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쓰나미의 천벌론(天罰論)에 대해

조회 수 1506 추천 수 132 2011.03.18 02:5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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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쓰나미의 천벌론(天罰論)에 대해


이번 일본의 대지진이 과연 하나님의 벌인가 아닌가에 대해 기독교 내에서도 설왕설래가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쓴 칼럼에도 김성진님이 조용기 목사님의 발언에 대해 아주 좋은 의견을 달아주셨습니다. 또 쌀로별님은 시대의 흐름이 불안해서 개인적 문제에 붙잡혀 있는 것이 옳은지 혼란이 온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주제에 대해 제 의견을 조금 더 자세히 개진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침 제가 어저께 한 교회의 수요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때가 때인 만큼 이번 쓰나미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본 칼럼에 썼던 대로 요나처럼 왜곡된 선민의식에 사로잡혔던 신자들의 심술궂은 마음보부터 회개하여 뜯어고치고 일본의 복음화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미국도 일본과 비교도 안 되는 큰 쓰나미를 이미 당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일본은 집이 몇 만 채만 파도에 떠내려갔지만 미국은 지금 수백 만 채가 은행 빚에 떠내려가고 있지 않습니까? 실은 금융사태가 오기 오래 전에 제가 어떤 설교 중에 그렇게 되리라 예언(?)했던 적이 있습니다. 신령한 은사를 받아 그런 것이 아닙니다. 너무나 죄가 많고 완악한 미국의 세태를 성경의 진리와 비교해보니까 언젠가 하나님의 벌을 받긴 받을 텐데, 아마도 대공황 같은 불경기의 형태가 될 것이라고 어림짐작 되었던 것입니다.  

죄는 항상 있어 왔다.

먼저 아실 것은 모든 세대의 모든 종족들이 모든 장소에서 모든 종류의 죄를, 개인별로 사회별로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항상 넘치도록 범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 모든 잘못에 대해 일일이 상응되는 벌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당신의 자비와 사랑으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또 죄가 내포하는 부정적 영향 때문에 죄 중에 있으면 이미 벌을 받고 있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죄를 다루는 모습이 인간이 바라볼 때는 비교적, 아니 아주 관대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과 논쟁을 벌인 두 주제, 1)왜 악인은 세상에서 형통하고, 2)의인은 왜 악인의 핍박을 받아야 하느냐가 뜻하는 그대로입니다.  

하박국이 갈등했던 이 문제는 십자가 복음을 모르면 풀리지 않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죄에서 절대 깨끗해질 수 없고 또 모든 죄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겨진 데에 기인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의로 덧입혀서 일방적으로 용서해 주시고 성령을 내주케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복원시키는 것이 복음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나 어리석은 모든 사람이 기대하는 것처럼 만약 하나님이 죄지을 때마다 일일이 벌을 준다면 이 복음의 원리와 상충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폭군 하나님이 되며, 모든 이가 겁에 질려서라도 하나님을 맹목적으로 믿을 것입니다. 이는 온전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형성될 수 없기에 애초부터 당신께서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치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지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103:8-11)

시편 기자는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따라 벌주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또 하박국 선지자의 질문에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말하자면 구약에서도 십자가 복음이 하나님이 인간의 죄악을 대하는 동일한 원리였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에 죄를 죄라고 여기고 있다면 하나님으로서도 심판을 보류하고 기다려줄 여지가 있습니다. 최소한 그분 앞에 회개할 거리가 있음을, 실제로 회개하여 선해지려 노력하든 안 하든 간에,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기를 기다려 주신다고 무작정 무한대로 그러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가 차면 당신의 때와 방식에 따라 신자든 불신자든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합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자주는 몰라도 가끔은 반드시 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인간들이 하나님은 없고 죄를 죄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사정은 여실히 달라집니다. 하나님 앞에 회개할 거리가 전혀 없다는 뜻이기에 당신께서 더 이상 기다려 줄 여지가 없습니다. 금융위기 오래 전부터 미국에 하나님의 심판이 올 것이라고 제가 감히 예언할 수 있었던 근거도, 미국 사람이 윤리적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 보다는 하나님 특별히 예수님의 복음의 공로가 부인되고 있었던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재조차 인정치 않는 우상숭배는 가장 큰 죄이자 하나님의 벌을 반드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분명한 원리는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은 아주 엄격하고 철저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불신자에게 한꺼번에 큰 벌을 내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마지막 때까지 유보되어 있습니다. 어디서 어떤 이들을 대상으로 어떤 방식으로 징벌을 내리실지는 오직 당신의 주권에 달렸을 뿐입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다.

하나님께서 신자나 불신자나 윤리적 죄에 대한 인내에 한계가 차서 벌을 내리든, 우상숭배에 대한 징벌이든 간에 그 궁극적인 목적은 죄인으로 회개토록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본심은 재앙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다른 말로 아무리 엄청난 규모의 징벌이 닥쳐도 아직은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론 종말의 시기는 아무도 장담하지 못하기에 내일 당장에라도 주님이 다시 오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내의 양 즉, 사탄에 미혹되어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죄인들을 아끼시는 그 긍휼의 크기는 우리 추측을 훨씬 넘어섭니다.  

또 징벌의 최종 목적이 구원이기에 하나님의 벌주는 방식도 회개로 가장 잘 이끌 수 있는 모습으로 이뤄집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벌임에 틀림없다고 쉽게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렇다고 이번 쓰나미처럼 가공할 위력 즉, 인간의 힘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로만  드러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 배후에 있다는 사실 즉, 하나님의 실존성에 대한 인식 밖에 못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죄를 범한 당사자들이 자기 잘못의 정확한 실상과 그 원인까지 깨달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금융 쓰나미를 봅시다. 아메리칸 드림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회라도 기본적 인권은 물론 기회가 균등하게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기 능력껏 최선을 다해 일하면 그 보상이 돌아와야 합니다. 이는 저울을 속이지 않고 정직하게 사는 것이 형통의 지름길이라고 잠언에서 밝힌 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회입니다. 미국의 모든 법률, 제도, 관습은 합리적이었고 탈세와 부정이 용납되지 않는 사회 분위기였습니다. 한마디로 신용사회였습니다. 또 기독교가 가치 판단의 척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점차 기독교가 변질 부인 되면서 사람들의 도덕도 함께 타락했습니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 버는 것만이 인생의 최고 목적으로 바뀌었고 월스트리트의 아이비리그 나온 수재들이 그 선봉에서 주도했습니다. 주님 안에서의 아메리칸 드림이 맘몬 신의 꿈으로 대체되어 타락해버렸습니다. 당연히 그 벌도 미국이 자랑하는 아메리칸드림을 무너트리는 불경기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요컨대 돈만 밝히기에 돈으로 벌을 준 것입니다.

일본 국민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지진과 핵입니다. 그 대비책 또한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정밀성, 안전성은 자연(하나님)의 위력 앞에는 무용지물입니다. 쓰나미로 일본이 교만하게 자랑하는 바로 그것을 하나님은 깨트리셨던 것입니다.

