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말이 없으셨던 진짜 이유(마11:28-30)

조회 수 1974 추천 수 99 2005.01.11 06:43:12
마태복음 강해 (132) 1/9/2005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첫번 단추를 잘못 끼우면?

옷을 입을 때 첫 번째 단추를 잘못 끼우면 자동으로 그 다음 단추도 전부 잘못 끼우게 된다. 본문에 대해 많은 신자들이 크게 세 가지 오해를 갖고 있다. 첫째는 지난 주에 알아본 대로 수고와 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오늘 따져볼 내용으로 수고와 짐을 어떻게 벗는가 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고, 마지막 셋째는 다음 주에 살펴 볼  수고와 짐을 벗고 난 후에 신자가 얻게 되는 결과에 관한 것이다. 단추를 잘못 끼우는 원리대로 첫째인 수고와 짐이 무엇인지 모르면 둘째 셋째인 그것을 제거하는 방법과 없앤 후의 결과도 전혀 엉뚱한 내용으로 흘러 가버릴 수 밖에 없다.

만약 수고와 짐이 흔히 생각하듯이 병이 나고 사업이 부도나며 가정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면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 오직 기도다. 이미 어떤 환난과 문제가 발생했다는 것 자체가 신자 자신의 계획과 능력과 통제 범위 밖의 일이므로 당연히 하나님께 기도 해야 한다. 기도는 신자가 갖는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하며 빠른 무기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수고하고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와서 기도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당신의 멍에를 메고 당신께 배우라고 했다. 수고와 짐을 벗는 방법이 다르다. 방법이 다르면 문제의 성격이 다른 것이다. 단순히 기도로 해결될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신자가 그런 오해를 하는 이유는 28절에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 때문이다. 신자는 단순히 문제가 발생하면 잘 믿고 기도 열심히 하면 예수님이 다 해결해주시리라 생각한다. 심지어 신자는 아무 하는 일 없이 가만히 있어도 40일 작정 기도가 끝나면 뚝딱하고 모든 환난이 끝나 있으리라 기대한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착각이다.  

다윗이 골리앗과 누가 봐도 도저히 게임이 안 되는 싸움을 싸우러 나갈 때에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라고 선포하며 나아갔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직접 싸운 사람은 다윗 본인이다. 대신에 다윗은 삼상17;47의 기록대로 “그(여호와가)가, 너희(골리앗을 비롯한 블레셋 족속,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 사람과 죄악과 흑암의 세력들)를, 우리 손(하나님의 백성 특별히 기도하는 믿음의 용사들)에게 붙인 것”을 확신하면서 싸웠다.

세상의 환난과 죄악과 문제들과 직접 부딪히고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자는 신자다. 그 싸움의 과정과 결과는 하나님이 선하게 책임지신다. 그럼에도 신자가 기도해야 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다윗과 같은 고백이 자신도 모르게 진심에서 우러 나오게 하기 위한 것이다. 또 바로 그 고백이 기도의 응답이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반드시 신자에게 궁극적인 승리를 보장하신다.

동일한 원리에서 예수님은 본문의 말씀을 하셨다. 내가 너희를 쉬게 하는 결과는 보장하는데 그 방법은 너희가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는 방법으로  하시겠다는 것이다. 실제 멍에를 메고 배우는 자는 신자 자신이다.  

비닐 봉지에 싼 다이아몬드 반지

그렇다면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께 배운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의 멍에를 메어야 하니까 신자는 세상에서 항상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최고로 가난하고 검소하게 살아야 하고, 교회 봉사에 열심을 내어야 하고, 여름 휴가 때는 단기 선교를 위해 미개지역을 찾아가 온갖 고생을 해야 하는가? 또 예수님께 배워야 하니까 제자훈련 풀 코스를 마치고 사역자 반까지 수료해야만 하는가?

물론 그 모든 일이 다 좋고 신자라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수고와 짐을 벗기 위해서 그런 일들을 열심히 해야지라고 부담을 가지거나 그렇게 하지 못해 죄책감을 가진다면 또 다른 수고와 짐을 자청해서 덮어 쓰는 셈이 된다. 그렇다고 그런 부담을 안 갖기 위해 세상에서 예수 믿기 전과 하나 다름 없이 살면서 주일날만 교회 와 예배 보는 것도 뭔가 잘못이지 않는가?  

