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모두 내 탓이오” 운동을 그만 두어라.(마7:1-5)

조회 수 4200 추천 수 135 2004.01.26 20:07:32
마태복음 강해(92) 1/25/2004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욕심 많은 빵 가게 주인

미국 어떤 마을의 빵 가게 주인이 단골 버터 가게에서 버터를 사서 쓰는데 아무래도 갈수록 그 양이 주는 것 같았다. 저울에 달아 보았더니 정량보다 훨씬 모자라 경찰에 고발했다. 재판관이 버터 가게 주인에게 어떤 저울을 쓰느냐, 저울 추를 속이느냐고 물었더니 우리 가게엔 저울이 아예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어떻게 양을 달 수 있느냐고 다그치니까 빵 가게에서 매일 배달해주는 일 파운드 짜리 빵에 무게를 달아 버터를 팔고 있다고 했다. 당연히 벌을 받은 것은 버터 가게 주인이 아니라 빵 가게 주인이었다.예수님이 본문에서 사람들이 자기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의 티끌은 잘 본다고 지적하시면서 자기가 한 비판과 헤아림이 도리어 자신에게 돌아 온다고 말씀하신 그대로다.

우리 모두 남의 티끌 잡는 데는 빠르지만 자기 들보는 보지 못한다. 예수님 말씀대로 먼저 자기 눈의 들보를 제거해야 하는데도 잘 지켜지지 않는다. 신자가 차라리 매일 몇 시간씩 성경 읽고 기도하는 일은 해낼 수 있어도 이 일만은 고치기 더 힘들다. 교회 안에 생기는 분쟁이나 성도 간에 서로 상처를 주고 받는 원인이나 나아가 인간 사회에 발생하는 모든 갈등, 다툼, 죄악의 근원도 따지고 보면 전부 이것 때문이라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니다. 오죽하면 한국 사회의 온갖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주교에서 몇 년 전부터 “모두가 내 탓이오”라고 고백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했겠는가?

“내 탓이오”라는 운동의 목적은 순수하며 그렇게 노력하는 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 사회가 겪고 있는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은 것이라 그  갈등을 해소하는 근본적인 해결책은 결코 되지 못한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본문에서 권면하신 말씀의 뜻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도토리 키재기 같은 인간

우선 내 눈에 들보와 남의 눈에 티끌이라고 해서 상대의 허물이 적고 내쪽의 잘못이 훨씬 크다는 의미는 아니다. 인간은 누가 잘나고 못나고 구별이 없다. 모두가 도토리 키재기 같을 뿐이다. 누구나 각기 장단점은 있기 마련이다. 누가 누구보다 우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경우란 어떤 특정 분야에 한해 모든 상황과 조건이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에만 해당된다.

말하자면 피겨 스케이팅 선수와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둘을 놓고 누가 더 스케이트 잘 탄다고 말할 수 없고 마라톤 선수와 100미터 단거리 선수를 두고 누가 더 달리기를 잘하는지 따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무 의미도 없다. 100미터 달리기 선수만 두고 그것도 남자 중등부, 여자 고등부 식으로 동일 조건으로 구분할 때에 한해 일등, 이등, 삼등을 나눌 수 있다.

성격, 체격, 외모, 감성, 인격, 자질, 능력, 지성, 교양, 도덕성, 영성 등 인간을 평가할 수 있는 항목은 수도 없이 많기 때문에  정말 객관적으로 공평하게 한 인간 전체를 두고 평가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세계 60억 명의 인구 중 단 한 사람도 지문과 DNA가 같은 자 없듯이 하나님 앞에는 모두가 천하 보다 귀한 그 분의 피조물이자 걸작품일 뿐이다.