또 일본의 우상숭배에 제한된 직접적 징벌이라는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전세계 인간들이 갈수록 하나님을 부인하고 과학문명이 만능통치약인줄 착각하는 그 교만과 완악성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 깨닫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정밀도와 안전성을 자랑하는 일본을 택하여 모두가 실황중계로 볼 수 있는 방식으로 벌을 주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본을 크게 혼내려고 하나님이 별도로 엄청난 지진과 쓰나미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일본에 이미 조성되어 있는 자연환경을 사용해서 벌준 것입니다. 또 그래야만 일본인들이 가장 잘 깨달을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세계 금융의 중심으로 돈이 최고로 많이 몰려 있던 미국에는 돈을 사용해 벌을 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들은 하나님은 필요 없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빳빳이 목을 쳐들고 있습니다.  

재차 강조하지만 이 두 쓰나미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재앙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진짜 심판을 하시려면 일본열도를 침몰시키든지, 또 전세계에 노아 홍수같은 벌을 내렸을 것입니다. 비록 그 규모가 엄청나긴 해도 아직은 전지구적인 재앙이 아니었습니다. 두 쓰나미 모두 잘 살펴보면 분명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인내, 구원, 사랑의 뜻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더러 죄에서 회개하라는, 최소한 교만하지는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그 재앙을 당한 당사자만 아니라 그 사실을 보고 들은 전지구인더러 말입니다.

욥기와 재앙

문제는 욥기에 따르면 죄와는 무관한 원인 모를 재앙도 있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욥과 세 친구들의 변론을 가만히 따져 보면 죄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번 쓰나미를 하나님의 벌로 여기는 것은 욥기를 제대로 이해 못한 비성경적인 오류인 것처럼 일부에선 주장합니다. 예수님도 나면서 소경인 까닭이 아비나 본인의 죄가 아니라고 말했으니까 말입니다.  

물론 원론적인 측면에선 옳은 반론이긴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욥의 믿음을 테스트할 양으로 사단이 요구한 것이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았으면 그런 재앙이 일어날 리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악이나 재앙을 적극적으로 주도 조성하는 것은 아니지만 허락 묵인할 때는 많습니다. 이처럼 범사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기에 궁극적으로 일본의 쓰나미도 하나님이 일으키셨다고 하는 진술은 기독교적입니다.

그 다음으로 따져볼 것은 욥이 겪은 환난이 과연 죄에 대한 벌인지 여부입니다. 우선 그 환난들이 만물을 통치하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주관 아래 일어났기에 그 자체로 이미 징벌의 의미는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정적인 결과로만 드러난 모습 자체로도 어쨌든 벌은 벌이라는 것입니다. 최대한 양보해서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는 있는 것입니다. 일본 쓰나미도 생명은 살려주되 다이아몬드가 파도에 함께 밀려오지 않은 이상 마찬가지입니다.  

거기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기에 불신자들도 이런 엄청난 재앙을 보고는 어렴풋이 천벌일 수 있겠다는 인식도 합니다. 이번에도 이시하라 도쿄지사가 물질만능주의와 개인주의에 빠진 일본인들이 천벌 받았다고 대놓고, 나중에 사과하긴 했지만, 말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구태여 기독교계가 나서서 그것마저 아니라고 부인할 이유는 없습니다. 당사자들이 이미 짐작하고 있는 문제이기에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됩니다. 또 그럴수록 따뜻하게 위로해주면서 사랑으로 도우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적 원리는 신구약을 합쳐서 종합적으로 판단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가 구약에선 점진적으로 드러나다가 신약에 이르러 완전히 명확해지기 때문입니다. 욥기의 내용도 아무리 자체적인 문맥과 책의 주제에 맞추어 정확히 해석했다 하더라도 신약성경과 연결해서 검토 적용하지 않으면 자칫 또 다른 오류가 생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행동으로 저지르는 죄만이 아니라 말과 생각으로 짓는 죄까지 예리하게 지적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죄책감으로 얽매겠다는 것이 아니라 어느 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오직 당신의 십자가 은혜만이 구원을 얻는 길임을 밝히고자 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욥이 아무리 죄가 없었어도 십자가 복음에 비추면 그도 수많은 죄를 지은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개별적 죄에 대응하는 벌을 주지 않으니까 인간이 실제로 느끼기에는 환난과 죄가 상관없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욥의 환난도 지은 죄에 일대일 상응한 벌이 아닌 것은 틀림없지만 전혀 죄가 없는데 벌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거기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사탄과 내기(?)한 결과로 환난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로선 꿈에도 짐작 못했습니다. 더더욱 아무 이유 없는 억울한 벌을 받고 있다고 착각하게 됩니다. 욥이 하나님께 무례하다시피 끈질기게 따진 까닭입니다.  

그에게 결정적으로 큰 잘못이 분명 있었습니다. 자기가 벌 받을 이유가 없다고 우기면 하나님에게 잘못이 있다는 뜻 아닙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이 세상은 하나님 없이도 독단적으로 움직인다는 뜻이 됩니다. 어떤 경우가 되어도 욥이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에게 나는 벌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고 대드는, 다른 말로 바리새인들처럼 자신만은 의롭다는 교만입니다. 앞에서 구약 시대 인물인 욥의 구원도 십자가 복음에 따라야 한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또 그가 죄 없이 벌 받았다는 주장도 궁극적으로 틀린 진술이 됩니다.

욥기의 마지막에 가선 도리어 하나님이 그에게 직접 따집니다. 과연 네가 나에게 고난의 이유를 대라고 따지는 것이 가당치나 한 일이냐고 말입니다. 만약 당신께서 던진 그 수많은 질문 중에 하나라도 정확하게 답변할 수 있다면 하나님도 그가 당한 고난의 이유를 알려주겠다는 식이었습니다. 하늘에서 사탄과 내기하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욥과 직접 내기를 하러 땅으로 내려온 셈입니다.

결국 어리석고 불완전한 욥으로선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렸고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과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했다”(42:3)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32:1) 바람에 잘못된 기복신앙관을 가진 친구들마저 할 말을 잃게 만든 그가 말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했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골고다 이전이었지만 십자가 앞에 완전히 엎드려 "저야말로 죄인입니다. 저는 어떤 발을 받아도 마땅합니다."라고 고백한 셈입니다. 당대에 그렇게 의롭다고 칭송받던, 그래서 후대 신학자들이 그가 죄 때문에 벌 받은 것이 아니라고 오해하게끔 만들었던 그 욥이 말입니다.  

