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바울에게 절하며 감사하는 하나님(행16:24-26)

조회 수 1094 추천 수 27 2012.12.18 15:5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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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에게 절하며 감사하는 하나님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행16:24-26)


오늘은 미국의 가장 큰 명절인 추수감사절이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초기 정착민이 첫 수확을 하나님께 올려드린 것에 유래한다. 믿음의 선조 청교도가 세운 미국의 현재 세태는 오히려 완연히 반(反) 기독교적 성향을 보이고 있다. 크리스마스를 단지 Holiday라고 부르며 기독교적 의미를 제거하려 든다. 마찬가지로 추수감사절도 단순히 가족끼리 오랜 만에 만나 성찬을 나누는 전래의 명절로 전락했다.    

하나님을 알고 따르는 신자로선 이 날을 그렇게 보낼 수는 없다. 오늘 하루 만이라도 그분께 진정한 감사를 올려드려야 한다. 그러나 참으로 유감스럽게도 신자가 드리는 감사마저 몇 가지 부족한 모습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감사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기쁘게 받으실만한 감사인지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올해도 무사히”의 감사

가장 먼저 올해도 무사한 것만 감사하는 것이다. 극심한 불경기에 어쨌든 아파트 렌트비나 모게지 페이먼트 안 밀리고 식구들에게 큰 병이 없었다는 것이다. 비록 여름휴가는 못 갔지만 무사한 것만 해도 어디냐는 것이다. 인생만사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측면에서 어려움이 없도록 지켜주셨으니 분명 하나님의 은혜인 것은 맞다.

오래 전 한국 시내버스마다 운전석 앞에 똑같은 그림이 걸려 있던 것을 기억하는가? “오늘도 무사히”라는 글귀와 함께 귀여운 소녀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그림말이다. 신자가 “올해도 무사히”라며 감사하고 치운다면 엄밀히 말해 불신자들의 그런 감사와 다를 바 하나 없지 않는가?  

하나님이 신자의 삶을 주관하는 목적이 불신자보다 더 형통하고 출세케 하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수호천사의 역할만 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 세상에서 고통을 겪는 것은 아담이 타락하여 피조 세계가 하나님의 벌을 받은 결과다. 또 우리 모두가 죄 아래 묶이어 서로 경쟁하는 바람에 빚어내는 부작용이다. 나아가 하나님이 신자라고 그런 고난에서 제외하는 특혜를 주시지 않는다.

하나님이 신자 각자에게 갖고 계신 계획은 우리 생각과 기대와 예상보다 훨씬 더 거룩하고 아름답고 영광스런 자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고난으로만 여겨지는 일들도 우리를 연단하여 정금 같이 빚어내시려는 그분의 세밀한 간섭이다. 그저 아무 문제나 고난이 없기만을 간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영광스런 면류관에 대해 아무런 기대나 소망이 없다는 뜻이다. 정금같이 빚으시는 그분의 손길을 뿌리치는 짓이다.

신자끼리 흔히 “엉뚱한 길로 갔다가 하나님께 쥐어 박혀서 돌아왔다. 만약 그렇게 쥐어 박히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얼마나 처참하게 실패했을지 모른다.”고 말하지 않는가? 하나님께 쥐어 박힌 것이 큰 은혜이기에 감사한다는 고백이다. 그렇다면 올해도 무사한 것 때문이 아니라, 올해 고난이 유난히 많았음에 더 감사해야 하지 않는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감사

신앙연륜이 어느 정도 된 신자들은 고난 중에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원리를 알고는 있다. 그래서 고난이 실제로는 힘든데도 감사는 해야 하기에 변질된 감사 현상들이 나타난다. 제일 대표적인 것이 긍정적 사고를 통해 감사하라는 것이다.

컵에 물이 반(半)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사람마다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뉜다. 긍정적 낙관적인 자는 “물이 아직도 반이나 남아 있네.”라고 말한다. 반면에 부정적 비관적인 자는 “물이 벌써 반이나 없어졌네.”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어떤 고난이라도 긍정적 마인드를 갖고 바라보면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다고 가르쳐져 왔다.      

이는 진정한 감사가 아니다. 동일한 상황을 두고 의지적으로 자기 생각만 바꾼 것이다. 물이 아직 반이나 남았다고 보는 자는 자칫 방심하여 게을러질 소지가 많다. 반대로 물이 벌써 반이나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자는 열심히 나머지 물을 더 채우려들 것이다. 그럼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 것인가?

