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주께 모든 것을 내려 놓는다는 의미는? (마7:24-27)

조회 수 3076 추천 수 78 2004.04.28 17:53:59

마태복음 강해(99) (마7:24-27) 4/25/0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柱礎)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앞뒤가 맞지 않는 예수님의 비유

예수님은 산상수훈을 네 가지 비유를 들어 결론을 내리셨는데 본문은 그 마지막 네 번째다. 저희가 산상수훈만 마태복음 강해 26번부터 오늘 99번까지 74주에 걸쳐 살펴 보았는데 그 내용 전부를 이 비유 하나에 압축시켜 놓은 셈이다. 한마디로 내린 그 결론은 무엇인가? 24절에 있는 대로 지금까지 주님이 가르치신 모든 말씀대로 행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신자의 삶이 반석 위에 지은 집과 같고 행하지 않으면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이 된다고 하셨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이 비유가 조금은 부적절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말씀대로 행하는 것을 집 짓는 것에 비유하자면 집을 튼튼히 지어라고 해야 앞뒤 논리가 맞다. 그런 뜻에서 돼지 삼형제의 비유가 더 적절하지 않겠는가? 큰 형 돼지는 노느라 정신이 없어 짚으로 겨우 비만 피할 정도로 짓고 둘째는 대충 적당히 나무로 짓고 막내만 벽돌로 정성껏 지었다. 폭풍이 덮치자 짚으로 지은 집은 흔적도 없이 날라갔고 나무 집은 폭탄 맞은 것처럼 파괴되었지만 벽돌집은 까딱도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이 비유에서 어떤 자재를 써서 얼마나 튼튼히 짓는가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으셨다. 무슨 의미인가? 집 자체는 똑 같고 단지 집이 앉은 기초만 반석과 모래로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집이란 예나 지금이나 반석 같이 튼튼한 기초 위에 짓지 모래 위에 짓는 바보는 없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이런 비유를 하신 이유는 따로 있는데 팔레스타인의 지형과 기후를 알아야 이해가 쉽다. 와디(wadi)라고 해서 평소 때는 말라 단단하지만 우기 때 이 지역 특유의 폭우가 쏟아져 범람하면 강으로  바뀌어 버리는 땅이 있다. 그런 땅에다 집을 지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비가 오지 않고 해가 쨍쨍하면 두 집 모두 기초도 단단하고 집 모양도 똑 같아 외양으로는 어느 집이 더 견고한지 모른다. 그러나 일단 폭우가 내리면 한 집은 완전히 떠내려 가 버리는데 집 자체를 부실로 지었기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강바닥에 집을 건축한 셈이라 그렇다.

예수님의 비유가 부적절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완전하며 그 전하고자 하는 고유의 뜻을 제대로 새겨야 한다. 비유의 초점은 집을 튼튼히 지어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튼튼한 기초 위에 집을 지으라는 것이다. 기초가 튼튼하면 그 위에 지은 집도 튼튼해진다. 그러므로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가르침대로 행하라는 것의 가장 근본적인 의미는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준수하느냐 보다 신자의 삶이나 신앙 생활에서 모든 행함을 올바른 기초 위에 두라는 것이다.

기도와 말씀으로 시간 낭비하고 있는 신자들

오늘날의 신자에 비추어 보면 기도하고 말씀 보고 예배 드리며 봉사하고 또 매일의 삶을 사는 모습은 별 차이 없이 신실한 두 사람이 있는데 누가 더 신앙이 좋은지 평소 때는 모르지만 시험과 환난이 닥치면 쉽게 판별이 난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따지면 예수님이 신자에게 당부하신 말씀의 포인트는 기도를 뜨겁게 하고 말씀을 열심히 보고 봉사를 정성껏 하라는 것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들리는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상하게 듣는 자가 더 이상하다. 기도하고 말씀 보는 궁극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시험과 환난을 이겨내는 것이다. 그런데 환난과 시험에 승리하지 못하는 기도와 말씀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차라리 안 하느니 못한 시간 낭비다.

