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을 매일 보고 만지는가? (마13:51,52)

조회 수 1330 추천 수 36 2012.10.26 01: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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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매일 보고 만지는가?
마태복음 강해(152)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하시니 대답하되 그러하오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그러므로 천국의 제자된 서기관마다 마치 새것과 옛것을 그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으니라.”(마13:51,52)


예수 믿은 가장 큰 축복

예수 믿은 후에 영생을 선물로 받은 것 외에 가장 큰 축복은 무엇인가?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은혜와 권능은 무엇인가? 제 경우에는 신구약 성경 66권을 소지하고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말씀을 묵상하면 하나님의 전적이고도 완전한 보호와 인도를 받을 수 있다.

성경이 없다면 하나님이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이 실존하지 않는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하나님과 교통이 이뤄지지 않으면 나에게 그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없는 것과 진배없다는 것이다.

성경을 풀어 가르쳐야 하는 목사니까 당연히 그럴 것이라 간주해선 안 된다. 오늘의 본문은 그런 은혜와 권능이 전임사역자게에만 허락되고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신자라면 누구나 그럴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천국에 관한 일곱 비유를 통해 구원과 심판의 진리를 다 가르쳤다.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고 물었더니 제자들이 “그러하오이다”라고 답했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제대로 깨달았을까?

복음서의 기록에 드러난 제자들의 그 이후 행적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예수님이 잡히시는 마지막 날 밤에도 로마의 압제가 끝나고 유다 왕국이 회복되면 누가 높은 자리를 차지할지 서로 다툼을 벌렸고,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지 않는가?  

당장 마태복음 15장에만 가도 예수님이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음에 대해 직접 질책한 사건이 나온다.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이고도 형식적인 종교 행태를 지적한 후에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함께 구덩이에 빠진다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그 비유에 대해 설명을 요청했고, 주님은 “너희도 아직까지 깨달음이 없느냐”(마15:16)라고 야단쳤다. 본문의 일과 시차가 얼마 지나지 않는 때였을 뿐인데도 말이다. 바리새인들을 소경에 비유했으니 천국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다는 뜻이다. 제자들더러 제발 그들처럼 소경이 되지 말라는 뜻이었다.    

현대 신자의 유익

그런 제자들에 비교해 오늘날의 신자는 성경을 누구나 소지할 수 있다. 언제든 읽고 묵상할 수 있다. 거기다 신앙의 선각자들이 성경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확립해 놓은 교리도 배울 수 있다. 지금 제자들이 온전히 깨닫지도 못하고도 그렇다고 대답했다는 사실도 바로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지 않는가?

오늘날의 신자로선 솔직한 심정으로 제자들이 왜 저리도 예수의 가르침을 못 알아듣는지 의아할 때가 많다. 또 그렇게 많은 기적을 보고도 주님께 순종은커녕 온전히 믿지도 못하는 모습을 볼 때는 갑갑하고 어리석게도 여겨진다. 이는 착각 중의 착각이다. 우리가 그들보다 지성이나 영성이 결코 뛰어난 것이 아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더라면 우리가 더 못 깨달았을 것이 틀림없다.

제자들이 미숙하게 여겨지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우리는 성경으로 전체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 때문이다. 마치 추리 소설이나 스릴러 영화를 이미 여러 번 본 자로선 처음 보는 자가 왜 저리 간단한 퍼즐도 못 푸는지 답답한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자기도 처음 봤을 때에 그랬음을 까마득히 잊고서 말이다.  