잘못 끼워진 둘째 셋째 단추를 바로 잡으려면 첫째 단추부터 바로 잡는 길 외는 없다. 본문에서 수고하고 짐을 진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일반 유대인들에게 지키라고 강요한 종교적 율법적인 온갖 세밀한 의무 규정들이다. 양념까지 십일조를 바쳐야 하고 안식일에는 오리 이상 여행하면 안 되고 또 여자는 화장해서도 안 된다는 식의 수백가지도 넘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을 말한다.

그런데 현대의 교회에선 더 이상 그런 것들을 교인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그럼 수고와 짐은 다 벗겨진 것인가? 더 이상 벗으려고 애를 쓸 필요가 없는가? 아니면 현대의 상황에 적용해서 교회에서 하는 모든 형식적인 절차나 행사는 하지 말아야 하는가? 교회는 오직 말씀보고 기도에만 집중 해야 하는가? 예를 들어 송구영신 예배에 불을 끄고 기도하거나 찬양대가 촛불을 켜고 찬양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여름 수련회 때 세족식(洗足式)이나 자기가 지은 죄를 종이에 적어 회개하는 뜻으로 캠프 파이어에 태우는 것들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형식이란 좋은 것이자 꼭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그것을 담아 낼 적절한 형식이 없으면 그 내용이 빛을 잃는다. 다이아몬드 반지를 신문지나 비닐 봉투에 싸서 선물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 반대로 겨우 20불짜리 Gift Card를 순금 도금한 상자에 넣어 보낼 수도 없다.

예수님이 오셔서 율법을 폐기한 것은 없다. 유일하게 폐지한 동물 희생제사의 경우는 당신의 십자가 대속 죽음으로 그 내용에 담긴 의미를 완전하게 달성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폐기한 것은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계명들을 자기들 임의로 확대 해석해서 복잡하게 추가 시킨, 성경에도 없고 그 계명의 뜻에도 맞지 않는 것들이다. 말하자면 형식이라고 다 폐기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형식을 폐기한 것이다.

잘못된 형식을 폐기했다는 것은 내용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내용이 갖고 있는 원래의 목적, 취지, 동기, 가치, 의미 등이 분명하게 내보이지 못할 정도로 가리고 있는 과대 내지 과소 포장의 형식을 벗긴 것이다. 따라서 우리로선 바리새인들의 율법의 겉으로 드러난 잘못을 따지기 보다는 왜 그들이 그런 규정들을 추가했는지 그 의도와 목적을 먼저 살펴야만 한다.

뷔폐 식당에서 목사님 밥 갖다 주는 여자 집사

마태 복음 23장에 무거운 짐을 지우는 그들의 의도를 예수님이 풀어서 설명해 놓았다.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저희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하나니 곧 그 차는 경문을 넓게 하며 옷술을 크게 하고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 하느니라.”(4-7절) 한 마디로 종교지도자로서 누리는 부귀와 명예와 권세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나아가 그들은 그 기득권을 더 확대시키려고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닌다”(마23:15)고 했다. 교인 한 사람을 더 늘리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이라도 다 동원한다는 것이다.

그럼 오늘 날 교회 안팎에서 동일한 목적과 동기를 가지고 행해지는 일은 과연 있는가 없는가? 솔직히 말해 같은 목사로서 부끄럽지만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많다. 목사가 돈을 밝히거나 온갖 스캔들에 휩쓸리는 명시적 잘못 말고도 많다. 목사는 하나님의 종입네 하고 어디 가나 대접 받기만 원한다. 아무나 보면 훈계조의 말을 그것도 반말로 한다. 어떤 모임이든 자기를 알아주고  상석이나 주빈에 앉혀 주기를 바란다. 상석에 앉는 것까지는 좋은 데 뷔폐 식당에 가도 전속 비서 같은 여자 집사님이 음식을 갖다 주도록 기다린다.

교인 하나를 더 얻기 위해 이미 다른 교회 다니는 사람도 무조건 우리 교회로 데리고 오라고 한다. 모든 전도용 프랭카드나 전단지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있습니까? 병든 자 있습니까? 사업에 부도 난 자 있습니까? 예수님께 나오십시요”가 단골로 등장한다. 예수님을 만병통치약 수준으로 떨어트리고 기독교 신앙을 현실에서 형통하고 복을 받는 미신적인 기복 종교로 잘못 가르쳐서라도 교인 머리 숫자만 채우면 된다는 식이다.        

