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베드로 묵상

조회 수 784 추천 수 72 2010.10.16 10:26:50
원래 다른 글을 올리려 준비하고 있었는데 김유상 형제님의 글(재시험을 앞두고)을 읽으면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형제님께 위로와 묵상이 될만한 무엇이 없을까 하다가, 부족하지만 형제님을 위하여 베드로 묵상 씨리즈를 이곳에 올립니다. 물론 이미 올린 것(물 위를 걸으라, 나눔의 법칙 등)은 빼고요. 아직도 3부작이 남아 있네요. 제가 어렵고 낙심될 때 힘이 되어준 묵상들이었습니다. 특별히 유상 형제님의 병상에 여호와 라파의 주님께서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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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베다니에서 갈릴리까지

그 날, 안드레는 스승인 세례자 요한과 하루 종일 같이 있었다. 이 곳 베다니 근처의 광야에 온지도 어언 6개월이 지났고, 그동안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고 배웠다. 그 중 가장 자랑스러운 일은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로 발탁된 것이었다. 같은 동네 벳세다 사람인 세베대의 아들 요한과 함께였다. 원래 그들은 어릴 적부터 단짝친구였다. 두 집안이 서로 동업자였기 때문에 한 집안같이 지냈다. 안드레는 여기까지 오게 된 과정을 회고해 보았다.

청년이 되면서 안드레는 친구 요한과 같이 바깥세상 얘기를 많이 하게 되었다. 로마 제국의 전횡은 갈수록 심해지고 민족의 고통은 가중되어 갔다. 특히 갈릴리의 분봉왕 헤롯의 악명은 대단했다. 하나님이 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은 희망이 없어 보였다. 사람들의 유일한 소망은 예언자들이 언젠가 오리라고 한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요단강 동편 베다니에 메시야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들렸다. 베다니 근처 광야에서 세례를 주는 그 사람이 엘리야라는 소문도 있었다. 안드레와 요한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베다니에 한번 다녀오겠다고 부모님께 간청하였다. 벳세다에서는 하룻길도 안되는 짧은 거리였다. 형들도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결혼을 한데다 집안일 때문에 부모님들도 동생들만 다녀오라고 허락했다.

그것이 6개월 전이었다. 세례자 요한은 소문대로 대단한 선지자였다.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고 시는 야인(野人)이었다. 그런 외모와는 달리, 그의 눈은 사람의 영혼까지 꿰뚫을 정도로 맑고 깊었으며, 입을 열면 불같은 기운이 쏟아짐을 느낄 정도로 우렁차고 뜨거웠다.

둘은 도착한 그날로 그에게 세례를 받고, 매일 그와 함께 이 곳 광야에서 기거하며 그를 도왔다. 그렇게 하기를 3개월째에서야 그들은 세례자 요한의 정식 제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4개월째는 안드레의 형 시몬과 요한의 형 야고보가 그들을 찾아왔다. 동생들을 찾아보겠다는 핑계로, 그들도 세례자 요한의 제자가 되고 싶었던 것이었다. 집안일은 좀 벅차지만 부모님이 당분간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부모님들은 아들들의 갈망을 보았고, 메시야를 위해서는 자식들을 보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오늘, 안드레와 요한은 스승에게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자기는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전혀 보지도 못한 엉뚱한 사람을 지목하며, “보시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예수라는 평범한 이름을 가진 젊은 사람이었다. 하루 종일 둘은 고민했다. 6개월간 따른 스승이 메시야가 아니라는 말, 메시야는 다른 분이라는 말이 그들의 귀를 맴돌았고, 결국 고민 끝에 그들은 새로운 메시야를 스승으로 모시기로 결심했다.

다음날, 안드레와 요한은 예수를 무작정 좇아갔다. 예수는 자신의 거처로 그들을 받아들였고, 이런저런 얘기를 같이 하며 하루를 지냈다. 지난 6개월간 세례자 요한에게서 배운 여러 교훈보다 더 새롭고 권위 있는 여러 말들이 예수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단지 하루를 지냈을 뿐이지만, 안드레는 예수야말로 이스라엘의 구원자 메시야라고 확신했다. 요한도 비슷한 생각이었다.

