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요11장] 마르다의 머리, 마리아의 가슴

조회 수 1021 추천 수 98 2010.07.22 21:34:44

(#3, #5, #18번의 엮인 글들을 미리 읽어 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본문: 요11:17~44

붙잡은 말씀:
20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절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29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절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2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33절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느낀점 및 묵상

지금까지 내게 가장 큰 감동을 준 성경 구절 중 하나는 단연 본문의 35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이다. Jesus wept. 간단한 영어 두 단어로 된 이 구절이 내 심금을 울린 것이다. 웨이브6기에 나를 위로해 주셨던 핵심의 말씀, 2006년 11월 롬폭 훈련소에서 주셨던 세차례 감동의 눈물은 평생 잊을 수 없다. 이 말씀을 대할 때마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나는 그 때 접했던 주님의 눈물이 생각나 감격과 감동 속으로 빠져간다.

2009년 12월 30일, 우리 가족은 나사로의 마을 베다니를 방문했다.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거리이지만, 지금은 팔레스타인 구역이기 때문에 우회도로를 지나서 검문의 절차를 밟아야 했다. 나사로와 마르다 마리아 자매가 살았고, 그들 때문에 예수님이 종종 들리셨던 곳.. 바로 이곳에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던 감동의 장소.. 나사로가 안장되었다던 무덤터 안으로 들어가 그 기적의 자리를 둘러 보았다. 아, 주님의 눈물.. 돌을 옮겨 놓으라는 주님의 음성, 나사로야 나오라는 힘찬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주님이 계셨던 자리이기에.. 주님이 몸소 눈물을 흘리셨던 현장이기에.. 그 진한 감동이 다시금 밀려온다.

금번에 다시 주어진 본문의 QT 묵상.. 이미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을 통해서 본문으로 연결된 바 있었다. 말씀의 후반부에서, 예수님이 마른 뼈와 같은 나를 살리는 과정을 통해 말씀을 대하는 나의 자세로 적용했었다. 돌문으로 닫혀있던 내 영을 먼저 주님께 내어드려 열어야 하고(1단계), 주님의 십자가 보혈을 의지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 내 손을 벌려 드림으로써(2단계), 주님으로부터 생기의 말씀을 은혜로 받는 것이다(3단계).

이제 본문을 다시 묵상하면서 전반부에 집중한다. 예수님의 눈물의 도화선이 무엇이었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33절에서 보듯이, 예수님의 눈물은 심령의 비통과 불쌍히 여기심에서 온 것이었다. 내 관심은 이 눈물의 최초 근원지가 될 만한 무슨 일이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게 다가온 것은 두 자매의 각기 다른 태도였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둘다 오빠를 잃은 슬픔에 젖어 있었다. 본문을 통해 드러난 이들의 행동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두가지 다른 자세가 나타나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님을 뵙고난 직후, 그들의 첫번째 반응은 어쩌면 그리도 똑같았던지..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1절, 32절) 한글 성경도, 영어 성경도 토씨 하나 틀림이 없이 똑같다. 그런데, 이들 자매의 속마음도 정말 똑같았을까? 마르다는 여기에 더하여 한마디 더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마르다의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럼 마리아는? 그녀에게는 이런 믿음의 고백이 없지 않은가? 그러면 결국, 마르다의 믿음이 마리아보다 더 뛰어난 것일까?

마르다는 마리아보다 행동도 더 빨랐다. 예수님이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곧 나가 예수님을 맞이했다. 예수님과 나눈 그 다음의 대화를 보자. 24절: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7절: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얼마나 위대한 신앙의 고백들이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던가! 주님께서 그녀의 믿음을 기뻐 받으시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정말 그럴까? 정말 마르다의 믿음이 ‘주님 보시기에’ 대단했을까?

그럼 마리아는? 그녀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데도 꼼짝않고 집안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한심스런 믿음인가? 아무리 오빠를 잃은 슬픔이 사무친다 하여도, 자신이 그토록 믿어왔던 주님을 소흘히 하고 박대할 수 있단 말인가? 먼저 갔던 마르다가 이 눈치를 채고, 결국은 동생을 부르러 다시 와야만 했지 않은가? 믿음이 부족한 마리아여... 그러나... 정말 그랬을까?