해명의 기회조차 상실된 기독교

조 목사님의 발언이 함의하는 내용 자체는 기독교 원리로 따져 틀린 것은 없습니다. 부분적 진리에 불과한 것이긴 해도 말입니다. 욥기를 제대로 읽지 않았다는 비평도 나올 만합니다. 그러나 살펴본 대로 욥기를 더 깊이 읽으면 조 목사님의 말씀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제가 반발을 한 것은 그분의 말씀하시는 방식이었습니다. 불신자나 타종교인은 아무리 세상에서 위대한 업적을 쌓아도 예수를 믿지 않기에 지옥 가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대놓고 지옥 간다고 즉,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럴수록 예수님의 은혜를 전하고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조용기 목사님의 발언에 대해서는 그가 단지 국가적인 공인이기에 그렇게 포장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운영자님도 분명히 일본을 향한 하나님의 눈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역시 조용기 목사님이 그렇게 말을 했다면 거의 유사한 반응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이든, 경고이든, 눈물이든 그 어떠한 것도 우리는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훗날 천국 가서 한번 여쭤볼 수밖에요."

상기에 인용한 김성진님의 댓글도 정확하고 온당합니다. 조목사님의 사회적 위상 때문에 어떤 표현을 했든 간에, 저처럼 하나님의 눈물이었다고 해도, 결국은 하나님이 벌 준 것으로 해석되기에 세간의 비난을 받기 마련입니다. 제가 글을 쓰면서도 내용적으로는 조 목사님과 같은 말이 된다는 것도 사실은 이미 염두에 두었습니다.

그럼에도 조 목사님은 당신의 그런 위치 때문에라도 조금 더 신중한 표현법을 사용했어야 했다는 뜻입니다. 물론 아무리 신중해도 또 다른 반발은 나올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대학입시에 떨어진 이웃집 아이의 비유를 들면서 자기 아들은 야단쳐도 된다고 했고 또 요나의 잘못에 비춘 것입니다. 예컨대 "이런 엄청난 재앙이 일어날수록 한국교회와 교인들더러 더욱 겸손히 회개하라는 하나님의 메시지로 받기에 일본을 돕는 일에 신자들부터 앞장서자"라고 말했다면 그 후의 상황전개는 지금과는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저로서도 조목사님의 그런 발언이 없었다면 칼럼의 내용을 요나의 회개에만 초점을 맞췄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왕에 그런 발언이 나와서 큰 논쟁거리가 되었으니, 원칙적인 면에선 옳은 말이지만, 일본과 비기독교인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잘못된 방식이었다는 경종은 울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많은 한국 교회가 교인들을 어떻게 오도하고 있습니까? 일본의 방사능이 한국에 오게 하지 말라고 기도합니다. 말하자면 바람이 동쪽으로만 불어달라는 것입니다. 그럼 미국 서해안에 있는 이민 교회들은 또 미국을 방사능에서 지켜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는 또 바람이 서쪽으로 불어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왕이면 바람이 일본에서 맴돌아 일본사람만 죽게 해달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럼 하나님이 대체 어느 쪽 기도를 들어주어야 합니까? 더 뜨겁고 더 오래 더 많은 사람이 기도한 쪽을 응답해주어야 합니까? 물론 바람이 북쪽이나 남쪽으로 불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든지 사람이 사는 곳은 있게 마련입니다. 결국은 다른 사람들이 죽는 것은 내가 알 바 아니니 나만 살려달라고 기도하는 꼴입니다.

약간은 극단적 예이긴 하지만 한국 교회들이 가르치는 내용이 실제로 이와 비슷하고 또 그런 내용을 외부에서 누가 봐도 빤히 알 수 있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니까 교회 외부에서 조목사님의 발언의 진의를 알아보거나 들어볼 생각도 않고 무조건 개독교란 비난을 퍼붓는 것입니다. 작금 세상은 기독교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게 되었고, 기독교는 해명의 기회조차 허용되지 않는 형국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 경고, 눈물은 같은 것이다.    

"지구 반대편은 나라의 운명이 걸린 일로 사투 중인데 지극히 개인적인 고민도 내려놓기가 힘이 듭니다.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에 나에게 적합하기 때문에 붙잡고 있는 다는 것에 한계가 온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쌀로별님의 참으로 진솔한 고백입니다. 이런 엄청난 재앙 앞에서, 어쩌면 종말이 다가오는 것은 아닌지, 과연 이런 때에 신자로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제대로 감조차 잡히지 않는 우리 모두의 심경을 대변해 주는 것 같습니다.

우선 김성진님의 말씀부터 참고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이든, 경고이든, 눈물이든 그 어떠한 것도 우리는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훗날 천국 가서 한번 여쭤볼 수밖에요."

자연적 재앙이나 개인적 환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선 아무리 믿음이 좋고 신령한 자라도 정확히 모릅니다. 그 이유는 누차 말씀드린 대로 죄마다 일일이 벌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욥의 경우 같이 영적으로 심오한 의미가 있는 경우는 더 그러합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징벌이 없다거나 그분이 징벌하시는 원리까지 모른다는 뜻은 아닙니다. 신구약 성경을 종합적으로 판단하고 십자가 복음과 연계시키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원리를 현실 사건과 상황에 일일이 적용해서 하나님의 징계, 경고, 눈물 중에 무엇인지는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천국 가서야 알 수 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오히려 구체적인 의미는 알려할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욥기가 말하는 바입니다. 또 다시 이 부분에서 주의할 것은 신자가 그런 일을 당해도 아무 것도 아닌 양 무심하게 넘기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성경에 비추어 기도하면서 묵상해야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몰라도 최소한 자신의 각성과 회개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님의 징계가 바로 그분의 경고이자 눈물입니다. 이 셋을 구분해서 이해, 적용할 이유가 사실상 없습니다. 비유컨대 잘못한 자식을 초달할 때에, 분명히 그 안에는 아비의 징계와 경고와 눈물의 뜻이 다 포함된 것이지 않습니까? 또 그 전체를 아우르는 자식을 향한 아비의 본심도 재앙이 아닌 구원 즉, 사랑입니다.

반면에 그 징계를 실제로 당하는 자의 입장에선 어느 한 쪽을 더 강하게는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도 때로는 한 쪽이 더 강조되어지는 모습으로 벌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어떤 특정한 사건을 두고 셋 중에 하나가 더 강조되었다고 정확하게 구분 지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징계, 경고, 눈물은 사실상 동일한 하나의 벌에 포함되는 세 가지 측면일 뿐 아니라 부정적 의미에서 긍정적 의미로 발전되는 표현입니다. 따라서 모든 자연적 재앙과 개인적 환난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벌이라고 보는 기독교인의 입장에선, 대외적으로 꼭 그런 뜻을 표명해야 한다면 가장 긍정적 표현인 그분의 눈물 내지 사랑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심판과 징계를 구분하라.
    
신자가 정작 주목해야할 구분은 심판과 징계의 관계입니다. 심판은 영원한 운명을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징계는 이 땅에서 사람의 생명이 붙어 있는 중에 받는 벌입니다. 다른 말로 심판에는 "영원한", 징계에는 "일시적"이라는 수식어가 자동으로 따라다닌다는 것입니다.