안드레는 이튿날 아침 일찍이, 메시야를 만났다는 말과 함께 형 시몬을 예수에게로 데려왔다. 예수는 그 즉시로 형에게 베드로(반석)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안드레가 생각하기에도, 조금 성격이 급하지만 묵직한 면이 있는 형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다음 날은 빌립과 나다나엘이 예수의 제자로 합류했다. 야고보도 뒤이어 동생 요한의 소개로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 모두 갈릴리 출신으로 세례자 요한을 따라다녔던 사람들이었다.

예수는 이들 6명의 새로운 제자들과 함께 베다니를 떠나 갈릴리 지방으로 들어갔다. 마침 가나에서 예수의 친지 중에 결혼식이 있어서 다 같이 참석했다. 가나 출신인 나다나엘도 잘 아는 집안이었다. 결혼식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예수와 제자들도 잔치의 분위기에 맞춰 흥겹게 놀았다. 어느 시점엔가 포도주가 떨어졌지만, 예수의 명으로 물이 변하여 된 포도주가 나오자 분위기는 더 고조되었다. 흥겨운 잔치날이었다.

이어 가버나움에 며칠 머물던 중 문제가 생겼다. 예수는 예루살렘으로 유월절을 맞으러 가겠다고 하는데, 고지식한 형 시몬이 한사코 벳세다 집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닌가? 형의 얘기인즉, 세상에 무슨 메시야가 포도주나 즐기고 놀 수 있느냐, 지금이 어느 때인데 잔치자리에나 계속 돌아다니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메시야가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이제 헛된 꿈을 다 버리고 집에 돌아가서 고기나 잡자, 우리가 무슨 메시야의 제자가 되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요한의 형 야고보도 이에 동조하고 나섰다.

안드레와 요한의 만류에도 형들의 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다. 결국 안드레는 예수에게 양해를 구하여, 다음번 갈릴리에 내려오면 꼭 벳세다 자기 집으로 모시겠다는 약속을 하고는, 형들과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돌아와 그들은 외적으론 조용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다들 관심은 예수의 행적에 대한 소문에 쏠려 있었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예수가 성전을 청결케 한 일, 한밤중에 니고데모를 만난 일, 다시 세례자 요한이 있던 곳으로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친다는 이야기 등이 간간히 입소문으로 들려왔다. 안드레는 아직도 예수가 메시야임을 믿고 있었다. 거의 매일 저녁 형과 예수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형을 설득하려 했으나, 고지식한 형의 마음은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렇게 몇 개월이 더 흘렀다.

그러던 중, 예수 일행이 갈릴리로 들어왔다는 얘기가 들렸다. 가나에서는 왕의 신하의 아들을 보지도 않고 말로 고쳐주었다고 하고, 나사렛에서는 고향사람들에게서 배척을 당했다가, 지금은 가버나움에 정착하면서 가르친다는 소문이었다. 형 시몬도 예수가 기적을 베푼 일이 많아지자, 이제는 조금씩 마음을 돌리는 것 같았다. 그렇다 할지라도 자기는 예수를 따라다니지는 않겠다고 했다.

그 날은 안드레가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전날 밤엔 형과 함께 배를 띄워 야간작업에 나섰지만, 밤이 맞도록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이런 날은 생전 처음이었다. 요한 네도 보니 별볼일 없었다. 어느덧 아침이었다. 허탈한 마음이었지만, 그래도 배를 대고 요한과 야고보, 형 시몬과 함께 그물을 씻고 있었다. 그 때 저쪽에서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큰 무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 앞에 걸어오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닌 스승 예수가 아닌가?

반가움으로 일어나 달려가 예수에게 인사했다. 요한도 달려왔다. 예수도 인사를 받고는, 엉거주춤 서 있는 시몬과 야고보를 향해 다가가면서 말했다. “배를 좀 띄워줄 수 있겠나?” 형 시몬의 배가 마침 옆에 있었으므로, 시몬과 안드레는 예수를 태우고 배를 육지 가까이에 띄웠다. 무리는 수천명이나 되어보였다.

예수는 뱃머리에 앉아, 무리를 향해 조용히 하라고 손짓했다. 큰 무리들을 육지에 두고 예수의 낭낭한 목소리가 시작되었다. 안드레는 배가 물결에 움직이지 않도록 조심스레 노를 이리저리 움직이면서도, 두 귀는 예수의 가르침에 집중했다. 형 시몬도 머리를 숙인 채 열심히 듣고 있는 눈치였다.

