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메시아에게 살인죄는 성립되지 않는다. (행2:37‐41)

조회 수 1606 추천 수 131 2008.11.14 18:3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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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에게 살인죄는 성립되지 않는다.
사도행전강해 (12)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2:37‐41)



사상 최대의 설교

베드로는 오순절에 천하 각국에서 모인 유대인들을 향해 기독교 최초의 설교를 행했고 본문은 그 설교를 들은 결과다. 설교가 나사렛 예수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기에 그리스도 주라는 아주 간단한 내용이었는데 비해 그 반응은 엄청났다. 끝나자마자 즉각적 호응이 나타날 정도로 영향력이 대단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한 마디에 현장에서 3000명이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만 찾아도 천국에서 큰 잔치가 벌어진다는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삼천 명이나 동시에 탄생했다는 것이다. 기독교 최초의 설교는 가히 사상 최대의 설교였다.

현대 선교의 아버지 캐리가 인도에서 한 명 전도하는데 수십 년이 걸렸고 오늘날도 제대로 전도하려면 뼈를 깎는 수고와 기도가 장기간 뒷받침 되어야 한다. 오순절에는 도대체 어찌된 연유일까? 물론  하나님이 하셨다 하면 그만이자 가장 정답이다. 그러나 오늘날도 대형 전도 집회를 수시로 하고 있고 개인적 전도도 많이 하는데 그냥 지나쳐선 안 될 본받을만한 요소는 분명 있을 것이다.  

본문에는 구원 과정이 명백하게 나타나 있지 않지만 당시 상황과 성경의 앞 뒤 문맥을 살펴보면 참으로 음미할 만한 내용이 숨겨져 있다. 청중이 처음으로 나타낸 반응이 어떠했는가? 설교를 들은 자들이 마음에 찔렸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다. 이에 베드로는 회개하여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면 구원받게 된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전혀 새삼스럽지 않은 구원의 공식이다. 신자라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불신자가 회심하는 절차를 동일한 순서대로 말하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도 불신자들에게 "예수 믿고 회개하시오. 그 분이 죄를 사하시고 구원을 주십니다."라고 열심히 전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대부분 소  귀에 경 읽기 같은 반응만 접하지 않는가? 그럼 베드로와 우리의 차이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반드시 주지해야 할 사항은 구원의 단계를 말로는 그렇게 밖에 표현 못하지만 사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한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에 담겨 있는 내용과 은혜는 너무나 풍성하다. 그럼에도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문자 그대로 예수를 구주로 인정하여 회개하고 세례 받으면, 즉 외형적 순서만 따르면 구원 된 것으로 간주해버린다. 세례 받는 것은 어차피 믿은 후에 받는 종교적 의식이지만 예수를 구주로 인정하여 회개한다는 진정한 의미를 잘 모르고 있다.  
      
본문에 따르면 설교를 들은, 즉 전도를 받은 후에 일어난 최초의 반응은 마음에 찔림이 있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알게 모르게 죄를 일상적으로 짓는다. 거기다 베드로 설교 현장에 있던 유대인들로선 아무 죄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다. 그래서 찔림이 있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을 것이라고  쉽게 생각해선 안 된다. 지금은 그런 상식적인 도덕적 찔림이 아니었다.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도 그런 죄를 지적하는 부분이 있긴 하다.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 박아 죽였으나(23절)", 또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36절)"라고 지적했을 때에 분명히 양심에 가책은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앞 뒤 문맥을 살펴보면 설교의 핵심이 살인죄를 지적하는 데에 있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너희 죄를 회개하라, 너희 잘못을 하나님께 자백하고 용서를 빌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말하자면 회개의 촉구를 하지 않은 채 설교를 마쳤다.

오히려 초점은 너희들이 못 박은 자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였다는 점에 두었다. 너희들은 비록 못 박았지만 하나님은 그를 죽음에서 살리셨다. 너희들이 그토록 대망했던 메시야를 너희들이 못 알아 봤다. 구약 성경의 다윗의 시편을 장황하리만큼 인용했던 이유도 그분이 살아계셨을 때에는 비록 몰라봤더라도 지금이라도 그 분의 메시야 되심을 깨달으라는 것이었다. 베드로의 전도는 한마디로 살인죄에 대한 회개의 촉구가 아니라 메시야 구원으로 초대였던 것이다.  