심판의 가름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받아들였느냐 아니냐에 달렸습니다. 불신자가 끝까지 예수를 안 믿으면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반면에 신자는 이미 영원한 심판은 면제되고 이 땅에서 취소되지 않는 구원을 확보한 것입니다.

불신자에게 닥치는 죽음 외의 환난과 재앙은 여전히 회개에의 촉구라는 의미가 있으므로 징계입니다. 구원으로의 초대입니다. 그러나 이미 믿은 신자로선 구원 여부는 전혀 걱정할 것 없으니 더 거룩해지고 더 주님께 순종하라는, 다른 말로 훈련과 교육의 의미입니다. 바꿔 말해 징계란 누구를 대상으로 하든 하나님의 사랑에서 기인한다는 것입니다.  

이번 쓰나미에도 이런 세부적 구분 없이 "우상숭배 때문에 일본이 천벌을 받았다"고 단순히 말하니 교회 안팎에서 온갖 잡음과 충돌이 생기는 것입니다. 천벌이 심판과 징계를 다 포함해버렸습니다. 지진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리 지금은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인내와 자비 가운데 있기에 이런 징계를 통해서라도 구원으로 초대 받고 있다고 강조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수만의 사망자가 나왔지만 그 가운데 누가 구원 받고 심판 받았는지는 정말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예수를 믿은 사람이 숫자적으로 아주 적어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또 그 모두는 이미 영원한 피안으로 옮겨졌기에 아직 살아있는 우리의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겐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져 있고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는데 이미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을 인간이 좌우는커녕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기독교적으로도 고려할 세부적인 사항들이 있음에도 한마디로 일본이 천벌을 받았다고 하면 일본인 전체가 영원한 심판 받은 것처럼 오해 받을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로선 마치 자기들은 지옥의 벌을 받아 마땅하며, 기독교인들은 천국의 상을 받을 자격이 넘치는 것 같은 너무나 큰 교만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런 오해를 예방하고자 일일이 구분해서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기독교 신학강의가 되어버립니다. 또 그런다고 불신자들이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징계이더라도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종교적 판단을 내려선 안 되며 진정어린 위로와 도움만 전해주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도 그것만 절실한 것입니다. 또 그래야만 나중에 그들에게 전도할 때에 그 마음 문을 쉽게 열 수 있는 것입니다.

심판과 징계의 구분을 정확히 하라는 것은 신자에겐 이 땅에선 더 이상 심판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들어온 자는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이 없습니다. 비록 징계는 있을지언정, 그것도 사랑의 매일 뿐입니다.

다른 말로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열심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당장 내일 심판이 이른다면 모든 일을 뒷전으로 한 채 전도부터 해야겠지만 문제는 당장 내일 심판이 이를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신자는 언제 어디서나 깨어서 기도와 말씀에 충실하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준 일과 처하게 한 그 환경에서 작은 일과 작은 자에게 충성하면 됩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잘 하는 일부터 열심히 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 되었던 그 일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만 드러내면 됩니다. 신자답게 살면서 자신의 바뀐 존재와 삶의 모습으로, 또 기회가 닿는 대로 말로서 복음을 증거하면 됩니다.  

이번의 재앙의 규모가 엄청나도 아직은 종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의 크기는 이번 재앙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대합니다. 종말은 배도하는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대환난을 겪은 후에 마귀를 결박하여 영원히 심판하러 예수님이 오셔야만 이뤄집니다. 처처에 지진이 일어나도 마지막 때가 아니라 그 징조일 뿐입니다.

이런 때에 세상 사람은 불안에 떨어도 신자는 결코 흔들려선 안 됩니다. 또 종말이 막상 오늘 닥쳐도 불안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복음 안에 들어온 자는 벌써 심판에서 완전히 면제되었고 영원한 영광으로 구원이 완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보다 더한 쓰나미가  닥쳐도 일상적인 여건에서 감사, 기쁨, 의미가 더 넘치는 생활을 활기차게 영위하면서 불신자들에게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고 있음을 확실히 보여 주어야 합니다.  

3/17/2011

운영자

2011.03.18 14:46:28
*.108.161.206

글을 다 써놓고 보니 자칫 오해하실 것 같아 보충합니다.
범사를 하나님께서 주관한다고 해서
혹시라도 모든 환난과 재앙이 마치 하나님의 책임인양 탓하면 안 됩니다.
징계란 경고와 눈물이 담긴 사랑이므로 오히려 우리를 잘 되게 하려는 것이지 않습니까?
자식이 잘못해서 부모에게 야단맞으면서 부모 탓이라는 것은 말도 안 되듯이 말입니다.

다른 말로 범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시더라도
인간에게 100% 책임이 돌아가는 환난이나 재앙도 많다는 것입니다.
건강관리를 못했다, 사업 계획에 정보 부족과 욕심이 앞서 망했다,
이번에도 일본 정부와 도꾜전력이 돈을 아끼고 자존심 세우려다
원전 피해를 눈덩이처럼 키운 것 등은 순전히 100% 인재입니다.

그럼에도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묵인 허용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직접적 징벌로 직접적 경계의 뜻이 아니라
간접적 징벌로 간접적 경계의 뜻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그 전에 인간에게 하나님이 허락하신 높은 지성으로 인해
인간은 믿음과 상관없이 스스로 자기 잘못인줄 깨닫게 됩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은혜인줄 알고 겸손해지고 감사해야 함에도
인간은 자기가 잘난 줄 착각하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쳐든다는 것입니다.

신자들더러 무조건 모든 환난을, 즉 인간이 100% 잘못한 일까지도
하나님이 "주신" 벌이라고 생각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대신에 모든 일을, 특별히 힘들고 어수선한 일일수록
하나님의 관점에서 바라보아 더욱 겸손해지며
오직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며 성령의 인도에 따라 그리스도를 닮아 자라가며
불신 세상 앞에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를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샬롬!

정양호

2011.03.19 11:24:23
*.25.255.195

* 이글은 인도네시아 쓰나미때 끈 글인데 좀 길고 신학적인 측면에서 조명한 글인데 참고로 올립니다.

쓰나미의 신음 소리
- 그리스도인, 환경문제를 어떻게 볼 것인가?

수도 시설이 되어 있지 않은 우리 농장 식구들은 하나님이 틈틈이 내려주시는 빗물을 먹고 산다.
냇물이나 지하수를 끌어 빨래도 하고 가축도 먹이고 채소도 가꾼다.
비교적 환경오염이 덜된 이곳은 빗물이 아주 맛있는 음료로 취급된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아마 놀랄 것이다.