대부분의 신자는 기도하고 말씀 보면 당연히 시험과 환난을 잘 이겨낼 것 이라고 너무 쉽게 단정 짓는다. 물론 그렇게 하는 사람이 안 하는 사람보다 승리할 확률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높다. 그러나 우리 주위에는 신실하다고 칭찬 받던 집사가 돈 몇 푼 때문에 하루 아침에 사기꾼이라고 손가락질 당하고, 인격자라고 존경 받는 장로가 아무도 모르게 바람을 피우고 있지만 교회 안에선 버젓이 행세 하고 있는 경우를 흔히 본다. 그 부인은 장로 부인이라는 체면 때문에 드러내 놓고 하소연도 못하고 우울증에 걸린다. 나아가 거룩하고 위대해 보이는 목사님마저 집에만 들어가면 아내와 아이들을 신경질적으로 달달 볶다 못해 학대까지 해 목회를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기도와 말씀에 얼마나 정성껏 매어 달리느냐가 신앙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본문의 비유로 따지면 집만 튼튼하게 짓는 것이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예수님은 특별히 기도에 대해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6:7)고 하셨다. 이 말씀이 신자들더러 꼭 도움 받아야 할 아주 갈급한 소원을 자꾸 아뢰거나 아침, 점심, 저녁에 동일한 내용으로 기도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세심한 성격이나 말을 더듬는 습관을 가지면 자기도 모르게 중언부언하게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이방인들이 자기들 신이 청력이나 지적 수준이 낮아 같은 말을 반복해야만 겨우 알아 들으리라 생각한 것도 아니다. 그들은 기도를 얼마나 정성을 들여 많이 하느냐에 비례해서 그 응답이 빨리 잘 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예수님은 중언부언 말을 많이 하는 형식보다 어떤 마음과 믿음으로 기도하는가를 문제 삼았다. 마찬가지로 본문의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이 가르친 대로 잘 행하느냐가 아니라  신자가 어떤 기준과 가치관을 갖고 매일 살고 있는가를 따지신 것이다.  

하나님에게 명령하고 협박하는 신자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기초 위에서 살고 있는가? 반석인가 모래인가? 특별히 역경과 시험을 당할 때 어떠한가? 아무 것도 염려말고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아뢰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에 가득차는가?(빌4:6,7) 또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이룰 줄 알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가?(롬5:3,4)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리 기도해도 불안과 염려가 가시지 않는가? 응답이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혹시 기도 중에 잡생각을 했는가, 하나님 앞에 죄지은 것 중에 회개하지 않은 것이 있는가 싶어 그저 안절부절 못하는가? 환난이 도저히 끝날 기미가 안 보이면 하루에도 몇 번씩 믿음을 포기하고 “그냥 확! 세상적인 방법으로 해치우고 말아”라는 생각이 드는가? 그럼에도 그렇게 못하는 유일한 이유가 혹시라도 나중에 있을 하나님의 징계가 두려워서라면 이 얼마나 초라한 신앙인가? 그야말로 모래 위에 지은 집이다.

아주 부드러운 모래 언덕을 걸어보라. 한 발 디딜 때마다 발이 푹푹 빠지며 몸의 중심을 못 잡고 기우뚱 거릴 뿐이다. 어정쩡하게 한 발은 세상에 두고 다른 발은 교회에 두면 항상 절뚝거리기 밖에 더하겠는가? 야고보 사도는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는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아라고 경고했다.(약1:7,8) 모래 위에 선 신자에게 승리의 기쁨이 생길래야 생길 수 없다.

신자가 삶에서 행하는 것 모두의 기초는 두말 할 것 없이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이다. 그 분께 삶의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므로 구하고 소망하는 것들을 전부 아뢴 후에 모든 문제는 내려 놓아야 한다. 그런데 솔직히 그렇게 하지 않는 신자는 별로 없다. 그럼에도 왜 환난 중에 즐거워하기는커녕 염려가 끊이지 않는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려 놓는 것을 구체적인 필요, 소망, 문제, 환난을 전부 기도로 아뢰기만 하면 된다고 단순히 생각해서 그렇다. 내게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 앞으로 되어져야 할 일 하나하나에 관해 가능한 많이 가능한 빠짐없이 전부 기도하면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겼다고 착각한다. 그것은 하나님께 의탁하는 것의 본질이 아니다.

