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은유) 파동의 세계

이선우님, 파동의 세계에 오심을 환영합니다.
나는 당신을 파동의 세계로 안내할 ‘파동자’입니다.

파동은 물질(입자)이 아니기 때문에 형태나 부피(질량)가 없습니다.
또한 파동은 물질세계처럼 ‘존재한다’는 표현도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파동의 세계에서는 당신도 존재로 표현되지 않습니다.
존재(being)나 대상(object)이 아닌 파동(wave)만이 이 세계에 있을 뿐이지요.
그러니까 여기서는 시간이나 공간의 개념도 초월합니다.
파동의 세계는 끊임없이 움직이되, 돌며 회전하며 진동합니다.
그 움직임으로 상호 간섭하고 관계하면서 파동은 소통합니다.
입자의 세계가 그러듯이 파동의 세계도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당신이 아는 과학적 용어로 설명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지금 사는 세계는 입자와 파동이 동시에 존재하는 세계입니다.
물론 입자의 세계 대비 파동의 세계는 아주 미미한 것처럼 보이지요.
마이크로 세계의 원리를 아신다면 금방 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입자(물질) 세계의 최소 단위는 분자입니다.
각기 다른 분자의 조합으로 에너지와 질량이 다른 입자들이 형성됩니다.
이 분자를 세부적으로 들여다 보면 원자핵과 전자로 구성되지요.
전자는 빠른 속도로 원자핵 주위를 끊임없이 돌고 있습니다.
반면에,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뭉쳐 있습니다.
양성자와 중성자를 이루는 물질을 쿼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쿼크는 입자가 아닌 파동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쿼크는 입자로서는 할 수 없는 파동의 행동패턴을 보입니다.
즉, 입자를 이루는 가장 최소의 단위는 결국 파동인 셈이지요.
이같이 마이크로 세계로 들어가면 이 세계는 입자인 동시에 파동의 세계가 됩니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이 세계는 파동으로 인해 만들어진 입자와 파동의 세계입니다.
왜냐하면 입자 또한 파동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정의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빛이 이러한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빛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지요.
그러면서 빛은 가장 빠른 속도로 나아갑니다.
나아가다 막히면 반사, 굴절, 산란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먼저 만드신 창조물이기도 하지요.
사실 빛은 파동의 세계를 실체화시켜 입자의 세계로 보이게 해 줍니다.
당신의 눈은 빛으로 인해 파동으로 내재된 입자를 입자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한다면, 당신이 사는 이 세계는 모두 파동의 세계랍니다.

파동은 다이나믹한 세계입니다.
파동의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움직입니다.
쉼이나 멈춤이 없다는 얘기지요.
움직일 뿐만 아니라 회전하고 진동합니다.
이는 마치 전자가 원자핵 주위를 끊임없이 도는 원리와 유사합니다.
당신의 존재영역인 지구가 자전하며 공전하는 원리와도 비슷합니다.
태양이 속한 은하계를 포함한 온 우주도 회전하고 진동합니다.
그 움직임의 파동이 두드림의 파장을 만들어 냅니다.
파동은 파동끼리 서로 관계하고 간섭하고 상호 영향을 끼칩니다.

소리를 통해서 파동의 세계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모든 소리는 진폭과 파장(주파수)을 가집니다.
진폭의 크기로 소리의 크기가 결정되고.
파장의 정도로 소리의 높낮이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소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당신이 그 소리의 파장을 맞추어 듣는 것입니다.
당신이 이 파장을 맞추기 위해서는 당신도 같은 파장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를 공명(共鳴)이라고 하지요.
당신의 귀에는 외부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공명장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같이 파동의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당신이 파동의 세계를 깨닫는다면 하나님을 더 알아갈 수 있답니다.
파동의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사도 요한은 이렇게 인식했지요.
- 하나님은 말씀이시라
- 하나님은 영이시라
- 하나님은 빛이시라
-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이선우님, 파동의 세계에 오심을 다시 한번 환영합니다.
이상, 파동의 세계의 안내자인 파동자였습니다.



