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인간이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마2:13-18)

조회 수 2190 추천 수 100 2006.06.26 17:5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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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해(13)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에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에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마2:13-18)

저주받을 하나님

영어로 흔하게 하는 욕설로 “God Damn”이라는 말이 있다. 문법적으로 하나님이 주어인 능동태 양식 즉, 누구를 두고 신의 저주를 받으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수동태인 “God be damned.”의 준말로 신이 욕을 먹고 저주를 받아야 한다는 뜻이다. 주로 어떤 경우에 쓰는가 하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불공평한 일이 생겼거나, 예상치도 못한 잘못된 결과가 났거나, 자기 쪽의 원인과 잘못은 전혀 없는데 일이 꼬여 갈 때다.

세상을 살다보면 그런 경우가 심심찮게 생긴다. 갓난아기가 백혈병에 걸려 태어난다든지, 사람들 사이에 칭송을 받는 행복하고 믿음이 좋은 부부가 교통사고로 죽는다든지, 그것도  어려운 가정을 도와주러 가다가 그렇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게 하는가? 직접 하신 일이 아니라 해도 미리 좀 막아 주시지 왜 방치하는가?”라는 의문이 당연히 생기게 된다.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런 “God Damn”이 절로 나오는 경우다. 아기 예수로 인해 아무 죄도 없는 2살 미만의 갓난아기들이 최소한 몇 십 명이 몰살을 당했다. 그것도 타지 사람이 호적을 하려고 와서는 그곳 토박이 아이들을 죽게 만든 셈이다. 더 분통이 터질 것은 하나님이 아기 예수를 애굽으로 먼저 피신시킨 후에 그 참극이 발생했다. 또 그런 살육극이 완전히 마무리된 한참 후 안전하다 싶을 때에 애굽에서 예수를 불러내었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 그렇게 되리라고 선지자를 통해 예언을 했고 또 그대로 이뤄졌다고 증언하고 있다. 무슨 뜻이 되는가? 헤롯이 아이들을 죽이도록 하나님이 미리 계획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지 몰라도 최소한 모든 사태를 미리 아셨다는 것이다. 그럼 과연 하나님이 이럴 수가 있는가? 그야말로 "God Damn!"이 아닌가?

인생을 살다보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억울하고 불공평한 경우가 많다. 도저히 원인을 알 수 없는 고통과 환난을 평생 중에 몇 번씩은 겪게 마련이다. 인류 유사 이래 모든 사상가, 철학자, 종교인들이 아무리 고뇌를 해도 그 원인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영원한 숙제다. 성경에도 욥기 전체가 이 주제만 다루고 있다. 기독교 신학적으로도 수도 없는 주석과 해명을 시도해봤지만 여전히 뭔가 석연치 않다. 한 편의 설교로 그 주제를 온전히 살펴 볼 수는 없다. 그래서 아주 단순하고도 쉽게 한 번 이 문제에 접근해 보기로 하자.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

이처럼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하는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다. 기왕에 일어난 어떤 일을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서 다시 그것의 역을 따져 보면 처음에 어려웠던 문제가 의외로 쉽게 이해된다. 성경을 해석할 때 뿐 아니라 실제 믿음생활이나 현실생활에도 적용할 수 있다.

미국 이민 온 지 얼마 안 되어 저를 두고 한국에서 한 사기꾼이 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이야기를 간접으로 전해 듣고는 너무 억울해 며칠 밤을 끙끙 앓았다. 그러나 미국에 오지 않고 한국에 계속 있었더라면 더 힘든 일이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 와선 그 한 가지 일만 빼고는 힘든 일이 별로 없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니까 그 정도쯤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마음이 들었다. 사실이 사기꾼이 아니면 되지 남들이 뒤에서 무엇이라 하던 개념 하지 않기로 했다. 처음에는 내가 미국까지 와서 이런 창피하고 치사한 꼴을 당해야 하는가 싶어 원통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미국에 오지 않았다면 발생했을 일들을 생각했더니 그 억울함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만약 구약에 예언이 없었다면, 동방박사가 경배를 오지 않았다면, 시므온과 안나가 성전에서 예수를 만나지 않았다면, 침례 요한이 광야에서 기쁜 소식을 외치지 않았다면, 아기들이 몰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는 메시야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구원하러 인간의 몸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단지 선한 삶을 산 한 인간 스승에 불과해진다.