또 예수님도 인정하셨듯이 인생은 염려, 실망, 상처, 실패, 좌절, 고난, 핍박을 죽을 때까지 연속적으로 겪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을 비켜 나갈 수 있는  행운아는 아무도 없다. 모든 인간이 연약하고 부족하며 불완전하다. 나아가 허물과 죄악 투성이인 불쌍한 존재일 뿐이다. 단 한 사람도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이 절실하게 필요하지 않은 자 아무도 없다. 하나님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고집하는 자에게 기다리는 것은 절망뿐이다. 실망하여 힘이 빠진다는 절망(切望)이 아니라 절대로 망한다는 뜻에서 절망(絶亡)이다.

인간 전체를 두고 우열을 따질 수 없다고 해서 본문 말씀이 동일한 조건에서 동일한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신자부터 회개하고 모든 것의 책임을 지라는 뜻도 아니다. 예수님의 권면의 말씀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이 말씀의 배경에도 바리새인의 잘못이 자리잡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날 여자가 화장을 하거나, 밀 밭을 지나다 발에 밟힌 것을 까먹는 것은 괜찮아도 손으로 비벼서 먹는 것은 노동으로 쳐서 율법을 위반한 것으로 정죄했다. 단순히 잘못을 저질렀다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몰아 부쳤다.

일반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도 아니고 바리새인들이 만든 유대사회의 관습법 내지 종교규례를 위반한 잘못밖에 저지른 것이 없다. 대신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지적한대로 소경 된 인도자로 천국 문을 사람 앞에서 닫고 자기들도 들어가지 못하고 들어가려는 자도 막은 죄를 저질렀다.(마23:13) 사람들을 온갖 종교적 멍에와 이단 사슬에 묶어 참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게 했다.  

본문의 뜻은 이처럼 자기는 치명적 잘못을 저질러 놓고 상대의 아무 것도 아닌 허물이나 약점 같은 것을 정죄하지 말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무조건 신자가 먼저 양보하고 희생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허물과 잘못과 죄악은 내 것이든 상대의 것이든 불문하고 정확하게 분별하고 판단하라고 하셨다. 상대의 잘못이 들보인데 티끌이라고 한다든지, 내 허물이 티끌에 불과한데 들보라고 인정할 필요가 없다.  

정확한 사실과 엄정한 진리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겸손은 참 겸손이 아니라 교만이다. 잘못을 정확하게 진단하여 있는 사실 그대로 솔직하게 잘못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겸손이다. 내 잘못이 들보인지 분명하게 알아 내 죄는 들보다라고 해야 겸손이다. 그렇게 하려면 내 탓이오 하기 앞서 오히려 누구 탓인지 먼저 따져야 한다.

바리새인들이 자기들 허물은 들보이고 일반 유대인들의 것은  티끌인데도 자기 것은 보지 못하고 상대만 정죄하므로 진실과 거리가 멀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5절에서 그들을 외식한다고 야단치셨다. 역으로 따지면 자기에게 잘못이 없거나 작은 데도 무조건 “내 탓이오”라고 하는 도덕적 겸손도 외식이 된다는 말이다.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다.

본문에서 정작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내용은 따로 있다.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도토리 키재기이며 어떤 특정 사건에서 잘잘못도 따지고 보면 반반인 경우가 대부분이며 얼마든지 상대가 치명적 잘못을 저지르고 내가 피해자가 될 수 있는데도 구태여 예수님이 자기 허물을 들보, 상대 잘못을 티끌이라고 비유한 이유를 따져 보아야 한다.  

모든 사람이 자기 잘못에는 한 없이 관대하지만 남의 허물에는 철저하게 엄격하다는 것이다. 남이 간통하면 불륜이고 자기가 하면 로맨스다. 인간은 백이면 백 자기 멋에 살고 자기만 사랑하는 자기도취병 환자다. 자기가 옳지 못하다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 보는 적이 별로 없고 그렇게 할 마음도 전혀 없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인간은 변명, 핑계, 과장, 가식, 위선, 거짓, 사기에 익숙하지 마음이 정직, 순수, 가난, 청결해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아예 반대 쪽에 등을 돌리고 서 있다.  

