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가 핍박에 져서 순교하지 못하면?

조회 수 375 추천 수 1 2023.02.03 05:42:02

신자가 핍박에 져서 순교하지 못하면?

 

[질문]

 

목사님의 이전 칼럼에서 전도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글귀를 봤습니다. 구원받아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면 스데반처럼 목숨을 초개처럼 던질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만약 그러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며 성령 충만하지 못한 것일까요? 또 믿는 자라고 말하면서 죽음의 공포 앞에 굴복한 신자는 예수님이 비유한 대로 가라지 같은 자일까요?

 

[답변]

 

이방 왕들을 섬긴 하나님의 종들

 

예수님은 율법 중에 가장 중요한 강령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마22:37) 목숨을 다하고라는 말이 진심과 전심으로 사랑하라는 것을 강조하는 뜻이긴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로 인해 목숨을 거는 일이 생기면 기꺼이 감수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래서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고 당신을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이 땅에 안 계신 예수님을 위한다는 말은 당연히 예수 믿는 신자답게 살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하다 최초로 자기 목숨을 잃은 자는 스데반입니다. 복음을 전하며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는 그를 시기한 유대 지도자들이 공회로 소환해 거짓 모함으로 재판을 열었습니다. 그는 변론을 하면서도 끝까지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바람에 결국 돌에 맞아 순교 당했습니다.(행7장) 요한을 제외한 열한 사도와 바울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도 로마의 핍박으로 인해 모두 순교했습니다. 신자라면 반드시 이들의 본을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에는 이와 정반대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요셉은 온갖 우상을 섬기며 바로가 살아있는 최고 신으로 숭배받는 애굽에서 총리가 되어 충성했으며 그곳 제사장의 딸과 결혼해 살다가 죽었습니다. 다니엘과 그 세 친구도 바벨론에서 고위 직책을 맡아서 평생토록 이방 왕들을 섬겼습니다. 무엇보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로 40년, 이방 제사장의 사위로 40년, 계 80년간 인생의 황금기를 우상을 섬기는 족속들과만 어울려 살았습니다. 이들 모두는 분명히 여호와 신앙을 가졌음에도 이방 왕과 제사장들을 섬겼습니다. 물론 믿음의 근본적인 내용이 다르고 그 흑암의 나라에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여호와를 증거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직간접으로 우상숭배의 현장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마침 지난주에 북한 선교를 하다 억울하게 체포되어서 큰 곤욕을 치뤘던 임현수 목사님이 한 TV 프로그램에 나와서 대담하는 모습을 시청했습니다. 임목사님은 생명을 위협하는 협박에 굴복하여 기독교의 가장 큰 대적인 공산주의 체제를 찬양하는 외신 기자회견을 했으며 그 모습이 세계적으로 방영되었습니다. 그분은 캐나다에서 10여년 동안에 150여 회나 북한을 오가며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간접적으로나마 복음을 전했는데 그 엄청난 희생과 수고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목사님이 그렇게 강요된 회견을 마치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는 모습도 잠시 비춰졌습니다. 북한 당국은 틀림없이 주민들에게 최고 존엄인 김정은을 존경해서 울었다는 식의 선전도구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당신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하나님 앞에 부끄럽기도 하고 온갖 회한의 감정에 복받쳐서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언뜻 하나님도 그 모습을 보면서 하늘에서 함께 우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제게 들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보성전문(고려대학교의 전신)의 교장이었던 인촌 김성수는 학생들을 신사 참배에 동원 시켰습니다. 그때 학생이었던 연세대 김형석 교수가 회고하기를 김성수 교장은 학생들 손을 일일이 잡아주면서 눈물을 흘리셨다고 했습니다. 당시로선 그러지 않으면 학교가 폐쇄되고 학생들도 큰 곤욕을 치러야 하기에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김성수 교장도 임현수 목사님처럼 너무나 억울한데다 하나님 앞에 사죄하는 마음에서 저절로 눈물이 떨어졌을 것입니다. 

 

믿음과 생명 중 어느 것이 먼저인가?