마음이 찔린 이유는?

그런데 문제는 원죄 하의 인간은 그 영혼이 사단에게 미혹되어 있다. 자기 죄를 지적당했다고 절대로 그 자리에서 쉽사리 회개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만 명에 한명도 찾기 힘들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극렬하게 반발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유가 무엇이었는가? 자기들 죄를 신랄하게 지적당한 것도 크게 차지하지 않았는가?

지금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다. 자기들이 저지른 행위의 정당성을 쉽게 번복하지 못하고 계속 고집해야 할 때다. 도저히 옴짝달싹 못하는 증거를 들이대어야만 마지못해 잘못을 시인하는, 그것도 척만 하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다. 그러나 돌아서면서 하는 첫마디가 무엇인줄 아는가? “쳇 자기가 뭔데? 하나님이나 되는 줄 아나.”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사이라 할 수 있는 부부간에도 예외는 아니다. 부부싸움의 중요 원인이 경제문제, 자녀교육, 고부간의 갈등 같은 것들이 아니다.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서로 의논해서 해결하기 바빠 오히려 싸울 기회가 적다. 단간 방에서 아무 것도 없이 지낼 때가 가장 행복한 법이다. 부부싸움의 10중 8, 9는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렸을 때다. 말하자면 본인의 잘못을 지적당하면 죽어도 참지 못한다. 각자의 성격이나 장단점을 이미 알대로 다 알게 된 사이인데도 그렇다. 나이 80이 넘어도 자기 잘못을 지적당하면 팩하고 성깔을 부리는 것이 인간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단 직접 당사자가 아니라면 수많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설교로 도덕적 회개가 일어났다고 단정 짓기는 무리다. 그것도 베드로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서 못 박았다고 일종의 변호(?)까지 해주었는데 양심에 찔릴 이유는 크게 없었지 않았겠는가? 설령 빌라도 법정에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라고 고함쳤던 자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해도 동시에 삼천 명이나 회개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당시의 정확한 사정은 모르지만 그 정도면 골고다 언덕과 빌라도 법정에 있었던 사람 숫자보다 훨씬 많지 않겠는가? 쉽게 도덕적 회개를 할 가능성은 더 낮아진다는 말이다.  

그들이 정작 마음에 찔렸던 것은 베드로가 지적한대로 메시야를 몰라보았다는 점이다. 나아가 도리어 십자가에 죽여 버렸으니 이러다 구원의 기회는 완전히 놓치고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되지 않을지 염려가 수반된 찔림이었다. 하나님 당신께서 메시야로 직접 오셨다는 사실은 그분이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자신들은 그 손길을 뿌리친 셈이었다.

“너희는 하나님과 불화했었고 아니 그분을 아예 외면하고 배반했었다. 모든 일을 너희 마음의 소견대로 했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께서 직접 메시아로 오셨다. 너희들이 누구인가? 바로 그분이 택한 거룩한 백성이지 않느냐? 그런데도 너희들은 몰라보는 정도를 넘어 아예 십자가에 못 박았지 않느냐?” 베드로의 설교 가운데 담겨진 이런 뜻을 그들은 깨달았기에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큰 흔들림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어떤 측면에선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은 살인죄가 성립 되지 않는다. 그분이 메시아인데, 즉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게 어떻게 살인죄가 적용될 수 있는가? 물론 성육신하시고 이 땅에 계실 동안에는 완전한 하나님이자 완전한 인간이었기에 십자가에 매달은 것은 분명 살인이었다. 유대인과 로마인이 그 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부활 승천하신 이후 모든 세대의 인간들의 경우는, 지금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는 청중들을 포함하여, 사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또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기에 살인이 아니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이제는 그분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다 이루셨다는 것이다. 죄와 사단과 사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간을 구속하는 사역을 완수하였다. 따라서 오순절에 모인 유대인들에게도 단순히 살인이라는 윤리적 죄를 따지기보다는 더 근본적이고도 영원한 구원을 문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베드로는 지금 살인죄가 아니라 참 하나님을 외면한 죄의 회개를 촉구한 것이다.    

