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T행5장]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누룩

조회 수 1764 추천 수 93 2010.12.04 13:24:11
본문 : 행5:1~11

요약 : 성령이 통치하시는 믿음의 공동체에 탐심과 속임과 섞임의 범죄를 범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죽음의 심판을 받았다.

붙잡은 말씀
3절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4절 사람에게 거짓말 한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라
9절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느낌 및 묵상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대할 때마다 그 드라마틱함에 놀란다. 땅 값 얼마를 숨겨놓은 조그마한(?) 허물에 대한 심판이 죽음이라니?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과연 무엇 때문에 이들 부부가 죽음이라는 심판에 이르게 되었을까? 이것이 자연스레 금번 QT의 묵상 주제가 되었다.

먼저 생각해 본것이 이 사건 이후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에 대한 이야기다. 사도행전8:9~24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은 사마리아의 성도들이 사도들에게서 성령세례 받는 것을 보고, 돈으로 이것을 사려고 했다. 마술사 시몬은 정죄받아 마땅했고 베드로는 그를 “마음이 바르지 못하고,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다”고 신랄하게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했다.

아나니아 부부와 마술사 시몬의 두 사건은 유사점이 많다. 먼저는 둘다 돈에 관련된 사건이었다. 마술사 시몬은 돈을 내고 성령의 선물을 사려고 했고, 아나니아 부부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를 팔아 시도들에게 실제 헌금을 했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은 둘다 같이 불순했다. 동기가 올바르지 못했고 ‘악독’이 가득했다. 그리고, 두가지 일에 모두 베드로가 주님을 대신하여 판단을 내렸다. 그런데, 같은 베드로의 판단이 아나니아 부부에게는 죽음을, 시몬에게는 준엄한 꾸짖음으로 천양지차를 보이고 있지 않은가? 시몬을 향한 질책은 당연했다. 오히려 더 심한 벌도 내릴 수 있었지 않을까? 그런데 아나니아 부부에게 내린 죽음은? 더 이상 회개할 수도 없고, 돌이킬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즉시 죽음이라는 가장 큰 형벌이 내려진 것이다.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기에 그랬을까? 아나니아와 시몬의 차이점은 무엇이었을까?

두 사건의 말씀 속에서 한가지 대조적 차이를 발견한다. 시몬의 악독은 그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다. 즉, 단순한 그의 욕심으로 인한 불의였다. 그리고 그는 성령의 선물이 실제 어떻게 오는 것인지 무지한 상태에서 이를 돈주고 사려 했다. 그러나, 아나니아 부부의 경우는 달랐다. 그것은 ‘영’에 대한 문제였다. ‘사단’이 그의 마음에 가득하여 ‘성령’을 속인 것이었다. 이는 ‘주의 영’을 시험하는 행위였다. 그는 땅값 얼마를 감춤으로, 사람에게 거짓말 한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거짓말 한 결과가 되었다. 바로 이것이 성령을 속이고 훼방한 죄가 아닐까? 예수님의 말씀이 여기에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누구든지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사하심을 영원히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처하느니라”(막3:29)

또 하나 차이점이 보인다. 시몬의 잘못은 개인적 범죄이지만, 아나니아 부부의 잘못은 공동체 전체를 향한 범죄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범죄는 개인이 회개하고 고칠 문제이지만, 공동체를 향한 범죄는 공동체에 속한 전원이 즉각 피해를 입는다. 그런데, 이 공동체는 성령께서 임하셔서 직접적으로 통치하시는 최초의 초대교회가 아니었는가? 여기서 나는 이 사건의 엄중성과 위급성을 본다. 그것은 마치 밀가루 반죽 덩이에 떨어진 조그만 누룩과 같은 것이 아닐까?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갈5:9)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5:6-7) 뜨겁고 성령 충만했던 초대교회에 몰래 조용히 들어온 누룩.. 그대로 두면 그 누룩은 온 공동체에 순식간에 확산이 될 가능성이 있는 독소와 같은 것이 아닐까? 그것은 즉시, 그리고 확실하게 제거해야 할 정도로 그만큼 사안이 화급한 것이었다.

