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모든 인간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마1:18-25)

조회 수 2076 추천 수 83 2006.03.02 23:5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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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6)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저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가로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 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가라사대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요셉이 잠을 깨어 일어나서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 아내를 데려왔으나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치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마1:18-25)

크리스마스 행사가 없는 교회

저희 교회는 크리스마스 특별행사를 따로 하지 않는다. 가족과 함께 검소하고 경건하게 보내자고 하는 뜻이 아니다. 저 자신이 크리스마스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목사가 무슨 말인가 이상할 것이다. 물론 그럴만한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은 시작한 날도 생명의 끝도 없는 영원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를 통해 자꾸 아기 예수의 생일을 강조하다 보면 성자 하나님이신 구세주 예수님이 약해진다.

또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실제 생일이 아니다. 누가 복음에 아기 예수가 태어날 때에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2:9)라는 기록이 있다. 유대 광야의 12월 25일은 한겨울로 그것도 밤에 양을 들에서 칠 수 없다. 그래서 학자들 간에는 예수님의 탄생이 최소한 늦은 봄 이후에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정확한 날짜는 아무도 모른다.

현재의 크리스마스는 4세기 후반의 로마 주교가 이방신의 축제인 태양신의 날(12/25)에 예수님이 모든 우상과 사단의 세력을 물리치고 이겼음을 기념토록 하기 위해 그리스도에게 미사(Christ + Mass)를 드린 데서 유래한다. 그리고 아기 예수 탄생과는 아무 연관이 없는 크리스마스 트리나 싼타크로스 같은 것들은 후대인들이 이방 풍습에서 본 따 첨가한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육신적 생일이라는 의미를 떠나 예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자들마저도 흥청망청 즐기는 서구 사회의 민속명절처럼 변질된지 이미 오래다. 간혹 경건한 자들도 그 의미를 기껏 구두쇠 영감 스쿠르지 정도에서 찾는다. 년 말에 그 동안 죄를 지은 것 반성하면서 주위에 불쌍한 자를 도와주고 신세진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주는 날 이상의 의미는 찾을래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일반인들이 예수의 생일을 이웃을 돕는 선행과 연결시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고 그렇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의 의미에 대해 현재 통용되는 그 어떤 이해나 인식보다 가장 앞서 중요하게 강조되어야만 할 것이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을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크리스마스는 아기 예수의 생일을 축하하기보다 반드시 구세주 하나님이 왜 꼭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야 했던가 그 의미를 깊이 깨닫는 날이 되어야 한다. 모든 교회가 이제는 크리스마스를 정말 크리스마스답게 지켜야 한다. 당연히 오직 구세주 예수만을 기리는 예배가 그 중심이어야 한다. 강단에선 인류의 죄가 십자가의 보혈로 구속되었음을 선포하고 그 구속 안에 들어온 신자는 더욱 그 은혜에 감사하는 날이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의 이 날에 대한 오해를 고치고 그들과 완전히 구별된 모습을 일부러라도 보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교회부터 그 구속과 아무 연관이 없는 온갖 장식이나 선물 돌리기 같은 행사를 없애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신자들도 예수님이 성육신 한 의미를 깨닫기 전에 과연 하나님이 성육신(成肉身) 하셨다는 사실 자체마저 확신이 없는 것 같다. 최근에는 예수님이 본문 기록대로 성령으로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셨다는 것을 믿지 않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많으며 또 그런 신학을 배운 목사들이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기도 한다. 성육신하신 하나님보다는 단순히 위대한 스승이자 희생적 사랑을 몸소 실천한 한 신령한 신앙인으로서의 예수님을 믿자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졌던 믿음과 품성을 본 받는 것만이 신앙 훈련의 전부가 되었다.

