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당신의 평생소원은 무엇인가?(마2:9-12)

조회 수 1790 추천 수 95 2006.06.10 19:2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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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12)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마2:9-12)

인간은 로봇인가?

동방박사들이 무례하게도 갓난아기더러 죽음을 준비하라는 의미가 담긴 몰약을 선물한 것은 본인들이 의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으로 이끈 결과였다. 따라서 신자가 하나님의 전능성을 생각할 때에는 단순히 그 능력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분의 선하신 뜻과 계획부터 먼저 완전히 신뢰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으로 이루신다는 것은 세상만사의 절대적 주권성이 오직 그분에게만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모든 가능성을 오직 하나님에게만 완전히 개방해 두는 것이 신자의 믿음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뜻과 계획은 물론 앞으로 전개될 과정은 구체적으로 모르고 또 알 필요도 없지만 그분은 절대적으로 옳다고 완전히 믿어야 한다.

그렇다면 당장 어떤 생각이 드는가? 신자는 단순히 로봇에 불과한 것 같다. 신자가 어떤 형편에 처해 있든 심지어 죄악 중에 있어도 하나님이 결국은 합력하여 선으로 이룬다면 신자 쪽에선 가만히 있어도 된다는 말인가? 신자가 가진 믿음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가라는 의문이 자연히 들게 된다.

그러나 합력하는 모든 것에 신자의 믿음도 포함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믿음이 연약한 자는 연약한대로, 성숙된 자는 성숙한대로 하나님이 그에 맞추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신자에게도 유익과 은혜를 베푸신다. 신자 쪽에서도 믿음으로 반응해야 할 부분은 반드시 있다는 뜻이며 실제로 박사들도 그랬다.  

본문에서 박사들의 믿음과 영적인 상태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표현이 있는데 무엇이겠는가? 가장 귀한 선물을 드리고 경배한 것인가? 대부분의 신자가 믿음이라는 문제를 따질 때에 범하는 잘못이 하나 있다. 자꾸 신자 쪽에서 노력하여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것을 바치거나 그분을 기쁘게 해드려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선물을 못 받아서 안달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분이 우리의 모든 것을 공급하시지 우리가 그분에게 무엇을 드려야 그분의 부족한 부분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다.

잘 못 찾겠다면 질문을 바꿔보자. 본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구절은 무엇인가? 또 다시 성경에서 무엇인가 위로 받고 힘이 되는 구절 혹은 도덕적 계명에만 초점을 맞추어선 안 된다. 뭔가 강조, 대조, 반전, 반복 혹은 오히려 상식적으로 잘 이해가 안 되는 표현들에 주목을 해야 한다. 요컨대 유별나게 기록된 부분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숨겨진 뜻이 있다. 그런 구절들은 반드시 찾아서 전체 문맥과 당시의 상황과 저자의 의도와 연결하여 이해해야 말씀이 살아 역사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본문에서 주목해야 할 표현은 10절이다.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도대체 얼마나 기뻤으면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까? 저자 마태는 원어로도  ‘기뻐하다’를 두 번, ‘크게’를 두 번 사용해 유별나게 강조했다. 이런 성경 기록을 보면 참으로 흥미로울 뿐 아니라 큰 은혜가 된다. 그 이유를 이제부터 추적해 보자.  

박사들의 이상한 기쁨

기뻐한 것은 분명히 저자의 체험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마태는 마치 자기가 기뻤던 양 아주 실감나게 표현해 놓았다. 그러나 마태가 동방박사들을 만나 본 적이라고는 없다. 그렇다고 지어낸 이야기도 아니다. 로마 역사가 마크로비우스의 ‘축제’라는 책에 의하면 헤롯이 베들레헴 지경의 2살 이하의 아이들을 죽일 때에 자신의 아들도 포함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동방박사 사건은 분명히 성경 기록대로 일어난 실화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마태는 누군가에게서 박사들 이야기를 들었다. 그럼 마태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 준 자는 누구이겠는가? 예수님이 아니라 마리아다. 혹시 예수님이 전해 주었다 해도 예수님역시 마리아에게서 들은 것이다. 당시 갓난아기였던 예수로선 그렇게 정확하게 기억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 기록이 흥미롭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태는 마리아에게서 언제 쯤 들었을까? 최소 30년은 훨씬 지나서다. 우선 마태가 예수님을 만나 제자가 된 것이 박사 방문 후 근 30년 이후이고 또 이 복음서를 기록한 것은 그로부터 또 최소 20년 후인 AD 50-70년  경이다. 만약 AD 70 년에 마태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면 마리아의 나이는 90살가량이었다는 말이 된다. 현실적으로는 가능성이 적다. 마태가 마리아로부터 전해들은 것은 아마도 예수님을 만난 초기나 십자가 사건 직후일 가능성이 높지만 어느 누구도 장담을 못한다. 어떤 경우가 되었던 확실한 것은 사건 발생 후 최하 30년에서 70년 사이의 어느 시점이라는 것이다.