이 사건과 진정 유사한 사건이 또 하나 있음을 본다. 여호수아7장에 나오는 아간의 범죄이다. 그는 여리고 성의 전리품을 탐욕으로 인해 몰래 자신의 장막 밑에 숨겨 놓았다. 여리고의 모든 전리품을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셨던 명령을 어긴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작은 아이성과의 전투에서 대패하였다. 한 개인의 탐심이 전체 공동체를 위기로 몰아넣게 된 것이었다. 아간에게 내린 심판은 무엇이었나? 아간과 그의 모든 식구들과 소유물들은 모두 공동체에서 분리되어 불사름 당하는 운명을 맞았던 것이다. 아나니아 부부처럼, 아간은 그 ‘순수하고 섞이지 않은’ 믿음의 공동체에서 즉시 제거되어야 할 ‘누룩’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잘못된 동기는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이 사건 직전에 나오는 바나바 이야기로부터 출발한 것이 아닐까? 바나바는 자기 소유의 밭을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주님 보시기에 온전하고 충성된 헌금이었을 것이다. 온 교회가 그의 헌금에 대해 칭송했을 것이다. 굳이 바나바만 그랬겠는가?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하는 이가 없더라.”(행4:32) 초대교회에서 나타난 아름다운 공동소유와 나눔의 정신이었다.

이를 바라본 아나니아는 어땠을까? 그들 부부에게 나타난 생각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성령의 감동에 의한 철저한 동참이라기 보다는, 부러움과 시샘이 앞선 부분적 참여가 아니었을까? 그들은 세상과 주님을 향한 ‘양다리’를 걸쳤던 것이 아니었을까? 돈은 돈대로 아깝고, 주님의 교회에는 그래도 참여하고 싶고.. 특별히 바나바처럼 그들도 칭송의 대상이 되고 싶어하지 않았을까? 아, 영의 세계에서 양다리는 용납되지 않는다. NIV성경을 보면 이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들은 부자였고, 그들이 판 것은 그들이 가진 재산의 일부(a piece of property;1절)였다. 전부가 아닌 일부의 재산을 팔고도, 그 판 돈마저 얼마를 감추어 놓았던 것이다. 그들은 분명 판 돈의 전부를 바치겠다고 베드로에게 약속(Commit)했을 것이다. 이것이 또한 공동체 내에서 보이지 않는 약속이 아니었던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6:10)

주님이 그들에게 원하셨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전 우주의 주인이자 창조주이신 그분이 돈 몇푼 더 받아서 뭘 하시겠다는 것인가? 아, 그들이 주님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운 성품을 조금이라도 더 알았었더라면.. 주님께서 진정 원하셨던 것은 주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이었다고 생각한다. 주님의 통치 안으로 들어오겠다는 그 거룩한 약속, 그러한 Full Commitment! 그것을 정말 원하셨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그 거룩한 약속을 소흘히 한 것이었다. 주님의 엄위한 통치하심을 만홀히 여긴 것이었다. 주님의 한량없이 귀한 은혜를 ‘값싸게’ 여긴 것이었다.

그들의 행위는 ‘영적 탐심’을 바탕으로 한 속임이 아니었던가? 그들의 탐심은 속임을 불러들였고, 그들의 속임은 ‘섞임’으로 이어지면서 거룩한 공동체를 오염시켰다. 거룩은 구별됨이다. 혼탁한 세상과 완전히 분리되어, 주님만을 닮은 순수함이다. 섞임은 용납되지 않는다. 순도 100%의 순수함을 유지하는 것이 거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초대교회 공동체의 거룩함이 아나니아 부부의 범죄함으로 파괴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주님께서 어찌 이를 가만히 보고만 계셨겠는가? 그들의 죽음을 두려움과 떨림으로 바라본다.