아담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원죄를 짓자 하나님이 벌을 주셨다. 그 징계의 이유를 성경은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기” 때문(칭3:22)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실력이 하나님 만큼 월등이 좋아져 인간이 감히 하나님과 맞먹으려 하니 괘씸해서 벌을 준다는 의미가 아니다.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는 분명 좋은 것이며 인간만이 갖고 있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절대적 선이다. 하나님에게 선악이라는 판단의 모든 기준과 근거는 본인 당신이다. 본인이 선 자체이기 때문에 당신의 뜻과 마음에 맞지 않으면 악이 된다. 인간이 범죄 하여 절대적 선이신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자기 영혼과 삶 속에서 배제해 버리자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하나님처럼 자기 자신의 생각과 기분에 두게 되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타락한 이후의 모든 자연인은 의사 판단의 기준을 자기에게 두어 남보다 자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신의 잘못에는 한 없이 관대해졌고 남의 허물에는 철저히 엄격해졌다.

신자가 된 것은 불신자시절과는 180도로 달라졌다는 뜻이다. 그럼 이 문제에 대해 신자는 불신자와 반대로 내 잘못에는 한없이 엄격하고 상대의 허물에 대해선 끝없이 관대해야 하는가? 아니다. 자연인의 상태가 그렇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 범죄한 이후의 결과적인 모습이다. 범죄해서 불신자가 되었으니 범죄하기 전의 상태로 먼저 돌아가야 한다.모든 선악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면 된다. 절대적 선이신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은 죄로 볼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싫어하고 미워하는 것은 신자도 싫어하고 미워하며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은 신자도 좋아해야 한다. 신자가 겉으로만 내 탓이오라고 도덕적 겸손을 떨기 전에 무엇이 악이고 선인지 분명하게 분별해야 한다는 말이다.

무엇이 죄악인가?

그럼 여러분은 선악 간을 어떻게 분별하고 있는가? 십계명에서 지적한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 이웃의 물건을 탐하는 것들이 죄악인가? 이런  부분에 구태여 인간의 선악에 대한 분별력을 동원시킬 필요가 없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모르는 것과 상관 없이 심지어 어린 아이도 그것들이 죄라는 것쯤은 다 알고 있다.

선이 아닌 것이 악이다. 너무 싱겁고 당연한 것 같은가? 아니다. 이것은 굉장히 심각한 이야기다. 선이 왜곡되고 모순 된 것이 악이다. 선이 조금이라도 헝클어진 모습이 보이거나 바로 서 있지 못하면 바로 그곳에 악이 깃들게 되고 악이 조금이라도 선에 영향을 끼치면 바로 선이 구부러진다. 알기 쉽게 말하자면 선을 행하고 있지 않으면 악이라는 말이다.

살인하지 말라나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동일한 주님의 계명이다. 어느 계명을 위반해도 죄이긴 마찬가지다. 이것은 지켜야 하고 저것은 안 지켜도 된다는 법은 없다. 사람이 선행을 하지 않고 있으면 악을 범하고 있는 것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중간의 회색지대에 처해 있는 법은 없다.

사람은 기도하고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선을 행하든 악을 범하든 둘 중 하나를 하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식사를 해도 사랑하는 아내가 이렇게 정성껏 차려 주었고 하나님이 일용할 양식을 주었기에 감사하게 먹고 있으면 선이다. 그러나 매일 똑 같은 반찬에 왜 이리 성의가 없어라고 불평하고 먹으면 악이다. 모든 사람이 어느 장소 어떤 시간에도 하나님의 선한 인도하심 가운데 있거나 사탄의 악한 궤휼에 빠져 있거나 둘 중 하나지 인간 혼자서 자기 뜻대로만 서 있는 법은 없다.