이런 두 관점은 단지 사람의 기질에 따라 달라진 것뿐이다. 기질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서로 다른 기질의 사람끼리 보완하고 힘을 합쳐서 온전한 섬김과 사랑을 행하라는 뜻이다. 만약 남편과 아내 둘 다 비관적인 사람끼리 만났다면 그 가정은 항상 침울한 분위기가 감돌 것이다. 반대로 둘 다 낙관적이라면 장래 계획은 뒷전이고 버는 대로 흥청망청 쓰고 볼 것이다.

교회마다 분란이 끊이지 않는 것은 바로 기질이 다른 사람끼리 모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획은 교회 안에 주는 것 없이 미운 사람과 함께 교제 동행하면서 사람을 사랑하는 훈련을 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정작 교회 밖의 미혹되고 불쌍한 영혼들을 찾아가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라는 것이다.  

만약 신자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예컨대 이처럼 생각을 바꿔야만 생기는 감사라면 아무리 그 뜻이 좋아도 진정한 감사가 아니다. 자칫 과장, 가장, 외식으로 흘러 형식적 의무적 감사가 될 뿐이다.

절로 우러나오는 감사

한 미국인 사업가가 중동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를 당했다. 일 년 반의 참혹한 감옥 생활에서 겨우 풀려난 그에게 한 기자가 “어떻게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절망감과 지루함을 견뎌낼 수 있었는가?”라고 질문했다. 그 사업가는 “내가 받은 축복을 헤아리며 그 어려움을 이겨냈다”고 답했다.

그런데 그가 말한 축복이 미국에서 풍요롭게 살던 때의 좋았던 일을 회상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또 언젠가 감옥에서 풀려나면 다시 그 즐거운 생활로 되돌아갈 것을 상상하며 무조건 참아냈다는 뜻도 아니었다. 감옥 안에서 정말 감사할 수 있는 일을 발견하고는 진정으로 감사했다는 것이다.  

그는 한두 달 만에 어쩌다 샤워 한 번 하게 되면 너무 감사해서 콧노래를 불렀다. 희멀건 죽만 먹다가 고기가 조금이라도 섞이면 신나게 먹으면서 감사했다. 컴컴하고 축축한 감방에  햇볕이 비취면 쓰러져 넘어져 있다가도 힘을 다해 창가로 기어가 그 한줄기 따뜻한 햇살로 인해 온 가슴으로 감사했다.

감옥의 반쪽은 어둡고 추웠으며 다른 반쪽은 밝고 따뜻한 두 상황이 공존했다. 컵에 물이 반이 있는 동일한 상황에서 생각을 바꾼 것이 아니었다. 어둡고 추운 곳에서 밝고 따뜻한 곳을 발견하자 적극적으로 모든 힘을 다해 옮겨가서 그 밝음과 따뜻함을 직접 체험하며 즐겼다. 실제적 즐거움에서 진짜 감사가 저절로 우러나왔다.    

그런데 이런 감사도 사실은 신자가 해야 할 완전한 감사에는 조금은 못 미친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는 자라도 사안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전체를 통찰할 만한 사고의 폭이 넓은 자라면 어떤 고난 중에라도 자기에게 실제로 유익한 부분을 찾아내어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학비를 벌려고 아르바이트 하는 경우에, 그저 힘들다고 불평하면서 어떡하든 시간만 때워서 돈만 챙기려는 학생이 있다. 반면에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도 그 일을 통해서 대인관계 기술이나 처세술을 습득하고, 장차 자기가 할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얻으려는 기회로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감사하는 학생도 있지 않는가?    

