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2:12-14)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2)

구원 완성 담화 (3)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빌2:12-14)

 

성화의 핵심

 

신약성경이 구원을 설명할 때는 항상 하나님이 먼저 주시는 것이고 신자는 그것을 받기만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구원을 이루라고 신자 쪽의 능동적 행동을 요구하는 표현은 본문이 유일합니다. 신자가 능동적으로 행해야 하므로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칭의의 구원이 아니라 성화의 구원을 뜻합니다. 또 유일한 말씀이므로 하나님이 신자가 구원 이후에 행하여주기를 가장 바라며 가장 기뻐하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럼 과연 우리가 그렇게 실행하고 있는지 잘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신자들이 대체로 성화를 윤리적으로만 접근 이해 실현합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 도덕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대신에 선한 일들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물론 의로운 시도로 하나님도 분명히 기뻐하십니다. 그렇지만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믿음 없이도 각기 정도는 달라도 도덕적으로 착하게 살려고 노력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닮게 만드셨기에 비록 원죄로 타락했지만 그 흔적이 누구에게나 양심으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도 도덕적 성숙이라고 간단하게 이해하고 치웁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은 당연히 선하고 의로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선 안 될 중요한 사항은 주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라 윤리적으로 당신께서 스스로 성장 발전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당신의 온전한 선이 그대로 발현되는 것이라 인간이 닮을 수 있는 차원이 결코 아닙니다. 본문에서 구원을 이루라는 것도 그런 뜻이 아닙니다. 

 

결론인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14절)는 말씀부터 죄 없이 착하게 사는 것과는 조금 다른 뜻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모든 일에서 그래야 하니까 쉽게 바꾸면 범사에 다투지 말아야 하는데 너무 광범위하고 초보적인 뜻에 머뭅니다. 본문이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시작하므로 정작 구원을 어떻게 이룰지에 관해선 앞부분에 설명되어 있습니다. 

 

성화를 이뤄나갈 내용은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2:1)에 해당됩니다. ‘무슨 일이나’라고 포괄적 의미로 표현했으니 14절의 모든 일은 바로 1절의 일들을 다시 가리킨 것인데 그 내용도 앞의 3-5절을 간단히 요약한 것입니다. ‘무슨’과 ‘모든’이라는 형용사는 몇 사람에게 몇 번만 행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언제나 그렇게 행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또 과거의 일회적 구원인 칭의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의 구원인 성화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지금 권면, 위로, 교제, 긍휼, 자비 다섯을 성화의 핵심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는 참으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말씀입니다. 성경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깊이 교제함으로써 영적으로 정결하게 되어서 점점 죄를 짓지 않게 되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다섯 모두가 최소한 한 명 이상의 상대가 있어야 행할 수 있는 일들입니다. 사람들과 관계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모습으로 행하는 것을 성화의 본질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혼자서 경건해지려 노력하는 일은 반드시 다른 이에게 이 다섯을 행하기 위한 준비단계여야만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반쪽 성화로 그칩니다. 신자 본인에겐 좋을지 몰라도 하나님에겐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한지 살펴보기로 합시다. 

 

신자가 양보해야 한다. 

 

권면은 잘못하고 있는 사람에게 알아듣도록 타일러서 선한 일에 힘쓰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단순히 충고하는 것(advice)을 넘어서 힘과 용기를 심어주는 것(encourage)입니다. 원어에 자기 가까이로 부른다는 뜻이 있으므로 권면하는 본인부터 다른 이를 지도할 수 있을 정도로 윤리적 영적으로 성숙해져 있어야 합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으면 함부로 남에게 권면하지 말아야 하니까 개인적인 성숙은 결국 성화를 위한 준비여야 합니다. 

 

위로는 불행이나 고난 중에 힘들어서 슬퍼하는 자의 울음을 그치게 하고, 그 대신에 오히려 기쁨으로 채워서 새로운 힘을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만찬 때에 스승과 이별할 것을 슬퍼하며 자기들 앞날을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또 다른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시겠다고 하면서 그러는 것이 너희에게 더 유익하다고 약속했습니다.(요14장) 그 보혜사의 헬라 원어가 위로하는 자인데 권면과 같은 접두사가 사용되었기에 성령님도 항상 신자 바로 곁에서 위로해주는 분입니다. 신자는 그래서 힘들 때마다 기도하면 주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때로 너무 힘들어 기도할 힘조차 없으면 성령님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기도해주십니다. 그런 성령의 위로를 항상 받는 신자라면 당연히 주변에 고난이나 죄 중에 있는 이웃이 있으면 언제든 찾아가 진심으로 상대에게 가장 유익한 방향으로 권면하고 위로해주어야 합니다. 

