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순서가 어떻게 됩니까?
[질문]
저는 구원에서 칭의가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중생이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조나단 에드워즈는 반드시 중생하고 나서 회심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롬 5:1, 8:10,30, 갈3:2 등의 말씀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은 다음에 성령님을 받게 된다고, 또 믿은 다음에 의롭다고 칭함을 받고 이 칭의로 말미암아 영이 살아 있다고 말합니다. 칭의와 중생의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중생과 칭의는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떤 이들은 그 둘 사이에 시간차가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 또한 어느 것이 옳은지요? 나아가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부르셔서 되살린 사건을 두고 "유효적 부르심에 의한 중생"을 예표 한 것 이라고 하던데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또 그렇다면 그런 유효적 부르심과 중생(혹은 회심) 사이에도 시간차가 있는가요?
[답변]
우선 질문 자체에 모순된 설명이 있습니다. 질문자는 ‘칭의’가 먼저이고 ‘중생’이 다음이라고 생각하는 반면에 에드워즈는 ‘중생’ 후에 ‘회심’이 따른다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질문자와 반대 의견이 되려면 에드워즈는 중생 이후에 칭의가 있다고 말해야 논리적으로 합당한 질문이 됩니다. 현재의 질문으로는 ‘칭의’와 ‘회심’이 같은 뜻이 되어버립니다.
이 문제의 해답을 얻으려면 각 용어의 정의(定意)부터 분명하게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칭의(稱義)는 성부 하나님이 아무 공적과 선행이 없어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구원의 은혜를 믿는 자를 여전히 죄의 본성이 남아 있어도 의롭다고 선언해주는 것입니다. 회심(回心)은 신자가 성령의 간섭으로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죽을 수밖에 없었던 죄인임을 철저히 깨달아서 인본주의적 사고와 가치관에서 신본주의로 완전히 바꾸는 것입니다. 중생(重生)은 회심과 같은 의미이지만 성령의 한 죄인의 옛 사람을 죽이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하는 역사를 말합니다.
이 셋은 사실은 한 인간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그 십자가 은혜를 믿어서 구원을 얻는 한 가지 일을 두고 강조하는 측면만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각각에 역사하는 주체를 달리하는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구원을 두고 칭의는 성부 하나님이 법률적 의미로 죽음의 형벌을 면제한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중생과 회심은 딱 부러지게 구분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중생은 성령이 죄인을 거듭나게 만드는 역사에, 회심은 중생과 동시에 신자가 근본 마음을 바꾸는 것에 초점을 맞춘 용어입니다.
어쨌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성령이 원죄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는 죄인에게 먼저 역사해야만 예수님이 믿어지면서 회심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전한 회심을 해야만 칭의가 이뤄집니다. 논리적으로 따져서 회심을 하지 않았는데 의롭다 칭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택하심, 성령의 간섭, 회심(중생), 칭의의 순서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드워즈의 말이 옳습니다. 과연 그러한지 질문자께서 근거 구절로 열거한 말씀들을 살펴봅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칭의를 얻었으니 하나님과 관계는 자연히 화평 되었고 그렇게 신자가 된 후에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누리자고 말합니다. 칭의 뒤에 화평이 온다는 뜻이 아닙니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롬8:10)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으면 성령이 신자에게 내주해주십니다. 그래서 이제는 영은 살았으므로 죄와 싸우며 성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성화에 관한 말씀이지 칭의의 구원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8:30) 택함이 있고 칭의(구원)가 따른 다는 뜻일 뿐입니다.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칭의(구원)와 동시에 성령이 신자에게 내주하여서 성화로 인도하면서 결국은 영화에까지 반드시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안에서 구원 받는 신자가 되는 것이 바로 신자가 영화롭게 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갈3:2) 성령의 간섭으로 구원 얻게 된 것이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뜻이지 구원 과정의 순서를 말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고 중생과 칭의 사이에는 논리적 신학적인 전후관계만 있지 실제로 시간적인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자가 진심으로 회심하여 중생했는데 하나님이 칭의를 더 이상 미룰 필요가 전혀 없지 않습니까? 대부분의 경우 택함과 성령의 간섭과 회심(중생, 칭의)과 믿음의 결단 헌신 등이 단 번에 일회성으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오랜 시간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므로 그 여정들 사이에 순서만 알면 되지 구태여 시간적 차이를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신자 자신이 자기 영혼에 성령이 간섭하여 일어난 구원의 구체적인 여정을 정확히 인식하지도 못합니다. 주님이 바람에 비유하여 설명하신 대로 성령의 간섭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와서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지 못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5-8)
그러나 한 가지 주지하실 사항은 바람이 불고 지나갔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여서 자신의 가치관을 완전히 바꾸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 앞으로 주님만 따라가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 헌신했다면 그 본인은 자신에게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알 수 있습니다. 자기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바꿔 말해 구원의 순서나 시간적 차이를 따지는 것은 신학자나 목회자들이 기독교 구원의 진리를 설명하며 가르칠 때에 필요할 뿐입니다. 그것에 대해 안다고 해서 한 죄인이 구원을 얻는 데에는 물론이고 예수님을 믿은 후의 신앙생활에 어떤 효력이나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누리고 주님을 닮아가며 주님이 맡겨주신 소명에 충성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구원을 설명하는 성경말씀에 칭의, 회심, 중생의 전후순서나 시차를 직접적으로 강조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사건의 의미는 크게 둘로서, 첫째 예수님이 구세주로 인간의 구원을 주관할 뿐 아니라 죽음 너머의 영계의 통치자도 되심을 증명하고, 둘째는 얼마 후에 아리마대 요셉에서 걸어 나오실 당신의 부활 사건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무덤 안의 나사로를 불러내어 죽음에서 생명으로 소생시켰기에 유효적인 부르심을 상징한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마지막으로 유효적 부르심이란 죄인의 영혼에 성령이 간섭하는 것이므로 중생과 회심보다 먼저 있어야 합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는데 그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유효적인 부르심이 됩니다. 당연히 부르심이 먼저이고 중생(회심)은 뒤입니다. 또 하나님의 택함 이후부터 성령이 계속해서 점진적으로 보호 인도 간섭하셨기에 둘 사이에 시간적 차이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8/19/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