꿈결 같은 시간이 그렇게 몇 시간 흘렀다. 예수의 가르침은 그가 처음 듣는 얘기였다. 천국과 이에 대한 많은 비유를 이야기했다. 알 듯 모를 듯 헷갈리기도 했지만, 그의 말은 힘과 권위가 가득하여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조용히 숨죽여 듣는 무리들의 빛나는 눈빛만 봐도 그랬다. “그래, 이 분이야말로 우리가 그렇게도 찾던 메시야야. 이제부턴 형이 뭐라든 간에 무조건 스승을 따라가야지.” 그는 이렇게 스스로 다짐을 했다.

어느덧 예수의 말은 끝났다. 무리는 흩어지고, 예수가 시몬에게 말했다.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그동안 숙이고만 있던 시몬이 고개를 들었다. 형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는 것을 얼핏 보았다. 자기가 느꼈던 잔잔한 감동을 넘어, 형은 뭔가 더 뭉클한 것을 느꼈는가 보다. 이어서 형이 대답했다. “선생님, 우리 형제가 밤새 야간작업을 했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안드레는 형 시몬을 도와 깊은 데로 열심히 노를 저었다.

호수의 가장 깊은 곳에 이르러 그들은 그물을 내렸다. 아, 이럴수가! 밤새 한 마리도 구경 못한 고기떼들이 그물 속에 가득한 것이 아닌가? 고기가 너무 많아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멀직이 친구 요한의 배가 보였다. 무슨 일이 일어날까 멀찌감치 따라와 보았던 것이리라. 안드레는 급히 요한과 형 야고보에게 도움의 손짓을 보냈다. 그 사이 시몬은 그물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네명이서 그물을 겨우 올려 두 배에 가득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안드레는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요한과 야고보도 눈이 화등잔만해져서, 잡은 고기를 보면서 놀랐다. 그 때 갑자기 형 시몬이 예수의 무릎 앞에 엎드렸다. 눈시울이 붉어져 있던 형의 얼굴은 이제 하염없는 눈물로 가득한 것이 아닌가? “주님, 나에게서 떠나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안드레도 숙연한 표정이 되어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 앞에 엎드렸다.

예수는 아무 말 없이 조용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 때 제자가 되겠다고 베다니에서 자신있게 예수를 좇았던 그들이, 그리고는 훌훌 세상을 향하여 예수를 떠났던 그들이, 이제는 예수 앞에 엎드려 자신들에게서 떠나 달라고 간구한다. 사실 안드레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그게 아니고, 우리는 모두 이제야 스승님의 진면목을 보았습니다. 당신은 주님이십니다. 이제 다시 주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을 따르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이윽고, 예수는 다시 빙그레 웃음지며 말했다. 예수의 웃음은 용서의 웃음이자, 꿈을 비젼으로 바꿔주는 웃음이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희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모두의 입가에 잔잔한 감동의 웃음이 어렸다. 형 시몬의 머리가 다시 한번 숙여졌다.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평생토록 주님만 따르렵니다."
* * * * *

그렇게
고기 잡는 동업자인 그들은
이제 사람 낚는 동업자로
바뀌었습니다.
메시야에 대한 단순한 '꿈'은
인생의 주인인 예수를 만나면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위대한 '비전'으로
그렇게
승화되어 갔습니다.



2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갈릴리 자기 고향마을로 돌아와 있었다. 그의 마음속은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특히 마지막 몇주 간에 벌어진 사건들은 그의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도 되지 않을 뿐더러, 도대체가 꿈인지 현실인지 이제는 가물가물 하기까지 했다. 지난 3년간 죽자사자 따라 다녔던 예수의 십자가 처형, 그 참혹했던 죽음을 먼 발치에서 숨어 바라보았다. 동료 유다가 예수를 배반했던 그날 밤, 처음에 그는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감히 너희들이 우리 스승님을 잡아 가려고 해? 말고라는 사내에게 칼을 꺼내 내리쳤을 때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이후 스승 예수는 힘없이 잡혀가고.. 그를 뒤쫓아 대제사장의 뒷뜰에서 서성이다 결국 천추의 한을 남기고 말았던 것이 아닌가! 그날 새벽, 숯불 앞에서 한갖 계집종에게 걸려 스승인 예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지 않았던가? 세번째 부인할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저주의 욕설까지 해대지 않았던가? 닭울음 소리를 듣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엎지른 물이었다. "오늘밤 닭 울기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는 스승의 말이 천둥처럼 그의 뇌리를 때렸다. 구석진 어둔 곳에서 땅을 치며 얼마나 울었던가?