그러면 크리스마스는 하나님과 전혀 무관하고 성도들이 기뻐하며 선물을 돌릴 필요도 없다. 아니 선물은 돌려도 되지만 그야 말로 크리스마스 예배는 드릴 필요가 없다. 예배를 드려도 크리스마스가 쉐익스피어 탄생 몇 주년 기념일과 같은 의미 밖에 지니지 못한다. 예수님의 구속이 강조되지 않고 아기 예수의 탄생만 기념하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자칫 자유주의자들의 크리스마스와 다를 바 없게 된다.

어떤 젊은 목사가 크리스마스 시즌에 동정녀 탄생에 대한 설교를 한 후에 나이든 초신자에게 그  설교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목사님은 약혼자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나 다른 남자와는 아무 관계를 맺지 않았는데 임신을 했고 그것도 하나님의 아들을 베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습니까?”라고 오히려 반문했다. 목사를 비롯해 교인들 모두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했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만약 마리아와 정혼했던 요셉의 입장이라면 믿었겠는가? 요셉은 순수하고 믿음이 출중해서 믿었는가? 솔직히 그도 처음에는 믿지 못했던 같다. 성경이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성경은 예수의 아버지인 요셉 마저 믿지 못한 이야기를 사실로 기록했고 또 우리더러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믿어라고 하는 셈인가?
          
동정녀 탄생의 최초 발설자

예수를 비판하고 반대하는 자들이 주장하기를 어느 종교든 그 창시자를 신격화하기 위해 출생을 신비롭게 꾸미려는 경향이 있는데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도 그런 의도에서 지어낸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잘못을 범했다.

신비스럽게 만들려면 얼마든지 다른 좋은 방법도 많다. 박혁거세처럼 알에서 태어났다든지, 어느날 천둥 번개가 쳐서 바위가 부서졌는데 거기에서 옥동자가 나타났다든지, 하다 못해 아비나 어미도 없이 홀연히 나타난 신령한 도사로 만들면 된다. 그런데 하필이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불륜의 자식으로 아비 없는 사생자라는 비난 받을 것이 너무나 뻔한 이야기를 지어내었겠는가?

동정녀 탄생은 마태와 누가가 가장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각기 직업이 세리와 의사로 당시로는 지식인에 해당된다. 특별히 의사는 전문의 제도가 없던 때라 모든 병을 다 진료하므로 당연히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도 전문가다. 말하자면 가장 과학적인 의사 누가가 자기 지식으로선 가장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가장 길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코 그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리가 없다는 뜻이다.

마태와 누가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면 이 이야기의 근원 즉 최초 발설자는 누구이겠는가? 당연히 마리아와 요셉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사내를 알지 못한”(눅1:34) 상태에서 임신이 되었다고 말해 봐야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 함부로 발설할 입장이 안 된다. 그야말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인척인 엘리사벳과 나중에 배가 불러져 바로 알게 될 정혼한 남편 요셉에게는 은밀히 이실직고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셉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가 마리아에게서 이야기를 전해 듣고 믿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남에게 전할 입장이 전혀 안 된다. 그런 면에서 성경에서 요셉의 증언도 함께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예수 탄생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어떻게 따져 보아도 동정녀 출산은 부부 공히 끝까지 숨겨야 하고 특별히 요셉이 발설할 사안은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사역을 시작하여 사람들 사이에 유명해지고 난 후라도 더욱 그래야 했다. 명성에 금이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불륜으로 비난 받는 정도를 떠나 율법에 따르면 마리아는 혼전 간음으로 사형감이었다. 혹시라도 공소 시효제도가 있거나 사람들이 다 지나간 일로 양해해 정죄를 받지 않는다 쳐도 아예 믿지도 않고 너무나 황당한 이야기라 조롱거리 밖에 더 되었겠는가?