본문은 성경으로 누리는 복이 단순히 무엇이 옳고 그른지 구별하고 또 구원의 진리를 깨닫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고 한다. 또 그 깨달은 진리를 남들에게 가르치는 차원도 훨씬 뛰어넘는 엄청난 권세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서기관과 집주인이라는 특정한 신분과 직업에 비견했다. 먼저 서기관은 모세오경이나 구약성경을 필사, 보관, 전승, 주해하는 성경의 전문가다. 우리말 번역으로는 “서기관이 천국 제자가 되면.”이라는 제한적 의미로 읽힌다. 그러나 제자들 중에 서기관 출신은 한 명도 없다. 지금 제자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므로 문맥상으로 따지면 제자들더러 서기관 같은 역할을 하라는 뜻이다. 오늘날의 예수 믿는 신자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또 새것과 옛것을 곳간에서 내어오는 집주인과 같다고 한다. 새것은 십자가 복음이요, 옛것은 율법인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또한 성경의 구원진리를 배워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곳간으로 사용된 단어는 사람의 마음을 뜻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심령 깊숙이 깨달아 진심으로 담대하게, 특별히 구약의 율법과 대비하여 전파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집주인에는 아주 중요한 의미가 또 있다. 천국에 관한 두 번째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곡식을 심는 자를 집주인이라고 묘사했다.(마13:27) 곡식을 심는 집주인은 당연히 하나님이다. 한 장소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 동일한 용어를 사용했다면 그 뜻도 당연히 같다. 집주인의 문맥상의 의미는 하나님이 된다. 실제로 새것인 십자가의 구원 은혜와 율법의 언약을 그 곳간에서 내어올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뿐이지 않는가?  

신자의 엄청난 권세

거기다 더 놀라운 사실이 따로 있다. 예수님이 제자들더러 서기관이나 집주인이 되라고 즉,  되도록 노력하라고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천국의 제자된”이라고 했다. 이미 천국의 제자가 된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또 집주인 즉, ‘하나님 같이 되어라’고 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과 같으니라”라는 직유법을 사용했다. 물론 어떤 이의 얼굴을 보고 찐빵 같다고 말할 때 그 얼굴이 찐빵은 아니다. 단지 보는 사람에게 그렇게 보였고 여겨졌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제자들을 거의 하나님과 동격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물론 오해는 말아야 한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은 품성, 속성, 능력을 갖게 되어 신(神)이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신자들의 현실적 지위나 신분을 최고로 격상시켜 준다는 뜻도 아니다. 무엇이 전제되어 있는가? “이 모든 것을 깨달았느냐?” 제자들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온전히 깨달았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같이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오늘날의 신자라면 성경 66권이 말하는 바를 깨달아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이미 천국 제자가 된 것이다. 천국 유업을 받게 될 것은 확정되었다. 또 천국 비밀을 전파하여 다른 이로 깨닫게 할 수 있다. 새것과 옛것을 나누는 하나님처럼 되었다는 것은 성경 진리를 전하여 다른 이의 영원한 운명을 천국 생명과 풀무 불 죽음 둘 중 하나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일은 하나님이 하시지만 그런 일을 하는 종으로 쓰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는 하나님의 전권대사요 대리인으로써 세상  사람들 앞에 서야만 한다는 것이다. 전권대사나 대리인이란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은 그 나라나 왕, 즉 하나님을 대리하여 말하기에 그와 동일한 권위와 효력을 갖는 것이다.    

너무 과분한 일이라 도무지 감당 못할 것 같은가? 그럼 예수님이 빈 말을 하신 것인가? 어떡하든 동기부여를 하려고 크게 격려하신 것인가? 목표를 크게 잡아 놓아야 그 1/10이라도 달성된다는 뜻인가? 그 어느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며 운명하셨다. 분명 이젠 안심하고 눈을 감아도 되겠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겨우 한 움큼의 제자들을 이 땅에 남겨 놓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그 말씀을 하셨다. 제자들은 두려워서 뿔뿔이 다 흩어졌고, 그중 한 명은 이미 원수들 편에 붙었고, 수제자 베드로는 한구석에 숨어서 통곡하고 있는 중에 그러셨다. 아무도 당신의 가르침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도무지 안심할 처지가 아니었다.