 

신자가 가장 먼저 또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이 믿음과 생명 중에 어느 것인지에 대해선 성경은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습니다. 세상 사람은 생명을 지키기 위해선 모든 수단을 동원합니다. 신자도 신자 이전에 사람이므로 생명부터 먼저 지켜야 할 것입니다. 생명이 있어야만 믿음도 지킬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런 원리를, 간접적이긴 하지만, 지지하는 기사가 신구약 성경에 각기 한 군데씩 있습니다. 먼저 구약에선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의 경우입니다. 

 

“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거기서 경배하며 그가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평안히 가라 하니라 그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가니라 ”(왕하5:17,18)

 

나아만이 엘리사 선지자에 의해 나병이 낫는 기적적인 은혜를 입고 여호와 유일신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맡은 직책상 왕을 보필하려면 자기들 우상 신당의 경배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는 것이 절대로 자기 믿음을 배역하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 형식적 잘못은 용서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만약 나아만이 여호와를 믿는 자가 우상에게 절할 수 없다고 자기 왕에게 대들면 기다리는 것은 죽음일 것입니다. 엘리사에게 굳이 그런 말을 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 내면의 믿음만 지켜도 되지만, 혹시라도 나중에 신앙을 버렸다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는 뜻일 것입니다. 나아만의 순전한 믿음을 확인한 엘리사는 “평안히 가라”고, 그런 요구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거나 네 죄를 사해주셨다는 히브리 어법의 관용적 표현임, 대답해주었습니다. 

 

당시의 어쩔 수 없는 형편에 따라 우상 나라의 중책을 맡았던 구약의 위인들이나, 한국 근현대사의 두 인물은 매일의 삶이 뼈를 깎는 것 같은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우상숭배의 현장에 참여하게 되면 사죄를 구하는 눈물이 가슴 가득히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자신의 믿음이나 소신을 지키려면 곧바로 죽음을 맞게 됩니다. 당장 목에 칼을, 가슴에 총을 들이대며 자기들 신에게 절하거나 예수 믿는 믿음을 포기하라고 할 때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여기고 당당하게 순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신에 이런 흑암의 땅에서라도 참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남는 방식을 택하고 더더욱 굳게 헌신한 후에 그대로 준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에서 예를 든 모든 인물이 그러한 경우이지 않습니까? 나아만도 자기만의 방식으로 아람 족속들에게 여호와를 증거했을 것입니다. 혹은 단순히 너무나 두려워서 시키는 대로 따랐다 해도 그 자리를 벗어나 혼자 있을 때 가슴을 치며 통곡하지 않을 신자는 없을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믿음보다 생명이 중요하다는 너무나 생생한 예는 잘 아시는 베드로입니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마26:74,75) 만약 그가 자기 믿음대로 스승을 시인하면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야 할 판입니다. 체포당한 예수님이 이적을 일으키기는커녕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자 그로선 너무나 두려워져서 얼떨결에 목숨을 택하고 믿음을 버린 것입니다. 그가 로마 황제나 다른 신상에 절하지는 않았어도 사실상 우상에게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이나 경배한 셈입니다. 

 

그런데도 부활하신 주님이 그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는 같은 질문을 세 번이나 물으면서 그의 세 번 부인한 잘못을 깨끗이 용서해주셨습니다. 베드로가 당신에 대한 순전한 믿음을 가장 먼저 고백했고 평소에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은 잘 알고 계셨기에 세 번의 부인이 진심이 아니라고 확인해준 것입니다. 엘리사가 나아만 장군의 우상 신전에서 단순히 절하는 행위를 두고 전혀 문제 삼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주님은 이 일이 있기 전에 이미 베드로가 그렇게 할 것이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제자 중에 겉으로 보기에는 가장 믿음과 담력이 좋았으나 실제로 그의 내면의 성향은 아주 여리며 믿음조차 잠시 버릴 정도로 너무나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며 대신 짊어진 것 중 첫째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께 심판받아야 할 죗값이지만, 베드로로 대표되는 인간의 모든 연약함까지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당신께서 승천 직전에 약속하신 대로(행1:8), 베드로는 성령이 임해 권능을 받자 담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바뀌었고 순교도 담대히 감당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의 부인 사건은 담대하게 순교하지 못하고 순간적인 두려움에 굴복하여 목숨을 건진 신자를 함부로 비방 정죄해선 안 된다는 교훈입니다. 인류 역사상 신자들이 죽음과 믿음 둘 중 하나만 택해야 하는 극심한 핍박에 당면하는 경우는 항상 있었습니다. 최근 백 년 안에만 해도 나치 제국, 일본의 신사 참배, 한국 전쟁에서 공산당의 횡포, 현재도 이방지역의 선교 현장 등등 얼마든지 꼽을 수 있습니다. 그런 역사의 비극적 현장에서 당당하게 순교한 신자보다는 눈물 흘리며 일시적으로 굴복한 신자가 훨씬 많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베드로를 용서했듯이 그들도 다 용서해주실 것입니다.