 

교제는 개인적으로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도 음식을 나눠 먹으며 하나님을 찬양했던 그런 공동체적인 교제를 말합니다.(행2:44-47) 신자는 가장 먼저 말씀과 기도와 순종으로 삼위 하나님과 실제 삶에서 교제 동행해야 합니다. 그럼 자연히 성도나 이웃과도 권면과 위로를 주고받으며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습니다. 

 

긍휼과 자비는 거의 같은 뜻으로 성경에서도 서로 혼용되지만 조금 세밀히 구분할 필요는 있습니다. 먼저 긍휼은 비참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상태를 뜻합니다. 원어의 어근이 사람의 지라(비장)이므로 잠시 스쳐 지나가는 동정심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안타까이 여기는 마음을 항상 품고 있으면서 생각나는 대로 기도해주는 것입니다. 

 

자비(mercy)는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안타까이 여기는 마음은 긍휼과 같으나 아무 조건 없이 실제로 도와주는 것입니다. 특별히 자신에게 어떤 잘못을 범했어도 그에 따른 보상이나 형벌을 요구하지 않고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죽어 마땅한 우리를 대신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죗값을 감당하시고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주신 것이 자비입니다. 죄에 빠진 인간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인 긍휼이 자비라는 행동으로 실현된 것입니다. 

 

그런데 권면은 그리스도 안에서, 위로는 사랑으로, 교제는 성령으로 행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와 사랑과 성령은 사실상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와야 신자가 되고 또 그래야만 참사랑을 실천할 수 있고 나아가 신자는 무슨 일을 하든 성령의 인도를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성화 실패의 첫째 원인

 

문제는 다른 종교의 공동체에서도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서로를 잘 섬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희생 양보하며 다른 이에게 권면, 위로, 교제, 긍휼, 자비를 아주 의롭게 베풀어 줍니다. 솔직히 따지면 기독교가 가장 잘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심심찮게 신자들이 세상보다 더 파렴치한 불법을 행하고 서로 분열되어서 끝까지 싸우다 교회가 쪼개지며 목회자들의 개인 비리도 종종 드러납니다. 세상 앞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기독교는 가장 싫어하는 종교로, 목사는 가장 신뢰할 수 없는 성직자가 된 지 오래입니다. 이런 교회의 행태가 꼴 보기 싫다고 교회 출석을 중지하고 집에서 혼자 신앙생활 하는 신자도 많습니다. 

 

그렇게 된 까닭은 우리 모두 인정하다시피 성화를 온전히 실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지금처럼 구원 이후의 성화를 윤리적 차원으로 자신에게만 적용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신앙 목표를 죄 안 짓고 착하게 살면서 교회 활동을 성실하게 행하는 일로만 한정하는 신자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는 것이 꼭 잘못은 아니나 성경 어디에도 신앙이 혼자서 성찰, 수양, 회개, 성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이처럼 반쪽 성화에만 그치는 원인을 본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신자들이 권면, 위로, 교제, 심지어 자비는 그런대로 잘 행하지만 긍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넷은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인 반면에 긍휼만 마음 상태입니다. 마음이 없으면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잘못된 마음은 잘못된 행동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긍휼은 비참한 처지에 빠진 사람를 보고 안타까워 하는 마음을 항상 지니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따라서 상대의 신분, 위치, 재력, 권세, 지성, 가문 등이 자비를 실천하는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아야 합니다. 요컨대 신자들에게 순전한 긍휼의 마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결정적으로는) 너희 안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3 & 5절)고 권한 것입니다. 성화의 출발이 주님처럼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야만 자기는 죽이고 남은 살릴 수 있는데 그럴 수 있는 힘이 주님의 마음에서 온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합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이는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진리를 가장 잘 요약한 말씀으로 신자들이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정작 문제는 이 말씀을 신앙생활에 적용하는 측면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자기를 비우고 종의 형체에까지 낮추었다고 하니까 예수님의 마음 즉, 성육신을 겸손의 차원으로만 접근 이해합니다. 주님이 창녀 과부 고아 이방인 불치병자 불구자 귀신 들린 자 같이 비천한 자들마저 종처럼 섬겨주셨던 그런 일에만 주목합니다. 그래서 자기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적용하고 그런 마음을 가지려 노력합니다. 