고향 땅 갈릴리로 돌아온지도 어느덧 보름이 지난 것 같았다. 이제 그는 새벽과 숯불과 닭 울음을 싫어하게 되었다. 누군가 그에게 똑같은 말을 세번 반복하면 벌컥 화를 내곤 했다. 이 모든 것이 그 날에 저질렀던 자신의 과오를 생각나게 했던 것이다. 스승 예수는 부활하셨다. 이미 두번이나 주님을 뵈었다. 두번째에는 그의 친구 도마가 예수의 손과 발과 옆구리를 확인하는 것을 지켜 보았다.

베드로는 그 때 한 쪽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웅크리고 있었다. 주님을 배반했던 그가 아닌가? 그것도 세번씩이나.. 주님은 잠깐 있다가 다시 사라지시기를 두 번.. 뭔가 매일 만났던 스승의 모습과는 다른 환상인 듯도 하고.. 아무튼 주님은 그와 별도로 대화도 않으셨고 이전의 친밀했던 주님은 아닌 듯 했다. 마음 한 구석은 뭔가 허전하고 쓸쓸했다. 그 주님께서 과연 나를 용서해 주실까?

매일매일 갈릴리에도 어김없이 새벽은 오고, 그 새벽에 베드로는 꿈에 숯불 앞에서 닭울음 소리를 들으며 신음하며 잠을 깬다. 주여, 나를 용서하소서.. 회한의 날들이다. 어느날 오후, 나는 고기 잡으러 가노라. 베드로의 말에 친구들도 같이 따라 나섰다. 밤이 맞도록 열심히 그물을 던졌지만 고기를 잡지 못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과도 같이.. 어느새 어스므레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다. 베드로는 초조했다. 그가 싫어하는 새벽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멀리서 누군가 소리를 지른다.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져 보라. 생각도 없이 그물을 다시 던졌다. 그물의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엄청난 양의 고기다..

그물을 올리면서 그는 깨달았다. 오, 주님이시구나! 이런 일이 그에게는 첫번째가 아니었다. 3년전 예수를 요단강에서 처음 만난 그 날이 문득 생각났다. 예수는 그에게 베드로라는 거창한 이름을 지어 주셨다. 자랑스런 이름 베드로, 반석과 같이 굳건히 서라고 격려하셨지.. 그러나 며칠이 못가서 그는 예수를 버리고 갈릴리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그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고기잡고 있던 그를 다시 찾았을 때 그는 몸둘 바를 몰랐었다. 그 날도 그가 잡은 고기의 양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때 고백했던 말이 지금도 생생했다.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 주님이 지금 다시 찾아 오신 것이다. 다시 실패한 베드로에게, 다시 배반한 베드로에게.. 그러나 그 주님이 너무나 반가왔다. 그 주님을 정말 기다려왔던 것이다. 요한이 먼저 외쳤다. 주님이시다! 베드로의 동작은 이보다 더 빨랐다. 배가 뭍에 대기를 기다릴 수가 없었다. 다짜고짜 바다로 뛰어들어 온 힘을 다해 헤엄치며 나아갔다.

눈물 나도록 기다렸던 그 분이 아닌가? 이젠 얘기해야지, 고백해야지. 주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소서.. 주께 다다랐을 때 그는 확신했다. 아, 이전의 주님이시다. 그의 배를 띄우고 설교하시던 3년 전의 그 주님, 그 분이시다.. 그런데 그 주님은 숯불에 무언가를 굽고 계셨다. 새벽의 숯불.. 베드로는 순간 긴장했다. 치욕의 순간이 기억난다. 그의 손과 발이 떨리기 시작했다.