 

순교는 인간의 결단이 아니다. 

 

하나님이 다수를 정의로 보거나 혹은 다수를 희생시킬 수 없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순교도 단순히 인간이 자신의 믿음으로 굳은 결의에 따라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서, 그것도 아주 비상한 경우에 순교를 통해서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일이나 드러내고자 하는 진리가 있을 때만 당신께서 순교를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이 순교할 자를 택하고 담담하게 순교를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는 것입니다.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바로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가 예수님과 똑같은 죄목으로 똑같이 거짓 증인들에 의해 참소당했습니다. 유대 공회는 이미 그를 사형에 처할 것을 정해 놓고 형식적으로 재판만 진행한 것이며 스데반도 그 사실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변론을 시작하기 전에 성경은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행6:15)고 증언합니다. 돌에 맞아 죽어가는 극심한 고통 중에도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행7:55,56)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순교를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 주관하시고 그 현장에 직접 와계셨던 것입니다. 

 

그는 사도도 유대인도 아니며 이방인 집사였음에도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세상 식으로 제 일호의 영광을 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일반 신자들이 로마 황제들의 극심한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산 채로 화형을 당하거나 맹수에게 잡아 먹히는 순교가 이어질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때 스데반의 경우처럼 로마인 신자들을 포함해 모든 순교자에게 똑같이 그 고통을 담담히 이겨낼 믿음과 담력을 주시고 바로 곁에 예수님이 와계셔서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예표였습니다. 

 

또 그런 모든 상황 자체를 섭리 주관하신 분이 주님인데 기독교와 교회를 순전한 모습으로 신속히 설립하겠다는 뜻입니다. 초대교회 시대에 성령이 가장 강력하게 역사한 시기였는데 신자들이 자신들의 삶을 통해 필요하다면 순교하는 모습으로 십자가 복음이 절대적 진리임을 당시 세상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로마와 그 시민들 눈앞에 증명해 보여준 것입니다. 

 

하나님이 순교를 주도하시기에 저같이 겁이 많고 믿음이 연약한 자는 종교의 자유가 제한받지 않는 미국에서, 그것도 편안하게 집에서 인터넷으로 말씀만 전하는 종으로 불러주신 것입니다. 제가 저를 봐도 총칼이 제 목을 겨누면 곧바로 굴복할 천하의 비겁한 겁쟁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저를 종교의 자유가 제한되는 상황이나 선교사역으로 부르지 않으신 은혜를 너무나 감사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더욱 감사할 할 일은 너무나 보잘것없은 저를 하나님은 그런 비겁한 모습으로 남아 있게 허락하시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약함마저도 들어서 활용하시고, 사실은 그전에 저만의 고유의 재능과 은사를 주시고 준비 훈련 시켜서 그에 가장 적합한 사역을 맡겨주셨던 것입니다. 구강암으로 혀를 일부 잘라내게 된 것도 지나고 나니 일반 목회보다 인터넷 변증 사역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오묘한 은혜와 섭리였던 것입니다. 