환경문제는 왜, 어디에서 발생하는가

얼마 전 이곳 신문은 아시아의 몇몇 공업화된 나라의 환경오염 실태를 꼬집으면서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야 한다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공업화가 안 된 아프리카나 아시아의 몇몇 나라를 가보면 꼭 공업화 문제만이 환경 문제의 요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환경오염과 생태계의 파괴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심각하게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학자들은 환경 문제의 원인을 토지 이용 증대로 인한 생태계의 파괴, 에너지 수요증대로 인한 대기오염의 증대, 수자원 이용 증대에 따른 하천 수질오염,
유독화학물질의 사용증가, 폐기물 증가로 인한 해양 오염 등을 문제로 제기한다. 지구촌 전체로 볼 때는 오존층의 소멸로 대책이 없는 온실효과(溫室效果)와
제트기나 기타 항공기의 출현으로 많아진 구름 층과 대기오염에 의한 스모그 층으로 태양열이 차단되어 지구가 식고 있다는 양산효과(陽傘效果), 산성비, 국제분쟁,
지구를 초토화시키는 사막화 현상 등은 전혀 예측 불허의 처절한 현상을 몰고 올 것이라고 보고한다.

지난 해 어느 날 갑자기 불어 닥친 엘니뇨현상의 열풍으로 뜰에 심긴 채소가 불과 수분 만에 모두 타 죽어버렸다.
지난 연말에는 지구에서 일어나는 자연재해의 역사에 남을 끔찍한 쓰나미 재앙이 동·서남아시아 해변의 모든 것을 앗아갔다.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자연환경의 문제는 이제 먼 뉴스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의 문제로 가까이 다가와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런 자연환경 문제에 대해 어떤 눈으로 읽고 해석해야 하며,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그 통찰력을 갖는 것은 무척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환경문제와 관련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환경문제가 어디에서, 왜 발생했느냐다.

미국의 역사학자 린 화이트(L.White)는 "만일 우리가 자연환경이 인간에게 이바지하는 것 외에 아무런 존재 이유가 없다는
기독교 원리를 배제하지 않는 한 생태계의 위기는 계속해서 악화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기술 문명은 정통 기독교의 오만함으로
너무 물들어 있기 때문에 생태계의 위기에 대해 아무런 해결책을 기대 할 수 없다"(F.A.Schaeffer. "Pollution & The Death of Man").
이 말은 기독교 사상이 환경오염의 주범임으로 기독교, 즉 성경 사상을 없애지 않고는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무서운 논리가 숨어 있다.

동국대 오홍석 교수는 "기존의 기독교적 자연관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 없이 환경문제 해결 운운하는 것은 하나의 시도일 뿐 동양의
고대 종교에서 지혜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고 강조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동양사상이 환경 문제에 대안이 될 수 있는가?

불교는 모든 존재가 절대적 자기 실체가 없다고 봄으로 끝없이 변화하는 과정을 전제한다. 이 논리는 윤회설(輪廻說), 업보설(業報說),
연기론(緣起論)을 낳고 이세상의 모든 존재가 상호관련성이 있음을 중시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불살생(不殺生)을 으뜸으로 나뭇잎 하나도 따지 않고
곤충 하나라도 밟아 죽이지 않는 것을 행동강령으로 한다.

도교의 환경관은 반대되는 현상을 향해 움직이는 것으로 보고,
동적인 것에서 정적인 것으로, 정적인 것은 다시 동적인 것으로 반복·순환하는 것으로 믿는다.

유교의 환경관은 음, 양, 선, 악과 같은 사물의 대립물 또는 비교개념 속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자연과 인간, 개발과 보전 등 대립관계가 있음으로 균형이 깨질 경우 다른 한편에 결정적인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자연이란 문자 그대로 스스로 존재하는 것으로 신을 대하듯 자연을 경외(敬畏)할 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비교적 유불선(儒佛仙)이 융성하는 아시아권에 있는 몇몇 나라들에는 환경문제에 초연한가?
환경오염의 예는 수도 없이 많다. 동양사상이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 말씀의 불순종으로 그에게 맡겨진 아름다운 정원을 빈민굴로 만들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문제는 하나님께 있지 않고 사람에게 있다. 겉이 아닌 속이다.

불교 철학에서는 존재론(存在論)과 생성론(生成論)이 같은 것으로 본다.
예를 들면 강, 산, 개, 소나무, 지렁이, 사람까지도 형태는 달라도 존재는 같다고 믿는다.
그리고 형태는 변해도 존재는 영원하다는 윤회설을 뒷받침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란 한갓 자연의 한 파편에 불과하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덧없는 인생에게 자연환경을 돌보고 개발하고 가꾸는 청지기 사명을 기대하기란 힘든 일이다.

항간에 제임스러브럭의 가이아(Gaea) 이론이 환경문제의 대안이라고 떠들고 있다.
그 명칭이 암시하듯 'Gaea'(그리스의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이론은 이 지구의 생태계를 하나의 신적 실체로 본다.
생태계가 환경에 맞추어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생물들이 생태계를 능동적으로 유지하는 방향으로 환경을 조성하는데 그것 자체로 보아 지구가 살아 있는 증거라고 한다.

지구는 하나의 신이요, 숭배대상이기 때문에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는 인식인데 단적으로 샤머니즘이나 범신론(汎神論)의 정체다.
여기서는 자연 환경이 거대한 주체가 되고 인간은 그 사이에 끼인 힘없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상당히 낙관적인 견해 같지만 인간이 주체성을 상실한 상태에서 누가 환경문제의 책임을 질 것인가 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천주교의 김수환 추기경은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길"이라고 한 적이 있다.
한편으로 일리가 있지만 범신론(汎神論)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민중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성, 인격성을 거부하고, 사랑의 한 실천 또는 한 이데올로기로서의 존재방식을 선택한다.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기독교와 다른 종교의 구별도 거절한다.
결국 자유주의신학은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와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의 차이를 간과하고
혼합주의 양상을 띠므로 다른 종교의 주장과 맥락을 같이 한다.

생태중심주의자(biocentrist)인 프란시스 쉐퍼(F.A.Schaeffer)는 "기독교라고 해서 무조건 해답을 제시할 수 없다.
일종의 플라톤적인 사고인 이분설에 기초하고 있는 기독교는 자연 환경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칼빈주의자들은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어 천국에 들어가지 않음으로 가혹하게 다루어도 된다는 왜곡된 생각을 갖고 있다.
창조된 만물은 모두 경이로움과 경외심과 진정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집에 우글거리는 개미떼를 없애는 것도 개미까지도 존중히 여기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망각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지지 않았을 뿐 창조에 관한 한 인간과 동등하다"고 주장한다.

도대체 우리의 입맛을 돋구어주는 각종 고기류, 온갖 생선류, 나물류는 어떻게 고상하게 다루어져 식탁을 장식해야 할 것인지 또는 말 것인지 상당히 헷갈린다.
쉐퍼는 동양사상과는 달리 하나님과 인간과는 분리, 인간과 자연과는 동등이라는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나 색깔은 대동소이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성경은 자연환경이라는 독자적인 가치보다는 인간을 위한 봉사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그 의의가 있음을 말한다(창 1:29,9:3,시 96).
일찍이 예수님은 사람의 목숨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셨고(마 6:3,16:26~27), 생선숯불구이요리(요 21;9), 돼지떼 몰사사건(마 8:26~34) 등을 통해
인간과 자연을 동등시하려는 그 어떤 시도에도 쐐기를 박으셨다.