그런 베드로의 의도는 청중들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하나님 그분을 배반하고 죽였으니 이제 도대체 무슨 수로 그분과 화목할 수 있단 말인가?”가 그들의 찔림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자기들이 저지른 일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야말로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도저히 다시 쓸어 담을 수가 없었다. 자기들 세대에 직접 오신 메시야를 몰라보고 죽이기까지 했으니 어떻게 그 일을 회복시킬 수 있겠는가? 이미 승천하신 예수를 다시 오시라고 해서 새로 믿을 수도 없지 않는가?

그러나 그 엄청난 사태에 비해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들이 범한 잘못의 근본 원인은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그저 한 사람의 정치사상범인 인간사형수로 간주했었다. 그렇다면 그 원인부터 제거하면 된다. 그분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청중들은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안절부절 했지만 베드로의 대답은 아주 간단했지 않는가? “주 예수를 믿어라. 그분을 메시아로 받아 들여라.”

만약 예수가 인간 사형수에 불과하다면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다. 아무리 종교적 사상범이라고 해도 당시에 통용되던 실정법을 어겼고 또 그 법절차대로 사형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매달라고 아우성쳤지만 유대법상 하나님을 모욕한 죄는 사형이었다. 대제사장 즉, 대법관이 신성모독죄라고 판결해 주었고 자기들이 봐도 그런 것 같았다. 비록 제사장들의 선동에 넘어간 측면이 있다고 해도 예수가 인간이었다면 정당한 법 집행이었다. 구태여 양심에 크게 가책 받을 일이 아니다.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했을 때만이 그분을 외면 부인 배반한데다 죽이기까지 한 일에 진정한 찔림이 생긴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당시 유대인들도 그러할진대 이천 년 전에 죽은 로마의 사형수 예수가 윤리적 회개를 촉구하지 못한다. 전도를 해보면 그 사람이 십자가에 죽은 것과 내 죄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반발만 접하지 않는가? 기독교 신앙으로 넘어오지 못하는 가장 큰 인식의 차이다. 결국 예나 지금이나 예수가 하나님으로 메시아인가 아니면 일개 인간인가가 구원을 결정짓는 분수령이다.  

오순절 집회의 특징

오순절에 세례 받은 삼천 명 중에는 방금 전까지 성령에 취해 방언하는 제자들을 보고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행2:13)고 조롱했던 자들도 많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영적 수준은 메시아 예수님이 죽어 없어졌기에 하나님과 화해할 길이 영영 없어진 것은 아닐지 눈에 보이는 현상으로만 이해하는 정도였다.

그런 자들이 예수가 메시아라는 아주 단순한 호소에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거꾸로 조롱했던 대상에게 애걸하다시피 했다. 자기도 모르게 영혼의 찔림을 받아서 구원의 갈급한 소망을 입술로 고백하게 된 것이다. 제자들에게 차고 넘친 성령의 임재가 그들의 심령 깊숙한 곳을 터치했기 때문이다. 그들로선 아직 성령의 은혜인 줄 구체적으로 인식하지는 못했겠지만 그 찔림과 또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은 심령 깊숙한 곳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온 것만은 분명했다.  

그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 단순히 구원 절차를 설명해준 것이 아니었다. 청중들이 가장 염려했던 바로 그 문제를 해소시켜 준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고 했다. 메시아가 이 땅에 더 이상 계시지 않는다고 해서 걱정할 것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예수를 직접 만나지 않고 “그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의 세례를 받으면 된다는 것이다. 예수는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임을 확신하고 그분의 구속의 은혜와 권능을 받아들이기만 하라는 것이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즉 성령이 내주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평생토록 거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물론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 그런 설교를 하고 있는 베드로 본인도 아직은 성령의 역할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 단계였다. 자기도 그저 성령의 권능에 힘입어 그분이 자기 입에 심어주는 대로 전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스피커나 녹음기 역할만 했다는 뜻은 아니다. 분명 예수가 메시아라는 흔들릴 수 없는 확신 위에서 전했고 또 전해지는 메시지도 오직 그것이었다.