인간적 시각으로는 그렇게밖에 판단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 곧 지혜의 영인 성령을 보내실 것이다. 예수님 당신께서 제자들을 직접 깨우쳐 주실 것이라는 뜻이다. 복음의 진리를 소유케 만들 것이다. 성령의 권능으로 덧입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고 모든 족속으로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만들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구속의 완성으로 이 땅에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강력하게 도래할 것을, 기대한 것이 아니라. 확신했다. 하나님 본체이신 당신께서 하실 일이기에 그 열매는 이미 확정되었지 않는가? 제자들은 그 권능에 부응하여 주님의 일에 기꺼이 동참하며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할 것이다. 신자가 받은 성령의 권능이란 그래서 주님께 전적으로 순종, 나아가 순교까지 할 수 있는 권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경저작 외에는 모두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신자는 예수님의 첫 제자들이 행했던 사역 전부를 수행할 수 있다. 딱 하나만 빼고는 말이다. 산 채로 사자 밥이 되는 것인가? 아니다. 최근에 순교한 자들이 초대교회 당시보다 더 많다. 실제로 지금도 지구 곳곳에선 십자가 복음을 전하다가, 심지어 그 진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순교의 거룩한 피를 흘리고 있다.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의 곳간에서 새것을 내어오는 일 즉, 성령의 영감으로 신약성서를 저작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오늘날 신자도 열두 제자처럼 될 수 있다.  

얼마든지 하나님의 대리인이 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졌다는 점이다. 인간의 영혼이 비록 죄로 타락하여 사탄과 사망의 권세 아래 묶여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그 묶임을 다 깨트리셨다. 성령으로 거듭난 영혼은 하나님과 언제 어디서나 교통이 가능하다. 성경을 매일 읽고 묵상하면 구원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고 나아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수 있다.

타락하기 전의 아담은 에덴에서 하나님을 대리하여 그분의 뜻대로 동산을 아름답게 다스렸다. 그것도 혼자서 성경이 없이도 말이다. 제 2의 아담으로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은 신자는 성령이 내주하여 영원토록 떠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의 일은 하나님의 영으로 알 수 있다. 오늘날 신자가 성경을 저작할 수는 없어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 수 있다. 성경으로 천국 비밀을 깨닫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분의 심정과 마음까지 읽을 수 있다.  

잘 알고 있는 히브리서 4:12,13이 성경에 대해 어떻게 선언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으며 좌우에 날 선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까지 찔러 쪼갠다고 했다. 인간의 육체와 정신과 영혼 전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한 죄인을 수술하여 새 사람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만물을, 인간도 당연히 포함됨, 우리를 상관하시는 이 즉,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것처럼 드러낸다고 했다. 성경 말씀 자체의 권세만으로도 구원과 심판으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라도 십자가 앞에 벌거벗고 엎드리게 되면 그 다음에 따를 일은 당연히 구원 아니면 심판이지 않는가?

신자가 성경의 시십자가 진리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갖고 당당하고도 자신 있게 전하면 그런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언제 어떻게 구원 받을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지만, 신자가 행하는 전도를 통해 궁극적으로 그 둘 중 하나로만 나뉘게 되는 구원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참 생명 그 자체인 성경

영원토록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은 정말로 성경을 통해 지금도 신자 각자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말씀인지라 성경 안에는 당연히 그분의 권세, 능력, 은혜, 긍휼, 사랑, 생명 등이 살아 숨 쉬고 있다. 인간이 동원 가능한 어떤 것으로도 이루지 못하는 의와 거룩과 생명의 열매를 맺게 해준다.    

물론 인간이 지은 책에도 좋은 책은 많다.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준다. 울고 웃게 만든다.  인생의 깊은 진리도 배우고 그 배운 진리로 삶을 윤택케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이 땅의 인간관계에만 적용될 뿐이다. 처세술과 자기수양에는 도움이 되지만 금방 거의 다 잊어버리고 만다.  