적용 및 기도

아나니아 부부 사건을 오늘날 내게 적용시켜 본다. 나의 다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누룩이 되지 말자.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없는 떡이 되자.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도 말고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도 말고,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누룩없는 떡으로 하자.”(고전5:8) 탐심과 속임과 섞임에 대해 나는 주님 앞에 내세울 것이 과연 있는가 또한 반성해 본다.

첫째, 탐심은 우상숭배이다(골3:5). 왜냐하면 주님이 계셔야 할 바로 그 자리에 탐심이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기 때문이다. 아나니아 부부와 아간의 탐심은 속임을 낳았다. 그들은 첫째- 자신들을 스스로 속였고, 둘째- 그들이 속한 공동체를 속였고, 셋째- 공동체를 통치하시는 주님(성령님)을 속였다. 이러한 탐심과 속임은 영의 영역이다. 바로 그 배후에 사단이 있기 때문이다. 사단의 전략이 무엇일까? 탐심과 속임을 조장함으로써 공동체에 ‘누룩’을 심는 것이다. 누룩은 부지불식간에 섞여서 퍼져가며 공동체의 순수함과 거룩함을 오염시킨다. 그러기에, 그것은 또한 거룩과 순수의 크나큰 적이다. 탐심과 속임이 들어오는 순간, 거룩과 순수는 파괴되기 때문이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내가 속한 공동체에 누룩이 되지는 않았는가 자문해 본다. 하나님이 계실 자리에 혹시 내가 뻐팅기고 서 있는 부분은 없는지? 주님께서 높임 받으실 그 자리에 혹시 내가 높임 받고 있지는 않은지? 공적인 자리 또는 사적인 자리에서조차, 누가 혹시 나를 칭찬하며 나에 대한 영광을 돌리도록 은근히 기대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내 의를 자랑하려고, 내 알량한 글재주(?)를 뽐내려고, 묵상의 글을 올리고 있지는 않은지? 내가 올린 글의 조횟수와 댓글에 따라 내 인기도를 가늠하는 것은 아닌지? 이 모든 질문에 ‘아니오’라고 선뜻 대답할 면목이 없음을 주님께 고백하고 회개한다. 아나니아 부부의 죄악이나, 내가 매순간 저지르는 죄악이나 무슨 큰 차이가 있겠는가? 그래서, 나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나아가 감사함으로 무릎꿇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내게는 그외에 다른 길이 없다.

주님, 주님의 자리에 서있는 제 추한 모습을 봅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제 본래의 자리로, 섬김의 자리로 돌아가겠습니다. 주님과 십자가를 통하여 진정한 낮아짐을 배우기 원합니다. 제 마음 가운데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옵소서.

둘째, 섞임은 마음이 한 길로 가지 못하고 두 갈레로 갈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섞임을 다른 말로 ‘두 마음’이라고 했지 않은가? 한 마음을 품었던 내 마음이 어느새 두 마음으로 갈라지는 것을 본다. 주님만을 향했던 ‘한마음’이 나(세상)를 향한 마음과 주님을 향한 마음의 두 갈레로 갈라진다. 이것이 주님이 싫어하시는 섞임이라고 생각한다. 아나니아 부부가 걸쳤던 양다리이다. 두 마음을 품으면 정함이 없어진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1:18) 다시 한 마음이 되려면 오직 한가지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들어온 아간의 마음(즉, 나를 향한 마음)을 죽여야 한다. 가차없이 이를 불태워 제거해야 한다. 바라봄의 법칙- ‘절망과 갈망의 싸이클’을 다시 타야 한다.