인간 사회의 갈등과 모순을 ‘모두 내 탓이오’라는 도덕적 회개 운동으로는 절대 고쳐지지 않는다. 선악을 분명히 구분해서 누구에게 티끌이 있는지 누가 들보를 지니고 있는지 정확하게 판별해 내어야 한다. 그래서 악은 절대로 저지르지 않아야 하고 선이 굽어지게 해선 안 된다. 사탄의 흉계에 놀아나지 말고  하나님의 은총과 권능 아래로 돌아 와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5절에서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고 그 후에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라고 하신 것이다. 내 눈의 들보를 먼저 빼는 목적은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기 위한 것이다. 누가 죄를 지었고 또 누가 더 큰 죄를 지었는지를 떠나 하나님의 자녀가 선의 자리에서 벗어나 악에 가 있다면 누구라도 다시 하나님의 자녀가 응당 있어야 할 그 자리로 되돌이키라는 것이다. 사탄의 꾐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품 안으로 돌아와 그 둘 사이에 확실한 담을 쌓아야 한다.

또 그러기 위해서 더욱 선악간의 구별을 절대선이신 하나님을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 악을 무시하고 축소한다고 악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것이 내 탓이오 하고 있다고 해서 상대의 잘못이 고쳐지지 않는다. 선이 아니면 악이라는 원리가 모든 신자의 삶에 전 인생을 걸고 적용되어져야 한다.

선이 아니면 악이라는 것은 악을 이길 수 있는 길은 선 뿐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불신자와 달리 자기 잘못에 대해선 한 없이 엄격해야 하고 남의 허물에 대해선 철저히 관대해져야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신자 된 결과로 나타나야 하는 법이다. 내 자신의 죄만 회개하는 도덕적인 견지에서가 아니라 오직 나와 상대를 하나님의 품 안으로 돌려 놓아 상대를 살리고 내 신자 된 생명력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이 차이를 분명히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인생을 가장 졸렬하게 사는 방법

어떻게 해야 상대의 허물에 한 없이 관대해질 수 있는가? 상대의 허물이 가장 잘 안 보일 때가 언제인가? 연애할 때다. 눈에 콩깍지가 덥힌 것처럼 곰보도 점점이 매력이 흘러 넘치고 사팔뜨기도 섹시하게만 보인다. 교회 안에서도 인격, 교양, 믿음의 수준에 관계 없이 아이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지는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 자식을 남의 자식보다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가 없다.

반면에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고 판단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연히 나는 다른 사람과 질적으로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선 남의 허물을 들추어 냄으로써 자기를 상대와 차별화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속내를 한 꺼풀만 더 파고 들면 결국 그 상대와는 상종하기 싫다는 뜻이다. 그 사람을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이유를 찾아 내어 자기가 그를 멀리하고 있는 핑계로 둘러댄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을 위반하고 있는 것에 관해 변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상대를 사랑하고픈 마음이 눈곱 만큼도 없다. 상대의 장점이 수백 가지이고 단점이라곤 몇 개뿐이라도 용케 그 단점을 반드시 집어 낸다. 조금이라도 상대를  가까이하고 친하게 지내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배려와 인내로 허물을 덮어 두지 뒷구멍까지 파 헤쳐 약점을 집어내지 않는다.

미국의 데오도르 루즈벨트 대통령이 “인생을 가장 졸렬하게 사는 방법은 남을 비웃은 얼굴로 대하며 사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가 최고이며 자기만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다. 자기만 옳고 바르니까 남에게서 마음에 드는 구석이 생길래야 생길 수 없다. 사랑하고픈 마음이 전혀 없으니 상대의 장점이 눈에 보일 리도 없다.