성경은 그와 전혀 다르다. 다른 책들이 그 표현이 미려하고 재치 있으며 아주 논리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표현은 투박하고 번역도 앞의 예에서 보듯이 어색하며 앞뒤 논리가 안 맞는 경우가 종종 나온다. 줄거리가 신나고 재미있는 것도 별로 없다. 정서적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면에선 훨씬 떨어진다.  

그런데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되며 비논리적인 부분에서 불현듯 뭔가 두들겨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해진다. 갑자기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은 자기 지정의로 분석 정리 판단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깨우쳐주었다는 뜻이다. 세상에선 아무도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했던 내용이다. 무엇보다 반드시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신자의 영원한 운명을 그분이 거룩하게 변화시켜 주신다는 주제가 명백히 드러난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며 읽으면 속에서부터 기쁨, 위로, 안식, 평강이 충만하게 솟아난다. 그 깨달은 진리가 계속해서 내 삶과 인생의 지표가 된다. 특별히 심령 깊숙이 역사하여 나라는 존재를 거룩하게 바꾸는 역사가 일어난다. 내가 나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나를 하나님의 제자답게 변화시키는 것이다. 또 어려운 문제와 환난이 닥칠수록 말씀이 나를 요동치지 않도록 강력하게 붙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말씀을 읽으면 성경이 자증(自證)하듯이 정말로 꿀 송이처럼 달다. 소름이 돋기도 하고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을 흘리거나 깊은 탄식이 베어 나온다. 최고의 수면제였던 책이 이제는 읽고 또 읽어도 여전히 더 읽고 싶어진다. 읽을수록 새로운 진리의 보석이 숨겨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수십 번이나 같은 구절을 읽었어도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깨달음을 그 같은 구절에서 얻기에 스스로도 놀라게 된다.

성경에서 진리의 보석을 캐다보면 너무나 자연스런 결과로 성경을 손에서 놓기 싫어진다.  성경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골고다 언덕의 예수님과 오순절의 성령님을 지금도 만나서 대화할 수 있다. 성경이 없다면 하나님이 없다는 서두의 진술이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정말로 하나님의 참 생명 그 자체다.

신약성경도 없었던 제자들  

그런데 본문의 제자들에게 구약성경은 있었지만 신약성경은 아직 저작되기 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약이 저작되기 시작하겠지만 제자들 일부만, 그것도 특정 주제로만 저작했다. 유대교와 로마 당국으로부터 박해를 받고 순교했던 초대교회의 많은 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신약 성경은 구경도 못했다. 말하자면 당시 신자는 성경 전체에 드러난 큰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떻게 구원 진리를 깨달아 천국 제자가 되었는가? 곳간에서 어떻게 새것과 옛것을 구별하여 내어오는 하나님 같이 될 수 있었는가?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그들은 정말로 예수님의 부활 생명을 소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초대 교회의 설교 메시지도 오직 하나였다. 로마서 1장이 말하는 대로 십자가에 죽고 되살아난 예수가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아들로 죄에서 구원할 메시아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도 천국 부활이 확실히 보장되었다는 것이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짧은 한 구절이 바로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정말로 그 복음은 순식간에 염병처럼 번져 나갔다. 그것도 역사상 크리스천에 대해 최고로 박해가 심했던 와중에 말이다. “염병처럼” 번졌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무슨 수를 써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성령이 일으키신 부흥의 불길을 어느 누구도 끌 수 없었던 것이다.

요한복음 1;1 이하에도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그 말씀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선언한다. 만물은 그 말씀으로 말미암아 지어졌고 그 말씀이 인간이 되어 세상에 참 빛으로 왔다. 그 빛을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다. 요한일서 1:1에도 태초에 계셨던 생명의 말씀을 초대 신자들에겐 귀로 들은바, 눈으로 본바, 손으로 만진바 되었다고 선언한다.