예수는 아는지 모르는지 제자들에게 구운 고기를 나누어 주셨고, 아무 말 없이 식사를 하신다. 베드로는 망설였다. 주께 내 잘못을 고백해야지. 예전의 베드로 같으면 이미 무릎을 꿇고 스승의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울먹였을 테지만 이젠 자신이 없다. 스승께 용서를 구할 염치가 없다. 모두 주를 버릴 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주를 위해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얼마나 호언장담했던가? 시간이 흐른다.

예수가 먼저 베드로를 향해 질문을 하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가페(Agape)적으로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이전의 베드로 같으면, 내가 주를 아가페적으로 사랑하노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능력이 산산조각난 지금은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십자가의 고난과 부활을 보면서 베드로는 아가페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것은 주님만이 할 수 있는 사랑이었다..

망설이다 베드로는 대답했다. 주님, 제가 주님을 필레오(Phileo)적으로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 저는 주님을 아가페적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미 제 실패를 주님이 보셨지요. 저는 오로지 친구간의 우정으로 사랑하는 필레오적인 사랑으로 밖에 할 수가 없나이다. 주님은 저를 아가페적으로 사랑하지만, 저는 주님을 아가페적으로 사랑할 수 없나이다. 저를 용서하소서..

예수는 두번째 똑같이 물으신다. 네가 나를 아가페적으로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당황했다. 똑 같은 질문을 주님이 하신 것이다. 또 망설인다. 내 의지를 담아 아가페적으로 사랑한다 말씀을 드릴까? 그러나 깨어지고 실패한 베드로의 마음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번에도 같은 대답을 드린다. 주님, 제가 주님을 필레오적으로 사랑하는 줄 아시나이다..

예수는 세번째로 또 물으신다. 그러면, 네가 나를 필레오적으로 사랑하느냐? 베드로는 세번째 주님의 바뀐 질문에 감격했다. 감동의 눈믈이 주르르 뺨을 타고 흘렀다. 오, 그렇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필레오적으로 사랑하나이다. 주님을 정말 사랑하나이다. 감격에 찬 베드로의 대답이었다.

그날 새벽 숯불 앞에서 세번 주님을 부인했던 베드로에게, 예수는 똑같은 방식대로 다시 다가오셨다. 그 갈릴리 해변가, 새벽의 숯불 앞에서 예수는 세번의 질문을 하신다. 주님이 베푸신 회복과 치유의 방식이다.

이제 주님은 실패한 베드로를 있는 그대로 껴안으신다. 베드로의 아프고 찢겨진 마음을 어루만지신다. 그의 처절하게 절망한 마음을 회복시키신다. 치료의 광선이다. 어두웠던 그 영혼에 빛이 들어온다. 회한의 눈물이 은혜와 감동의 눈물로 바뀐다. 그리곤 말씀하신다.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의 눈물은 실패의 눈물이 아니었다. 실의에서 딛고 일어나 부활하신 주님을 겸손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에게는 회개의 눈물이 있었고 주님이 주시는 심령의 터치가 있었다. 치유와 회복의 눈물이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고, 한번 설교에 삼천명을 회개케 하는 능력의 베드로. 그 이전에 먼저, 베드로에게는 깊은 회개와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이 있었던 것이다.



3부: 신의 상품에 참여하기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베드로후서 1:5-7).

베드로후서의 위 말씀은 제가 평상시 묵상하기 좋아하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인생의 황혼에 선 베드로의 완성된 인격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더욱 좋습니다. 이것을 쓰면서 부끄러운 제 자신을 발견합니다. 하나도 이루지 못한 제가 여덟가지 아름다운 주님의 성품에 대해 일일히 생각하고 얘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큰 은혜였지만, 끝내는 내 자신의 부족함으로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언젠가 영적으로 어른이 되었을 때 이 글을 다시 한번 쓰고 싶습니다.
~ㅇ~ㅇ~