한 마디로 베드로는 “어찌할꼬”라는 청중들의 물음에 “전혀 걱정하지 말고 성령으로 자기들처럼 거듭나라”고 대답한 것이다. 예수 본인이 없더라도 그분과 동일한 보혜사 성령이 구원을 주시는 통로가 되니 아무 염려 말라는 것이다. 또 인간으로 오신 예수 대신에 성령이 구원의 통로가 되기 때문에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도 그분의 이름만 부르고 회개하면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이후의 모든 세대는 성령으로 거듭나야만 구원이 유효화 된다는 것이다. 단순히 자기가 믿기로 스스로 결단만 해선 기독교인은 될지언정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해서 섹스, 폭력, 방탕, 탐욕 등에 빠져 있는 자들로부터 구원을 얻으라는 뜻이 아니다. 도덕의 타락은 모든 시대 모든 장소 모든 인종에게서 항상 있어 왔다. 패역(悖逆)한 것을 성경이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가? “그 열조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고 그 심령은 하나님께 충성치 아니한 세대”(시78:8)라고 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22절) 자들이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그리스도임을 부인하는 것이 패역이다. 제발 다른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인간으로 볼지라도 진정 그분을 구세주 하나님으로 모시는 자라야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패역은 얼마나 많이 죄를 짓느냐 여부로 결정되지 않는다. 죄로 따지면 모든 인간이 똑 같다. 사람마다 말로 마음으로 심령으로 짓는 것과 행동으로 짓는 것 즉, 죄를 짓는 방식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세상의 의인들과 경건한 종교인들은 지성과 교양과 계율로 무장해서 행동으로 튀어나오는 것을 막을 뿐이지 속으로는 살인, 간음, 질투, 폭력 등의 죄를 감옥에 있는 자들보다 많았으면 많았지 절대 적게 짓지 않는다. 도덕적 죄를 회개하거나 선행을 한다고 결코 구원 받을 수 없는 까닭이다.

인간이 방탕과 부정한 죄를 지어 구원 못 받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지은 죄에 양심이 찔려 하나님과 멀어진 것도 결코 아니다. 하나님을 부인하니까 즉 천국과 지옥 같은 최후의 심판을 전혀 걱정하지 않으니까 마음대로 죄를 짓는다. 진정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며 그분도 믿었을 것이다. 또 예수님의 말씀은 쉽게 믿지 못했어도 하시는 일을 보면 구세주임을 알았을 것이다. 예수를 인간에 불과하다고 보았으니 마음 놓고 십자가에 매달았던 것이다. 그럼 인간이 가장 먼저 시급히 해야 할 일은 몇 가지 윤리 도덕적인 죄를 뉘우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나오는 것이지 않는가? 다른 말로 예수를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한 이래 인간의 곁을 떠나신 적이 없다. 역사의 어느 한 순간도 그분의 은혜와 권능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나 함께 하셨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것이다. 구약시대나, 예수님 당시나, 예수님 승천 이후에나 영이신 그분은 인간의 영과 교통하신다. 오순절 예루살렘 성전 앞에도 하나님은 계셨다. 아니 역사상 가장 충만하게 임재하셨다. 베드로가 유대인더러 너희가 매달았던 그분이 바로그리스도라는 단순한 설교가 찔림을 줄 수 있었던 이유도 성령의 역사였다.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이 의식하건 못하건 그 강력하고도 충만한 성령의 영향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들은 베드로의 설교 직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동시에 방언으로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을  이미 보고 들었었다. 말하자면 설교 행간(行間) 중에 이런 호소가 그들의 영혼에 비수가 되어 꽂힐 수 있는 바탕이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너희들도 방금 방언을 통해 보고 듣고 느꼈지 않느냐? 하나님이 살아 계시지 않느냐? 너희가 죽인 예수가 메시아임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엄청난 역사를 왜 부인하느냐? 예수가 없으니 구원 받지 못할 것이라 염려하지 말고 제발 당부하건대 그분의 무한하신 은총과 완전하신 권능 앞에 지금 당장 무릎 꿇어라!”

당연히 청중들에게도 이런 생각이 자연히 들었을 것이다. “저들에게는 하나님이 분명 함께 하고 계신다. 예수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도 저들에게 저런 신령한 현상이 일어난 것을 보면 자기들 말대로 분명 성령을 받았다. 저들이 믿는 예수가 메시아임이 틀림없구나. 지금이라도 예수를 믿으면 성령의 역사가 우리에게도 일어나겠구나. 정말 예수의 이름으로 회개하여 죄 사함을 받는 길 외에는 구원의 방도가 따로 없구나.”