그런 목사들을 주님은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마23:13)라고 야단치셨다. 또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교인 하나를 얻으면 “너희보다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한다”(마23:15)고 꾸짖으셨다.  

그렇다면 이제 수고와 짐을 벗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이 무엇인지 해답을 얻었다. 바로 그런 잘못된 가르침을 안 받으면 된다. 그럼 그런 목사들을 쫓아 내어야 하는가? 아니다. 목사는 그런 목사님들 말 대로 하나님의 종이다. 하나님이 알아서 그들에게 벌을 내리신다. 신자가 나서서 하나님의 역할까지 대신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목사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작 문제는 신자에게 더 있다.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거짓 목자에게 속아서 그들 요구대로 따르는 신자들 대부분이 상식과 교양에 아무 문제가 없는 멀쩡한 사람들이다. 넘어가는 신자가 아이큐가 낮거나 속이는 목사가 더 똑똑하고 영악하며 사기성이 농후한 것이 아니다. 목사나 신자가 서로 추구하는 목표가 동일하다. 교회에 모여 열심히 종교 행위를 하는 목적이 오직 세상에서 형통이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에 풍요하고 화려하며 폼 나게 해보겠다는 취지에 서로 짝꿍이 맞아 떨어진 것뿐이다. 누가 잘했고 잘못했는가 따질 필요도 없고 따질 수도 없다.

신자가 기도하고 말씀 보는 유일한 이유?

신자가 현실에서 전혀 예상치도 못한 환난과 문제가 닥쳤을 때 가장 먼저 솔직히 어떤 생각이 떠 오르는가? 내가 죄를 지었는가,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보지 않았기 때문인가, 근래 교회 봉사에 열심을 내지 않아서인가 같은 생각들이다. 물론 그런 것들이 원인일 수 있다.

스페인 속담에 “하나님은 연기는 하지만 결코 잊지는 않는다”는 말이 있다. 하나님은 신자가 죄에 빠져 있더라도 자비와 긍휼로 참으시고 두고 보시다 도저히 안되겠다 싶으면 신자의 영적 회복을 위해서 매를 든다. 하나님이 매를 들었을 때는 신자는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그 징계가 강력해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매를 든 이상 그 매를 든 목적이 완전히 이뤄지기 전까지는 매를 놓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솔직히 우리 모두 어려운 일이 닥칠 때에 그동안 기도와 말씀에 등한했던 것에 관해 반드시 고쳐야 할 참으로 잘못된 일이라고 절감하고 진정으로 회개하는가? 기도하고 말씀 보는 것 자체가 다이아몬드 같이 너무나 귀하고 소중한 보석인데도 제대로 찾아 누리지 못하고 많이 빠트려 먹었기 때문에 진정으로 안타깝고 아쉬워하는가 말이다.

환난을 만난 대부분의 신자가 생각하는 흐름은 이렇다. 이런 문제와 환난이 생긴 것은 내 계획과 통제 밖의 일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징계로 일으키시거나 허락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이런 나쁜 일을 허용하셨다면 나한테 무엇인가 성에 안찬 일이 분명히 있다. 그것을 바로 잡으려면 하나님이 나에게 가장 원하고 또 어떻게 해야 그분이 가장 좋아하실 것인지 찾아내어 고쳐야 한다. 그렇다면 알게 모르게 지은 죄도 회개할 겸 해서 기도와 말씀에 이젠 정말 열심을 내어 보아야지로 간다.