2부: (QT) 나의 파동, 주님의 파동

본문 말씀: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20)

10월9일 독일 한마음교회 주일 설교 말씀은 본문을 주제로 한 ‘두드리는 사랑’이었다. 언제나처럼 담임 목사님의 설교는 내 가슴을 울렸다. 목사님의 설교와 본문 말씀을 통해서 크게 두 가지의 깨달음이 있었다.
*

첫번째 깨달음은 두드림의 파동이었다.

두드리는 사랑- 사랑의 두드림.. ‘두드림’이라는 단어에 엄청난 매력을 느꼈다. 두드림이 주는 또 다른 심상들, 두드림- 파동- 소리- 음성.. 본문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서, 신기한 한 가지 깨달음이 왔다. 예수님의 음성이 뭘까? “선우야, 내가 문을 두드린다. 네 문을 열거라”는 음성일까? 그렇다고 해도 논리적으로 큰 무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본문의 내용을 기준으로 볼 때는 예수님이 어떤 실제의 음성을 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한다면, 본문의 어딘가에 그 음성의 내용이 나왔어야 한다.  

또 다시 같은 의문이 온다. 예수님의 음성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시며 내게 주는 본문의 말씀 전체가 주님의 음성으로 표현될 수도 있다. 그게 전부일까? 그러다가 언뜻 스치는 영감- ‘내 음성’ 바로 앞에 나오는 대목이 예수님의 음성의 내용이 아닐까? “내가.. 두드리노니” 그것은 다름아닌 ‘두드림’이었다. 두드림의 소리- 이것이 예수님의 음성이 아닐까? 볼지어다! 내 눈이 확 띄어졌다. 본문을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예수님의 음성은 두드림에서 나오는 소리였다고.. 문 밖에 서서 두드리는 그 소리,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음성이었다고.. 이것은 내게 엄청나게 중요한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요즈음 나는 울림의 세계, 파동의 세계에 대해 묵상 중이었다. 소리는 울림이요, 파동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입자와 파동의 세계가 공존한다. 하지만, 우리 일상의 생활 중 대부분은 입자에 의한 것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오감(五感)의 세계 중, 청각을 제외하고는 모두 입자를 매개로 하는 세계이다. 그런데, 청각의 매개체는 소리다. 소리는 보이거나 측정할 수 있는 입자가 아니다. 울림이요, 파동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다. 이러한 파동의 세계를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시19:1-4)

‘하나님의 소리’가 전달되는 과정을 유의해 보자.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달한다.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다. 아, 파동이다. 파동이 아니라면 이런 현상이 어찌 가능할까? 파동의 울림으로 온 세상에 미치는 소리가 주님의 음성이다. 끊임없이 움직이며 나아가는 파장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온 우주를 향한 두드림이기도 하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면서 늘상 결론적으로 던진 이 말씀을 들으면, 나에게 듣는 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산다. 믿음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10:17) 내가 듣되, 주님의 말씀, 즉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믿음이 생긴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주님의 두드림(음성)을 내가 어떻게 깨달아 알 수 있을까? 이것이 바로 공명(共鳴)의 비밀이 아닐까? 공명은 내가 소리를 받아들이는 원리이다. 우리의 귀는 외부의 소리를 받아들이기 쉬운 공명 장치가 외이도, 고막, 달팽이관 등 청각 기관에 존재한다. 공명은 상대의 주파수에 내 주파수를 똑같이, 그대로 맞추는 것이다. 공명을 잘 하는 것, 찬양대에 소속한 내가 찬양하면서 늘상 주의해야 할 부분이다. 주님의 음성을 공명하자!

본문에서, ‘문’이라는 것은 주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보이지 않는 벽이요, 장애물이라고 생각한다. 주님이 내시는 두드림의 소리, 그 세미한 파동을 내가 ‘듣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방해물이다. 주님의 음성과 내 음성이 공명이 되면 문이 열린다! 주님의 음성을 들음이 곧 믿음이다. 나의 믿음이 공명 장치인 셈이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주님의 음성은 쉽사리 들리지 않는다. 내 속에 각종 방해물이 많기 때문이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두 마음, 환경의 거센 파동 등..