 

열두 사도 중에 요한만 장수하게 해서 계시록을 저작하게 하신 하나님입니다. 앞에서 예를 든 생명을 믿음보다 앞세운 구약시대의 인물들도 전부 개인별로 그 시대와 그 환경에서 반드시 그만이 할 수 있는 하나님이 맡기신 역할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방 나라를 섬길 수밖에 없어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계획이 태어나기 전부터 미리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인간은 대체로 자기 생명을 살리려고 모든 의를 버리는 치사한 존재이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간혹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려고 자기 생명을 서슴없이 버리는 냉혹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집안이나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고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는 자들이 세상의 위인이 됩니다. 자기가 믿은 신(神)을 위해서 자폭 테러하는 자는 그 신을 위해 순교한 자로 크게 존경받습니다. 하나님 안에선 무고한 생명을 살인한 최고의 죄인인데도 말입니다. 그런 종교를 비하하려는 뜻이 아니라 단순히 논리적으로 따지면 순교라는 행위만 갖고서 믿음을, 나아가 구원을 논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도덕과 종교가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범사를 행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언제 어디서나 만약 이런 경우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했을 것인지 정확히 분별하여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하는 결과는 당연히 선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만약 사전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하면 단순히 성경에 기록된 계명들을 문자적인 범위 안에서만 따르게 됩니다. 필연적으로 믿음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개별적 사안, 사건, 사람에게 도덕적 종교적 선을 행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혀집니다. 

 

문제는 인생살이가 또 신자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여건과 사람들이 절대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사에 그에 딱 들어맞는 하나님의 뜻을 어지간해선 분별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인간은 믿음을 가지고도 여전히 성경의 계명들을 아무 주저 없이 스스로 기꺼이 행할 수 있을 만큼 의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자라면 마땅히 성경에 계시 된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해야 하고 분명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한 일이지만 믿음을 도덕과 종교의 규범으로 묶어선 안 됩니다. 자칫 계명들을 문자적으로만 지킴으로써 자기 내면과 관계없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거룩했던 바리새인들 같은 신앙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에선 중직을 맡아서 아주 경건하고 의로워 보이지만 막상 가정과 직장에선 전혀 그렇지 않은 신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의 근본적인 마음과 그 영적 진리를 온전히 분별하기 위해서 평소에 성경을 통해 그분의 속성, 섭리, 주권 등을 철저히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광대하심을 최대한 많이 또 크게 가슴에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에 반해서 인간이, 바로 자기 자신이 얼마나 연약하고 어리석고 교만하며 고집 세고 탐욕적인 존재인지도 처절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면서 범사에서 자신과 주변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는지 잘 분별해 나가야 합니다. 나아가 그분이 자신의 인생을 장기적 종합적으로 어떻게 이끌어가시는지 깨달아서 그에 합당하게 스스로 모든 지정의를 동원해 열심히 순응해 나가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했어도 나중에 다 용서하시고 큰일을 맡겨주셨지 않습니까? 

 

신앙은 개별적 사건과 행동을 거룩하게 바꾸려는 노력보다 신자 자신의 인격체 전체를 거룩하게 성장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신자더러 어떤 선한 행동을 하기를 바라기보다는 먼저 당신의 뜻대로 따르는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평생을 두고 겸손히 자신의 무지, 무능, 교만 탐욕, 죄성을 버려 나가면서 예수님의 긍휼과 은혜만을 바라며 그분이 걸어가셨던 길을 묵묵히 따라가는 여정이 믿음입니다. 비록 수시로 넘어질 수 밖에 없지만 주님을 향한 시선과 방향은 절대 바꾸지 말고 그분을 가슴에 품고 끝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요컨대 순교도 생명을 위협하는 한 번의 협박을 이겨내는 신앙적 행동이라는 차원으로만 접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목숨은 걸지 않아도 되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신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원수사랑도 사실은 어지간한 믿음으로는 지키기 힘들지만 이웃 사랑도 못하지 않습니까? 어떤 희생과 수고가 필요 없는 자기 눈의 들보부터 보고 남의 눈에 티끌은 찾아내지 않는 일조차 아직 실천 못하지 않습니까? 그럼 목숨이 걸려 어쩔 수 없이 실패하는 순교보다, 평소 아무 제약 없이 일상적 믿음으로 순종할 수 있는 계명에 게으른 신자들이 더 크게 비난 정죄 받아야 하는 것 아닙니까? 