믿덕지절인경우사.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
그리스도인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들이 잘 정리되어 있지요.
신의 성품(벧후1:4)에 참여하기 위한 덕목들입니다.
이렇게 짝으로도 의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믿음과 덕, 지식과 절제, 인내와 경건, 형제 우애와 사랑.
이것이 바로 신의 성품이며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인격의 열매들입니다.
순서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이 제일 먼저요, 사랑이 맨 나중입니다.
믿음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납니다.
내적인 것으로 출발해 외적인 열매를 풍성히 맺음으로 마무리합니다.
이 덕목들이 하나씩 더해 감에 따라 나의 영성은 늘어갑니다.
믿덕지절인경우사는 한번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덟가지 덕목이 한 쎄트로 계속 이어지는 연속 싸이클입니다.
우리의 일생을 통해 이 싸이클이 잦아지고 더 심화될 때
내 속에 있는 신의 성품은 더 영글어 갈 것입니다.
모든 덕목의 중심은 주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분만이 나로 하여금 신의 성품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오르게 하실 수 있습니다.

첫번째 덕목은 나의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믿음으로 시작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의 삶은 변화를 받습니다.
애벌레가 고치의 과정을 거쳐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것처럼,
생명의 제2의 탄생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한 거듭남입니다.
우리 안의 영이 새로이 탄생하는 것이지요.
그리스도안에 있음으로 인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내 믿음의 대상은 온전하신 나의 구세주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내 안에 있고 내가 그 안에 있음으로,
나는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첫 발을 떼게 되었습니다.

덕은 나의 믿음 위에 쌓을 수 있는 두번째 덕목입니다.
믿음은 '나' 중심이지만 덕은 '너' 중심입니다.
믿음은 나의 내면적인 삶이지만 덕은 타인을 향한 나의 삶의 거울입니다.
덕은 공격적이 아닙니다. 세우는 것입니다.
내 안에 있는 고귀한 주님의 향내를 은은히 풍기는 것입니다.
쓰러진 것, 넘어진 것을 세우고 다시 넘어지지 않도록 돌보고 돕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은 덕을 세울 수 없습니다.
내가 받은 능력과 은사와 은혜를 내세우고 자랑하기 보다는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가르쳐 줌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지식은 나의 덕 위에 쌓을 수 있는 세번째 덕목입니다.
지식은 진리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이 세계와 그 안에 내재하고 있는 영계,
그곳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배우고 깨닫는 것입니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그러할 때에 나는 모든 지식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그러할 때에 나는 하나님이 주신 충만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할 때에 나는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교회를 향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게 됩니다.

절제는 나의 지식 위에 쌓을 수 있는 네번째 덕목입니다.
나의 믿음, 덕, 지식, 인내, 경건, 사랑에 절제가 필요합니다.
절제는 나의 속내를 조절하는 것입니다.
나의 감정을 주님의 뜻과 맞추어 조절하는 것입니다.
내 심장의 박동수를 주님의 주파수에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나의 소원보다 주님의 말씀이 우선순위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더 사랑하기 위한 내 자아의 포기입니다.
어느 때나 낮에와 같이 단정하게 생활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같이, 요셉과 같이, 주님과 같이..
무절제하지 않고 낭비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인내는 나의 절제 위에 쌓을 수 있는 다섯번째 덕목입니다.
나의 믿음, 덕, 지식, 절제, 경건, 사랑에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는 내게 주어진 환경을 이기는 것입니다.
나의 환경을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난관이 닥쳐올 때 어떤 이는 환경을 바라봅니다.
불 가운데를 통과할 때라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인내는 이 때에도 주님을 끝까지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아주 오래, 매우 오랫동안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는 것이 인내입니다.
인내는 나 자신과 다른 이들과 세상을 향한 용서입니다.
용서하고 인내하되 일흔번씩 일곱번까지 하는 것입니다.

경건은 나의 인내 위에 쌓을 수 있는 여섯번째 덕목입니다.
경건은 비밀입니다.
경건을 완성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보화이자 비밀입니다.
순간순간, 매일의 삶 속에서 이 비밀의 보화를 캐어 갑니다.
경건의 비밀을 알아갈수록 나는 그리스도의 분량을 하나씩 쌓아 갑니다.
경건은 능력입니다.
나의 눈과 배와 심장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강해지는 것입니다.
망령되고 헛된 신화을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합니다.
경건은 배우고 확신한 일에 확고하게 거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나의 생각과 마음과 영을 주님과 일치시키게 됩니다.
헌신의 예배와 순종의 삶 속에서 자족과 감사의 열매를 맺습니다.