엄격하게 말해 신자가 하는 대부분의 기도가 내게 지금 이런 긴급하고 궁핍한 사정이 있음을 하나님이 잘 모르고 계실 테니 가르쳐드린 것 정도 밖에 안 된다.  월말까지 수천불의 돈이 꼭 필요하니 도와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치자. 말투는 극상의 존칭으로 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나님의 도움을 원했지만 그 속을 까뒤집어 놓고 보면 사실은 월말까지 꼭 그 돈 만들어 놓으라고 명령한 것에 불과할 수 있다.  나아가 혹시라도 그렇게 안 되면 더 이상 교회 안 나오고 세상으로 다시 나갈 수 있다고 협박했을 가능성조차 포함되어 있다.      

단순히 우리 필요만 전부 아뢰는 것은 본문 비유로 따지자면 여전히 집을 튼튼히 짓는 행위일 뿐이다. 기도를 두리뭉실하게 했는가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했는가의 차이 밖에 없다. 아무리 구체적으로 아뢰어도 튼튼한 기초 위에서 기도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내려 놓는다는 의미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탁한다는 것의 본질은 따로 있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을 주님이 해결해 주리라 믿는 것 훨씬 이전에 더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다. 한 마디로 나라는 존재, 내가 현재 영위하고 있는 삶, 앞으로 이뤄질 남은 인생 전부를 주님께 완전히 내어드리는 것이다.

70평생을 산다면 70년 X 365일 X 24시간 X 60분 X 60초에서 단 일초도 빠지면 안 된다. 그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지 내 것은 하나도 없으며 내 영원한 운명의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주님의 절대적 주권 아래 있다고 철저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 인식이 모든 삶의 절대적인 명제이자 전제가 되어야 한다. 단순히 그렇게 믿고 고백하는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렇게 인식한 바탕 위에서 현실의 삶도 반드시  그런 방향으로 반응되어져야만 한다.

“하나님 이제 모든 것을 아뢰었으니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세요” 하고 가만히 두 손 놓고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사실은 이렇게도 못하는 신자가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단 일초도 하나님의 사랑이 역사하지 않는 순간이 없고, 삶의 모든 부분에 그 분의 강하고 의로운 손길이 닿지 않는 구석이 없다는 엄정한 진리가 살아 있는 체험으로 완전히 자기의 것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순간순간, 그 구석구석에 하나님의 사랑, 인자, 자비, 긍휼, 은혜, 권능이 넘치지 않는 곳이 있으리라고는 아예 생각도 못해야 한다.

그런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 안에는 시험과 역경의 순간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내 믿음으로 그것들에 절대 지지 않고 이겨 내야지가 아니다. 하나님이 그 역경과 시험 속에서도, 아니 그것들을 수단으로 사용하셔서 베푸시는 은혜와 사랑을 발견해낼 줄 알아야 한다. 발견하는 것으로도 끝이 아니다. 그 발견한 사랑을 누리고 즐길 줄 알아야 하며 그 사랑으로 인해 삶과 인생이 정금 같이 변화되어야 한다. 가만히 참고 견디어냈다고 기특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금으로 덧 입혀 주시지 않는다. 역경 중에 찾아 낸 하나님의 사랑을 신자가 소중하게 키워 나가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환난이 인내를 낳을 뿐 아니라 소망을 이룰 줄 알아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게 된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께 다 아뢰고 나면 내게 일어난 일 하나하나 해결해 주시리라 믿는 것이 전부라면 그 일들이 해결 나지 않았는데 어느 누가 즐거워 할 수 있겠는가? 정신 나간 바보가 아닌 다음에는 그럴 수 없다. 역으로 말하자면 신자가 환난 중에 즐거워 하기 위해선 정신 나간 바보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근본 생각이 바뀌어 그 정신 전부가 하나님께로만 완전히 집중되었고 내 본 정신이 없는 바보(?)로 말이다.    