그럼에도 그들 부부와 엘리사벳 세 사람은 그 이야기를 절대로 끝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다른 이유가 없었다. 오직 한 가지 엄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자라나는 모습을 보니까 그 안에 욕심, 사기, 궤휼은 전무하고 사랑과 인자가 넘치며 어려서부터 말씀을 권세 있게 풀었다. 다른 아이들보다 우수하다기보다는 전혀 다른 아이였다. 정말로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갔다”(눅2:52)

그러다 나이 삼십이 되자 예수는 집을 나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선포하기 시작했다. 중풍병자, 문둥병자, 장님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으며 물을 포도주로 만들고 물 위를 걸으며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렸다. 그 동안 두 부부 사이를 얽매고 있던 참으로 미묘한 출생의 비밀을 다시 심각하게 재고해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마리아로선 천사에게 받은 수태고지와 선지자 시므온과 안나에게서 받은 예언을, 요셉은 현몽으로 받은 예수의 소명등이 실제적인 현실로 차츰차츰 나타나고 있기에 그 모든 예언과 특별한 출생의 의미가 부부에게 공히 더 확실하게 인식되었을 것이다.    

나아가 예수 본인도 “나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며,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고, 나를 믿는 자는 나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며,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고 도저히 구세주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들을 담대하게 선포하고 다녔다. 심지어 성전을 헐라 그러면 사흘 만에 다시 짓겠다고도 했다.

그러다 어떻게 되었는가? 예수는 십자가에 죽었다. 그렇다면 모든 예언은 거짓으로 또 그 사역은 단지 신비한 마술로 판명되었는가? 그래서 모든 것이 끝이 났는가? 오히려 죽기 전에 본인 스스로 예언한 대로 삼일 만에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났다. 또 마지막 승천하기 전에 약속한대로 마가의 다락방에 성령이 급하고 강한 바람 소리와 함께 불의 혀 같이 임하여 120명의 제자들에게 권능을 입혀 담대하게 십자가의 비밀을 전하게 했다. 그리고 모든 성령 세례를 받은 사람들의 한결 같은 고백은 그분이 바로 우리 죄를 사하려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메시야였다는 것이다.

어찌 마리아와 요셉으로서 그 출생의 비밀을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있겠는가? 도리어 지금이야말로 떳떳하게 더 밝혀야 할 필요가 있지 않았겠는가? 그 사실을 가장 상세하게 기록한 누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가 언제 어떻게 복음을 받아 들였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성령으로 거듭난 후에는 그분의 구세주 됨에 한치의 의심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속에 지금껏 세상의 것으로는 절대 줄 수 없는 신령한 기쁨과 평강이 생수의 강처럼 흘러 넘침을 체험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땅의 썩어 없어질 것에 대한 미련은 완전히 없어지고 하늘의 거룩한 보화에 대한 갈망만 도저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솟아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 받기 전의 의사라는 입장에선 누구보다도 황당한 불륜의 이야기라고 비난했을 법한 동정녀 탄생이 전혀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음에 틀림 없다. 아니 세상 사람 모두가 믿지 않고 비난을 하든 말든 예수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엄연한 사실에는 한 치의 영향도 끼칠 수 없음을 확신했다. 오히려 그에게 문제는 그분이 왜 그런 모습으로 오실 수밖에 없었던가 그 이유와 목적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복음서에 있는 사실 그대로, 즉 마리아와 요셉이 담대하게 밝힌 예수 출생의 비밀을 기록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셔야만 했던 이유는?