형제우애는 나의 경건 위에 쌓을 수 있는 일곱번째 덕목입니다.
내 육신의 형제는 물론 주 안에서 하나된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형제우애의 근거는 주 그리스도입니다.
내 안에 역사하시는 주님과 형제 자매 안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이 서로 만날 때
나는 그 형제 자매를 주님 안에서, 주님께 하듯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발견하고 비판하기 보다는
형제의 더러워진 발을 보고 이를 손수 씻겨 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나의 형제우애 위에 쌓을 수 있는 마지막 덕목입니다.
사랑은 사랑이신 주님만이 나에게 공급해 주실 수 있습니다.
사랑은 에너지입니다.
사랑은 잔잔한 연못에 돌을 던져 생기는 동심원과 같이
은은히 주위로 퍼져가는 파장의 에너지입니다.
사랑은 빛입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하듯이,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듯이,
사랑의 빛은 모든 이들에게 비추입니다.
주님의 사랑이 스스로 발열하는 밝은 태양 빛이라면,
나의 사랑은 그 태양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희미한 달빛입니다.
그래서 나의 사랑은 내것이 아니기에 자랑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사랑은 차가운 나의 머리로 알 수 없습니다.
따뜻한 나의 심장으로만 깨닫고 느낄 수 있습니다.
나의 심장은 주님의 사랑을 받아서 비출 수 있는 거울이니까요.
가슴속에 사랑이 있는 사람만이 상대의 사랑을 느끼고 공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고백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 아시고 사랑을 받는 그 사람들이 알게 되지요.
주님만이 이 사랑의 비밀을 내 안에서 창조하시고 완성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주님은 한량없이 부족한 나를 도우십니다.
주님은 영적으로 어린 나를
신의 성품을 향하여 조금씩 자라게 하십니다.
주님은 나에게
믿음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덕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지식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절제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인내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경건의 근원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형제우애의 근원입니다.
또한,
주님은 나에게
위의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훨씬 위대한
사랑이십니다..
오, 주님!
부족한 저로 주님을 닮아가게 하옵소서.
사랑하게 하옵소서.
아멘..

김순희

2010.10.17 10:14:36
*.161.88.93

믿덕지절인경우사. 이렇게 외우니 정말 쉽네요. 감~~사^^
멧시야에 대한 단순한 꿈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서 하나님 나라 확장의 커다란 비전으로
승화되어가는 제자의 모습처럼 우리 모두도 그렇게 그렇게 승화되어지면 좋겠습니다.

그러려면 베드로처럼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때 아픔, 고통, 수치스럼, 부끄럼등을 모두
성령님의 조명해 주심에 비추어 보아얄텐데... 너무 너무 아프겠지요. 너무 너무 부끄럽겠지요.ㅠㅠㅠ

김유상

2010.10.18 23:53:51
*.234.41.56

선우 형제님, 감사합니다. 두 번째의 시험을 통해 하나님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도록 완전히 하나님께 순복한 아들이 되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정해린

2010.10.19 01:42:04
*.217.186.106

언젠가 추천해 주신 꽃들에게 희망을 이란 책을 읽어 보았답니다.
저도 이젠 껍질을 깨고 희망을 주는 나비처럼 살고 싶어요.
험한 산의 들판에서 푸른나무처럼 꿋꿋하게 희망을 심는 나무가 되어
주세요. 감사합니당!! saint. louis에서 해린..

이선우

2010.10.19 20:01:23
*.222.242.101

믿덕지절인경우사를 쓰면서 제 마음에 가슴앓이의 슬픔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김순희 자매님 말씀하신 대로, 나를 바라볼 때 그 부끄러움이 얼마나 컸던지..ㅠㅠ

유상 형님, 제 영원한 벤치마크인 것을 아시지요?^^
두번째 시험 잘 통과하시도록 기도제목(완전히 하나님께 순복한 아들!) 추가요..

해린님, 세인트루이스는 정말 복 받은 곳이야.
왠지 아니?
.
.
.
정천사님이 사는 곳이니까.ㅋㅋ
희망 나비가 훨훨 날기 위해서는, 고치가 되는 과정이 힘들더라도 잘 참아야 하겠지?
에스더님과 함께 홧팅!이다. 아~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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