최하로 따져 사건 발생 30년 후에 들은 이야기를 마태는 이렇게까지 강조했다. 마리아가 마태에게 전해 주었을 때도 아주 강조했기 때문이다. 박사들이 와서 단순히 선물만 놓고 잠시 경배 한 두 번 하고 간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수십 년이 지나도록 생생하게 기억했다면 박사들이 밤새 아주 기뻐서 그 얘기를 되풀이 했고 또 마리아도 감명 깊게 들었다는 뜻이다.

그럼 이제 따져 보아야 할 것은 박사들이 그렇게까지 기뻐했던 이유다. 별을 보고 기뻐했으니 혹시 그 동안 별을 놓쳤다가 다시 찾아서인가? 그래서 자기들 점성술 실력을 다시 확인할 수 있어서인가? 사실은 별을 보고 기뻐한 것이 아니다. 별은 동방에서부터 보고 왔으니까 그 별에 대해선 계속해서 기뻐하고 있었다. 성경은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라고 했다. 별이 머물러 섰기 때문에 새삼 크게 기뻐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 먼 여행길이 끝나서 기뻤다는 것이다. 그럼 또 이제 샤워 하고 발 뻗고 쉴 수 있었기 때문인가? 아니다. 근 2년이 걸리는 여행길이라 특별히 하루 저녁 쉴 수 있다고 구태여 더 기쁠 일이 없었다.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있는 곳이 시설 좋은 호텔도 아니었을 것이다. 여행의 목적을 완수했기에 기뻐했는데 그 목적은 당연히 아기 예수를 경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너무나 싱거운 내용을 두고 괜히 흥분한 셈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헤롯이 박사들에게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는 2살 미만의 아기는 다 죽였다. 그렇다면 박사들의 여행길은 왕복으로 잡으면 최장 4년이 걸릴 수도 있다는 뜻이다. 물론 별이 나타난 후에 기도하고 여행 준비를 하고 또 선물을 마련하는 등의 기간은 소요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들은 3-4년의 기간을 이 여행길을 위해 투자했다. 그런데 2천 년 전의 인간의 평균 수명이 얼마였는지 아는가? 겨우 30년이었다. 전 인생의 최하 1/10을 아낌없이 투자했다는 뜻이다.

아직 실감을 못하는 것 같은데, 오늘 날로 환산하면 평균 수명 70년을 잡으면 7년을 투자했다는 말이다. 그것도 이제 갓 태어난 아기에게 찾아와 단 며칠을 머물면서 경배하기 위해서 말이다. 거기다 세 가지 귀하고 값진 선물에다 장기간의 여행 경비까지 보태면 아마 전 재산을 투자했을 수 있다. 또 오고 가는 길에 온갖 자연적 지형적 난관도 많으며 강도의 위험도 도사리고 있었다. 요즘처럼 비행기나 자동차 여행이 아니라 오직 낙타만 타고 그렇게 오랜 기간을 아무 일도 안 하고 오직 여행만 한다고 가정해 보라.

그런데 그 여행의 행선지가 아주 이상하다. 먼 나라 변방의 아주 작은 시골에 자기들과는 전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것이었다. 부모 형제를 만나려면 몰라도 친척도 아니고 개인적 관계가 전무한 생판 남을 그것도 말도 못하는 갓난아기를 보려고 인생의 1/10을 완전히 따로 떼어 투자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겠는가? 지위와 명예가 아주 높은 사람도 아니고 이름 없는 한 목수의 아들에게 가장 비싼 선물을 바치러  가면서 뭐가 그렇게도 좋았을까? 밤늦게 불쑥 찾아와선 “너무너무 기쁩니다!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라고 말하고는 바로 또 되돌아갔지 않는가?