이 생각의 흐름에 크게 잘못 된 것은 없다. 또 결과적으로 회개하며 기도하고 말씀 보게 된 것도 좋다. 그러나 그 이유가 오직 지금 일어나 있는 문제와 환난을 당장 해결하겠다는 목적뿐이라면 그것은 잘못이라도 크게 잘못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오늘날의 신자보다 머리가 나쁘고 덜 신령해서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화장해선 안 된다는 식의 무리한 요구를 군말 없이  따른 것은 절대 아니다. 하나님에게 복을 받으려면 그런 정도의 열심과 치성이 대수인가! 그 보다 더한 것도 얼마든지 드려야지! 라고 생각한 것뿐이다. 예수님은 그런 그들에게 무엇이 잘못인지 친절하고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고 그런 잘못된 가르침을 좇지 말고 자신을 따르라고 초대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오히려 바리새인들을 따르지 않았는가?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에 제대로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신자들이 세상 사람 앞에 주눅이 든 이유가 무엇인가? 교인 숫자가 적어서 그런 것이 결코 아니다. 바로 오늘날의 똑똑하고 신령한(?) 신자들도 유대인들과 동일한 수고와 짐을 질 테니 복만 부어주시옵소서 하고 바리새인 목사를 일부러 자청해서 찾아갔기 때문이다. 머리로 좌정하여 계셔야 할 예수님이 교회 안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다. 자연히 기독교는 힘이 약해지고 예수님은 없고 교인끼리만 모여 입술로만 주여주여 외우는 교회에 권능이 나타날 리 없지 않는가?        

오늘날의 신자는 기도하고 말씀 보며 주님과 동행하며 교제할 때에 그 분께 받는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에 대한 체험이 없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시는 내용이 얼마나 신령하고 의로우며 거룩한 참생명에 관한 것인지 관심이 없다. 하나님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느끼는 기쁨과 재미와 감격이 무엇인지 모르고 알려고도 않는다. 오직 현실의 형통과 안락을 위해 눈 앞에 벌어진 문제의 해결에만 관심을 쏟아 붓는다. 모든 신앙 행위와 현실의 삶이 그 목적을 달성하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이 신자를 통해 이루실 일을 신앙의 목적으로 삼지 않고 있다. 대신에 하나님을 이용해서 신자가 바라는 일만 이뤄내려고 모든 생각, 판단, 결정, 행동을 한다. 물론 그 속에 기도와 말씀과 찬양과 교회 봉사 등도 포함된다. 기도하고 말씀 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되었다.  예수님은 지금 신자더러 제발 그런 잘못된 생각을 고치라는 것이다.

차라리 나가서 죄를 지어라

예수님이 왜 수고와 짐을 벗으려면 당신께 나와 배우라고 하셨을까?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신 이유를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잘 아는 대로 죽어 마땅한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신 감당하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들이 저지른 윤리적인 죄만으로도 죽어 마땅하지만 그 보다 더 큰 죄가 따로 있었다. 하나님이 진짜 참지 못하셨던 죄다. 단순하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은 죄가 아니다. 유대인들은 거짓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었다. 또 그 믿는 형식도 단순한 방법으로만 아니라 열심과 정성을 듬뿍 실어서 하나님께 바쳤다.  

그러나 그 목적과 동기는 오직 사탕을 받아 먹기 위한 것이었다. 다리를 절고 병이 든 희생 제물을 바쳐서라도 축복만 달라고 하나님을 찾은 죄다. 축복을 받고자 하는 진심과 열심에는 전혀 거짓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전 마당만 밟고 간 것이지 하나님께 진정으로 경배하러 온 것은 전혀 아니었다. 오죽하면 하나님이 다른 모든 죄는 다 참다가 바로 그 죄만은 참지 못해 “너희가 내 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말1:10)고 하셨겠는가?

만약 자식이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으면서 오직 유산 상속에만 관심이 있어 겉으로만 효도하는 것이 눈에 빤히 보일 때 그 부모의 심정이 어쩔지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자식이 부모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아니요 몰라라 내 버려 두는 법은 절대 없다. 시시때때로 오히려 효도하는 방식은 최고급이며 정성마저 담뿍 담겨 있다. 그러나 목적과 동기는 오로지 돈일 때 말이다.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아무 말없이 달리셨을까? 부모 재산만 노리는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가 도대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아예 쳐다보기도 싫고 상대도 하기 싫지 않겠는가? 차라리 밖에 나가 온갖 나쁜 짓하고 실패해 부모 속을 계속 썩게 만들지만 가끔 빈손으로 찾아 와도 진심으로 등을 두들겨 주는 아들과 비교해 누구를 더 마음에 들어 할까?