예수 그리스도 개인의 정체성에 관해 따지자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선 성육신과 상관없이 항상 성자 하나님이심에 아무 문제가 없다. 이는 사실 모든 인간의 궁극적이고도 영원한 운명에 관한 문제로서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할 계획을 전혀 세우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고 성경에 예언된 대로 실현되었으니 이해가 안 되지만 어쩔 수 없이 예수를 메시야로 인정하자는 뜻이 아니다. 만약 헤롯이 2살 미만이 아니라 베들레헴과 그 지경의 모든 사람을 다 죽였어도 하나님의 하나님다우심에는 손상이 가지 않는다. 그분만의 또 다른 계획과 뜻이 반드시 그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좀 더 차원을 넓혀서 이렇게 생각해 보라. 만약 세상에 말도 안 되는 말하자면 "God Damn" 같은 일들이 하나도 안 생긴다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억울하고 불공평한 일이 전무해서 매사가 순리대로 이뤄진다면, 그래서 선과 악의 질과 양에 비례해서 형통과 실패가 그 보상으로 따라 온다면 말이다. 가장 먼저 인간이 자기가 한 일에 대한 결과를 스스로 미리 예상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내가 바치는 노력과 수고와 희생이 어떤 결실을 맺을지 미리 안다면 과연 갈등과 고민이 없어지고 인생이 행복하고 만족스러워질 것 같은가? 영어 속담에 “바보는 항상 행복하다(Fool is always happy)”는 말이 있듯이 아무 어려운 일이 없이 매사가 형통하면 인간은 바보가 되기 십상이다. 지능이 낮아진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전무해진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모를 뿐 아니라 아예 알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분석하고  판단한대로 만사가 시작되고 그 과정도 쉽게 통제할 수 있으며 결과마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계산이 되면 인간이 최고이자 이 땅의 주인이 된다. 눈에 안 보이는 세계가 있거나 세상만사를 움직이는 제 삼의 힘이 있다는 것을 인식은커녕 상상도 하지 못한다.

“God Damn”의 숨겨진 의미는 아무리 궁리해 봐도 그 원인을 알 수 없기에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상에선 그 잘못된 상황에 대해 비판받고 책임질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이 세상 밖의 눈에 안 보이는 어떤 힘에 의해 그 일이 일어났다는 증거다. 또 도저히 실패할 가능성이라고는 없어 보였던 일이 비틀어졌다면 그 힘은 절대적으로 강력한 존재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God Damn”은 하나님을 저주하는 욕으로 발단되었지만 내용을 따져 보니 “이 일에는 하나님 외에는 욕을 먹을 자가 없다”는 것이 되어 오히려 하나님을 증명하는 말이 되었다.  

불공평하다, 억울하다는 불평은 내가 투입한 투자(input)에 비교해 산출(output)이 정비례해서 나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반대는 당연히 선이라는 input이 있으면 축복이라는 output이 반드시 나와야 하고 또 악이라는 input에 대해 재앙이라는 output이 필연적으로 따라야 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만약 세상만사가 그렇게 된다면 인간이 불공평하거나 억울하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될까? 과연 세상의 죄악이 없어지고 평화가 달성되어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아니다. 그 때는 또 틀림없이 자기는 절대로 나쁜 input을 투입한 적이 없는데도 output이 악하게 나왔다거나, 축복과 재앙의 양과 질의 다소를 가지고 또 다시 불공평하다고 난리 칠 것이다.