이렇게 따져보니 오히려 그들의 기쁨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이상한 것 같다. 지금껏 성경을 배워 오면서 한 번이라도 이 부분에 의심을 가져 봤는가? 성경은 너무나 오묘한 말씀이다. 유별나게 표현된 곳에 특별히 주목하지 않고는 그 오묘한 은혜를 맛보지 못한다.

평생 동안 기다렸던 순간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은 전 평생을 두고 오직 아기 예수만 보기를 소원했었다. “주재(主宰)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2:29-32)라고 했다. 그는 주의 구원을 이룰 한 아기가 태어날 것이라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계속 기다렸었는데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고백한 것이다.

또 안나라는 늙은 과부는 평생을 바쳐 성전에서 금식하며 기도했던 여 선지자였다. 마침 성전에 결례를 하러 온 아기 예수를 보게 되자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 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해 말”(눅2:38)했다. 그녀는 결혼 후 7년 만에 과부가 되어 84년을 혼자 지냈으니 13살에 결혼했어도 104살이나 된다. 그 동안 오직 예루살렘의 구속자가 나타나기만을 기도하고 기다렸는데 이제 백 살이 넘어서야 그 기도가 응답이 되었다는 것이다.  

동방 박사들이나. 시므온이나, 안나나 평생을 투자해서 오직 메시야만 기다렸다. 단순히 그들이 믿음이 좋고 하나님이 지시한 것이니까 그렇게 했을 수 있다고 보면 안 된다. 평생을 건 것은 자기들 전부를 걸었다는 뜻이다. 역으로 말해 메시야가 안 오면 자신들의 인생은 살아도 전혀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신의 생명은 부지하고 있을지 몰라도 완전한 실패와 철두철미 절망뿐이었다는 것이다.

그중에도 박사들은 아직 십자가 복음을 알기 전이었다. 안나나 시므온에 비해선 구약의 율법에 대한 지식이 훨씬 모자라고 어쩌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연약했던 이방인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현실의 삶에서 절망했던 정도는 오히려 두 선지자들보다 엄청나게 더 컸을 수 있다.

“우상만 숭배하는 이 메소포타미아 땅에서 점성술로 돈을 벌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본들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먹고 사는 것에 전혀 걱정이 없고 남들도 인정해 주는 위치에 오르면 그것이 인생에 성공한 줄 알았는데 왜 내 속에는 평강과 기쁨이 전혀 없지? 오히려 그 반대로 탐욕과 시기와 분노와 음란과 궤휼과 위선과 거짓만이 끊임없이 솟아오르지? 무슨 짓을 해도 그 어떤 것을 차지해도 도대체 채워지지 않는 이 공허감과 갈급함은 어찌해야 하는가? 남은 인생도 계속 이렇게 살아야만 할 것인가?”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나 같은 자도 그분의 용서와 사랑과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또 주위를 둘러보면 너무나 불쌍하고 연약한 인생들뿐이지 않는가? 모두들 한숨과 슬픔과 분노와 상처와 고통을 하루라도 안고 살지 않는 날이 없다. 거기에다 다들 서로 자존심과 체면과 위신을 세우기 바빠서 부정과 부패는 끊이지 않고, 악인은 오히려 형통하고 있으며, 처처에 기근과 홍수와 지진과 강도와 전쟁이 끊어질 날이 없으니... 아니 그럴 가능성마저 전혀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 정말 이 세상과 이 죄인들을 이대로 그냥 두고 보실 것입니까? 인간을 아예 포기하고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 될 한 아기는 언제 태어나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다윗의 위에 앉아서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할 것입니까?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루시겠다는 그 일은 과연 언제 이루실 것입니까?’(사9:6,7)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제발 응답하셔서 저를 만나 주시고 보여 주시고 들려주시옵소서. 저를 불쌍히 여기셔서 자비와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평생에 한 번이라도 참 평강을 맛보게 해 주시옵소서. 내 평생에 주를 만나 뵙기를 진정으로 소원합니다.”