그럼 하나님이 왜 꼭 인간의 모습으로 오셔야만 했는가?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저희 교인 가운데 페인트 업종에 종사하는 분이 셋 있다. 두 분은 이제 시작한지 얼마 안 되었고 한 분은 십년 정도의 경력을 가졌다. 그래서 신참 두 분은 문제만 생기면 고참에게 찾아가 상의한다. 왜 그런가? 솜씨가 좋고 성격이 자상해 잘 가르쳐 주고 영어를 잘해 고객 관리를 잘해서인가? 물론 그런 면도 있지만 고참도 처음에는 보조로 시작해서 모든 궂은 일들을 다 겪어 보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신참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모든 애로 사항을 하나 빠짐 없이 똑 같이 겪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 이 부패된 세상에서 죄와 사단의 권세에 눌려 있는 인간들의 모든 상처와 고통과 연약함을 직접 체휼하기 위해 오셨다. 그래야 인간들의 모든 죄와 고통을 십자가 상에서 감당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또 그래서 죄인 된 인간에게 언제라도 위로와 힘이 되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에게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스승인 인간 예수가 아니다. 우리 모두 지각이 어느 정도 깨인 후에 이것 해라 저것 하지 말라는 훈계를 제대로 따른 적이 있었던가? 인간은 죄 안 짓는 법을 몰라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도덕, 철학, 종교는 흘러 넘친다. 성현들의 가르침에는 정말 가치 있고 따를 만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태도와 습관의 일부를 고칠 수 있을지 몰라도 인간 존재 전체를 변화시킬 수는 결코 없다.

또 인간의 불안과 염려를 없애는 법도 수도 없이 개발 되어 있다. 적극적 사고, 명상, 기 단련, 마인드콘트롤, 입맛대로 자기 적성에 맞게 골라 시행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일시적인 효과뿐이다. 금방 그 방법이 싫증나 색다른 방법을 시도해봐도 그때뿐이다. 영원하고도 완전한 안식과 위로는 세상에선 결코 얻지 못한다.

우리 솔직히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보자. 내게 도덕이 없어서, 깨우침이 부족해서, 종교적 제사를 드리지 않아서, 내가 고통 중에 힘이 빠지고 죄악에 넘어지며 평강이 없는가? 과연 하루에도 수도 없이 우울과 실망에 사로 잡히는 참 이유는 무엇인가? 부모나, 남편과 아내, 자식, 형제, 친구 심지어 자신마저도 자기 속 심령 깊숙한 곳의 갈급함과 공허함을 메워줄 수 있었던가? 어떤 훈련과 연습으로도 인간 속에서 끝 없이 솟는 탐욕과 죄성을 다스릴 수 없다. 그것으로 맺을 수 있는 최선의 결과는 ‘나’라는 존재 전체가 뒤틀려진 상태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는 것 뿐이다. 인간이란 존재 자체는 처음부터 어떤 일이나 물건으로 다스려질 분야가 아니다. 인간을 만드신 분 아니고는 인간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없다. 당연히 세상의 보상책은 헛되고 헛되며, 마셔도 마셔도 목이 마를 수 밖에 없다.

힌두교의 한 저명 인사가 스탠리 존스 목사에게 물었다. “기독교에서 힌두교가 도무지 제공할 수 없는 것 딱 한가지를 들라면 무엇인가요?” 존스 목사는 주저 없이 “예수”라고 대답했다. 어떤 도덕적 계명이나, 종교적 훈련이나, 신령한 체험이 아니라 오직 구세주 되신 예수님만이 다른 모든 종교와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시하러 이땅에 오지 않았다. 자신의 전부를 우리를 위해 내어 놓기 위해 오셨다. 그래서 마지막 피 한 방울마저 흘리고 모든 살이 찢기며 심장이 터졌다. 죄와 환난 가운데 눌려 한숨 짓는 우리와 함께 울고 한숨 짓기 위해 오셨다. 우리를 지으신 바로 그분이라 우리의 체질을 너무나 잘 아시기에 모든 허물과 죄악과 고통을 대신 감내하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다. 이 세상의 어떤 위대한 스승도 가르침을 줄 수 있을지언정 모든 고통을 대신하고 죄에서 건져 줄 수는 없다.