이렇게 따져 보면 인간이 행복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히려 바보가 되는 것뿐이다. 남이야 축복을 받든 내가 재앙을 당하든 그 차이를 인식조차 못해 시기와 질투를 아예 할 수 없어야 한다. 하나님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 그분에게 억울함을 호소할 생각도 못하는 수준이 되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바보가 되지 않으면 결코 즐거울 수 없다.  
  
성전의 억울한 죽음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눅13:1-5)

로마의 지배를 받던 유대인들에게 핍박은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일이었다. 성전에서마저 학살 사건이 수차례 있어서 적게는 몇 명에서 많게는 수천 명도 죽었다. 빌라도 총독도 갈릴리에서 여러 명을 살해했는데 요즘 식으로 따지자면 교회에 새벽기도 가다가 강도를 만나 총 맞아 죽은 셈이었다. 그래서 두어 사람이 예수에게 나와 어떻게 이런 불공평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고 물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실로암 저수지를 지키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은 사건과 대비해 대답했다. 요즘 식으로 비유하면 911 뉴욕 쌍둥이 빌딩 테러 사건 때에 구조하러 들어간 소방대원들 500여명이 죽은 것과 같다.      

질문자의 뜻은 “아무 죄도 없는 자들이 죽었으니 너무 불공평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제 멋대로 구는 심술궂고 불공평한 분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미처 몰랐던 죄에 대해 심판을 한 것인가?”를 따지고 싶은 것이었다. 그에 대해 예수님은 이런 사건에서 정작 따져야 할 것은 하나님의 공평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회개치 않으면 너희도 똑 같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억울하게 보이는 그 희생자들이 회개를 하지 않아 죽었다고 쉽게 단정 지어서도 안 된다. 분명히 예수님은 “죽은 자들이 더 죄 있을 줄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죄의 질과 양을 따져 많았기 때문에 먼저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왜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아 죽었다고 해놓고도 죄의 양과 죽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앞뒤가 서로 맞지 않는 말씀을 하셨는가? 예수님의 뜻은 만약 너희가 생각하듯이 하나님은 착하면 복을 주고 악하면 벌을 주어야 한다면 너희부터 먼저 죽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너희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되물은 셈이다.

“너희들은 그럼 죄가 없어서 살아 있는가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라. 죄가 없는 자가 죽어 불공평하다고 생각되면 죄가 있는 데도 계속 살려 주는 것도 그럼 불공평한 것 아닌가? 그런데도 너희들은 그것을 불평한 적은 왜 한 번도 없는가? 너희들 생각대로 하자면 헤롯, 빌라도, 바라바, 가룟 유다 뿐 아니라 베드로 사도 바울도 죽여야 하느냐? 죄악인 만연한 도성 니느웨의 십이만 명을 나더러 지금 몽땅 죽이지 않고 무엇하고 있느냐고 따지는 셈이냐? 그렇게 말하는 네부터 하나님의 벌을 받아야 마땅한지 아니면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제대로 따져 보아라.”

인간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불공평성에 대해서 따지려 들었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공평성부터 따져보자는 것이다. 자신의 죄로 심판 받을 준비는 전혀 되어 있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는 몇 가지 이해되지 않는 사건을 가지고 하나님의 공평성을 따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평성은 죄인마저 살려 주며 회개치 않는 백성 12만의 회개를 기다리고 그 육축도 아끼며 사랑하는 공평성이다. 하나님의 공평성은 인간의 공평성과는 차원이 다르다. 당신께서 완전히 공평하신 분이기에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도 공평하다. 인간은 하나님이 불공평해서 온갖 불행이 일어난다고 우기지만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떠나지 않으면 한 번도 불공평한 대우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한다. 인간이 당신을 떠나서 불행해졌고 또 하나님의 공평성에 대한 인식 능력이 상실되었다. 요컨대 인간이 불공평해져서 무슨 일을 보더라도 심지어 하나님이 하신 일조차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역사상 최고로 불공평한 일