역사상 가장 충만하게 임재 했던 성령의 근본적 역할이 방언 같은 초자연적 현상을 일으키는 것만이 아니었다. 복음이 복음답게 담대하게 전해지게 하고 또 듣는 자의 심령에 찔림이 일어나게 하여 예수를 주로 시인케 한 것이었다. 베드로의 설교에 비해 오늘날의 전도 현장에 부족한 것은 바로 이것, 성령의 역사다. 전하는 자에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실제로 함께 하심이 완연히 드러나지 않아서 말로 전해지는 복음이 전도 대상자의 심령에 찔림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 하노니 너희도 알거니와 너희가 이방인으로 있을 때에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 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1-3)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길 외에는 구원이 없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을 고쳐주자 종의 주인이 더 이상 이익을 볼 수 없음에 앙심을 품고 감옥에 가두어 버렸다. 한밤 중 깊은 옥에서 찬양하고 기도한 바울 일행을 하나님은 지진을 일으켜 감옥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담당하고 있는 죄수가 도망가면 간수가 대신 형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 중범들이 다 도망간 줄 알았던 간수는 칼을 꺼내들고선 차라리 자결하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이 죄수들은 아무도 도망가지 않았으니 벌 받을 일이 없다고 간수를 안심시켰다. 자살까지 할 뻔 했던 사태가 아무 탈 없이 종결지어졌다.

말하자면 간수는 사실상 잘못 한 것 하나 없었다. 또 일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기적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사태가 무사하게 종결된 뒤에도 ”무서워 떨며 바울과 살라 앞에 부복했다.“(29절) 무기를 가진 간수들이 지키고 서 있었을 텐데도 왜 무서워 떨었을까?

그 자리에 임재하신 성령의 권능을 느꼈던 것이다. 말하자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바울과 실라를 신적존재로 착각했다는 뜻이 아니다. 사도들이 그런 절망 가운데도 감사하며 기도하고 찬양했고 또 그로 인해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고 나아가 그럼에도 도망가지 않은 두 사람의 범상한 모습 앞에 저절로 두려워진 것이다. 사도들에게 충만히 임재하여 역사하는 성령의 영향력이 그 간수의 심령에도 찔림을 일으킨 것이다. 자연히 바울 일행에게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이까”(행16:30)라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불현듯, 어쩌면 생전 처음으로 어찌하여야 이 죄 많고 곤고한 인생을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 수 있을지 염려가 된 것이다.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두려움에 가득차서 한숨 섞인 고백이 절로 나왔던 것이다. 윤리 도덕적 죄에 대한 회개가 결코 아니었다. 자기라는 인간 전부가 영원히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였다.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가 하나님에게만 맡기느냐 아니면 지금까지처럼 자의적(恣意的)으로 사느냐의 기로에 선 것이었다. 그에 대한 바울의 대답도 오직 하나뿐이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데 그 간수를 전도한 바울 본인의 경우도 동일했다. 그는 나사렛 이단을 없애서 율법과 성전 중심의 정통 여호와 신앙으로 회복시키려 했다. 당연히 너무나 의로운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러다 대제사장의 허락을 받아 멀리 다메섹에 있는 크리스천마저 잔해하려고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대일로 맞닥뜨리게 되었다. 하늘에서 빛이 비쳐 눈이 멀게 되고 하늘로부터 예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곧 바로 “주여 뉘시니이까?” 라고 물었다. “나는 네게 핍박받는 예수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또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라고 되물었다. 생전 처음 겪는 신비하고도 두려울 수밖에 없는 사건의 와중에서 바울에게 어떤 윤리적 뉘우침이 생겼을 리는 만무하다. 도저히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었고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바울은 오로지 자기 의에 가득차서 하나님 앞에서조차 자랑스럽고 당당했었지 않는가? 지금껏 인간적 의를 실천하기 바빴던 그였다. 그러나 율례에 묶여 관념적이고도 교리적으로만 아는 하나님을 최고로 열심히 믿었다. 그에겐 어떤 선행과 공로 없이도 구세주 예수를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는다는 복음은 나사렛 이단임에 분명했다. 동족들이 더 이상 그 이단에 빠지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만 했던 그가 살아 계신 예수를 만난 것이다. 도덕적 의인이자 관념적 종교인이었던 그가 생전 처음으로 자기 생명이 걸린 문제에 맞닥트려져 하나님의 진짜 구원을 얻어야만 하는 절대 절명의 순간을 맞은 것이다. 자연히 자기도 모르게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바로 주라고 호칭했다. 방금 전까지 예수를 나사렛 이단의 괴수로 멸시했던 자가 말이다. 그리고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 즉, “어떻게 하여야만 구원을 얻으리이까?”라고 완전히 주님 앞에 항복했다.