“어떻게 처녀가 남자도 모르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가? 순전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치장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다”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탓할 수는 없다. 바로 그것이야말로 그가 아직도 참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고통과 죄악 가운데 있는 한 연약한 인간임을 반증하는 증거다. 그러나 그들에게 딱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다. 과연 도덕을 몰라 계속 죄를 짓고 있는가? 가르침이 모자라 아직도 갈급해 하고 있는가? 자신의 심령 깊숙이 숨겨져 있는 남들은 아무도 모르고 또 들키기 도 싫고 심지어 자신도 인정하기 싫은 그 공허와 갈급함을 과연 무슨 방도로 매울 수 있는가 말이다.
아기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된 까닭은 인간 존재 전체에 뿌리깊이 박혀 있는 원죄와 심령의 피폐함을 성령의 은혜가 아니고는 결코 치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 존재 전체를 바꾸는 길은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당신의 전부를 내어주어 인간의 모든 죄를 사해주고 그 고통을 감당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은 말로 야단쳐서 선해질 존재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기독교를 신비화 시키려 했다면 얼마든지 휘황찬란하고 신묘막측하게 위장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은 구유에 태어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단 한번도 하나님의 진리와 사랑에 바탕을 두지 않은 적이 없었다. 동정녀 탄생을 믿느냐 안 믿느냐의 차이가 과학적 지식이나 종교적 깨우침의 우열로 나눠지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자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일 뿐이다. 다른 말로 하면 내 인생에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이 내 죄를 씻어서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 받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내  주위 여건을 바꾸어 더 편안하게 사는 것을 원하는가의 차이다. 지금 당신에게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것은 과연 무엇인가?              

(1/13/2002 나무 십자가 교회 주일 설교, 3/2/06 정리)

정순태

2006.03.03 00:41:41
*.95.73.2

아멘! 역시 큰 은혜와 깨우침 받아 갑니다! 감사~~~ 2가지만 언급하겠습니다.
먼저, 주님 탄생기사가 너무 초라하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석가처럼 모친의 옆구리에서 나오자마자 좌우 칠보를 걸으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고 외칠 정도는 되어야 했지 않을까요? 근데, 주님은 모친의 옆구리로 나오지도 못하셨고 좌우 칠보는커녕 냄새나는 구유에 뉘였었을 뿐입니다. 우리 주님은 탄생모습부터가 영웅적(?)이지 못했습니다. 또 목사님 말씀처럼 불륜의 자식으로 오해될 가능성까지 있습니다(사생아라는 견지의 주장들이 많습니다).....왜 이처럼 초라하고 지탄받을 수 있는 모습으로 오셨어야 하는지에 대한 일단의 답변이 목사님 글에 설명되고 있기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음, 동정녀 탄생을 믿을 수 있느냐 믿을 수 없느냐의 문제는, 창1:1에서 이미 결판난 사항입니다! 창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입니다. 동정녀 탄생은 유에서 유를 창조한 것입니다(물론 이 표현은 잘 소화해서 들어야 합니다). 창1:1절을 믿는다면 동정녀 탄생을 저절로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논리적인 귀결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라면 유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할 뿐이니까요.....(물론 우리 주님은 결코 창조된 분이 아니라는 진리는 다 알고 계십니다!!! ^0^)
암튼, 목사님 글을 읽을 때마다 뭔가 새로운 깨우침을 얻게 되기에, 늘 감사하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전합니다. 샬롬.

김광찬

2006.03.03 05:20:08
*.248.136.176

아멘 귀한말씀 감사드립니다.

김광찬

2008.06.08 08:35:03
*.169.140.105

몇번째 다시 읽어도 정말 진리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아멘하고 싶습니다 아멘 †

날마다순종

2020.11.07 16:39:08
*.14.99.253

하나님께서 비천한 인간의 모습으로 동정녀에게 나시어 우리의 연약함을 몸소 체율하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까지의 그 대속과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고도 깊은지, 이를 헤아릴 수도 없지만 그 놀랍고도 크신 사랑을 재삼재사 확인할 뿐입니다. 정말 몸둘바 모르게 감사 또 감사하며 찬양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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