성경에 비추어 환난에 대해 우리가 취하고 있는 태도를 솔직하게 되돌아 보자.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동원하고 눈물 콧물 뿌려가며 간절히 아뢴다. 그래서 겨우 그 문제만 해결해주시는 하나님의 하해 같은(?) 은총에 그 순간은 간이라도 떼어 내어 줄 것같이 감지덕지하지만 과연 그것이 얼마나 오래 갔는가?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면 일순간에 그 받았던 은혜는 다 잊어 버리고 별로 자신도 없고 불안에 떨면서 하나님과 늘 해 오던 힘 겨루기를 다시 시작한다. 우리가 지금껏 해온 신앙의 실체이자 앞으로도 계속하려는 모습이다.

왜 믿음의 조상이 되었는가?

알다시피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갈 바 몰랐지만 순종하여 떠남으로 우리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었다. 그러나 정작 꼭 기억해야 할 믿음의 참 모습을 놓치고 있다. 하나님은 그 명령을 통해 아브라함이 제대로 순종하는 지만 보시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도 하란에서 머물지 가나안이나 애굽까지 가게 할지 지금 이사 가는 곳은 모르지만 하나님이 명령하셨으니까 무조건 따랐다는 사실만으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예를 들어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갑자기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장엄하고도 거룩한 음성을 확실히 들었는데 안 떠나는 바보가 있겠는가? 시쳇말로 죽으려고 환장을 안 한 다음에는 그럴 수 없다.    

순종의 행위 이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먼저 요구하시고 시험하신 것은 따로 있다. 세상에서 재미 있고 신나는 일, 안전을 보장해주는 생존의 근거, 계획하고 소망하는 것들을 성취해 낼 수 있다고 믿는 자원과 수단과 지혜를 일순간에 몽땅 포기하라고 한 것이다. 세상과 하나님 둘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생명마저 포함해 인생 전부를 당신께 바칠 수 있겠는가 물으셨지 당장 보따리 싸 이사가라고 재촉한 것이 아니다.  

당시에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난다는 것은 바로 죽음을 의미했다. 강도와 도적과 이방 인종과 강과 바다와 사막과 폭풍우의 위험 앞에 보호나 방어 수단 하나 없이 맞서는 꼴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모든 신자에게 종교적 지식, 도덕적 회개, 신앙적 순종을 요구하기 이전에 가장 먼저 하시는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내가 네 생명마저 내어 놓으라면 내어 놓을 수 있겠는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 생명보다 귀하신 분이요 또 언제라도 그것을 내어 놓으라고 요구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인정했고 세상 전부를 포기함으로 자기의 전부를 하나님께 완전히 맡겼다. 갈대아 우르를 떠나기 전에도 그에게 비록 믿음의 형태와 내용은 달랐지만 최소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있었고 또 경배했었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과 자기 생명을 맞바꾸지는 못했다. 그랬던 그에게 세상의 모든 것을 포기하더라도 하나님은 절대 포기할 수 없으며 당신 한 분만으로 만족한다는 믿음이 먼저 생겼기에 그 명령을 순순히 따를 수 있었다. 그에게는 세상과 맞바꾼 하나님이 반석이었고 그 위에 순종이라는 집을 지은 것이지 순종하여 그 반석 위에 올라 간 것이 아니다.    

현대 신자의 약점

오늘 날의 신자는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해 너무나 많이 잘 알고 있다. 성도가 어떻게 행해야 바른 삶인지에 관해서도 모르는 바 없다. 기도, 말씀, 예배, 전도, 선교, 봉사 등에 관해 체계적인 훈련 교본이 다 마련되어 있다. 신학적 지식도 사역자 못지않게 풍부하게 소지하고 있다. 목사가 성경과 다르게 설교하고 있는지 금방 다 꼬집어 낼 정도다.

그런데도 그렇지 못했던 이전 세대의 신자보다 시험과 역경을 이기는 데는 훨씬 약하다. 환난을 만나면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맥을 못 춘다. 그 모든 지식들이 어떻게 하면 집을 튼튼히 짓는가에 관한 것뿐이라서 그렇다. 대부분의 신자가 집을 어디에다 지을지 모르고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이미 반석 위에 자신의 집이 지어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잊고 있다.