그런 그들 앞에 분명히 메시야의 탄생의 징조로 보이는 별이 멀리 유대 땅 서쪽 하늘에 나타났다. 너무나 흥분이 되었고 기대감으로 떨렸다. 그 분을 만나러 갈 이번 여행길이 얼마나 멀고 험할지 또 얼마나 오래  걸릴지 상관이 없었다. 돈이 얼마가 들어도 좋았다. 평생을 걸고 소원했던 일을 이룰 수 있는데 어찌 생명과 재산이 문제가 되겠는가? 틀림없이 그들은 당시에 이미 인생을 살만큼 살았을 것이다. 이제 이방을 비추는 영원한 생명의 빛을 보고 죽는다면 여한이 없었다.

오직 절망뿐인 곳에서 소망을 보았는데 절망 속에만 머물러 있을 바보는 없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봤지만 그 절망을 빠져 나올 길이 없다면 더 그렇다. 간단하게 마약 중독자 소굴, 사형수 지하 감방, 나병 환자 촌에서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을 하염없이 기다리고 있는데 생명의 길, 소망의 빛, 회생의 수단이 생겼다면 어느 누군들 그곳을 찾아가지 않겠는가? 인생의 1/10의 기간 정도야 아무 문제가 아니지 않겠는가?  

서리 집사도 하지 않으려는 신자들

지금 박사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잘 반응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그들과 한번 견주어보자는 것이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지 뭐!”라고 쉽게 볼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들 “나도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듣는다면 7년 쯤, 아니 평생을 이슬람 선교사로 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런데 하나님은 이상하게 나보고는 그런 말을 생전 안 하셔!”라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그런 말씀을 하지 않는 것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 그런 말씀을 해봐야 들을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기에 안 하신 것뿐이다.

대부분의 신자가 말로는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 기쁘고 기쁘다고 한다. 그러나 기껏 교회에서 간단한 봉사 하나 하라고 해도 그저 꽁무니 빼기 바쁘다. “절더러 무엇이라도 시키시면 그날로 교회 안 나옵니다. 집사람에게 집사 직분 주면 아예 집사람도 교회 못나가게 할 것입니다” 혹시라도 담임 목사가 대표 기도라도 시킬까봐 손사래부터 친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만 보았지 그 구원이 십자가에서 완성되리라는 것도 몰랐다. 예수님의 이적과 사역과 가르침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박사들의 반응이 그 모든 것을 보고 배운 우리와 다른 까닭은 무엇인가?

한 마디로 그들은 평생의 소원으로 예수를 보기 원했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생의 소원이라는 것은 다른 모든 것은 다 희생하더라도 그것만은 달성하고픈 것이다.   평생에 달성하고픈 오직 한 가지 일이기에 그 일이 달성되면 죽어도 여한이 없어진다. 그래서 자기의 전 존재와 삶과 일생과 심지어 생명을 걸고도 아깝지 않다. 또 그렇게 되려면 그 일 이전의 모든 것들이 완전한 실패임을 인정해야만 가능하다. 나름대로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한다면 생명까지 걸며 또 새로운 일을 소원할 리는 만무하다.

박사들은 아기 예수를 평생에 단 한 번이라도 진정으로 경배하고 싶어 했지만 오늘날의 많은 신자들은 예수를 믿어 열심히 경건하게 살려고만 한다. 그 차이가 어느 쪽이 더 의롭고 믿음이 좋은 가가 아니다. 전자가 있으면 후자는 자연스레 따라오지만, 후자는 전자가 없어도 가능하다. 예수를 꼭 한번 경배하고 싶다는 것은 예수 외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이 반드시 전제가 된다. 즉 예수 없이는 자신에게는 도저히 가능성이 없어서 죽느니 못하기 때문에 어떤 희생과 대가를 치르더라도 예수를 꼭 만나야겠다는 것이다. 또 예수를 만나면 그 이후는 자연히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한다.  반면에 예수를 열심히 믿어 경건하게 살겠다는 것은 그런 죽음이 없어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는 소망이다. 예수 전에도 어느 정도 경건하게 살고 있었는데 이제 예수를 보태어 더욱 경건하게 살겠다는 뜻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 이전에는 오직 공허함과 갈급함뿐이었던 자가 예수를 만나고 난 반응과, 단순히 부분적으로 부족한 것을 보충하려고 예수를 찾은 자와는 그 감격이 전혀 다르다. 전자가 더 크고 좋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예수를 만난 것이기 때문에 죽음에서 살아난 새 생명이 계속 이어진다. 반면에 후자는 부족한 것이 채워질 때만 기뻐지는 일회적, 순간적, 부분적 감동에 불과하다.