 

불합리한 질문

 

하나님은 거의 모든 신자를 순교에 맞서야 하는 여건에 두지 않습니다. 당신만의 비상한 경우에 비상한 사람만 순교로 이끌며, 그것도 본인이 전혀 예상치 못한 때와 장소에서 일어납니다. 순교는 막상 그런 상황을 당해본 자만이 논의할 수 있는 차원입니다. 자유로운 환경에 있는 신자들이 생명의 위협에 굴복해 순교하지 않으면 구원이 취소되는지 염려하는 것은 엄격히 말해서 비신앙적인 잘못입니다. 그런 질문은 베드로가 세 번 부인했던 대제사장 관저 안에서만 즉, 나가서 통곡하기 전의 상황에서만 그것도 논리적으로만 적용될 것입니다. 

 

구원의 기준은 예수 십자가 복음을 순전히 믿었는가 여부 하나뿐입니다. 순교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순전히 믿지 않은 자만 구원받지 못합니다. 나아가 살펴본 모든 경우처럼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왔으면 때로 큰 잘못을 저질러도 구원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신자가 순교하지 못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성령 충만하지 못한 까닭이 맞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당신의 뜻대로 당신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십니다. 성령의 은사 중에 믿음과 능력이 바로 순교할 수 있는 자에게 주시는 은사입니다.(고전12:4-11) 사도들, 스데반, 초대교회 신자들이 그런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그런 은사를 받지 못하면 어지간한 신자라도 극심한 핍박에 져서 생명을 구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믿는 자라고 말하면서 죽음의 공포 앞에 굴복한 신자는 예수님이 비유한 대로 가라지 같은 자인지 물었습니다. 이 주제에 국한해서 엄밀히 따지면 공포 앞에 굴복한 신자를 가라지라고 판단 비방 정죄하는 자가 오히려 가라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너무나 광대하신 은혜, 사랑, 권능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가라지는 모양은 벼와 똑같은데 속에는 알곡이 없는 쭉정이를 말합니다.(마13:25-40) 앞에서 말한 대로 신앙을 단순히 도덕적 종교적 계명의 준행으로만 따지려는 신자들이 가라지입니다. 교회 안에 성품과 그에 따른 삶의 정반대로의 거룩한 변화는 전혀 없이 기독교적 계명과 관습을 갖고 자기 의를 드러내면서 그러지 못하는 자들을 비방 정죄하는 자들입니다. 주님은 그들은 마귀의 자녀라고까지 말합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16:25)는 예수님의 말씀도 정확히 이해해야 합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목숨을 잃느냐 지키느냐로 구원의 기준을 제시한 것이 아닙니다. 순교를 주님이 요구 강요 권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왕이면 순교가 더 좋은 믿음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정반대되는 두 사안을 대조함으로써 어떤 주제를 더 강조하는 히브리어 수사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당신을 위해서 목숨을 바칠 만큼 순전히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는 것은 평소에 주님이 아니라 자기를 더 중하게 여기며 사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많은 가라지 같은 신자들을 가리킵니다. 

 

주님으로선 많은 신자가 원수를 사랑하지 못할 줄 알지만, 천국 시민에게 합당한 의의 기준에 대한 당신의 뜻은 분명하게 밝혀 놓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말씀도 신자들의 실제 준행 여부와 관계없이 그런 원론적인 뜻을 밝힌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전도 순교하라는 권면도 그 일이 다른 이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며, 또 자신부터 생명을 새로 얻었고 그 새 목숨이 너무 귀해서 전도하는 것이며, 나아가 전도하다 보면 생명을 위협받을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순교는 미리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으며 배교자들처럼 보여도 절대로 비방 정죄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이 순교할 자에게만 순교를 허락하시고 당신께서 주관하십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목숨을 구걸했어도 당신께서 택하여 구원을 주신 신자라면 반드시 베드로처럼 통곡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죄를 용서해주시고 그 후로 더 거룩한 은혜를 베푸셔서 반드시 당신의 큰일을 맡겨주십니다. 한 가지만 첨언하자면 이 답변은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극심한 핍박 때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2/3/2023)


lawclerk

2023.04.19 21:22:11
*.229.11.55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박진호 목사님! ^^ 글을 읽으면서 많은 것들을 배워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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