이와 같이 환경문제를 빙자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깎아 내리려는 반성경적, 비복음적, 비인간적인 논리를 경계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성화의 과정에서 청지기 사명을 잊고 넘어지기도 하고, 무감각하게 자연환경을 남용하는 태도는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피 값으로 구속 받은 그리스도인의 가치를 평가절하(平價切下)하는 것은 성경이 용납하지 않는다.
지구촌의 환경문제에 창조주이신 우리 주님의 공간이 없음을 개탄한다.

누가 환경문제의 답을 줄 수 있는가

어느 날 신문 일면에 'One time, Good friend'라는 기사가 눈길을 끌었다.
이탈리아의 한 동물 애호가는 각종 동물을 좋아하고 기르는데 어느 날 자기가 사랑하던 사자가 밥을 주던 자기 주인을 잡아 먹어버렸단다.
아마 먹혀 주었을지도 모른다.

최근 이곳 시에서 운영하는 동물원에서 장난을 하던 한 사람이 호랑이의 먹이가 된 웃지 못 할 사건이 있었다.
이 나라의 아름다운 해변에서 윈드써핑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한 해 한두 명씩은 상어의 밥으로 사라져도 파도타기는 멈출 줄 모른다.
케이프타운의 유명한 관광지인 Hot Bay 물개 섬에는 수백 마리의 물개들이 살고 있다. 물개들이 얼마나 많은 배설물을 생산하는지 그 특유의 냄새가 주변을 진동한다.
케냐에서는 코끼리 수렵을 금지시킨 이래로 그 수가 불어나 농작물에 막대한 피해를 준다고 한다. 아프리카의 바퀴벌레는 얼마나 정력이 센지 날아다니면서 괴롭힌다.

남미가 원산(原産)인 붉은 불개미는 떼 지어 몰려다니며 중국, 홍콩에까지 확산되어 곡식은 물론 사람까지 위협하는 ‘육지발 쓰나미’라고 전한다.
요즘 메뚜기떼의 공격, 사람을 해치는 개구리 등도 보통이 넘는다. 특히 이곳의 달팽이는 인정사정없이 채소를 먹어댄다.

누군가 적자생존(適者生存), 약육강식(弱肉强食)이라고 적절한 표현을 했다.
정원에 잡초를 깎고 있는데 우리 집 지붕에 몰래 들어와 살고 있는 벌떼의 공격으로 때 아닌 벌침을 강제로 맞아야만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프리카의 마라라리아를 전염시키는 모기는 생명을 위협한다.
사람의 피부에서부터 몸속의 피까지 온통 이름도 알 수 없는 가지가지 병균은 쉴 사이 없이 생명을 앗아가고 가차 없이 분해시켜버린다.
과학자들은 21세기에 에이즈 같은 것보다 더 센 병이 등장하여 사람을 괴롭힐 가능성이 있다고 예견한다.

지난 해 처음으로 옥수수를 꽤 많이 심어 잔뜩 기대를 갖고 자라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 익어 갈 무렵 원숭이 떼가 몰래 훔쳐 가기 시작하더니 다 가지고 가버렸다.
상당히 감미로운 맛이 나는 구화바, 뽀뽀는 새들이 먹기 전 서둘러 수확하든지, 보호망을 쳐야 조금은 건진다. 맛있는 과일을 먹고 사는 새들은 허수아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어떤 분들은 기도하면 벌레도 없이 무공해 식품을 가꿀 수 있다는 데 워낙 기도 약발이 약해서인지 배추 흰나비만 보면 농약을 하든지 아니면 조기 수확을 서둘러야 한다.
교실 안에 갇혀있는 실험 관찰용 화분에 거름을 준 것과 안준 것, 햇빛을 받는 것과 안 받는 것 등 비교 관찰을 할 때도 예외 없이, 예고 없이 병충해는 달려들었다.
채소를 심기 위해 밭을 갈고 잡초를 제거하면 씨앗을 심기도 전에 원치 않은 잡초는 금세 잡초 밭을 이룬다.

아무리 생명의 외경을 외치는 시바이처 같은 사람이라도 독사에 물려 사경(死境)을 헤매면 "독사님,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아직 배가 부르고 어쩌다 사지가 멀쩡하여 하나님의 은혜인지 알지 못하고 창조주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큰소리치는 인생에게는 구구하게 다른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성경은 환경문제에 대해서 공업발전이니, 에너지 사용 증대 같은 피상적인 데서 원인을 찾지 않는다.
성경은 "내가(하나님)… 땅은 너를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창 3:17,18)라고 했다. 농사를 한번이라도 지어 보신 분은 이 말씀에 실감을 하게 된다.

우리 농장의 한 부분은 아프리카 특유의 가시나무 숲이 있다. 울타리를 뚫고 도망친 염소를 찾다가 이 가시나무들의 거센 항의에 두 손 들고 말았었다.
그래서 이것들은 도적을 막는 울타리용으로 적격이요, 양고기 바비큐를 할 때 불탐이 좋아 땔감으로 안성맞춤이다.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는 창조주의 명령에 가(氏)와 엉(氏)은 그때 이후로 즉각 순종에 착수하여 온 산야를 덮어버릴 기세다.
죄로 인한 하나님과의 부조화는 인간과 인간 사이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부조화를 가져왔다.
지구촌의 어느 인생, 어느 사상, 종교에서도 이 환경 문제의 해답을 기대 할 수 없다.
오직 ‘내가"(창 3:17)라고 말씀하신 창조주 하나님 자신만이 할 수 있다.
그의 구속의 손길만이 환경문제의 실마리를 풀수 있다.

환경문제에 접근하는 세계관들

학문적으로 대개 세 관점에서 환경문제에 접근한다.
생태중심주의(biocentrism)는 유불선이나 이방종교 등에서 볼 수 있는 자연중심주의 이론으로 범신론적 세계관이다.
다른 하나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인데 하나님의 역할을 배제시키고 문예부흥과 산업혁명 등 인간이 이룩한 현대 과학문명의 가능성에 무게중심을 두는 경우로 인본주의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범죄한 아담이후 피조세계는 그 어떤 화려한 이론이 등장한다 해도 실제에서 그 무능력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중심주의(theocentrism)로 개혁주의 세계관에서 접근하는 경우인데 성경적인 환경관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 중심 세계관은 동양사상처럼 음과 양, 선과 악 등의 대결구조로 파악하지 않고, 인격적 하나님이 절대 주권적 행사를 하시는 활동의 장(場)으로 본다.
따라서 어떤 악의 현존과 세력도 하나님의 주권에 감히 도전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대한 이해는 필연적으로 피조물에 대한 긍정으로 연결되고, 자연은 아름다운 것이며 거기에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과 신성이 드러난다.
모든 자연 환경은 하나님의 소유이고 그의 선의(善意)의 결과임으로 세상에는 본질적으로 추하거나 속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활동은 가치 있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세계관의 확신이다.
이러한 긍정적인 확신은 선하게 창조된 세계를 관리해야 할 선한 청지기이라는 적극적인 태도를 일으킨다.