이 때, 내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마7:7, 눅11:9) 그렇다. 나도 두드리는 것이다. 내 쪽에서도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주님을 향해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때까지, 주님의 소리와 내가 공명이 될 때까지, 그날 찬양대에서 내가 올려드린 찬양곡처럼 쿰바야(Come by here)가 실질적으로 내게 임할 때까지.. 아, 공명의 은혜여..
*

두번째 깨달음은 ‘먹음’에 대한 것이었다.

공명을 함으로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 그런데, 함께 하심의 결과가 무엇일까? 본문에 의하면, 먹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자 하는 이유는 나와 함께 먹고자 함이었다. 사실 이 말씀은 조금 어이가 없다.ㅋㅋ 그렇게 열심히도 문을 두드리셨던 주님, 문이 열려 주님은 나를 만나시자마자 같이 한바탕 신나게 먹자고 하신다. 순서도 재미있다. 주님이 먼저 나와 함께 먹는다. 그리곤 나도 주님과 함께 먹는다. 이니셰이터(Initiator), 즉 일을 먼저 벌리신 분은 주님이시다.

이를 파동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어떨까? 주님의 파동이 내게 몰려온다. 나는 공명으로 나의 파동을 주님의 파동과 일치시킨다. 주님의 파동과 나의 파동이 그렇게 만난다. 만남 이후엔 무엇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결합이다. 연합이다. 나의 파동이 주님의 주파수와 완전히 공명되어 결합하고 연합한다. 결혼이라는 표현도 좋겠다. 파동의 결혼이다. 주님의 주파수가 변한게 아니다. 주님의 주파수에 내 파동의 주파수가 변화된 것이다. 연합이 되면 하나다. 한 파동이 되어 이후에는 같이 먹고 같이 즐긴다.

먹는 상상을 하니 오병이어 생각이 났다. 사실 지난 주 내내 오병이어 사건이 내 머리를 맴돌았었다. 이곳에 오셔서 멧시지를 전해 주셨던 이강천 목사님의 말씀 중에서 오병이어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한 밤중에 나그네 친구를 위해 떡 세덩이를 얻으러 갔던 가난한 친구 이야기(눅11:5-8) 중에서였다. 이 생각을 하다가 문득 갑작스레 깨달음이 왔다. 오병이어의 본질은 먹는 것이다. 먹되, 예수님과 함께 다같이 먹자는 것이다. 바로 본문의 말씀과 오병이어의 목적이 일치되는 것이 아닌가! 식탁을 함께 나누는 것 만큼 풍성한 것이 있을까?

오병이어는 4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몇 안되는 사건 중의 하나다. 그만큼 이 시건이 중요하다는 시사점이 아닐까? 4복음서를 다같이 참조하여 대화록을 만들어 보았다.

주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제자: 여기는 빈 들이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주님: 그들이 갈 필요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 우리가 가서 200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주님: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는지 가서 보라.
제자: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주님: 그것들을 내게로 가져오라.
주님: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이후) 이제 이것들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이 대화는 음미할 수록 재미있다. 주님의 제자는 바로 나다. 주님의 파동과 나의 파동이 얼마만큼 다른지 그 시작과 끝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주님의 관심은 처음부터 한결같았다. 그것은 무리를 먹이는 것이었다. 즉, 나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같이 염려하시고, 우리들을 한꺼번에 같이 먹이시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님이 바라보시는 쏘스(Source)는 단 하나다. 본문에서는 제자이나, 실제에 있어서는 바로 나다. 주님의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를 직접적으로 향하고 계신 것이다. 내가 하라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내가 먹이라는 말씀이시다.