현대의 신자가 역경에 약한 것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없거나 모자라서가 아니라 정작 하나님 당신을 놓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뿐이다. 역경을 만나면 차라리 개종을 하거나 기독교 신앙을 포기하는 한은 있어도 에스더 왕비의 “죽으면 죽으리라”와 다니엘의 세 친구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라고 한 고백은 죽도록 하기 싫어 한다.

신자가 하나님께 생명마저 드릴 수 있는 이유는 그 분은 빛이시고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기 때문이다.(요일2:6) 우리의 전부를 받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요구 안에는 우리를 갖고 놀려는 조종, 기만, 사기, 거짓, 변개, 복선 그 어느 것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분의 우리를 향한 생각에는 오직 사랑, 자비, 인자, 긍휼뿐이다. 우리를 지으셨기에 우리의 체질이 얼마나 연약하며 진토인 줄 알기 때문이다. 그 분만큼 우리를 잘 알고 있는 존재는 이 우주 전체에 아무도 없다. 우리보다  더 우리를 잘 아신다.

우리의 생명까지 내어 놓으라고 요구하실 수 있는 충분한 이유가 그 분에게는 있다. 그 명령에 순종하는 우리의 갸륵한 마음씨를 보고 복을 주시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먼저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9,10)

네 전부를 바치라는 요구를 다른 말로 바꾸면 너희는 나를 떠나선 단 한 시도 제대로 살 수 없으며 염려와 불안이 끊이지 않아 참 평강을 누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깨우쳐 주시는 것이다. 알기 쉽게 말해 “나는 언제나 네 편이다.” 더 실감나게 말하면 “때려 죽여도 나는 네를 사랑한다. 네를 어느 때 어떤 환경에서건 절대로 망하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상 어느 누구에게도 이런 사랑은 없다. 만물을 지으시고 전 우주의 주인이신 그 분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런 사랑을 베푸셨다. 그 사랑 안에 우리 전부를 내어 던지라고 하시는데 더 이상 무엇을 주저하겠는가? 망설이는 자가 오히려 바보 아닌가? 신자가 그 분의 사랑 안에 잠겨 있다면 두려움이 없고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한 것이다.(요일43:18) 성경은 분명히 믿음으로 훈련을 쌓아 어떤 역경에도 끄떡 없는 담대한 사람으로 바뀌지 못해 두려워 한다고 하지 않았다. 그 분의 사랑 안에 완전히 잠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신자가 전 평생을 걸쳐 해야 할 행함은 오직 하나다. 그 사랑 앞에 제대로 반응하는 것이다. 기도하고 말씀보고 찬양하여 감정의 충만이 일어나 눈물 흘리면서  ‘주님 사랑합니다’라고 고백하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일들, 처해 있는 환경 전부가 우리가 살기에 가장 축복되고 완벽하게 선한 것이라는 확신이 있고 그 바탕 위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어떤 시험과 역경이 와도 Up-and- Down하지 않아야 한다.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랑하는 상대가 내게 해 주기를 가장 원하는 바로 그것을 해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기도하고 말씀보고 찬양하는 것을 원하시겠는가?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으로 이뤄내심을 확신하기에 어떤 시험과 역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평강을 유지하는 것이겠는가? 두 말 할 것 없이 후자다. 그럼에도 우리 체질이 연약하고 아직 죄의 본성이 남아 있어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것을 알기에 우리더러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어떻게 해야 실천할 수 있는가?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결론으로 가르침 대로 행하라고 하셨다. 대표적인 가르침 하나만 들어 어떻게 행해야 하나 알아보자.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하셨다. 가장 힘든 계명이다. 어떻게 해야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명령하셨으니까 무조건 해야 하는가?  선한 일이라 당연히 노력해야 하는가? 주님이 그 원수를 위해서도 죽었으니 밉지만 신자 된 책임에 사랑해야 하는가? 인간의 도덕성, 교양, 의지력만으로는 두세 번 억지로 사랑하면 그만이다. 모든 산상수훈의 계명이 그렇지만 특별히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더더욱 내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지 않고는 절대 지킬 수 없다.