다윗이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27:10)고 고백했다. 돈 때문에 부모를 찾는 그런 불효 자식을 인간 부모는 상대조차 하기 싫어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저들이 하는 짓을 모르니 용서해 달라고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셨다. 또 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오히려 용서하고 사랑을 베푸셨다. 그분이 지고 가신 모든 죄 가운데는 도저히 용서할래야 할 수 없는 재산만 바라고 부모 찾는 바로 그 죄까지 안고 가셨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아는 자라면 또 다시 윤리적 죄 짓는 것보다 최소한 축복만 바라고 하나님을 찾는 죄만은 짓지 않아야 하지 않겠는가?  

원죄란 무엇인가? 모든 세대, 인종, 문화, 관습, 지성, 도덕성과 아무 상관 없이 늙으나 젊으나 똑 같이 그저 하나님께 복을 받으려는 생각이다. 그래서 복을 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심보다. 그런데 문제는 그 원죄의 잔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복음의 진리만으로는 고쳐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말하자면 신자마저 그 진리를 말로만 배워선 그 뿌리 깊은 습성을 고치지 못한다는 뜻이다. 만약 말로만 고쳐질 것 같으면 예수님이 내게 배우라고만 한 것으로 충분하지 구태여 멍에를 메라고 하실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본문에서의 멍에는 문자 그대로 멍에를 말한다. 소가 쟁기질 할 때나 수레를 끌 때 그 어깨에 올려 놓는 농기구다. 한국 쟁기는 소 한 마리에만 올리지만 당시 유대의 쟁기는 반드시 두 마리에 함께 올리도록 되어 있다. 바리새인들은 무거운 짐을 유대인들끼리 메게 하고 자기들은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 했다.”(마23:4) 반면에 예수님은 다르다. 분명히 ‘나의 멍에’를 메라고 했다. 멍에를 주님이 함께 메어 주신다. 그래서 가볍고 쉽다. 또 제발 예수님이 모든 환난과 문제를 다 해결해 주시는가 보다라고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예수님과 함께 메는 멍에

예수님이 함께 메는 멍에란 간단하다. 그 분이 항상 신자의 바로 곁에 계신다는 것이다. 멍에를 메고 있기에 단 한 시도 떠나시는 적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누구나 잘 알고 있고 또 신자의 입장에서만 생각한 것에 불과하다. 역으로 생각해 보라. 신자는 그 분이 가시는 길을 떠나 다른 길로 벗어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 분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과 맞바꾼 구원이라 당신의 자녀로 선택한 자를 중도에 포기하고 놓으실 이유는 절대 없다.

주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것은 신자가 가는 길로 그 분이 끝까지 동행하시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이 가시는 길을 신자가 갈 수 밖에 없도록 하신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길이 아닌 곳으로 절대 가지 않으시기에 신자가 길이 아닌 곳을 가고 있으면 절대 그대로 가만 놓아 두시지 않는다. 어깨에 멍에를 메어서라도 바른 길로 끌고 오신다. 결국 그 분이 가는 길을 가야 수고와 짐이 벗어진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따라가야 할 신자의 길은 어떤 길인가?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좁고 협착한 길이다. 신자가 그분의 뜻과 다르게 제 마음대로 가고 싶어하는 그 길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자 청년이 주님께 찾아와 어떻게 하면 주를 따를 수 있는가 물었을 때에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눠주라고 했다. 전 재산을 교회에 헌납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생명을 보존하고 현실의 삶을 유지시키는 능력과 자원이 돈인가 주님인가 둘 중에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쟁기를 잡은 자는 뒤를 돌아 볼 수 없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일 수 없는 세상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편하고 신나고 화려하고 풍요롭게 가는 넓고 쉬운 길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야 한다. 그 길의 목적지이자 종착점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다. 자기의 생명을 버리더라도 원수를 사랑하며 그 원수의 영혼에 새생명을 불어넣어 대신 살려야 한다.  

