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실컷데리고 놀다 제 자리에만 돌려 놓아라(마5:38-42)

조회 수 2406 추천 수 136 2003.07.08 22:47:55
마태복음 강해 (62)  5/11/2003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 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5:38-42)

남의 가랑이 밑을 기어지난 간 사람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한나라 왕 유방에게 삼국지의 제갈공명에 버금가는 뛰어난 신하로 한신이 있었다. 그가 젊었을 때에 시장 길거리에서 그 동네의 가장 힘 센 깡패가 시비를 걸어 와 괴롭히면서 자기 가랑이 사이로 무릎을 꿇고 기어 지나가면 더 이상 괴롭히지 않겠다고 제의했다. 한국이 양반 선비 따지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그 원조는 중국으로 군자의 도에 대해 자기 목숨을 건다. 그런데도 한신은 두 말 않고 모든 자존심을 버리고 깡패의 가랑이 사이로 기어지나 간 것으로 유명하다.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까닭은 자기 마음 속에 나중에 천하를 호령할 큰 야망을 품고 있었기에 그 정도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영국의 처칠 수상에게 한 정적이 있었는데 그는 항상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처칠을 모함하고 욕했다. 그럼에도 처칠은 그 비난에 대해 눈도 꿈쩍하지 않고 대범하게 대했다. 기자들이 궁금해서 “수상께선 억울하고 분한 마음도 들지 않는가? 왜 반박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존경하는 사람이 나를 욕하면 내가 괴롭겠지만 나는 그 사람을 전혀 존경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상관이 없다”라고 대답했다.

내 쪽에 전혀 잘못이 없고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는데도 상대가 내 뺨을 때려 올 때에 아무 분한 마음 없이 끝까지 참아낼 수 있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가? 한신처럼 속에 큰 야망이나 복수의 칼을 갈고 있으면 된다. “네가 지금은 나를 우습게 알지만 나중에 두고 보자. 언젠가 네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싹싹 빌 때가 반드시 올거야.” 혹은 처칠처럼 상대의 가치를 철저하게 인정하지 않거나 무시해 버리면 된다. 완전히 정신 나간 천치 바보에게 뺨을 한 차례 맞았다고 복수하겠다고 덤빈다면 그 사람이 더 바보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 모두 한신 같이 큰 야망을 가진 자도 아니요, 처칠처럼 대범하지도 못하다. 그저 평범한 소인배일 따름이다. 또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사람도 우리와 똑 같이 그저 그렇고 그런 범인들이다. 그런 와중에 어떻게 뺨을 맞고 끝까지 참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내가 손해 보더라도 끝까지 참으라는 것을 지금 한 번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네 가지 예화를 들어 반복해 말씀하셨다. 히브리 어법상 반복은 강조를 뜻하는데 네 번씩이나 강조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신자가 꼭 그렇게 변화되길 진심으로 원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아무리 대범해지려고 노력해도 혹시 끝까지 참는 것은 할 수 있겠지만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을 대고, 속 옷을 달라면 겉 옷까지 주고,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갈 수 있겠는가? 내가 당한 손해만 참아 내는 것이 아니라 그 보다 더 손해 볼  수 있겠는가? 그것도 자원해서 말이다. 한신이나 처칠 같은 위대한 사람도 자기가 당한 피해와 비난을 참기만 했지 더 베풀지는 않았지 않는가? 예수님이 우리 같은 평범한 신자를 너무 과대 평가하신 것은 아닐까?        
        
미리 알고 반을 떼어 가신 하나님

이런 말씀을 접하는 모든 신자의 마음 한 구석에는 항상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저도 신자답게 먼저 양보하고 희생하며 손해를 감수하고 싶습니다. 이웃의 악을 선으로 갚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습니다. 그러나 지금 내 코가 석자입니다. 도저히 그럴 여유가 없고 형편이 안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의 세상적 형편은 요 모양 요 꼴로 만들어 놓으시고 도덕적으로는 예수님과 같은 수준이 되라고 요구할 수 있습니까? 언젠가 저도 믿음이 좋아지고 형편이 풀리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현재는 할 수 없는 먼 장래의 일이나 목사나 장로 정도 되어야 할 일로 제쳐 둔다. 그러면서 일상 하는 기도의 내용은 내가 참거나 더 큰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헌신은커녕 제발 이 억울한 사정을  하나님이 대신 갚아 주시고 저 원수를 이길 힘을 달라고 한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게 일 억을 주시면 그 반을 떼서 하나님 일을 하는 데 쓰겠다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랬더니 일 억 대신에 오천 만원이 생겼다. 그러자 “하나님이 감사하게도 미리 아시고 반을 떼어 가시고 나머지 반만 주셨군요”라고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가장 큰 착각을 하는 것이 사정이 풀리고 믿음이 자라면 선을 더 베풀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진정한 선은 세상 형편과 인간의 사정과는 관계 없다. 돈을 더 벌어서, 신앙을 더 키워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평생 가도 제대로 선을 베풀어 보지 못한다.

