차 꿈 꾼 적이 없지 않는가?

요셉은 오히려 모세와 같았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자가 되기 위해 애굽의 왕자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요셉도 전혀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애굽의 총리가 되었지만 결국은 자기 형제들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온전하신 계획을 깨닫고 너무나 자기들을 사랑하시는 그분 앞에 무릎 꿇었다. 현실의 보화가 문제가 아니라 그분의 자녀로 영생을 누리는 것이 진짜 그분의 상주심임을 알게 된 것이다.  

지금 혹시라도 여러분의 삶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의 연속인가?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문제들이 겹쳐지는가? 그것도 열심히 기도하고 잘 믿으려 노력하고 있는데도 그러한가?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그분을 찾으면 상주시는 것을 정말로 확신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럼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현실적으로 너무 힘들어서 감사와 기쁨이 잘 안 나온다면 그분의 신실하신 사랑과 권능에 대해서만은 절대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연 같이 보이는 것들이 하나님의 필연이며 또 반드시 요셉 같이 때가 되면 그분의 방식대로 여러분 인생의 열매들이 하나씩 결실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더 우리 모두를 요셉의 자리에 세우고 싶어 하신다. 총리가 아니라 자기를 죽이려 했던 형제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며 오히려 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자리다. 하나님 그분이 상을 주시지 우리가 상을 기획해서 이런 저런 상을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그분의 상주시는 계획안에 이미 들어와 있다. 각자에게 가장 고유하고 합당한 면류관이 다 예비 되어 있다. 그 사실을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여 반드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시키게 해줄 것이다.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실패했지만 초대 교회의 헬라파 한 집사였던 스데반은 성공했듯이 말이다.

불신자에겐 몰라도 신자에겐 모든 우연이 하나님의 필연이다. 그분의 필연이기에 궁극적인 완성은 이미 확실히 보장되어 있다. 신자에게 실패처럼 보여도 그분에겐 성공이다. 결국 실패(失敗)처럼 보이는 것도 단지 신자의 실수(失手)일 뿐 하나님의 실패는 절대 아니라고 확신할 줄 아는 것이 믿음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실패할 리는 절대 없지 않는가?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자. 당신은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분을 찾을 때에 상 주신다는 것을 정말로 온전히 믿는가?  

4/14/2009
유타 대학촌교회 10/20/1996 주일설교  

사라의 웃음

2012.02.25 21:31:05
*.109.8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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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라는 것, 내가 추구하고 소원하고 갖고 싶은 것들을 갖는 것이 복이
아니고 하나님, 그 분의 임재 가운데 항상 거하는 삶, 그래서 그 분의
통치를 받아 그 분의 왕되심이 자잘한 우연들이 겹쳐 필연이 되어지는
모든 상황들로 보아서 분명하게, 선명하게 알아 가는 것임을 배웁니다.
정말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

날마다순종

2021.01.10 14:00:34
*.14.99.253

그분께 붙잡히어 예수님을 믿게 해주시고 일생을 함께 동행해 주시며 영원히 그분의 사랑안에 거할 수 있음에 이보다 더 큰상이 무엇이며 또 더 이상 무슨 상을 바랄까요.. 그저 지금부터 영원토록 감사와 찬양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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