그때까지 그가 복음의 구체적 내용을 가르침 받은 것이라곤 전혀 없었다.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 죄를 뉘우칠 수 있는 여유 또한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예수를 그리스도 주라 시인했었다. 또 그것이 전부였다. 그런 바울을 예수님은 군말 없이 용서해주시고 큰 사명까지 부여했다. 그것도 예수님 당신이 먼저 그를 찾아와서 만나 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이다. 바울이 구원 받기 위해 한 일은 오직 예수님의 정체성을 인간에서 하나님으로 바꾼 것뿐이었다.

지금 베드로가 설교하는 시점은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겨우 50일밖에 지나지 않았다. 천하각국으로부터 온 경건한 자들뿐만 아니라 빌라도 법정에, 골고다의 처형장에, 말하자면 살인의 현장에 직접 참여했던 자들도 그 자리에 분명히 함께 있었다. 그런 자들에게도 베드로의 설교로 찔림이 생긴 것은 윤리적 회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 또한 성령님의 간섭을 통해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비로소 예수님의 실체를 제대로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만남이 절대로 그들의 내면적 사고영역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베드로 설교의 진위여부를 스스로 분석하고 이해하여 합리적이라고 수긍하는 절차는 아예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정말 예수를 제대로 믿어 봐야지 하고 의지적으로 결단한 것도 아니었다. 빌립보 간수와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주여! 나는 어찌 해야 할까요?”라는 간구가 튀어나왔던 것이다. 그것마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로 성령이 그들의 영혼에 간섭해 준 것이었다.

베드로가 오순절 청중에게, 또 바울이 빌립보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고 회개하라는 초청의 구체적 내용은 이것이다. “심판에 대해 아무 걱정하지 말라. 더 이상 죄책감에 묶여 있지 말라. 선행과 공적을 쌓아서 구원을 얻으려 노력할 필요는 없다. 아니 너희가 평생을 그렇게 노력했어도 과연 온전한 평강을 맛본 적이 있더냐?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 다시 살아 나셨다. 또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셔서 우리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그 분은 바로 이 자리에 성령으로 임재해 계신다. 너희들이 지금 구체적으로 잘 몰라도 마음에 찔림이 생긴 것은 그분이 너희 영혼에 울림을 주신 것이다. 주님이 너희를 먼저 찾아 오셔서 화해의 손길로 너희들을 부르신 그분의 은혜다.  너희가 지금 아무 한 일도 없고 아니 죄 중에 빠져 있고 그분과 원수 된 사이에 있더라도 그분이 그렇게 하셨다. 그런 너희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실 만큼 너희를 정말로 사랑하신다. 너희가 할 일은 오직 하나뿐이지 않느냐? 그분을 구세주로 영접하라. 그리하면 너와 너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신앙의 처음과 끝  

구원의 첫 과정은 반드시 영적 찔림으로 시작한다. 다시 말하지만 도덕적 종교적 찔림이 아니다. 신령한 체험을 해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성령을 통해 자신의 영이 영원히 살아계신 예수님과 마주치는 것이다. 하나님이신 그분의 인격과 죄에 찌든 한 인간의 인격이 일대일로 실제적 체험으로 온전히 만나야 한다. 오직 죄인과 구세주 둘 뿐의 만남으로 다른 어떠한 것들도 그 만남에 간섭하거나 영향을 줄 수 없다.