지금 예수님은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시고 계신가? 우리와 똑 같이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게 하셨다. 그것도 이제 갓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 우리 생각처럼 불가능하거나, 무리한 요구이거나, 먼 장래에 해야 할 일이거나, 목사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신자라면 누구나 지금 당장 할 수 있고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실천하기가 그렇게도 힘이 드는가? 그 이유는 하나 뿐이다. 이 말씀대로 따라 살고 그대로 실천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지금 왜 실천하지 못하는가를 따지면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것 때문에 실패한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앞 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차츰 설명하기로 하고 우선 예수님이 인용한 네 가지 예를 정확하게 어떤 상황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그리고 그 상황에서 우리가 과연 실천하려고 노력하여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판단해 보기로 하자.

남의 분풀이 감이 되어라.

먼저 39절에서 예수님은 뺨을 때린 자를 악한 자라고 칭했다. 상대에 잘못이 있고 당한 사람은 억울하게 당했다는 뜻이다. 뺨을 맞았다는 말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첫째, 피해를 본 것은 나의 위신, 체면, 자존심과 감정이다. 한 마디로 인격적 모독을 당한 것이지 현실적, 외형적 피해는 사실 없다. 둘째로 뺨을 맞았다는 것은 힘으로 당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뺨을 때리는 것은 주로 약자가 강자를 모욕을 줄 때 사용된다. 부부싸움할 때도 아내가 남편의 뺨을 때리지 남편은 화가 나면 아내를 주먹이나 발길질부터 하고 본다. 뺨을 맞고도 참는다는 것은  상대를 얼마든지 힘으로 제압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아가 오른 편 뺨을 맞은 후 왼뺨을 대어 준다는 것은 참는 것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컷 상대의 분풀이 감의 대상이 되어 주었다는 뜻이다. 시쳇말로 “실컷 갖고 놀다가 제자리에만 되돌려 놓아라”고 농담하는데, 제 자리에 돌려 놓지 않고 실컷 갖고 논 상태에 그냥 버려 두어도 된다는 의미다.  

송사하여 속 옷을 가지려거든 겉 옷까지 주라는 뜻은 이 말씀이 갖는 당시의 배경을 먼저 살펴 보아야 한다. 율법에 의하면 겉옷은 절대 저당물로 잡을 수 없었다. “그가 가난한 자여든 너는 그의 전집물을 가지고 자지 말고 해 질 때에 그 전집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릴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의로움이 되리라.”(신24:12,13) 겉옷은 당시에 밤에 덮고 자야 할 이불의 역할을 겸하고 있었으므로 혹시라도 담보로 잡았더라도 반드시 해가 지기 전에 돌려 주어야 했다. 누가 송사를 해서 겉옷을 뺏으려 하지 속옷부터 차지하려는 자가 있겠는가? 겉옷은 송사를 해도 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송사를 했다는 것은 벌써 정상적인 인간 관계가 끝이 났음을 의미한다. 상호간에 더 이상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못하게 되었고 법에 호소해 무슨 꼬투리를 잡더라도 자기 목적을 채우겠다는 심보다. 예수님은 지금 설사 상대가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나오더라도 맛 고소하거나 재판까지 가지말고 법적으로 보상할 의무가 전혀 없는 겉옷까지 주어가며 상대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주라고 하신다.