나는 말씀을 다시 읽으면서 이것이 정반대임을 발견했다. 누가 누구보다 더 낫다는 비교는 사실 신앙의 세계에서는 적당치가 않다. 우리 모두는 다 도토리 키재기 아닌가? 그러기에 주님은 마르다와 마리아를 차별없이 사랑하셨지 않은가? 주님 앞에서 그들은 차이가 없다. 그럼에도 본문에서 그들의 태도에서 드러난 상이함이 명확히 나타나 있지 않은가? 마르다는 분명 행동과 말이 마리아에 비해 빨랐고 민첩했으며, 주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정답’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어디 하나 나무랄 데가 없다. 게다가 동생 마리아를 불러오는 섬세함도 가졌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과 태도를 묵상해 보면, 마르다에게서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왜 예수님은 그녀로부터 계속적인 다짐을 받으셔야 했을까? 믿습니다! 한 마디면 될 건데, 왜 자꾸 이것저것 물어 보셨을까? 23절: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는 예수님의 선언을 그녀가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부활 때가 아닌, 지금 바로 그 자리에서 주님은 나사로를 살릴 수 있음을 그녀는 끝까지 믿지 못했던 것이 아닐까? 번드르한 그녀의 말 속에 진정한 믿음이 부족했던 것이 아닐까? 머리로만 믿음을 고백했지, 참다운 가슴의 고백은 없었던 것이 아닐까? 마르다를 향한 주님의 안타까움이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왜 예수님은 마을 밖에 우두커니 서 계셨을까? 그사이 마르다는 도망치듯 동생을 부르러 마을로 들어가 버렸고.. 예수님이 마리아를 불러 오라고 하셨을까? 문맥의 전후를 살펴보면, 이것은 마르다의 독단적 판단이었지 않은가? 그런데도 마르다는 마치 예수님이 시킨 것처럼 동생에게 버젓이 말하고 있지 않은가?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무슨 뜻일까? “마리아, 너 정말 그럴 수 있어? 나만 이렇게 생고생하게 만들고? 그래, 어떻게 된 애가 예수님 오셨다는 데 코빼기도 안 보이니? 너만 슬프지 나는 슬프지 않느냐구? 당장 빨리 가봐, 이것아!” 동생에게 이렇게 다그쳤다는 얘기가 아니었을까?

아, 중심을 보시는 주님.. 주님은 예나저나 겉모습을 보시지 않고, 중심을 보신다. 그 사람의 마음 중심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보시고 말씀하신다. 처음 의문으로 돌아가 본다. 그 주님께서 무엇 때문에 눈물을 흘리셨을까? 그 도화선은 무엇이었을까?

말씀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그 최초의 발화점을 발견했다. 그것은 마리아의 눈물이었다! 아니, 마리아의 가슴이었다. 그녀의 진정성, 오빠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복받쳐 오른 눈물.. 그 눈물을 주님이 보신 것이 아닐까? 마리아의 중심 깊은 곳에 있는 슬픔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닐까? 예수님의 눈물샘을 건드린 것이 아닐까? 예수님의 긍휼지심이 그녀로 인해 나타난 것이 아닐까?

이제보니 마리아의 태도는 분명했다. 마리아는 왜 예수님을 영접하러 가지 않았을까? 정말로 슬픔에 복받쳐있는 사람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슬픔으로 인하여 넋이 빠진 모습, 애통으로 인하여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 이것이 마리아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언니의 말을 듣자, 그제서야 넋나간 정신을 추스린 마리아, 급히 일어나(29절) 예수님께 가지 않았는가? 아, 마리아가 예수님을 만나뵙는 모습이 눈에 선하지 않은가? 32절: 그 발 앞에 엎드려.. 33절: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주님을 향한 마리아의 진정성을 이것 이외에 어찌 달리 표현할 수 있겠는가?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눈물이야말로 마리아의 참된 언어였다.

그러면 마르다는? 21절: 예수께 여짜오되.. 그녀가 마리아처럼 눈물을 흘렸을까? 그녀가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을까? 그랬으면 사도 요한이 왜 기록하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았다는 얘기로 간주할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아, 그녀의 말투에서 냉정하고 사무적인 나의 평상시 말투가 떠오름은 어찌 된 일인지..ㅠㅠ 이 글을 쓰면서 떨어지는 눈물은 또 뭔지..ㅠㅠ

마르다와의 대화에서 주님은 그녀의 ‘상대적으로’ 메마른 중심을 보셨지 않았을까? 그래서 석상처럼 그 자리에 꼼짝않고 서 계셨지 않았을까? 그러셨던 주님께서, 주님 앞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는 마리아의 진정성을 보시고 그제서야 움직이신다. “그를 어디 두었느냐?” 드디어 주님은 위대한 사역의 팔을 걷어 붙이셨다.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을 만인에게 보이기 위해.. 누가 주님의 마음을 움직였을까? 누가 주님의 눈물샘을 건드렸을까? 마르다의 꼿꼿함인가? 마리아의 엎드려짐인가? 마르다의 머리인가? 마리아의 가슴인가?