 

그런데 막상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니까 아직은 믿음이 약해서 죄를 온전히 이기지 못한 탓으로 돌립니다. 교회 생활에 더욱 열심을 내어서 믿음의 수준을 끌어올리겠다고 합니다. 혹은 현재 내 형편이 너무 궁핍해서 그것부터 해결할 수밖에 없지만 앞으로 하나님이 풍요롭게 복을 주시면 그렇게 하겠다고 또 할 수 있겠다고 즉, 하나님에게까지 책임을 돌립니다. 

 

지금 신자가 놓치고 있는 점이 무엇입니까? 바울은 예수님이 성육신했던 마음을 가지라고 했는데 신자들은 단순히 더 겸손해져서 남들을 더 잘 도울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다고만 합니다. 주님이 성육신하신 본질을 완전히 놓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이렇게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으로 오실 때 어떤 마음을 가졌겠습니까? 단순히 자기를 낮추고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누구나 똑같이 잘 섬겨야지라는 마음을 품고 왔겠습니까? 그런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겠지만 과연 그것이 근본 마음이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차원뿐이라면 예수님 이전에도 진심으로 자기를 낮추며 다툼, 허영, 보상은 전혀 바라지 않고 남들을 사랑해준 의인은 꽤 있었을 것입니다. 당장 자비의 대명사 석가모니가 있었지 않습니까? 다른 일반 종교와 동일한 모습으로 동일한 가르침을 주려면 예수님이 굳이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없고 십자가에 죽으실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구스도 같은 거짓 복음에 속고 있는 세상 모든 이에게 참 복음을 깨우쳐 주려고 오신 것입니다. 그동안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던 돈을 완전히 버리고 길이요 생명이요 진리이신 당신만을 주로 모시게 하고 또 그런 자들로 영적 공동체인 교회를 이 땅에 세우려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성육신하실 때 예수님이 품은 마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당신께서 실제로 십자가에 죽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설명하는 6-8절의 결론도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이가 사탄에 미혹되어 참 하나님을 외면 대적함으로써 그 영적 실체가 실제로 완전히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택한 족속으로 율법을 지키며 성전 제사로 당신을 섬기는 유대인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지 않았고 오히려 자기들만 높였고 다툼과 허영으로 자기 의를 뽐내었기에 사탄의 음부에 갇혀 있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인간들을 살려낼 수 있는 유일하고도 완전한 방안이 당신께서 그들을 대신해 실제로 죽는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의 유일한 마음 

 

예수님은 태초부터 이 땅에 오시기까지 그 후로도 마지막 완성의 날에 다시 오시기까지 한 가지 마음만 품고 계신데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들이 어떤 종교를 가졌던 참 하나님과는 등지고 있어서 무슨 일을 해도 갈급하고 허망해지는 그런 비참한 상태를 너무나 안타깝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주도적으로 골고다 십자가에 올라갔으며 누구든지 그 대속 죽음의 은혜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는 당연히 죽어야만 했던 그 죄를 전혀 묻지 않고 자비의 구원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이에게도 당신의 사랑을 베푸는데 어떤 전제나 조건을 걸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없이는 세상의 부요나 궁핍에 관계없이 온전한 만족 기쁨 안식을 누릴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점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적 윤리로는 당장 정죄하고 심판해야 마땅한 빌라도 총독과 헤롯 왕을 전혀 꾸짖지 않았습니다. 세리와 창녀는 물론 우상 숭배하는 이방인들도 당신의 사랑으로 품어주고 천국 복음만 전했습니다. 열 명의 문둥이를 고쳐주었는데 한 명만 돌아와서 주님께 감사와 경배를 올렸습니다. 주님은 틀림없이 그 한 사람을 기특하게 여기는 마음보다 돌아오지 않고 세상으로 가버린 아홉 명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훨씬 컸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기 직전인 겟세마네 동산에서도 하늘에서 이 땅으로 오실 때의 그 애끓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삼 년간 공사역을 하는 동안에 더욱더 많아져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시겠다는 성육신이 태초부터 계획되어 있었다고 선언합니다.(요1장) 여호와 하나님은 그래서 아담이 타락하자 바로 구원 계획이 마련되어 있다고 원시 복음을 인간에게 계시해주었습니다.(창3:15) 요컨대 예수님은 창조 때의 그 원시 복음을 실현하겠다는 일념으로 이 땅에 오셨기에 당신의 긍휼한 마음을 공사역 중에 삶으로 보여주셨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완성시킨 것입니다. 