이처럼 예수님은 한 번도 이 땅이 공평하다, 또 공평해야 한다고 명확하게 말씀한 적이 없다. 스스로 공평 불공평에 대해 판단하지도 않으셨다. 또 인간의 불공평하다는 불만에 대해서 그 원인을 설명하고 해결책이나 방법을 가르치지도 않으셨다. 인간의 눈에는 불공평해 보여도 하나님 당신에게 불공평이란 절대로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이 땅에는 인간의 지정의로 판단하기에는 억울하고 불공평해 보이는 일들이 많이 생기며 인간의 불평불만도 끊임없이 이어질 것이다. 그런 불평에 대해 하나님은  어떻게 반응하실 것인가? 지금까지 반응해 오신 그대로 영원토록 변함없이 아무런 말씀과 해명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 당신이 스스로 인간이 느끼는 불공평을 담당하여 인간의 불만을 해소하러 이 땅에 오셨지 않는가? 그리고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아무 말씀도 없이 십자가에 죽으시어 그 모든 불공평을 이미 다 담당하셨지 않는가?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이 땅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만큼 억울하고 불공평한 일이 있었는가?

그분이 오셔서 한 일이라고는 우는 자의 눈물을 닦아 주고, 병든 자를 고쳐 주고, 눌릴 자를 풀어 주고, 주린 자를 먹여 주고, 목마른 자를 마시게 하고, 저는 자를 뛰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눈먼 자를 보게 한 것뿐이지 않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면 이웃을 사랑하고 일흔 번씩 일곱 번도 용서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역사상 최고의 의인으로 칭송 받아야 마땅했고 당시에 노벨상이 있었다면 3년 연속 평화상을 탔어도 모자랐다.

그런데도 가장 저주 받은 죽음을 당했다. 그 죽음을 통해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가르침의 본을 직접 보이셨다. 그런데 그분이 죽으신 유일한 이유가 무엇인가?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자가 없다”고 선포한 그 말 때문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따져서 그분이 하신 일과 가르친 말씀 중에 진리와 길과 생명이 아니었던 것이 하나라도 있었던가?

그분의 은혜를 입고 가르침을 받고 십자가 사건을 목도한 자는 실제로 하나님을 본 것이었다.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분이 온 것은 양들에게 생명을 주되 더 풍성히 주기 위해서였다.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몸에 걸친 것 말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우리에게 다 주셨다. 세상에 이런 죽음보다 더 억울하고 불공평한 일이 있었는가? 인간이 입이 열 개, 백 개 천 개라도 하나님에게 불공평하다니 억울하다니 말할 자격 아니 낯짝조차 없다.

그런데 누구에게 그 죽음을 당한 것인가? 예수님에게 와서 “빌라도에게 성전에서 살육당한  자들이 억울한 것 아닙니까?”라고 따진 바로 그 사람들에게 당했다. 오늘 날로 치면 헤롯에게 죽은 아이들만 억울한 것 아닙니까라고 따지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가장 불평을 많이 한 자들이 가장 불공평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오히려 죽였다.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라

예수님이 유대인들의 질문에 비유로 통해 답변한 것이 “인간더러 모든 죄를 회개하고 남의 탓 하지 말고 너부터 착하게 살아라. 특별히 하나님의 탓은 절대로 하지 말라”는 단순히 윤리적 종교적 당부가 아니다. 불공평하다는 의심과 불만이 생기는 자일수록 정말 하나님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 갈등하고 그분을 진심으로 만나려고 소원해 본 자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러기 위해선 성경을 제대로 묵상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의미를 파헤쳐 보아야한다. 요컨대 예수님의 그 답변은 하나님의 심정을 한 번이라도 헤아려 보라는 것이다.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 또한 역으로 생각해 보면 된다. 예수님이 아직까지 탄생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진지하게 따져 보아라. 그분이 동정녀로 탄생하지 않았고 오병이어나 바다 위를 걷고 봉사를 눈 뜨게 하는 기적들을 일으키지 않았고 단순히 착하게 살라는 가르침만 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구약의 선지자가 그분의 탄생을 예언하지 않았다면, 안나와 시므온이 없었다면, 헤롯과 발라도가 그렇게 악독한 인물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베들레헴 지경의 아기들이 죽지 않았다면 과연 십자가가 있었겠는가 말이다. 나아가 그분이 십자가에 죽지 않았다면 과연 인간에게 진정한 희망이 남아 있었을까?