순간적 감격의 크기는 후자가 더 클 수도 있지만 전자는 평생을 두고 흔들리지 않는 잔잔한 기쁨이다. 세상과 사람과 사단이 뺏거나 방해할 수 없는 감동이다. 비록 현실은 여전히 힘들고 어려움이 닥칠지라도 심령 깊숙이 평생을 자리한 근본적인 허무와 공허가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말 그대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고백이 절로 나오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만 완전한 중생을 체험한 자는 필연적으로 그 이후의 삶에 예수보다 더 중한 것이 없게 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완전한 중생이 아니다.

본문의 기뻐하다는 원어적 의미도 흥분해서 기뻐 날뛰는 것이 아니다. 은은하게 속에서 우러나오되 그 여파가 잔잔하게 오래 가는 기쁨을 말한다. 박사들이 마리아에게 자기들의 이야기를 전했을 때도 그 단어를 썼을 것이며, 마리아도 그들의 말과 얼굴 표정과 행동에서 그런 기쁨을 쉽게 읽었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는 더 이상 자기들의 인생에 허탄한 방황이 없이 끝까지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대상을 발견했다. 그분을 위해 살고 그분을 위해 죽을 예수를 만나 경배했기에 평강과 온유함이 자기들 전 영혼에 채워지는 것을 실감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박사들이 기뻐하고 기뻐했던 때가 아기 예수를 경배하고 선물을 증정하기 전이었다. 아직 메시야를 보지 못했을 때였다. 별이 멈춰 선 것만 보고서 기뻐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여호와 신앙을 가졌고 별의 흐름에 능통한 박사였다. 우상 숭배의 이방 땅에서 구약 성경의 창조주 하나님을 믿으며 메시야를 대망하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그들의 2년여에 걸친 여행 기간 동안, 아니 그전부터 평생을 두고 해온 기도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 우리를 이대로 두고 보실 것입니까? 제발 불쌍히 여기시어 하루 속히 임마누엘 하나님을 보내어 구원해 주시옵소서!” 그런데 이제 메시야 탄생을 확연하게 예표 하는 별이 베들레헴 땅 하늘 위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그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확신했던 것이다.  

자신들의 평생소원을 하나님이 들어 주셨다. 그분은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권세 아래 신음하는 인간들을 그대로 두고 보지 않으셨다. 자신들이 어떤 형편과 죄에 처해 있더라도 용서하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임을 확신하게 되었고 그분이 이제 임마누엘하셨다. 그들 자신과, 그들 주위의 모든 불쌍한 이웃과, 전 인류에게 소망의 빛이 비췄다.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다스렸던 유대 땅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고향 메소포타미아에도 희망이 생기고 동족들도 새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자신들의 인생이 그 별이 멈추기 이전과 멈춘 이후에 완전히 달라졌다. 나아가 세계의 역사도 아기 예수의 탄생 전과 후로 완전히 둘로 구분되어졌다. 어찌 기뻐하고 기뻐하지 아니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여러분에게 솔직히 물어보자. 평생에 가장 크게 기뻤던 일이 무엇이었는가? 대학 입학인가, 첫 취직인가, 결혼인가, 첫 아기의 출산인가? 그런데 그런 일들로 인한 기쁨이 평생토록 당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을 흔들림 없이 붙들어서 평강과 온유로 채워 주던가? 아니지 않는가? 그것들이 기쁜 일이 아니라서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대학 입학 전과 후, 취직 전과 후, 결혼 전과 후, 첫 아기 출산 전과 후가 완전히 180도 다르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전 일생과 생명을 걸어가며 소원했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인생에서 단 한 번의 사건으로 인해 크고 또 크게 기뻐할 일은 예수님을 만나는 일 뿐이다. 그 전과 후가 완전히 180도로 달라지는 인생의 절대적 분기점이기 때문이다. 그 만큼 인간에게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절대로 없다.

그 이유를 한 마디로 쉽게 설명하자면, 예수 이전에는 세상 일이 잘 풀려도 내 속이 끓는 냄비처럼 부글부글 평강이 없었는데 이후는 세상이 나를 못살게 굴려고 아무리 들볶아도 내 속은 잔잔한 호수처럼 온유해졌기 때문이다. 더 정확하게는 여전히 세상과 사람과 죄악으로 그 평강이 조금씩 흔들릴 수 있지만 최소한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으로서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할지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 삶, 일생이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서만은 결코 무의미하고 무가치 하지 않다는 점만은 확신했기 때문이다.