어떻게 내가 이것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주님의 주파수를 맞춰 내 파동을 조정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는 과정이요 프로세스이다. 내 파동은 끊임없이 꿍시렁 거린다. 여기는 빈 들이라니깐요? 200 데나리온이라는 큰 돈이 내게 어디 있습니까? 오병이어 밖에 없는데 이게 도움이 되겠어요? 에게, 이거 고작 나눠줘서 이 사람들을 다 어떡해? 그러나 주님의 대답은 한결같다. 이 세가지다. 1) 네가 먹을 것을 주라! 2) 그것들을 내게로 가져오라! 3) 이제 이것들을 나눠주라!

주님께서 나를 향해 두드리시는 파동도 이렇게 세 가지다.
주님의 첫번째 파동은 내가 먹을 것을 주라는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이 얼마인가? 그것이 주님께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이다. 단지 내가 가진 것으로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가진 것을 그대로 주님께 보여드리면 내 역할은 끝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오병이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주님의 두번째 파동은 내가 가진 그것을 주님께 가져오라는 것이다. 아까와하지 말고 주님께 그대로 내어 놓으라는 것이다. 주님의 손에 얹어졌을 때 비로소 변화는 시작된다.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심- 파동의 변환이다. 내 것이 주님의 것으로 변화된다. 그 결과는 파동의 결합이요, 연합이다.
주님의 세번째 파동은 이제 주님의 것을 실제 다른 이들에게 나눠주라는 것이다. 주님의 파동과 연합된 나의 파동이 움직이고 진동하고 회전하고 굴절하고 산란하여 나아간다. 이제 나는 주님의 파동의 사자(使者)이다. 요한의 하나님이 나의 주님이시다. 나는 주님을 따라 말씀이요, 영이요, 빛이요, 사랑이 된다. 그러할 때, 나의 파동은 다른 이들을 ‘먹이는’ 파동이 된다.
*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는 항상 나와 함께 먹고자 하신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것이 내가 누릴 수 있는 천국의 삶인 것이다. 다른 이들과 함께 주님과 떡을 떼는 것- 이것이 천국이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시초는 주님의 파동이시다. 주님의 두드림의 음성을 내가 공명함으로, 그 파동에 동조함으로, 일어나는 것이다.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나의 파동에서 주님의 파동으로.. 아, 공명의 은혜여.. 먹고 합시다.^^ 주님, 감사합니다.

사라의 웃음

2011.10.14 21:32:28
*.169.30.48

'파동'이란 말을 들으면 오래전 읽다가 접었던 릭워렌의 '새들백 교회'란 책이
떠오릅니다. 그 책에선 하나님이 일으키신 파도를 표현하고 있지만 가만히 들여다 보면 자신이 스스로 일으키는 파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 그 책을 덮어 버렸지요. 왜 '파동'이란 단어에 그 책이 생각이 나는지...

오병이어의 기적을 저는 나름 이렇게 해석하고 적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 저로 이해를 하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그 은혜 속에 살아감이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이제도 체험하도록 하시는 은혜 아닌가...

그 렇게 기적 속에서 그 살과 피를 먹고 마시다 보면 자연스레 흘러 흘러 넘치는 기쁨, 감격, 사랑, 섬김... 들이 또 이웃들에게 넘쳐 흐르고 또 흐르고...

그 어떤 선행 보다 그 어떤 구제보다도 너무도 중요하고 아름다운 예수님의 살과

사라의 웃음

2011.10.14 21:37:05
*.169.30.48

실수로 그만 마무리 못하고 올려졌네요. ㅋㅋ
네, 그 어떤 선행보다 그 어떤 구제보다도 너무도 중요하고 중요한 그 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또 먹는 일, 그 일만큼 중요한 일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습니다.

홍성림

2011.11.01 12:20:18
*.88.65.84

자신을 불태우지 않고는 빛을 낼 수 없다는 말이 이 글을 읽으면서
생각이 났습니다.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고 기적을 체험하며 산다면
정말 행복하겠지요.
뜨겁게 사랑할 때 빛이 난다고 합니다.
그런 파동을 믿고
느끼시는 집사님이 부럽고 대단하십니다.
늘 주안에서 승리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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