 

원시 복음의 뜻이 무엇입니까? 장차 때가 되면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에게 미혹되어 사망의 나라에 갇혀 있는 아담의 후손들을 천국 열쇠로 풀어서 생명의 나라로 옮겨주겠다는 것임니다. 그 열쇠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요컨대 인간을 죄에서 구원해주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담이 타락한 원죄의 뜻을 정확하게 알아야만 성화의 구원도 올바르게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윤리적 죄로 인해 타락한 것이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은 첫째 원인은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교만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사탄의 꾐에 넘어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고 그래서 그분을 자기 마음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것입니다. 선악과 금령은 하나님이 인간의 자유를 제약한 것이 아니며 인간을 향한 당신의 긍휼한 마음을 온전히 계시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선 다른 모든 과일을 임의로 먹도록 허락해주었기에 어떤 힘든 일이 생겨도 당신의 사랑을 의심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당신의 사랑의 울타리를 벗어나면 곧바로 실질적인 죽음인 영적 멸망이 닥친다고 경고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 실질적 의미는 제발 그 품을 벗어나지 말라는 간절한 호소였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이 인간이 당신과 같이 되는 것을 싫어한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고 그 결과 그분의 사랑의 품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성육신이 태초부터 계획되어 있었다고 선언한 요한이 예수님의 구원의 의미와 신자가 구원 이후에 이룰 성화를 어떻게 설명했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요일4:9-11)

 

성화의 다섯 핵심은 상대가 있어야 하므로 결국 다른 이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일입니다. 신자의 자발적 선도적 적극적인 양보와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주변 이웃들에겐 모든 희생과 수고를 감수하고 먼저 다가가서 주님의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교회 안에선 먼저 믿은 자가 나중에 믿은 자에게 양보하고 인내해주어야 합니다. 비슷한 수준의 성도끼리는 서로 존경하고 한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동역해 나가야 합니다. 신자가 그리스도의 빛을 주변에 비춰내지 못하면 교회에서 어떤 직분을 맡았던, 성경에 아무리 능해도 성숙한 영성이 결코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것은?

 

흔히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고 주님의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니까 최고로 양보 희생하며 최고로 사랑해주려고 노력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자기부터 선한 마음과 말과 행동을 최고치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려 듭니다. 물론 아주 선한 일이지만 여전히 자칫 자신을 높여보겠다는 시도입니다. 살펴본 대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본질과 다르며 무엇보다 그분의 마음을 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주님은 선 자체이므로 노력하지 않고도 그런 사랑을 실현할 수 있었습니다. 피조물로 죄에 찌든 인간 신자는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죽었다 깨어나도 주님의 그런 모습까지는 온전히 따라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려면 자기가 실제로 가장 최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재산을 팔고 의도적으로 신분과 지위를 낮추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시체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자기는 천하 죄인 중의 괴수였고 지금도 그 상태에서 단 하나 나아진 것이 없다고, 종교적 미사여구나 변명 차원이 아니라, 실체적 진실로 체험되어져야 합니다. 

 

인간적 본성이 여전히 살아 있어서 자기를 세상 누구보다 더 높이려는 욕심과 교만이 예상치 못한 시간과 장소에서 솟구치는 정말로 곤고한 몸이라 제대로 성화를 이룰 수 없다는 처절한 한탄이 입술에서 새어 나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이 없이는 한 시도 인간다운 의미와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없으니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의 영적인 가난함을 철저히 깨달았다면 자연히 다른 모든 이를 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아무도 예수님의 긍휼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실도 절대적인 진리로 체감할 수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나도 너무 불쌍하고 너도 너무 불쌍하다는 확고한 인식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다른 이를 그 외모와 무관하게 긍휼한 마음을 갖고서 대할 수 있습니다. 

 

이런 성화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거듭날 때 이미 천하 죄인 중의 괴수임을 절감하고 고백하며 예수님의 자비만 소원했습니다. 그 후에 성령이 신자에게 내주하여 떠나지 않으며 항상 위로하고 때로는 대신 기도해주며 범사를 성령님이 인도 주관해주십니다. 말하자면 신자에겐 비록 연약한 모습이긴 해도 예수님의 마음을 깨달아서 함께 품도록 해주신 것이 성령의 거듭남입니다. 신자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게 되었다는 차원에서 구원은 완성된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이 성령으로 거듭나서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를 어떻게 말하는지 보십시오.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5:15-17) 이전 것은 모든 사람을 육신대로 아는 것이고 새 것은 그렇게 하지 않는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 성경은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는 사람으로 바뀐 것이라고 분명하게 정의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보면 모든 이가 얼마나 영적으로 가난한지 알기에, 그전에 자기부터 더 그러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절대로 다른 이를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을 믿기 전의 제가 이 말씀대로 다른 이는 물론 예수님도 아주 멸시했습니다. 그럼 신자가 되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도 더 많은 선을 실현하게 되었다는 것보다 이전 것과 정반대로 누구에게나 긍휼한 마음을 품게 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긍휼의 어근이 비장이라고 말씀드렸듯이 인성 자체가 이미 긍휼로 가득 차 있어서 누구든 불쌍한 사람만 보면 자연히 어떤 방안으로도 도와주려 해야 엄밀히 말해서 신자입니다. 보상은 당연히 바라지 않고 자기 이름도 내세우지 않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자존심을 전혀 지키려 하지 않는 것이며, 거꾸로 도와주지 않고는 영적 부담감을 느낄 정도가 되는 것입니다. 만약 모든 신자가 이런 긍휼을 지닌다면 지금처럼 교회 안에 불법, 스캔들, 분쟁 등이 생길 리는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구원을 이루라는 뜻은?