한편 어린 아이들이 실수하여 그릇을 깨었을 때 부모가 능력이 없는 자녀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것처럼
성경은 택자(chosen people)를 위한 구속의 특별 은총 외에 모든 피조물에게 일반은총(common grace)을 선물로 주셨다고 말한다.
만약 타락 후에 창조주가 이 은혜를 발동하지 않으셨다면 만물은 죄의 부패속성(腐敗 屬性)에 의해, 또는 하나님의 진노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을 것이다.
본래 인간은 피조물을 다스리고 관리할 책임적 존재였기 때문에 인간의 타락은 곧 피조물인 자연환경의 부패와 타락을 가져왔다.
구원문제에서 인간의 공로나 의지를 완전히 부인하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자연환경의 회복, 창조질서 보존도 예외가 아니다.
금세기 산업의 고도 성장과정에서 환경과 개발의 조화를 무시하고 당장 눈앞의 물질만을 추구하면서 수질, 해양, 공기가 오염되어 고통의 맛을 본 후에야 비로소 환경 윤리에 눈을 뜨게 되었다.

개혁주의 윤리관은 궁극적인 선 자체이신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인간의 인격적인 순종으로 믿는다.
따라서 기독교 윤리의 모든 표준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상황윤리(狀況 倫理)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려주신 절대윤리(絶對倫理)이며 그것을 만족시키며 살 수 있는 힘도 그분이 내려 주심을 믿는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삶의 초점이 하나님 중심이듯 소위 환경 윤리의 초점도 역시 하나님 중심이다.

언젠가 소비자 보호원에서 100% 국산 콩으로 만든 두부에 유전자변형(GM) 성분이 검출됐다는 지적에 국내 굴지의 식품회사인 풀무원은 "성분 분석조사에 문제가 있다.
사실 무근이다"로 큰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과거에 고춧가루에 톱밥을 섞어 물감을 들여 판매하다 적발된 상인도 있었고, 참기름에 물을 섞어 순참기름이라 하여 팔기도 하고, 오징어나 쥐포에 방부제를 많이 써서 뭘 아는 사람들은 아예 먹질 않는단다. 공장 폐수 정화 시설을 하지 않고 유독 화학 물질을 방류하여 고기 떼가 몰살을 함에도 전혀 양심에 꺼림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공장 굴뚝, 자동차의 매연이 새까맣게 올라가 마음대로 창밖에 빨래를 널 수 없게 되었다.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에는 뿌연 스모그 현상으로 태양을 거의 볼 수 없는 지경이 와도 무감각이다.
왜 그럴까? 환경문제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일까? 아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눈먼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상황 속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시고 지켜보시는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환경문제에 사실 어떤 면에서 걱정할 자격이 없다. 그래도 신전(神殿, 하나님 앞)사상으로 무장된 참 그리스도인 때문에 소망이 있다.

환경문제에서 그 뿌리를 찾아내어 처방해야 한다

환경문제의 첨예한 이슈로 등장하는 성경은 창세기 1장 28절이다. 이것을 소위 문화명령(Cultural mandate)이라 부른다. 이 말씀의 문맥적 성찰을 통해 문제에 대한 힌트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의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절대 명령에 인간은 절대 순종을 조건으로 한 생명과 축복의 선언임을 기억해야 한다.

박윤선은 "인간으로 말미암아 자연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과 만물을 지배함으로 자연계에 얽매이거나 섬기지 않고 하나님께 더욱 가까워지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카일 델리취는 "하나님은 땅 자체 뿐만 아니라 동식물계를 다스리는 지상권, 정복능력, 통치권을 주셨다"고 했다. 칼빈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부성적(父性的) 돌보심이 인간의 모든 필요를 준비해주시고 "그러므로 너희는 나를 너희 아버지로 인정하라. 너희를 위해 내가 마련한 것을 양육하는 것은 모두 너희의 일이다. 그러나 나 자신도 책임을 지고 있다"고 적절한 예로 표현하였다.

메튜헨리는 "인간의 위치와 권위의 관계로 본다. 인간이 비록 준비한 것이 없는데도 피조물을 다스릴 권세를 부여 받음으로 땅위의 하나님의 대리자가 되었다. 하등 피조물에게는 인간을 두려워하고 섬기는 본능을 주었다. 이와 같이 인간에게 면류관을 씌우신 것은 더욱더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의무를 강하게 깨닫도록 하시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주영흠 교수는 "생육하라"(Be fruitful)는 열매를 생산하라는 뜻인데 식물성, 동물성 열매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부모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구비한 열매를 생산하라는 말씀이다(창 1:11,22,시 127:). 그러나 축복의 열매가 심각한 인구폭발(물)로 돌변한 것은 불순종의 산물이다. "번성하라"(Become many)는 말씀은 의인의 양적인 증가, 의인의 기도, 지식의 확대 등도 이에 해당한다(잠 29:2, 단 2:4, 왕상 4:30, 삼상 1:12). 그러나 불의가 증가하면 심판하신다(신 11:).

"땅에 충만하라"fill).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찬송의 열매가 충만할 것을 선언하심이다(사 11:9,29:6,창 3:3,단 2:35, 합 3:3). 그러나 포악이 충만할 때 하나님은 심판하신다(창 6:13). "땅을 정복하라"(subdue) 하나님 앞에 순종하게 하라는 말씀이다(슥 9:15, 수 18:1, 대하 22:18, 미 7:19, 렘 34:11,16,). 그러나 동족을 짓밟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govern)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스리라는 뜻이다(잠 12:10, 시 72:8, 민 24:19, 레 25:43,53) 그러나 죄(사탄까지도)를 다스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따른다(창 3:, 4:7)는 좀 특이한 강해를 하였다.

요컨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에게 문화 명령을 주신 것은 땅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처럼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시 8:6) 인간은 스스로 개척하고 자기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한 청지기 명령을 받고 사는 존재이다. 그 이유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여호와의 것이기 때문이다.(시 24:1) 그분의 땅에서, 그분의 뜻을 따라, 그분의 청지기로 살아간다는 이런 원칙에서만 참된 문화가 꽃이 피게 된다.

자연환경의 문제는 본질적으로 영적인 환경에서 그 뿌리를 찾아내어 처방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은 죄요, 죄에 대한 그분의 심판은 우리가 깨닫든지, 알지 못하든지 역사 속에서 지금도 여러 양태로 계속 진행되고 있다.
오늘의 환경문제가 아무리 시끄러워도 창조 시 주셨던 하나님의 명령은 취소하거나 철회(撤回)를 선언한 적이 없으시므로 청지기로서 소명(召命)과 사명(使命)도 여전히 유효하다.
하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구체적으로 그분 자신이 직접 책임을 짊어지셨다.
실로 문화적인 사명은 하나님이 마련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재창조(再創造)위에서 비로소 밝은 빛을 보게 된다.