나를 향하는 마음, 세상을 향하는 마음은 내가 육신의 연약함에 머물러 있는 한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래서 나는 매일의 삶에서, 아니 매 순간 순간마다 주님의 도우심과 통치하심이 절실하다. 주님께 무릎꿇음으로 내 두 손을 벌려야 한다. 주님의 긍휼하심과 은혜 주심이 없이는 나는 한순간도 거룩해 질 수 없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는 순간, 나는 두 마음을 품게 된다. 정함이 없게 된다. 야고보 사도가 제시한 해법을 묵상한다.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4:8)

주님, 성결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섞임이 없는 순수하고 거룩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이것이 주님의 마음이 아니옵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5:8)라는 말씀에서와 같이, 두마음이 아닌 한마음을 갖겠습니다. 주님과의 끊임없는 교제의 만남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더욱더 체험하기 원합니다. 한마음 체험을 평생 지속하기 원합니다. 주님과의 일치를 원하옵니다. 아멘.

이선우

2010.12.05 17:02:23
*.222.242.101

박목사님께 드리는 질문입니다.
질문 내용: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영혼은 과연 구원을 받았을까요?

배경: 사실 위의 제 글은 아나니아 부부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지 못했다는 전제로 쓴 것이었는데, 다른 이견이 있음을 오늘 알았습니다.
그 주장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아나니아 부부의 혼은 그들의 한가지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로 떠나갔지만, 영은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그들은 천국으로 인도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영이 구원받지 못했다고 판단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한 특정한 죄로 인한 한순간의 심판과, 죄사함으로 인한 영혼의 구원은 엄연한 별개의 사안이다. 십자가 복음의 능력이 일순간의 죄 하나로 인해 도말되지는 않는다. 물론 본문의 내용 자체로는 판단이 어렵겠지만, 사랑과 구원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초대교회 성도의 일원이었기에, 한번 이루어진 구원이 일시적인 한 사건으로 철회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이야기를 듣고보니 그럴 듯 하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휴~, 너무나 헷갈려서 질문을 드립니다. 앗, 목사님께 골치아픈 숙제를..ㅋㅋ 충성!

운영자

2010.12.06 14:36:07
*.104.233.34

All-in 집사님
앗! 또 쬐끔은 골치 아픈 숙제를 주셨네요.
우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것은 여러모로 무리한 해석이네요.
그 이유는 준비 되는 대로 (이 메일로 받은 앞선 질문이 하나 있음) 올리겠습니다.
그리고 그 중 아주 중요한 이유는 이미 집사님이 위 글에서 밝혀놓았는데요.
제가 조금만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기쁨의 날들

2010.12.07 04:09:26
*.176.226.233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보면서 선우님과 같은 의문을 가졌습니다.땅값 얼마를 감춘 것에 대해서
죽음은 가혹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하나의 의문은 저들은 죽었는데 저들보다 훨씬 심한 나는 왜 살아 있는가? 정말 의문입니다.

김순희

2010.12.08 12:07:52
*.165.73.38

ㅋㅋ 기쁨의 날들님!
저두요,
저들보다 더 심한 나는 왜 살아있을까요??
정말 의문입니다. ^^

김유상

2010.12.09 20:58:57
*.234.45.182

저는 이 사건을 "일벌백계"의 표본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구원을 다루는 문제가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죽음을 곧 버림당함으로 해석하는 것은 고난받음을 믿음 없음으로 해석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지 않을까요? 살아 있어도, 게다가 온갖 부귀영화 다 누리고 살고 있어도 구원받지 못한, 못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갑작스럽게 불운하게 또는 천벌 받았다 여겨지게 죽은 사람들 중에도 구원받을 영혼이 있을 것입니다. 즉 죽음의 시점과 방법은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는 좋은 잣대는 아닌 것이지요. 구원은 우리의 능력과 이해력을 넘어선 오직 하나님만이 결정하시고 처리하실 수 있는 권한이기에,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알려 주시지 않은 한 우리는 결코 어떠한 단정도 내려선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기쁨의 날들 자매님과 김순희 자매님의 의문은 우리 모두의 의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나니아 부부보다 결코 낫지 않은 저를 아직 살려 두고 계신 하나님께서 그들 부부가 하나님을 속였다고 지옥에 보내신다면, 매일 매일 이렇게 저렇게 하나님을 속이고 사는 저의 결국 또한 지옥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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