부활하시어 제자들 사이에 나타난 예수님을 의심 많은 도마는 그 허리의 창 자국과 손의 못 자국을 직접 만져보고서야 구주로 영접했다. 그러나 그가 일단 예수님 앞에 진정으로 항복하자마자 곧바로 부활 생명을 소지하게 되었고 인생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전승에 따르면 당시의 땅 끝에 해당되는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다 말 다섯 필에 묶이어 산 채로 몸이 찢겨나가는 순교를 당했다지 않는가?

그에게는 예수의 참 생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마는 죄와 사탄과 사망에 묶여 있는 죄인들이 너무나도 불쌍해 십자가에 대신 죽은 주님의 그 긍휼, 그 진리, 그 사랑만 온전히 붙든 것이다. 객관적 교리를 믿은 것이 아니요, 종교적 사상과 철학을 깨우친 것도 아니었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님만 자신의 구주로 심령 깊숙이 모시었고 또 그분의 생명이 그를 순교마저 담대하게 감당하는 영광의 자리에까지 이끌어 주셨던 것이다.

가장 안 읽히는 베스트셀러

성경은 지금도 베스트셀러다. 그동안 팔리고 배포된 양이 지구상의 전 인구 숫자보다 많다.  불신자의 집에도 책꽂이에 한 권씩 꽂혀있을 정도다. 그런데 가장 안 읽히는 것으로도 최고다. 불신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자들마저 그렇다.  

그 이유는 자꾸만 성경을 자기에게만 적용시키려 들기 때문이다. 자신의 현실적 삶과 인생에 도움이 되는 어드바이스만 얻으려 하는 것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성경은 분명히 인생의 지도로 삶의 세밀한 부분에까지 적용해야 한다. 그러나 자기 생각과 기분에 맞추어서 판단하고 자신의 주변을 바꾸는 일에만 활용하려드니 문제라는 것이다.

그럼 한마디로 현실의 처세술을 배우는 책이나 다름없어지며 그런 용도라면 세상에 훨씬 좋은 책들이 많다. 또 그런 생각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은 절대로 그 독자에게 진짜 속을 내보이지 않는다. 천국의 비밀과 구원의 진리가 깨달아지지 않는다.

대신에 성경에다 자기를 적용해야 한다. 자신의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으로 채우며 읽어야 한다. 무슨 책이라도 완전히 몰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인공에 자신을 스스로 대입해야 한다. 코난 도일의 추리탐정소설을 읽으려면 자신이 셜룩 홈즈 형사가 되어야 한다. 또 저자인 도일의 의도를 추적해가며 읽어야 한다.

성경은 누가 주인공이고 누가 저자인가? 그 주인공은 예수님이고 그 저자는 하나님이다. 그 줄거리는 예수가 십자가 대속죽음으로 죄인을 구원하여 하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을 올린다는 것이다. 성경의 시작과 끝을 보라.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는데(창1:1),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있게 하기(계22:21) 위해서라고 하지 않는가?

신자는 성경에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죄로 썩어가는 세상을 향한 그분의 심정을 헤아려야 한다. 인류 역사를 이끄는 그분의 생각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그분이 직접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한다. 천국의 비밀을 훔쳐보고 구원의 진리를 깊이 깨달아야 한다. 신자가 예수의 은혜 안에서 그분의 참 생명을 얻고자 성경을 대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뜻이다.

예수를 진정으로 영접한 자는 이미 천국 제자가 되었다. 자신의 시민권이 벌써 천국에 있으며 바로 그 사실이 인생에서 가장 큰 기쁨이 된다. 아무리 이 땅에서 현실적으로 궁핍하고 고난이 이어져도 잠시 뿐임을 알고 있다. 그런 가운데도 얼마든지 의와 거룩과 선의 인생을 살 수 있다. 만약 시민권을 천국에 두지 않은 채로는 교회에 출석한들, 미국에 사는 우리 사정에 비유하면 영주권이나 시민권 없이 불법체류자로 사는 것과 같다. 교회 안에서 아무리 오래 생활해도 계속 불안 염려가 끊이지 않는다.