억지로 오리를 가는 문제도 당시의 관습을 알아야 한다. 경찰이나 군인이 어떤 일이 있으면 아무나 짐을 지어서 오리, 어른들 걸음으로 약 천 보의 거리까지 가게 할 수 있었다. 일종의 강제 부역을  동원할 수 있는 규정이다.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웠더라.” (마27:32)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을 십자가를 지고 올라 갈 때에 너무 지치고 곤하여 잘 지지 못하자 군인들이 주위에 있었던 시몬에게 지고가게 한 것이 그 좋은 예다. 마27:32와 마5:41에서 ‘억지로’라고 번역된 것은 그런 요구를 당하면 누구나 당연히 복종해야 할 의무라는 의미이지 강제력을 동원해서 법에도 없는 일을 시킨다는 뜻은 아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를 가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권력을 가진 관리나 지도층의 권한과 책임을 인정해 줄 뿐만 아니라, 의무감으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협조하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법에서 정한 범위를 벗어나서 협조를 하라고 했다. 무슨 일이든 공적인 일에 자원해서 최선을 다해 봉사하라고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구하는 자와 꾸고자 하는 자에게 주라고 하셨다. 요구하는 자와 요구 받는 자의 조건이나 상황과 관계에 대해서 일언 반구의 설명도 없다. 상대가 빚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다. 나에게 요구할 아무 자격이나 조건도 없고 나 또한 상대를 도와 줄 의무가 없다. 단지 상대가 필요해 요구했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도와주라는 것이다. 설사 상대가 친척이나 친구도 아니요 가깝지도 않은 이웃이거나 엄연한 제 삼자거나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처럼 길가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거나 심지어 원수일지라도 도와주어야 한다. 상대가 어렵다면 어떤 사정인지 따지지도 말고 힘들어 하는 것만으로도 무조건 도와주라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네 가지 경우를 다 듣고 나니까 어떠한가? 과연 믿음과 형편이 좋아지는 나중에라도 실천할 자신이 생기는가? 목사나 장로가 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이 아니라 도저히 나와는 전혀 상관 없는 아예 먼 나라 딴 나라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천국에 가서야 가능한 일일 것 같지 않은가? 맞다. 이 땅에서 상식적인  사고방식과 행동규범을 가진 자로선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 뿐이다.

스스로 180도 돌아 가 있자.

예수님이 지금 네 가지 예화를 든 것은 너희가 신자가 되었으니 불신자보다 더 선하고 사랑을 많이 베풀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정도의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신자가 불신자보다 선행을 질적, 양적으로 많이 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예수님이 네 가지 예를 든 의도는 따로 있다. 그 네 가지가 우리 모두 일상생활에서 항상 겪는 일이다. 특별히 흉포한 사람에게 가끔 당하는 일이 아니다. 일부러 어려운 사람을 찾아가서 도와주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자존심 상해 분통 터지고 인간 관계에 상처 받는 것은 다반사다. 먹고 입고 자는 것에 제대로 풍족한 여유가 없어 힘든 사정은 쉽게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인다. 세상 권력을 쥔 자들에게 심심찮게 억울하게 당한다. 돈이 없어 난리치고 괴로운 것은 누구나 겪는 매일의 삶이다. 아파트 단지 안에서 아무 것도 아닌 일로 시비가 붙어 서로 말도 안하고 지내거나, 바로 옆 집 아저씨가 단 돈 백불 없어 빌려달라고 찾아 오는 바로 그런 일들이다. 어제, 오늘, 내일 언제나 찌지고 볶는 우리의 인생이자, 삶과 존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상황을 예수님은 말씀하신 것이다. 자존심과 돈과 권력과 명예가 걸린 문제다. 일년 365일 단 하루도 이 네 가지 중에 하나라도 걸리지 않은 날이 없다.

본문을 다른 말로 하자면 너 일생 동안에, 너가 죽을 때까지  아낌 없이 남에게 퍼주어라는 것이다. 더 당할 것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당하고  완전히 죽어  끝까지 베풀어라는 것이다. 또 그 말은 네 삶 자체를 바꾸어라고 한 것이다. 네라는 존재, 사람, 전부를 변화시켜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양심과 상식을 가지고 남을 도우라거나, 이 땅의 도덕이나 계명으로 가르침을 주신 것이 아니다. 종교나 사상 강론을 베푼  것은 더구나 아니다. 천국 시민이 되어라고 하신 말씀이다. 우리가 그렇게 살도록 노력해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 인생을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라고 하신 것이다.

오른 뺨을 때리면 어떻게 왼편 뺨을 갖다 댈 수 있는가? 속에 자존심이 펄펄 살아 있는 정상인은 그렇게 못한다. 도덕적 종교적으로 훈련받고 노력하면  한 두 번 정도는 실천할 수는 있을 것이다. 누구에게, 어떤 상황 하에서나, 평생을 두고는 절대 그럴 수 없다. 내 자존심이 완전히 빠져 나가야 가능하다. 자아가 철저하게 부서지지 않고는 안 된다. 상대가 나를 갖고 놀아 180도 돌려 놓기 전에 내가 스스로 180도 만큼 돌아가 있으면 아무리 당해도 억울하거나 분통이 터지지 않는다. 더 돌래야 돌 것도 없고 갖고 노는 상대도 아무 재미도 없다. 나중에는 그 당하고 있는 자를 보고 이 땅의 사람이 아니라 무슨 이상한 나라에서 온 별종취급을 하게 된다.