기독교라는 종교를 택해 믿으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없었다면 인간은 지금 아무도 살아 있지 못하고 심지어 헤롯의 영아 살해 사건과 빌라도의 성전 사건 훨씬 이전에 이미 다 없어졌을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인간이 생각하는 식으로 공평하게 대했다면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한 번이라도 심각하게 생각해 본 자는 감히 두렵고 떨려서라도 하나님이 불공평하다는 말을 입 밖에도 내지 못한다.  

지금 현재 당신이 겪고 있는 불공평이 있는가? 당하고 있는 억울함이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이 원망스러운가? 그럼 그 일이 없었다면 당신이 재벌 회장이나 대통령이라도 되어 있을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이다. 이럴 때는 차라리 불교식 논리가 맞았으면 좋겠다.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인간 대신 개나 돼지로 태어나지 않은 것만이라도 감사해야 한다.  

사람들, 신자들마저 가장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헤롯이 죄 없는 아기들을 무참히 죽인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그 당장에 벌주지 않은 하나님은 불공평하다는 것보다 더 큰 착각이다. 하나님이 세상만사를 인간에게 완벽하게 이해되도록 구체적으로 다 설명해줄 책임 내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보다 못한 존재다. 인간이 하나님의 보고를 일일이 받는 상관의 자리에 서겠다는 엄청난 교만이자 죄악이다.  

“하나님은 불공평하지 않는가? 왜 세상에 억울한 죽음이 많은가?”라는 의심이 들거나 불만이 생기는 것에 관한 성경의 대답은 딱 하나 뿐이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다. 인간이 저질러 놓은 온갖 불공평을 하나님이 대신 당하신 것 외에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욥이 자신이 당하는 고통이 억울하다고, 하박국 선지자가 의인이 핍박 받고 악인이 득세하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따지니까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과 감히 변박하려 들지 말고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말 외에는 한 마디도 않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모든 설명이 다 들어 있고 더 이상 다른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살이에 힘들고 고달픈 일은 많다. 그러나 신자가 가지는 삶과 인생에 대한 생각은 불신자의 것과는 달라야 한다. 고상하고 심오하고 거룩해지라는 뜻이 아니다. 바로 인생살이에 대한 억울함과 불공평에 대한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래서 태어난 것에만도 감사해야 한다.  지금 이 세대가 아니고 예수님 당시에 태어났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 분을 못 박는 자가 되어 빌라도 법정에서 바라바를 살리라고 기를 쓰며 고함치고 있었을 것 아닌가? 또 몇 백 년 후에 태어났다면? 한국이 아니라 미국에 태어났다면? 그 어떤 경우가 되었어도 지금보다 더 좋아지지 않는다. 현실적 형편이 지금보다 못할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불공평해 억울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언제 어디서든 불행한 삶을 살고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비록 제가 50년 정도 밖에 살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확신하는 것, 갈수록 그 확신의 강도가 더 세어지는 것이 딱 하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없이는 언제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심지어 세계 최고 갑부나 미국의 대통령이 되어 있어도 전혀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라 것이다. 또 그 정도의 위치에 올랐다면 틀림없이 십자가와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를 알게 해 주시기 위해 저를 형편없는 자리에 까지 낮추어 주셨다. 그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 모른다. 하나님이 나를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만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도저히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끔찍할 따름이다.  