환경문제는 구속사 성취의 한 수단

최근 이곳저곳에서 지진이 일어나 많은 피해가 일어나고 있다. 우리나라는 매년 태풍으로 많은 손실을 가져온다. 태풍이 인간 편에서 보면 대개 부정적인 일면만 보기 쉽다. 진공청소기로 청소를 하면서 하나님의 진공청소기인 태풍을 생각해본다. 그 엄청난 위력으로 휘젓지 아니하면 지구촌의 어마어마한 오물 쓰레기, 유조선에서 흘린 기름 덩어리 등 청소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데 하나님 자신이 그의 전체 지구를 관리하는 도구로 그런 것을 사용하시는지 모른다.

과학자들은 동·서남아시아의 쓰나미에 대해 "지진해일은 싱싱하고 살기 좋은 지구를 만들기 위해 쉼 없이 계속되는 지각의 재생 작업에서 파생되는 불가피한 부작용이다. 이 결과 강의 풍부한 퇴적물을 해변 평야로 운반해 토양을 비옥하게 한다. 앞으로 수십 년간 최대 피해 지역인 해안 지방에 환경적인 혜택을 줄 수 있다"고 평가를 하고 있다.

영국의 옥스포드대 연구진은 지구 온난화가 예상보다 훨씬 심각해 온실가스 방출량이 줄어들지 않으면 금세기 중반까지 지구 기온이 최저 섭씨 1.9도에서 최고 섭씨 11.5도나 높아질 수 있는 것이라는 대규모 컴퓨터 모델 실험 결과가 ‘네이처’ 2005년 최신호에 발표됐다. 지난 달 북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에 27년 만에 폭설이 내렸고 유럽과 북아프리카에서 이상기온으로 큰 혼란이 벌어지고 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많은 연구팀이 남극대륙의 해빙을 주시하고 있는데 남극의 대륙빙들이 급속히 녹고 있으며, 1995년과 2002년에는 기후온난화로 남극반도에 있는 거대한 빙붕들이 떨어져 나왔다고 보고한다. 남극대륙의 해빙이 본격화되면 난리의 소문은 지구촌의 일상뉴스가 될 것이라고 한다.

지난 해 12월 7일부터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유엔 기후변화협약 제10차 당사국총회에서는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을 지적하는 충격적인 보고서들이 잇따라 발표됐다. 결국 총체적인 위기 상황에 놓인 지구촌의 환경문제는 지구의 종말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 관점이 다르나 아무튼 환경문제가 결국은 지구촌 환경의 종말을 향해 달리고 있음에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결론적으로, 성경의 환경관은 창조(創造),타락(墮落),구속(救贖)이라는 세계관에 입각하여 구약의 문화명령(Cultural Mandate)과 신약의 복음위임령(Gospel Mandate,마28:19-20)의 두 수레바퀴가 동일선상에서 종말의 완전 성취를 향해 달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일반은총으로 허락하신 자연환경을 악용 내지는 남용은 죄요, 그 결과는 여러 형태의 자연재앙이라는 이름표를 단 하나님의 섭리로 보아야 한다. 자연환경 파괴의 모습은 바로 우리의 영적인 모습이 얼마나 일그러져 있는지 보여주는 거울일 수 있다. 영적으로 눈이 먼 세상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보이는 자연환경이라면,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자연환경과 함께 영적 환경문제까지도 동시에 읽어야 한다는 것이 복음 위임령(great commission)이다. 환경문제의 진행도, 해결도 하나님의 처방인 성경 앞에 솔직하고 겸손하게 설 때만 바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환경문제는 구속사 성취의 한 수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 인간, 자연이라고 하는 구별과 질서를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순서가 뒤바뀌게 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숭배가 된다. 그런 면에서 요즘 우상숭배하는 자들이 각종 논리로 기독교의 실패한 하나님이라고 아무리 난도질해도 여전히 우리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창조, 질서, 보존의 주체자로 전혀 이상 없이 일하고 계심을 믿는다(사 40:28,계 21:).

그리스도인의 현실 참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환경이든, 자연 환경이든 정치, 교육환경이든 삶의 전 영역에서 청지기 사명완수 여부는 신자의 상급에 관계한다. 그리스도인이 가진 윤리는 최고 최상의 윤리인데 불신자에게 손가락질당한다면 회개해야 한다. 자연보호운동이니 국토대청소, 쓰레기분리수거, 음식 쓰레기 분리배출 등 환경 보호를 위한 정부의 불편감수 운동이나 재난의 충격 속에 터전을 잃어버린 이웃을 향해 긴급구호활동 같은 현실참여에서도 솔선수범하여 적극 수용, 참여, 선도(先導)해야 한다. 그런 사랑의 필드를 통해 복음전도의 문을 열고 영적 환경을 효과적으로 정화 할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계속해서 인간의 죄로 인해 모든 자연환경이 부패조직(腐敗組織)에 연결되어 고통하고 있다고 말한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라"(롬 8:18~30). '비록 세상에서 힘없고 매력 없는 자들일지라도 환경문제 최상의 해결책으로 하나님 자녀들의 구원과 하나님나라의 회복이라'고 절규하는 쓰나미의 신음 소리에 우리는 자못 흥분해야 한다. 참 그리스도인이 더욱 그리운 시대이다.
(정양호, newsnjo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735 )

운영자

2011.03.19 15:10:47
*.108.161.206

정양호님
아주 좋은 자료를 또 올려주셨네요.
혹시 원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까?
가르쳐 주신 주소만으로는 전번처럼 접속이 잘 되지 않아서 그럽니다. ^^

정양호

2011.03.19 17:45:26
*.25.255.195

환경문제를 통해
기독교를 공격해오는 여러 상황을 보고 제가 쓴 글인데
성경적인 많은 논의와 아이디어로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습니다. 샬롬

쌀로별

2011.03.22 22:17:03
*.234.16.126

제가 예전에 건강문제로 채식 커뮤니티에 가입했던 적이 있었는데 고기와 조미료를 넣지 않고 요리하는 것 만큼 환경문제에 대해 매우 많은 글을 접하게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종교와 사상이 매우 깊게 관련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이 점에 대해서 막연하게 계속 궁금함으로 남아있었습니다. 좋은 글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알료샤

2012.11.15 02:17:33
*.111.7.238

아멘..귀한 말씀 감사합니다. 징계와 심판의 구별을 다시금 깨닫게 되네요. 평소 어렴풋 알던 지식을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재정립합니다. 주님의 크신 섭리와 은혜에 더욱 감사하는 저와 이 시대 그리스도인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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