지금까지 쌓아온 인격, 교양, 직위, 재물, 권력이 아무리 고상하고 높아도 또 철학적 종교적 사고의 틀이 아무리 고상하고 심오해도 그 만남에 털끝만치도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 그분의 거룩한 임재 앞에 한 더럽고 추하며 연약한 인간이 벌거벗은 모습으로 꿇어 엎드리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일방적 초대와 그분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지는 만남이다. 내 자신의 진짜 실체를 완전히 되돌아 볼 수 있는 찔림을 그 분이 우리 영혼 속에 심어주는 것이다. 성령의 장중(掌中)에 한 인격체가 전적으로 사로잡히는 최초의 체험이다.

예수님이 승천했다고 역사 속에 실존했던 메시야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으로  오히려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당신을 주로 시인하고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을 아바로 부르는 권세를 주셨다.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라면 누구라도 그 삶과 인생의 온전한 주인이 되어주신다.  베드로도 설교의 결론 부분에서 그 점을 강조했다.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고 했다. 창세기부터 구약성경 곳곳에 계시되어 있던 인류구원의 약속이 예수님의 부활 승천과 더불어 성령강림으로 완벽하게 성취되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찾는 모든 개인에게는 지성소로 가는 길이 아무 장애 없이 활짝 열린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가면 내가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요14:7-9)라고 약속하셨다. 성령이 와서 죄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을 책망, 즉 마음에 찔림이 있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죄를 어떻게 설명했는가? “나를 죽인” 죄가 아니라 “나를 믿지 아니한 것”이라고 했지 않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어 죽으러 이 땅에 오셨다. 죽음과 부활과 승천이 그리고 이어지는 성령의 강림이 인류 구원 계획으로 순차적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유대인들의 살인죄는 죄도 아니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 이전에 그분 구세주를 제대로 믿지 못하는 것이 더 근본적 죄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죄인이 예수를 믿지 않았던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은 그 죄인의 나머지 윤리적인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구원 받았을 때에 혹은 구원을 받고 싶었을 때에, 아니면 구원이라는 용어의 의미도 잘 모르고 단순히 신앙생활을 해보고 싶었을 때에 어떤 이유와 필요에 의해서였는가? 믿음을 가짐으로써 무엇을 목표로 했으며 또 지금 하고 있는가?

기독교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는 것이자 그분을 자신의 온전한 주인으로 모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 당신이시오 유일한 인생의 소망이자 삶의 원천되심을 내용으로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빌립보 간수나, 회심하기 전의 바울이나, 오순절에 천하각국에서 모인 경건한 유대인들도 하나님은 알고 믿었다. 그러나 그 분께로 나아가는 길 즉, 구원받는 길은 전혀 잘못된 길이었다.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일대일로 만나지 않고는 영생은 없다.

인간 쪽에서 하나님을 알고 믿는 것과 하나님 당신께서 그 사람을 개인적으로 정말 용납해 주었느냐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완전한 비유는 아니지만 대통령을 전 국민이 알아도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한 것과 같은 이치다. 또 내가 좋은 일을 하여 대통령이 나를 알아보게 해야지 한다고 나를 개인적으로 알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해서도 내가 그분을 아는 것으로 그만이라고 간주하거나 내 쪽에서 그분 앞에 점수를 따려고만 한다. 그러니 구원을 은혜로 주시는 예수는 당연히 필요 없다. 나사렛의 목수이자 로마 사형수일 뿐이다.

정작 문제는 아무리 그렇게 노력해도 나는 하나님을 아는데 그분이 나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으리라고는 평생 가도 믿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원 받았다는 확신이 없어서 영혼의 평강을 누리지 못한다. 바울이 죽기 살기로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러 나선 것도 역설적으로 따져 보면 하나님 앞에 자신의 공로를 최대한 쌓다보면 혹시 평강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 날 같은 희망 때문이었다. 그러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눈이 멀게 하자 세상과 자기 속의 어떤 것에도 의지할 수 없게 되었다.  