예수님이 2절에서 내가 비판하고 헤아린 그대로 나에게 거꾸로 돌아 온다고 지적하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인간은 영적인 동물이라 내가 상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겉으로 아무 내색을 안 해도 상대는 본성적으로 알게 되고 그에 따라 상대도 당연히 똑 같은 방식으로 나를 대한다는 것이다.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구태여 가서 물어 볼 필요가 없다. 내가 상대를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스스로 판단해 보면 그 답은 뻔하다. 상대를 진정으로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아무리 모든 것이 내 탓이오라고 해 봐야 먹혀 들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간 사회의 갈등과 모순이 우리가 서로 남에게 핑계만 대고 도덕적으로 겸손하지 못해서 생긴 것이 아니다. “모두 내 탓이오”라는 운동은 이미 문제가 발생하고 난 후다.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는 데 훔쳐간 도둑이 와서 배상하고 고쳐주기 전에 소를 잃어버린 주인이 손해를 감수해 가며 고친 정도다. 더 악화 될 수 있는 소지를 막은 것 뿐이지 문제의 근원을 해결한 것은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 상처를 줄 수 있는 데까지 다 주어 상대를 완전히 바보 병신으로 코너에 몰아 세상의 웃음거리로 만든 후에 그래 내가 잘못했다 미안하다라는 말을 하는 것으로 다 된 것인가? 나아가 그런 말조차 안 했기 때문에 상처와 갈등이 생기는 것은 더더구나 아니지 않는가? 모든 인간 사회의 갈등과 분쟁이 생기는 유일한 이유는 따로 있다.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인간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권능의 품 안에서 도망쳐 나가 스스로 독립하자 똑똑해지고 거룩해지고 선해지고 능력이 늘어난 것이 아니다. 전부 치사하고 졸렬하고 비겁해졌다. 자기 기분과 마음에 드는 일만 하고 그런 친구만 사귄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 모두가 얼마나 불쌍하고 연약한 죄인인지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거지 떼들이 모여 그 안에서도 서로 잘나고 못나고 따지고 있는 꼴이다. 곧 죽어도 자기는 멋지고 능력 있는 양 착각한다. 모든 죄인이 주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변화되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지 않고는 그 사람 개인 뿐 아니라 세상 전체가 절대로 망할 수밖에 없다.  

신자가 교회로 모여야 하는 이유

목회를 하다 보면 성도 중에 분명히 반복적인 죄와 시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본다. 신자로써 반드시 서 있어야 할 자리인 하나님의 거룩과 의와 생명과 빛의 영역에서 벗어나 죄와 죽음과 흑암의 영역에 들어가 헤매고 있다. 꼭 방탕하고 거짓되고 흉악한 죄를 짓고 있다는 뜻만은 아니다. 그 영혼이 선에서 벗어나 하나님과의 교제와 동행에서 점차 멀어지고 반대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 외형적인 잘못이 없어도 목사가 보면 얼굴 빛이 달라지며 무엇인가 무너져 내리고 있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 구석인가 썩어져 가는 냄새가 맡아진다.

곁에서 그런 모습을 보는 목사로선 참으로 안타깝다. 직설적으로 그 잘못을 지적하면 바로 되돌아 오는 반응은 반발이다. 본질적으로 완악한 경지에 들어간 자는 자꾸 완악해진다. 사탄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간접적으로 넌지시 암시해도 못 알아 먹는다. 이미 그 영혼에 어두운 그림자가 끼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목사로선 그 성도의 앞 날에 하나님의 징계가 기다리고 있음을  너무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이 죄를 지어 벌을 준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택하신 영혼을 사랑하고 안타까워 하는 하나님이 미혹에 빠져 있는 자를 당신의 은혜의 품 안으로 돌이키려면 그 수 말고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때 목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 뿐이다.