마르다의 머리는 이후에도 한번 더 나온다. “돌을 옮겨 놓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내 머리도 따라 대답한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 말에 틀린 것이 있을까? 얼마나 올바른 판단인가? 그러나 내 머리에서 나온 판단으로는 주님을 만족시키지 못한다. 40절: “내 말이 네가 믿으면..” 다시 말하면, 마르다 그녀는 완전히는 믿지 못했다는 말씀이 아닌가? 믿음은 머리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가슴으로 받아 들이는 것이다. 가슴으로 알아가는 것이다. 레에마의 말씀은 다른 것이 아니다. 말씀이 머리에 꽂히는 것이 아니고, 가슴에 꽂히는 것이다. 주님의 생기의 말씀을 받되, 내 가슴으로 받자.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는 마르다의 말이 또한 다른 각도로 내 가슴에 천둥처럼 울렸다. 내 마음의 상태를 너무나 정확히 묘사해 주고있지 않는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이 바로 나의 마음이라고 예레미야는 지적해 주지 않았던가? 이 말씀은 나를 향한 말씀이 아닌가! “돌을 옮겨 놓으라” 더럽고 썩어서 냄새나는 내 마음을 열라는 말씀.. 아, 좋으신 주님! 현재의 내 상태와 주님의 임재하심과는 상관관계가 없다. 썩은 냄새 풀풀나는 내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고자 했던 분은 바로 주님이셨지 않은가? 나는 그저 현 상태에서 내 마음 문만 열어 놓으면 된다. 내 죄를 해결하신 예수 십자가만 바라보면 된다. 마리아처럼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내 상한 마음을 그냥 드리면 된다. 넘어지더라도 주님 앞에서 넘어지자. 이것이 십자가의 은혜 아닌가?


적용의 기도

오, 주님!
계산적인 내 머리,
번드르한 내 입술,
뻣뻣한 내 다리,
냉냉한 내 가슴,
내 속에 있는 마르다를
치료하여 주옵소서.

오, 주님!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먼저 생각하게 하옵소서.
입술보다는 가슴으로 먼저 말하게 하옵소서.
다리보다는 가슴으로 먼저 행동하게 하옵소서.
내가 당신의 발 앞에 엎드림으로,
당신께 나의 눈물을 드림으로,
중심에 가득한 마리아의 진실함으로,
그렇게 당신께 나아가게 하옵소서.

오, 주님!
방심에서 중심으로 이동하겠습니다.
마르다의 머리에서 마리아의 가슴으로 옮아가겠습니다.
주님을 향한 내 삶의 중심을 그렇게 바꾸겠습니다.
내 가슴이 주님의 중심에 늘 머물기를 원하옵니다. 아멘.



(후기)
금번 묵상을 통해서 두 번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리아 때문에 한번 울었고, 마르다 때문에 또 울었습니다. 마르다의 태도와 믿음은 대단했습니다.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습니다. 마르다의 훌륭한 믿음을 닮고 싶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해 갈수록 마리아의 속깊은 마음에 더 초점이 맞추어졌습니다. 마리아의 엎드려짐과 눈물은 그녀의 진정성에서 나온 것이었고, 주님의 마음을 움직인 발화점으로 제게 다가왔습니다. 그 마리아의 진정성에 저도 울었습니다.

한편, 마르다의 믿음 속에는 가슴의 진실함 보다는 논리적이고 체계적이며 교리적인 ‘지성적 신앙’이 엿보였습니다. 내가 처한 한계가 또한 그런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극단적으로 양쪽을 비교하느라 과장이 되긴 했습니다만, 지금까지 내 신앙의 길은 마르다와 같이, 이해가 되지 않으면 믿지 못하고 논리적 접근으로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경향이 있었습니다.(물론 감성적 측면도 적잖이 있습니다.) 마르다가 부족하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주님은 논리적 지성적 귀납적으로 연결된 접근성 보다는 진실하고 순전한 내 마음의 중심을 더 보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것은 가슴이지 머리가 아니라는 것.. 이 때문에 한번 더 울었습니다. 제 안에 가득한 마르다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감동과 감격의 말씀을 주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하람맘

2010.07.23 02:29:08
*.186.65.130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님의 글을 읽고 차분히 제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봅니다... 전 사실 마르다와 많이 닮은 사람입니다. 이 주제는 여전도회에서도 여러번 대했지만 이번 처럼 가슴에 와 닿기는 처음입니다. 항상 봉사태도나 마음가짐에 적용했었는데... 제 성격, 믿음상태, 주님의 관점까지... 적용의 기도가 어찌 제가 써놓은 것 같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전 사실 시부모님께도 남편에게도 가슴보다 머리와 입과 몸이 먼저 움직인다는 것을... 부끄럽게도 하나님께도 그렇게...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옵니다

정순태

2010.07.23 10:21:55
*.75.152.229

또 감사하며 나갑니다!
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마리아의 믿음을 닮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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