신자가 주님의 사랑 가운데 완전히 잠기어 자신의 영혼 속에도 주님의 은혜와 자비와 평강이 완전히 살아 움직이는 실체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랑이 신자의 모든 행함에 전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있어야 한다. 챨스 스펄전은 자기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 흐르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갖고 형제에게 나아가며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은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알지 않겠다고 했다. 그처럼 주님의 사랑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득 차 있어 자연스레 그것이 흘러 나와야 한다.  

구체적으로 적용하자면 나에게 원수가 생긴 지난 일들과 또 그가 나를 지금 대적하여 핍박하는 일 또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하에 있으며 그런 일 가운데도 주님의 사랑과 인자가 있음을 확신해야 한다. 원수와 내가 이루고 있는 불편한 관계 속에도 주님의 풍성하신 신비가 숨겨져 있어 틀림 없이 하나님과 성도의 영광으로 나타날 것이므로 그런 관계마저 소중히 여기고 즐거워 해야 한다.

그 원수도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에 쓰임 받고 있으며 그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 또한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당장 원수를 감정적, 종교적, 도덕적으로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 드러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게 되고 변함 없이 지속적으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에도 신자 속에 실체가 되어 흐르는 주님의 사랑이 반석이고 원수를 사랑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 나를 통해 자연스레 원수에게 전해지듯이 신자의 존재 전체가 주님이라는 반석 위에 자리 잡고 있다면 계명대로 행하는 것은 단지 그 위에 집을 짓는 것만큼 쉽고도 자연스런 일이 될 뿐이다.

시험과 역경이 닥치면 구체적으로 낱낱이 주께 아뢰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정작 주께 맡겨야 할 것은 그 일 하나하나가 아니다. 그 일로 인해 힘든 나 자신 전부를 주님의 반석 위에 놓아야 한다. 아니 참된 신자라면 이미 예수님이라는 반석이 우리 밑에서 우리를 바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기도는 그 사실을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작업이다.

눈 앞의 환난을 당장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가장 먼저 내가 예수 믿어 바뀐 위치와 신분과 소속을 재확인하고 붙들어야 한다. 그럼  인내할 수 있는 힘이  속에서부터 자연스레 생겨 얼마든지 연단을 통과하고 주님을 향한 소망은 더욱 견고해지며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반석이신 주님은 성도를 떠난 적이 단 한 순간도 없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이라는 것 외에 우리 신앙의 기초가 될 수 있는 것은 절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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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당신은 성전 문턱을 넘었는가? (행3:1‐10) [3] 운영자 2008-12-10 4452
239 “모두 내 탓이오” 운동을 그만 두어라.(마7:1-5) [1] 운영자 2004-01-26 4200
238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칭찬은 불신자의 몫이다.(눅10:25-37) 운영자 2013-10-23 4101
237 땅끝은 과연 어디인가? (행1:8) [6] 운영자 2005-03-23 3889
236 김정일이 예수를 믿었다면?(마6:13) 운영자 2003-11-04 3705
235 미국과 한국이 가장 크게 다른 점은?(마 5:18-20) [1] 운영자 2003-06-16 3631
234 왜 우리에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 (행3:11‐18) [3] 운영자 2008-12-18 3548
233 주일을 꼭 지켜야 하는가?(마4:8-11) [4] 운영자 2006-08-06 3450
232 인생에서 꼭 이루어야 할 두 가지(엡2:4-7) [4] 운영자 2007-03-01 3281
231 회개가 아니라 회심이다. (행3:19‐26) [3] 운영자 2008-12-31 3219
230 기도로 염려가 없어지지 않는다 (마6:25) [2] 운영자 2004-01-02 3167
» 주께 모든 것을 내려 놓는다는 의미는? (마7:24-27) 운영자 2004-04-28 3076
228 당신은 지금 행복합니까?(마4:23-5:3) [4] 운영자 2007-03-15 3069
227 종신 운전수와 평생 식모 (마 5:16) [5] 운영자 2003-06-16 3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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