그런데 그 때 목사가 “전부 내 탓이오”라고 기도하지는 않는다. “제발 저 성도의 눈에서 티끌을 제하여 달라고” 매달린다. 목사로선 그 사람이 앞으로 당할 징계도 안타깝지만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이 얼마나 불쌍한지 철저히 알기 때문에 하나님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영혼을 다시 선의 자리에 되돌려 놓아 달라고 간구하게 된다. 심지어 어서 빨리 징계를 주어서라도 그렇게 해달라고 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선의 자리만이 신자가 있어야 할  풍성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는 “모두가 내 탓이오”는 자기 의를 자랑하며 겸손을 가장한 교만일 수 있다. 십자가에 자기 모든 것을 내어주신 주님과 돌에 맞아 순교한 스테반이 하나님께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때만 그 말이 참된 효능과 진정한 가치를 가진다. 내가 죽더라도 상대를 살리려는 진심이 없이 이런 말을 함부로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신자들이 교회로 모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도해서 사업에 형통하고 병이 낫기 위해서인가? 절대 아니다. 하나같이 모두 연약하고 불쌍한 존재라 고난의 연속인 세상을 혼자 힘으로만 감당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시험과 유혹과 죄악에는 더 그렇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서로의 눈에서 들보와 티끌을 제거해 주면서 힘을 합쳐야 이긴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 생활은 인생을 가장 풍성하고 아름답게 살게 한다. 더 이상 졸렬하고 치사한 인생을 살지 않기 위해서다. 서로가 믿음과 인내와 소망을 갖고 서로를 붙들어 세워주어 주님의 장성한 자녀로 다 같이 변화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참 된 인생을 살 수 없다. 교회로 모이지 않는 인생 만큼 불쌍한 인생이 없다. 신자가 예수 믿고 교회 나온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지 모른다. 신자만이 고난의 연속인 인생을 능력 있는 승리의 장으로 바꿀 수 있다.

“모두 내 탓이오’라고 하면서 남들을 비판하지 않고 헤아리지 않게 되었다고 신자가 다 된 양 판단하지 말라. 신자가 된 기준은 오직 하나다. 언제라도 세상의 어떤 누구와도 기꺼이 친구가 될 용의와 준비가 되어 있는가다. 아무리 심각하고 치명적인 허물과 약점과 잘못과 죄악도 용서하고 수용하고 사랑할 수 없다면 아직은 참 신자가 아니거나 신자이면서도 잠시 선이 아닌 악의 자리에 외출해 있는 것이다.

선악의 기준을 하나님에게 두었다면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해야 하고 싫어하는 것을 싫어해야 한다. 주님이 하나님께 돌아 온 십자가 상의 강도를 싫어하고 배척했는가? 그런데도 왜 우리는 교회 안에 특별한 잘못도 저지르지 않은 자를 단지 자기 기분에 들지 않는다고 꼴불견으로 매도해 멀리하고 비판하고 헤아리고 있는가? 그 비판과 헤아림이 우리에게 돌아와 벌을 받지 않겠는가? 벌 받는 것은 차라리 깨우칠 기회를 가지게 되어 신자의 축복이다. 벌을 받고 안 받고를 떠나 우리가 그러고도 참 신자인지 정말 심각하게 되돌아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날마다순종

2020.08.30 16:45:52
*.14.99.253

그간 완악하며 졸렬하고 치사하게 살아온 어리석음과 죄를 회개합니다. 내눈의 들보를 빼내어 청산하고 주님의 자녀로서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와 낮은 곳에서 기쁘고 즐거이 이웃을 섬길 수 있는 자녀가 되도록 성령님 저를 이끌어 주옵소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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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3 주일을 꼭 지켜야 하는가?(마4:8-11) [4] 운영자 2006-08-06 3450
232 인생에서 꼭 이루어야 할 두 가지(엡2:4-7) [4] 운영자 2007-03-01 3281
231 회개가 아니라 회심이다. (행3:19‐26) [3] 운영자 2008-12-31 3219
230 기도로 염려가 없어지지 않는다 (마6:25) [2] 운영자 2004-01-02 3167
229 주께 모든 것을 내려 놓는다는 의미는? (마7:24-27) 운영자 2004-04-28 3076
228 당신은 지금 행복합니까?(마4:23-5:3) [4] 운영자 2007-03-15 3069
227 종신 운전수와 평생 식모 (마 5:16) [5] 운영자 2003-06-16 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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