 

결국 성경에서 유일하게 신자더러 구원을 이루라고 명한 말씀의 뜻도 신자더러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부터 죽지 않고는 남을 살릴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주려는 마음으로 가득 차면 윤리적 죄를 지을 수도 없고 그럴 여유도 없습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을 볼 때다 너무 안타까워서 어떻게든 십자가를 전하고 싶은데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습니다. 죄는 현실적으로 풍요하고 시간이 남아돌 때 짓는 법입니다. 바울처럼 오직 앞에 있는 푯대만 바라보며 매일 복음을 전하는 자에겐 윤리와 종교에 관심을 두고 그에 붙들리는 일은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신자가 그렇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서 이루어내는 결과가 무엇입니까?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11)입니다. 신자가 된 후의 성화의 목표가 혼자 의롭고 경건해져서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되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모든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려는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여 헌신 충성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유일하게 야단친 자들이 누구였습니까? 스스로 영적으로 건강하다고 자랑하면서  자기들이 정한 종교적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한 가지 이유로 인간인 주제에 다른 이를 심판 정죄한 유대교 지도자들뿐이었습니다. 당시 인간사회에선 윤리적 종교적으로 최고 의인들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도 이와 유사한 교회 지도자들이 꽤 많습니다. 

 

나아가 엄밀히 따지면 신자들끼리 교회에 모여서 죄 안 짓는 일에만 몰두하거나, 혼자서 집에서 착하게 신앙생활 하겠다는 신자들도 사실상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방불한 것 아닙니까? 반쪽 성화를 탓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혹시라도 나는 영적으로 조금 더 우월하다든지 그럴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꾸중을 면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다른 종교는 선행을 열심히 행하겠다는 각오와 실천을 구원의 전제 조건으로 내세웁니다. 그들에겐 그리스도의 마음이 없고 아예 어떤 마음인지 그가 누구인지 알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본인이 생각지도 못하는 사이에 성령이 역사하여 자신이 천하 죄인 중의 괴수였다는 처절한 자각 고백 회개부터 일으켜 줍니다. 그 후로도 말씀과 기도와 순종으로 예수님을 깊이 알아나갈수록 윤리적으로 선해지는 일은 두 번째이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충만히 채워집니다. 바로 그것이 신자에게 내주하신 성령이 행하는 기본 역할입니다. 바꿔 말해 죄의 본질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기에 그에 비추면 날이 갈수록 자신의 영적 비참함을 더 깊이 깨닫게 되니까 점점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구원받았는지 기준은 실천이 더디더라도 성화의 구원을 이뤄나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번 주는 성화의 구원을 이뤄나가고 있는지 판단하는 기준을 살펴본 셈인데 바로 긍휼한 마음을 지녔는지 여부입니다. 지금 스스로 자문해 보십시오. 누구를 만나도 그 사람이 나보다 낫다고 여기고 있습니까? 최소한 내가 가장 못해서 가장 불쌍하다는 철저한 인식이 있습니까? 그래서 어떤 이도 외모는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심지어 죄를 즐기는 자와 원수까지도 최선을 다해서 예수 십자가를 알게 해주겠다는 애끓는 심정을 지녔습니까? 

 

기독교 신자의 이웃 사랑은 고난 중에 있어서 불쌍하니까 도와주는 정도가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땅과 인간을 창조하셨던 목적이 온전히 실현되었던 타락 전의 에덴 같은 공동체를 세우는 것입니다. 예수님 쪽에서 이 땅에 천국을 당신의 십자가로 완전히 침노시켰으니 신자가 그 천국을 침노해 차지하는 것이 기독교의 성화입니다. 

 

(11/20/2022)


날마다순종

2022.11.21 07:0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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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루두개

2024.03.20 19:4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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