다윗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이 보았을 때 도저히 게임도 안 될 것 같은 대적을 당당하게 맞서 싸우며 이겨 나가는 길이다. 신자가 가진 자원과 능력은 하나 없어도 주님이 멍에를 메고 가시는 그 길을 함께 가고 있기 때문이다. 신자는 가난하든 풍요롭던 아무 상관 없이 세상의 죄악된 길과는 정반대로 가야 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양 믿고 오직 그것만 구하려고 아둥바둥대며 헛수고하는 세상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영원을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절대적 진리와 선이 타락되다 못해 완전히 실종된 세상 앞에 그 절대적 진리이자 선이신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 역사하심을 보여야 한다. 신자가 그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권능을 자기 삶에서 증거해 보이지 못하면 이 세상은 더 이상 희망이 없고 절망 뿐이다. 갈수록 더욱 썩어져 멸망의 길로 가고 있는 세상이 신자 한 사람이 있음으로 그 부패의 속도가 줄거나 중지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아니 신구약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은 신자에게 자기를 따르는 자에게 세상의 부귀영화를 약속하신 적이 없다. 세상에 보물을 쌓는 것은 좀과 동록과 도적이 해칠 뿐이라고 하셨다. 신자는 하늘에다 영원히 썩지 않는 보물을 쌓아야 한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바라는 요구 사항은 오직 하나다. 무엇을 먹든지 마시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것이다. 종교적 행사를 거창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신자를 보는 모든 사람이 그 입술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라는 것이다. 우리 속에 있는 보배 되신 예수님의 향기와 빛이 우리를 통해 세상 앞에 겉으로 드러나고 비춰져야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자기들이 가고 있는 길이 넓고 편하기는 해도 완전히 틀리고 잘못된 길이라는 것을 깨달게 해 주어야 한다. 또 그 길에서 돌이켜 예수를 따르게 해야 하고 그들에게도 주님의 멍에를 메게 해야 한다.

바로 이 부분에서 신자는 쉬지 말고 기도하고 말씀을 보아야 한다. 자기가 바른 길로 제대로 가고 있는지 또 그 길 위에 있다면 더 능력 있게 가기 위해 점검하기 위해서다. 신자라도 아직은 연약하고 원죄의 본성이 남아있다. 예수님과 멍에는 메고 있으면서 자꾸 뒤를 돌아보려 하고 곁눈질 한다. 때로는 곁에 주님이 함께 멍에를 지고 있다는 것도 잊어 버릴 때 있고 심지어 주님의 길로부터 자꾸 멀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제 수고와 짐을 벗는 방법을 결론지어 보자. 수고와 짐이 병 들고 사업 부도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그것을 벗는 방법도 기도하고 말씀 보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다. 수고와 짐은 어떻게 하든 하나님께 겉으로라도 잘 보여서 복 받으려는 집착과 고집이다. 하나님과 거래하려 드는 우리 심령 뿌리 깊이 박힌 원죄의 흔적이다. 그럼 그 수고와 짐을 벗으려면 당연히 그런 생각을 버리고 그 죄를 회개해야 한다. 주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뜻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배운 것만으로 그 길로 제대로 걸어갈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기에 주님이 같이 멍에를 메어 주신다. 주님과 함께 좁고 협착한 길을 가야만 그 수고와 짐이 벗어진다.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는가? 오히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병 들고 사업 부도나는 길로 가는 것이다. 현실의 수고와 짐을 도리어 짊어져야 한다. 이해가 되는가? 일부러 찾아나서 고통을 당하라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 가운데 주님의 영원한 계획과 은혜가 있음을 알아 범사에 소망을 갖고 감사해야 한다. 또 할 수 있다면 그 속에서 그 분의 영광을 찾아내어 세상 앞에 드러내야 한다.

신자더러 세상에서 환난을 겪게 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신자가 꼭 매를 맞아야만 정신 차리고 잘 하게 된다는 뜻이 아니다. 주님과 함께 세상 앞에 빛과 소금의 모습으로 서서 거룩하고 의롭고 생명이 넘치는 길로 갈 때에 오히려 환난 중에 그 기쁨과 재미가 훨씬 더 크고 얼마나 신나는지 함께 가보면 스스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란 바울 사도가 말한 대로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인 것이다(고후6:9,10)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그 분께 배우지 않고는 신자가 지고 있는 수고와 짐을 벗을 길은 없다.        

날마다순종

2020.10.15 17:09:33
*.14.99.253

주님의 멍에를 함께 멜 수 있음에 감사와 찬양드립니다. 이보다 더 큰 영광이 어디 있을까요? 주님 가시는 길 이 어리석은 저에게도 지도해 주시고 인도하여 주옵소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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