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

조회 수 1223 추천 수 76 2005.08.25 00:52:56
건망증이 점점 심해진다. 그런 것 같다. 요즘엔 아내도 약간은 걱정스런 눈치다. 저러다 집이나 제대로 찾아 오려나, 제 마누라 얼굴은 알아 보려나.

오늘 아침에도 뭔가 골똘히 생각을 하면서 운전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잊어 버리기 전에 노트에 적어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노트와 연필을 손에 쥔 순간, 그 생각은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약 십 여 분간 붙들고 있던 거였는데. 참으로 펄쩍 뛸 일이지만, 이젠 익숙해졌다. 그렇게 사라진 생각이 어딘가에서 시간을 보내다 (다른 사람에게로 간 것은 아닐까?) 때가 되면 다시 돌아 오는 것을 번번이 경험한 터였다.

지난 번엔 아내 생일을 깜박해 크게 낭패를 당했던 적이 있다. 아내 생일은 공적으로는 2월 4일이나 실제는 2월 26일이다. 2월 26일은 토요일이었다. 한 주 전까지, 아니 그 며칠 전까지 아내의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토요일은 골프하는 날이기도 했다. 나는 티타임을 예약하면서 그 날이 아내의 생일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뇌의 사고 기능 중 조합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 한 날을 두 날로 달리 기억하고 있었다. 26일은 아내의 생일, 토요일 (역시 26일)은 아내와 골프하는 날. 그 날이 그날이라는 것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토요일이 왔다. (26일은 기억에서 사라졌다.) 아내를 대동하고 세 친구와 함께 즐겁게 골프를 치고난 후 헤어져  아내와 둘이 밖에서 식사하고 영화나 하나 보고들어 가자며 극장 앞에 갔다. (여전히 26일 아내 생일날은 내 기억에 없었으나 아내는 내가 자기 생일이라 그러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때 함께 골프쳤던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기 집에서 같이 저녁 먹자고. 아내는 썩 내켜하지는 않으면서도 거절하지는 않았다.

맛있게 저녁을 먹고 밤늦도록 즐겁게 얘기꽃을 피우며 시간을 보내는 내내 아내는 간간이 (나중에 되짚어 보니) 어딘가 서운한 모습이었음에도 난 눈치를 채지 못했다. 공교롭게도 와인에 마침 장미꽃까지 한 송이 곁들여져 아내는 또 한 번의 기대를 했다는데도, 난 그 기회를 놓치고는 집에 돌아가는 차 속에서 아내가 비감한 목소리로 "오늘이 내 생일이었어요"라고 말할 때까지 여전히 아내의 생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 난 일 년 동안의 모든 공로를 그 한 날 다 잃어 버렸다. 이렇게 억울할 데가 있나. 도대체 잊어 버릴 것이 따로 있지, 아니 어쩌자고 아내의 생일을, 그것도 결혼 후 첫 생일을 잊나 잊긴.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그날 아침 새벽기도 시간에 알려 주셨더라면 이런 황당한 일은 없었을 것을.

그로부터 약 사흘 간 난 지상 지옥을 경험했다. 난 이제 확실히 안다, 지옥이 어떤 곳인지를. 그곳은 하나님의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 공간이요 시간이다. 그곳은 이를 가는 후회만이 존재하는 곳이다. 자신의 어리석음과 실수의 무게에 짓눌리는 곳이다.

내년엔 아예 여러 친구들에게 부탁을 해 둘 참이다, 내 아내 생일 상기시켜 달라고.

아직도 사라진 오전의 생각은 여전히 돌아 오지 않고 있다. 혹시 내 생각 보신 분은 즉시 제게 연락 바란다.

8.24.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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