지금 예수님은 우리더러 그렇게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신자가 사람과 세상 앞에 서야 할 모습이다. 세상의 상식, 관습, 법률, 제도, 도덕, 종교, 사상의 규범을 완전히 뛰어 넘어 천국의 행동 원리를 이 땅에서 드러내 보이라고 한 것이다. 천국 시민으로 삶의 기준과 가치가 전혀 다름을 실천해 보이라는 것이다.

백 불짜리 지폐 다발을 수백 장 침대 밑에 깔아야 밤에 불안하지 않고 잠이 제대로 오는 자는 남이 아무리 힘들어 도와 달라고 해도 도와주지 않는다. 세상 살아 가는 것이 말과 신의로는 절대 될 수 없으니 수 틀어지면 고소해서 본때를 보일 생각을 가진 사람은 송사하여 상대의 속옷 겉옷 구분 없이 발가벗겨야 속이 시원하다. 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판, 검사나 국회 의원 정도 배경이 없으면 당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사람은  그것으로 자신의 어려운 일의 방패막이로만 동원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그것으로 요리조리 빠져 나가고 불법으로라도 더 큰 재물과 힘을 쟁취하는 수단으로 사용해 볼까 궁리한다.

철저하게 부셔져라.

한신이나 처칠이 끝까지 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가해자인 상대의 가치를 철저히 무시했으며 심지어 깔보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여기까지는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러 더 베풀지는 못한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의 전존재가 완전히 변화된 천국 시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신자란 인간이 가장 인간다워야 하는 참 모습으로 바뀌어진 자다. 궁극적인 진정한 인간이 신자다. 하나님이 창조 시에 우리에게 심어준 형상을 원상으로 다시 회복한 자이며 그래야만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랄 수 있다.

신자는 피해를 입히는 상대를 무시하지 않는다. 내 속의 자존심을 무시한다. 나의 깊은 내면의 자아가 철저히 부셔져 다른 사람 앞에 과시하거나 그들에게 잘 보이려는 체면과 위신이 얼마나 쓸 데 없는 것인가를 알게 된 자다. 그런 것들로 이 세상에서 사는 기쁨과 가치가 줄거나 늘지 않는다. 또 재물, 권력, 명예, 쾌락 등이 나를 살려내고 인생의 의미를 늘여주지 않으며 반대로 삶의 불안과 염려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로 내 속에 평안과 자유와 충만을 일구어 내지 못함을 뼈저리게 체험한 자가 신자다.  

물론 신자라고 해서 불신자보다 더 거룩해지거나  신령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전히 연약하고 불완전 하여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거나 억울하게 피해를 입으면 분통이 터진다. 그러나 사람 앞에선 자존심이 상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 내 자존심이 죽었고 죽일 줄 아는 자가 된 것이 다르다. 다른 말로 바꾸면 더 이상 세상 사람들의 세상 살아가는 요령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의미다. 진정한 위로와 힘과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로만임을 철두철미 알게 되어 더 이상 다른 곳에서 그런 것들을 찾지 않게 된 것이다. 즉 세상과 사람들에게 아쉬운 것이 없어졌기에, 그것들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무시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로 인해 자존심이 상하거나 불안해 하지 않게 된 것이다.

한신이나 처칠이 상대를 무시할 때에 아무렇지도 않았듯이 우리가 돈, 권력, 명예, 자존심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니 이제 자유스러워질 수 있으며 얼마든지 오리를 가자고 해도, 속옷을 뺏으려 들어도, 오른 뺨을 맞아도 아무 상관이 없게된 것이다. 그 때 비로소 피해를 입히는 상대를 더 이상 가해자로 보지 않고 우리가 기꺼이 감당해주고 도와 주어야 할 이웃으로 볼 수 있게 되며 오리만 가는 것이 아니라 십리를 가고, 속옷 외에 겉옷도 주게된다.