비로소 자기야말로 하나님을 세상에서 가장 잘 안다고 자부했던 것이 얼마나 어리석었든지 알게 된 것이다. 지난 삶들이, 정말로 율법에 의로웠고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 열심에서도 최고였는데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참 긍휼이 없기에 헛되고 헛되었다는 것을 절감했다. 어떤 선행과 공적으로도 하나님 앞에 떳떳이 나아갈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길 외에는 하나님이 자기를 용납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아니 나사렛 예수가 바로 하나님인데 그분을 외면하고는 도무지 구원이 불가능함을 깨우친 것이다. 그것도 자기가 노력하여 분별하고 이해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꼼짝 없이 무릎 꿇게 만든 후에 성령의 간섭으로 저절로 “내가 어찌할꼬?”라는 고백이 새어나오게 한 것이었다. 그 후로 그가 오직 예수를 믿으라는 말만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기독교 믿음이 그로 인해 돌아오는 어떤 유리한 점 때문에 결코 요구되지 않는다. 기도하여 병이 낫고 돈을 벌고 공부 잘하고, 심지어 말씀으로 인격을 도야하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사는 것조차 신앙의 근본 목표가 절대 될 수 없다. 일생의 어느 순간에 하나님의 절대적 계시이자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딱 마주쳤기 때문에 도저히 옴짝달싹도 할 수 없이 그 분께 완전히 항복한 것이다. 그래서 그 분께 순종하며 영원히 동행하는 것만이 인생의 진정한 목표가 된 것이다. 풍요든 궁핍이든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 갈 것이며 설령 죽으라고 하더라도 기꺼이 죽는 것이다.

심지어 신앙으로 남을 섬기는 삶을 살고자 하는 것조차 신앙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어떤 의롭고 경건한 행위라도 신앙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만약 이타적 삶 자체가 목표가 된다면 여전히 바울처럼 하나님을 위한 선행을 찾아서 눈에 쌍심지를 세우고 다메섹 도상을 달려가게 될 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의보다 앞서가는 신자의 인간적 의는 무엇이라도 잘못이다.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을 취득하거나 이뤄나가는 행위일 수 있다. 믿음이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구원을 선물로 받는 데에 통로로 동원될 뿐이다.

재삼재사 강조하지만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이루신 일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 구원 이후도 마찬가지다. 믿음이 행위를 이루는 수단이거나, 믿음 그 자체도 행위가 되어선 안 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통해 이루시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준비요 헌신을 넘어서는  믿음은 인간적 의다. 쉽게 말해 믿음이란 오늘도 내일도 두 손 들고 “이 모습 이대로 주께 나왔으니. 주여! 저를 받아 주시옵소서.”라고 엎드리는 것일 뿐이다.    

우리가 "Yes"해서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아니듯이 지금도 우리 모두는 그저 핑계만 있으면 "No"하고 싶은 자다. 주님의 긍휼과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한 순간도 믿음마저 제대로 지킬 수 없는 자다. 요컨대 믿음은 평생토록 영혼의 찔림으로 호흡하는 것이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나 “주여 어찌할꼬?”라는 간구가 입에 절로 붙어있어야 한다. 그 의미도 처음 예수를 만났을 때나 구원 받은 이후나 한결 같아야 한다. 스스로 의로워질 수 있다는 자부심이 가장 어리석다 못해 죄였음을 깨닫고 오직 내가 하나님에게 용납되어져 그분이 성령을 통해 베푸시는 은혜와 권능만을 갈급해 하는 것이다. 혹시라도 여러분의 “주여! 어찌할꼬?”는 오로지 환난에서의 건짐 받는 것만을 구하는 의미는 아닌지?

11/13/2008
 (1996/5/12 유타대학촌교회 주일설교)       


김순희

2010.03.21 13:31:42
*.161.88.93

아멘!! 아멘!

믿음은 평생토록 영혼의 찔림으로만 호흡하는 것이여야함을. 아멘!
그저 기회만 있으면 NO! 하고 싶은 우리의 본성을 예수님의 십자가 아래 무릎 꿇도록 만드신 일은
어떻게 말로 글로 설명이 가능할런지요.

그럼에도 이처럼 세세하게 구구절절하게 표현해 놓으신 글들이 정말이지....

날마다순종

2020.12.24 16:24:39
*.14.99.253

성령님께서 주시는 찔림, 그 은혜가 저와 제 주위에 항상 임해주시길 기도하며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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