일곱 천국 비유의 간단한 결론  

천국에 관한 일곱 비유를 가르치고 난 이후에 예수님이 결론을 내린 본문을 한 문장으로 줄이면, 바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하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단 복음을 전하고 나면 상대가 알아먹던 말든 신자로서의 책임을 다한 것이며, 또 그 후는 하나님이 알아서 해줄 것이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예수 참 생명을 소지한 신자가 진심으로 예수님의 긍휼한 마음으로 전도하면 진리 자체의 권능이 반드시 역사한다는 것이다. 말씀이 살아 운동력이 있어서 상대의 심령을 찔러 쪼개어 십자가 앞으로 벌거벗겨 끌고 오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영생 아니면 영벌 둘 중 하나로만 결과 맺게 된다는 것이다. 구원의 진리인 십자가 복음의 권능을 강조한 것이며, 신자는 그 권능에 참여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성령으로 거듭 났으면 그 권능으로 이미 덧입혀졌으니 구원 여부는 하나님께 맡기고 전파하라는 것이다.

예수의 참 생명을 소지한다는 것을 너무 신령하게 여길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진짜로 나의 주인으로 모셨기에 이미 자신이 천국의 제자 된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인생의 목표를, 현실에서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하나님의 대리인이 되어서 살겠다고 헌신하면 이미 그 생명은 신자의 속에서 살아 역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예수의 생명이 날마다 새롭고도 풍성해져서 자기 삶의 모든 부분을 세밀히 보호, 간섭, 인도하게 된다. 요컨대 지금도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신자에게 말씀하고 계시며 아침마다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신자는 매일의 삶에서 어떤 고난과 핍박이 닥쳐도 넉넉히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10/14/2012


사라의 웃음

2012.10.26 03:39:51
*.235.51.19

아멘, 아멘!!!
성경 속에서 창조의 하나님이 만나 주시고. 골고다의 예수님이 만나주시고, 오순절의 성령님이 만나 주시오매...이렇게 엄청난 복을 받았음이 너무도 기이한 복이기에..아멘!

의인

2012.10.27 06:32:55
*.143.180.107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8.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으나 사랑합니다. 지금도 여러분은 그분을 보지 못하지만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즐거워합니다.

9. 이는 여러분이 믿음의 결과로 영혼의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요셉_

2022.05.19 13:08:55
*.169.188.148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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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 욥이 고난을 이긴 첫째 비결 (욥42:1-6) [3] master 2016-10-24 1396
239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칭찬은 불신자의 몫이다.(눅10:25-37) 운영자 2013-10-23 4096
238 믿음으로 행하고 있는가? (창1:1) [3] 운영자 2013-07-08 1539
237 재림은 예비보다 망각하라. (마24:42-44) [3] 운영자 2013-02-08 1436
236 Disturbed or Overjoyed? (마2:1-10) [4] 운영자 2013-01-15 1169
235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2) (마14:28-33) [3] 운영자 2013-01-14 1829
23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갈4:4-7) 운영자 2013-01-08 1758
233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1) (마14:28-33) [2] 운영자 2013-01-02 2124
232 예수님의 진짜 이름(마14:22-27) [2] 운영자 2013-01-01 2341
231 바울에게 절하며 감사하는 하나님(행16:24-26) [5] 운영자 2012-12-18 1094
230 천하 제 일의 부자는? (마14:1-12) [1] 운영자 2012-11-26 1001
229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기도(눅22:31-34) [1] 운영자 2012-11-09 2035
228 사탄의 프라시보 효과 (마13:53-58) [1] 운영자 2012-11-04 1767
» 예수님을 매일 보고 만지는가? (마13:51,52) [3] 운영자 2012-10-26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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