아주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을 때에 세상이 너무 억울하고 불공평해 보여 자살을 해버릴까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말하자면 입만 열면 세상과 사람들을 향해 "God Damn"하고 욕을 해되던 시절이었다. 실제로 술에 만취되어 한 번 시도도 해보려 했다. 그러나 솔직히 죽을 용기조차 없었고 두려워서 빌빌대다 그만 두었다.

모든 인간이 분명히 기억해야할 것이 하나 있다. 인간은 끊임없이 "God Damn"하고 있어도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 한 번도 “Man Damn"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대신에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당신께서 스스로 가장 억울한 경우를 당하면서 불공평하게 죽었다. 또 너무나 어리석게도 지금도 하나님은 자신을 죽인 인간들의 집 문밖에 서서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비난받아야 할 일은 완악하고 치사하기가 헤롯과 빌라도보다 전혀 모자라지 않는 우리 모두를 아직도 살려 두고 있다는 것 하나뿐이다.

(나무십자가교회3/3/2002 설교, 6/26/2006 정리)


김문수

2006.06.27 04:16:40
*.91.1.15

아멘!!!!!!!!!!!!

김순희

2010.02.03 11:32:14
*.254.209.141

인간은 끊임없이 "God Damn"하고 있어도 하나님은 인간을 향해 한번도 "Man Damn"하지 않으셨다. ㅎㅎㅎㅎㅎ

맞네요.
정말 우리 하나님은 그러신 분이네요.

사라의 웃음

2011.11.27 23:33:52
*.120.3.94

하나님의 공평하심으로 보자면 지금 이 순간 제가 숨을 쉬고 있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을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지금도 자신을 죽인
인간들의 집 문밖에 서서 이 인간들이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고 계시
다니... 오, 주님! 주님을 죽인 자가 바로 저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의
맘 문 앞에서 문 열어 주길 기다리시니, 엎드려 웁니다.

날마다순종

2020.11.16 16:41:18
*.14.99.253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비난받아야 할 일은 완악하고 치사하기가 헤롯과 빌라도보다 전혀 모자라지 않는 우리 모두를 아직도 살려 두고 있다는 것 하나뿐이다'

 

그 유일하게 불공평한것 덕분에 주님께선 죽으시고 우리는 살았으니 이 감당키 어려운 너무나 크신 은혜를 어찌 해야할까요. 영원토록 찬양 받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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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 당신의 평생소원은 무엇인가?(마2:9-12) [5] 운영자 2006-06-10 1790
122 아기 예수를 저주한(?) 동방 박사들(마2:9-11) [3] 운영자 2006-06-05 1919
121 지금 당장 예수님이 재림한다면?(마2;1-8) [4] 운영자 2006-06-01 1852
120 예배를 회복하라.(창3:14,15) [2] 운영자 2006-05-09 2286
119 너의 왕은 어디 있느냐?(마2:1-3) [5] 운영자 2006-04-26 2825
118 신앙 실패의 가장 큰 원인(마1:22,23) [6] 운영자 2006-03-21 2731
117 예수님이 땅에 쓰신 글씨(요8:1-11) [1] 운영자 2006-03-14 2874
116 임마누엘 하나님의 필요 충분 조건(마1:22,23) 운영자 2006-03-09 2455
115 모든 인간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마1:18-25) [4] 운영자 2006-03-02 2076
114 “What If?”(만약 그랬다면?)(마1:1&17) [1] 운영자 2006-02-25 1672
113 구세주의 씨앗을 보존하라.(마1:2-6) [4] 운영자 2006-02-23 2679
112 예배를 받지 않는 예수님(마1:2-6) [3] 운영자 2006-02-11 1981
111 다윗의 외모를 보고 택하신 하나님(마1:1) [2] 운영자 2006-02-08 2955
110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지 말라?(마1:1) [3] 운영자 2006-01-27 1756
109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생일이 아니다. 운영자 2005-12-27 1738
108 당신의 시계는 고쳐졌는가?(시63:1-4) [2] 운영자 2005-12-19 1881
107 사상 최대의 부흥 집회(행2:1-13) [2] 운영자 2005-11-15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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