당신은 인생의 1/10의 기간 아니 전 평생을 걸고도 소원할 만한 일이 있었는가? 그 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일대일로 만나 진정으로 경배하는 것인가?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아직도 인생에서 가장 귀중하고 시급한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2/24/2002 나무십자가 교회 주일 설교, 6/10/2006 정리)  


국중후

2006.06.11 02:08:27
*.155.1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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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가장 귀한 가치를 목사님의 글을 통해서 알게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 샬롬!

김문수

2006.06.11 09:33:09
*.75.117.115

목사님께서 칠천인의 수장급내공을 실타래를 풀듯이 오직 예수님관점으로 하나하나 풀어내시는것 같습니다.샬롬










김순희

2010.02.02 13:52:19
*.254.209.141

예수님이 원하시고 원하시는 그 일, 자녀들이 십자가를 통과하여 평강의 나라에 임 하는 일, 우리가 기뻐하고 기뻐하는 그 일, 그 평강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모든 상황으로 연출하시어 이끌어 주신 아버지의 사랑의 손길. 아버지의 깊으신 사랑의 맘 때문에.... 목사님의 사역이 이 귀한 일에 쓰임 받고 계심을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

사라의 웃음

2011.11.26 00:39:10
*.120.3.94

아무리 읽어도 또 다시 감동이...
동방박사의 예수님 뵙기도 전에 기뻐하고 기뻐하였던 모습,
시므온과 안나의 예수님 뵙곤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었던 기쁨.
우리의 모든 인생의 시간을 몽땅 다 소비한다고 해도 아깝지 않은
아니, 너무도 귀한 그 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죄사함 받는
그 일임을 다시한번 되새깁니다.

날마다순종

2020.11.15 16:21:56
*.14.99.253

당시 동방박사들의 아기예수를 찾아 경배하며 느꼈을 그 흥분과 감동을 상상하니 덩달아 기뻐집니다. 그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메시야를 만났을때의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지 그 감동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합니다.지금 우리에게도 주님이 함께 하고 계시는 그 사실로 인해 느껴지는 이 마르지 않는 기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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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건축 이후를 위해 기도하라. [4] 운영자 2006-06-27 2249
125 공동체 의식으로 간구하라(마2:19-23) [3] 운영자 2006-06-26 2049
124 인간이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마2:13-18) [4] 운영자 2006-06-26 2190
» 당신의 평생소원은 무엇인가?(마2:9-12) [5] 운영자 2006-06-10 1790
122 아기 예수를 저주한(?) 동방 박사들(마2:9-11) [3] 운영자 2006-06-05 1919
121 지금 당장 예수님이 재림한다면?(마2;1-8) [4] 운영자 2006-06-01 1852
120 예배를 회복하라.(창3:14,15) [2] 운영자 2006-05-09 2286
119 너의 왕은 어디 있느냐?(마2:1-3) [5] 운영자 2006-04-26 2825
118 신앙 실패의 가장 큰 원인(마1:22,23) [6] 운영자 2006-03-21 2731
117 예수님이 땅에 쓰신 글씨(요8:1-11) [1] 운영자 2006-03-14 2874
116 임마누엘 하나님의 필요 충분 조건(마1:22,23) 운영자 2006-03-09 2455
115 모든 인간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마1:18-25) [4] 운영자 2006-03-02 2076
114 “What If?”(만약 그랬다면?)(마1:1&17) [1] 운영자 2006-02-25 1672
113 구세주의 씨앗을 보존하라.(마1:2-6) [4] 운영자 2006-02-23 2679
112 예배를 받지 않는 예수님(마1:2-6) [3] 운영자 2006-02-11 1981
111 다윗의 외모를 보고 택하신 하나님(마1:1) [2] 운영자 2006-02-08 2955
110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말라?(마1:1) [3] 운영자 2006-01-27 1756
109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생일이 아니다. 운영자 2005-12-27 1738
108 당신의 시계는 고쳐졌는가?(시63:1-4) [2] 운영자 2005-12-19 1881
107 사상 최대의 부흥 집회(행2:1-13) [2] 운영자 2005-11-15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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