그런 의미에서 목사로서 솔직한 심정은 여러분 모두가 완전히 재기불능 상태로만 빠지지 않는다면 한 번씩 철저하게 깨어지고 부서졌으면 하는 것이 역설적인 소원이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다. 이미 우리 가운데 그렇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다. 제가 이 교회와 여러분들이 너무 좋고 감사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 가운데 문벌이 좋거나 세상에서 자랑거리가 많은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모두 연약하고 힘들며 커다란 실패들을 겪었고 하나 같이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는 것에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교회 와서 거들먹거리는 자가 없어서 좋다는 뜻이 아니다. 교회는 시끄러운 사람들이 좀 있는 것이 좋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 깎이고 다듬어져야 하는 곳이 교회다. 또 어려운 사람들이 많으니 교회가 도와주는 일을 할 수 있어 좋다는 뜻도 아니다. 도덕적인 선행으로 자랑하는 교회가 되면 그것도 하나님 앞에 인간의 의를 내세우는 것이 된다. 교회란 자선과 구제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란 오직 영혼의 구원과 안식과 충만을 주는 곳이다. 철저히 부숴지는 체험들을 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철저히 맛보았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이 약해질 때 더 강하게 작동한다. 주님의 사랑과 권능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얼마나 풍성하며 고귀한지는 더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우리가 깨어질 대로 깨어져 생명이 약동하며 빛이 비취는   거룩하신 주님의 보살핌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세밀한 모습으로 인도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다윗의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나에게 상을 베푸신다는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아직은 원수의 목전(目前)이다. 여전히 세상적으로는 만신창이가 되어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앞에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상(床)이 베풀어져 있다. 상(賞)이 아니다. 환난과 시련 가운데도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의 기쁨과 충만함이 넘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가 내 잔에 넘치나이다고 감사해야 한다.

남이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할 때에 스스로 기꺼이 십리를 가주는 삶이 얼마나 기쁘고 가치가 있으며 신이 나는지 신자는 알 수 있다. 그것이 절대 우리의 양심이나 도덕성으로 훈련하고 노력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살아 계시며 지금도 우리를 천국의 시민답게 살수 있도록 주위에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부쳐 주시고 우리에게 선한 소망을 심어 주시며 세상의 모든 것들이 얼마나 썩어 없어질 것인가를 깨닫게 해주시는 주님의 은혜만으로만 가능하다. 우리 전 존재와 인생 전부를 이 귀한 주님의 은혜 아래에 완전히 내어 맡긴 자만 가능한 삶이다.

물론 세상의 권력, 돈, 명예, 자존심 모두 중요하고 필요한 것들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절대 그것들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목사라서 종교적 의미로만 하는 말이 아니다. 여러분의 지나 온 삶에서 겪은 모든 일들을 통해 깨닫고 체험한 것이지 않는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날씨 좋은 날 골프치러 가지 않고 교회에 나와 앉아 있지 않은가? 골프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에 충분한 안식이 안 되더라는 증거다.

이왕에 무엇인가 부족하여 교회에 나왔으면 정말 화끈하게 은혜를 소망하고 갈급해야 하지 않겠는가? 정말 주님의 은혜에 전 인생을 한 번 걸어보라. 절대 주님은 우리를 외면하거나 실망시키지 않으며 우리가 생각하거나,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아니 꿈도 못 꾸던 신비와 권능의 삶으로 인도할 것이다. 남이 속 옷을 달라하면 겉옷도 주고, 꾸는 자를 거절하지 않는 그런 삶, 신자만이 살 수 있는 그런 삶이 얼마나 풍성하며 신나고 즐거운지 알 수 있게 해 주신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도 그 일을 함에는 우리가 연약할수록 더 잘할 수 있다.

예수님은 신자가 세상 앞에, 사람 앞에 까지 자존심을 죽이라고 하지 않았다. 단지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것들을 깨뜨리라고는 했다. 그럴 때에 인생이 완전히 달라진다. 상식과 양심으로는 도저히 살 수도 없었고, 그렇게 살게 되리라 예상도 못했던 그런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낙타무릎

2010.11.04 05:2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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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헤의 말씀에 감사합니다

사라의 웃음

2011.06.16 10:5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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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180도를 돌아가고...
그 돌아감도 실상은 스스로가 아니고 돌아가도록 해 주시기에 가능한 것이고..
그래서, 그래서 감사밖엔 올려 드릴 수가 없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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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 인류 역사상 오직 두번 뿐인 사건(롬12:1,2) [2] 운영자 2005-03-14 2310
171 블랙홀이 사라진 까닭(마5:17) [3] 운영자 2003-06-16 2293
170 신자의 감사는 달라야 한다.(시 50:22,23) [3] 운영자 2007-09-25 2290
169 네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라. (마6:19-24) 운영자 2003-12-15 2290
168 예배를 회복하라.(창3:14,15) [2] 운영자 2006-05-09 2287
167 살아있는 자가 예배드려라.(마8:21,22) [4] 운영자 2008-03-21 2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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