신자가 행할 완전한 감사

본문의 상황은 바울과 실라가 2차 선교 여행 중에 빌립보를 방문했을 때에 일어난 일이었다. 바울이 귀신 들려 점치는 여종을 고쳐주자 종을 통해 돈을 벌던 주인에게 수입이 끊기게 되었다. 화가 난 주인이 모함하여 사도들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우리말로 “밤중쯤”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영어성경에서 보듯이 한밤중(midnight)이었다. 그만큼 시달릴 대로 시달리며 매를 맞았다는 뜻이다. “깊은 옥”은 악명 높기로 유명한 로마의 지하 감옥이었다. 그야말로 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않는 곳이다. 워낙 불결해서 문둥병에 걸리기 예사다. 그런 곳에 착고에 채워져서 내던져졌다. 우리 같으면 힘들고 지쳐서 그대로 쓰러져 자기 바빴을 것이다. 그런데 사도들은 기도하고 찬양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사도들도 그런 상황 속에서 진정으로 기뻐할 일을 발견하고 감사했던 것이다. 먼저 낮에 귀신 들린 여종을 고쳐준 일에 너무나 감사했을 것이다. 한 불쌍한 여종을 사탄의 묶임에서 풀어주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찬미했을 것이다. 점치는 무당은 사탄의 군대로 따지면 계급이 아주 높은 장교에 해당된다. 그런 자를 하나님 나라로 전향 항복케 했으니 사탄의 나라는 그만큼 무너졌고,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는 그만큼 확장된 것이다. 여종을 고친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게 했고 또 앞으로 여종에게 점을 치러오려고 마음먹은 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원천적으로 묶여버렸다. 너무나 기쁘고 감사할 일이었지 않는가?
    
거기다 지하 감옥에 던져진 것 자체에 더 크게 감사했다.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이 모인 곳이었다. 세상에서 완전히 실패하여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 자들이었다. 더 이상 아무 희망이 없기에 그야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만이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유일하고도 완전한 소망을 심어줄 너무나 좋은 기회였다.  

바울과 실라는 그 비참한 감옥에서 실망하여 엎드려져 있지 않았다. 어떻게든 그 어려움을 적극적으로 극복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바로 그곳이 십자가 복음을 마음껏 전할 수 있는 사역지요 선교의 현장으로 간주했다. 또 자기들을 그런 곳으로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다.

실제로 사도들이 감사하고 찬미한 후에 옥 터가 흔들리며 착고가 풀어지는 기적이 일어났고, 또 그 기적을 목격한 간수와 그 집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 그 간수는 사도들이 그 전에 전도했던 자주 장사 리디아와 귀신들렸던 여종과 함께 빌립보 교회를 설립했다.  지진이 일어나 사도들이 풀린 기적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사도들의 감사와 찬미를 통해서 역동적으로 확장되어진 것이다.  

이보다 훨씬 전에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도 유대 당국에 붙들려 매를 맞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활의 도를 전하지 말라는 엄명을 받고선 풀려난 적이 있었다. 그 때에 사도들이 어떻게 반응했는가?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행5:41)  

예수를 전파하다가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박해를 받아도, 아무리 매를 많이 맞고 지하 감옥에 갇혀도, 사도로서 기꺼이 할 바를 한 것만이 아니다. 진짜로 기뻐하고 감사할 일을 즐겁게 한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니까 너무 신났던 것이다. 사탄에게 미혹된 한 영혼만 구원되어도 천국에서 잔치가 벌어지는데 사탄의 장교가 항복해왔는데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실 지를 바울과 실라는 알았던 것이다. 베드로와 바울 같은 사도들은 그런 하나님의 기쁨에 동참한 것이다.    

환난 중에 감사하라.  

성경에는 환난 중에도 감사하라를 넘어서 기뻐하라고까지 말한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다. 범사(凡事)란 좋은 일뿐 아니라 굿은 일이든 슬픈 일이든 구분 없이 감사하라는 것이다. 그중에는 자존심이 완전히 땅에 떨어진 경우는 물론, 화가 쉴 새 없이 끓어오를 때도 포함된다. 그럼 너무 무리한 요구 같고 종교적 위선이나 임무로 여겨지지 않는가? 혹시라도 아예 말이 안 되는 요구인데도 목표라도 그렇게 거창하게 잡아 놓으면 최선을 다해 조금이라도 노력할 수 있다는 뜻인가?

이런 권면들은 마음을 억지로 바꿔먹는다고 수행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다. 끝까지 믿음으로 참아낸다고 가능한 일이 결코 아니다. 신자가 나중에 언젠가는 정금같이 되어서 범사에 감사하게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반쯤은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다. 고난 중에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조금씩 정금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실제로 체험함으로써 감사가 절로 나와야 한다. 자신의 잘못과 허물들이 하나씩 둘씩 깨끗이 씻어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품성으로 닮아 변화되어지는 모습을 보고 기뻐해야 한다.

나아가 그렇게 바뀌어지는 것이 너무 좋고 귀해서 자꾸만 어서 빨리 정금으로 더 많이 바뀌고 싶은 열망이 생겨야 한다. 아니 진정한 감사를 하면 자연히 그런 열망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어떤 세밀한 간섭과 역사에도 신자는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기꺼이 헌신하려고 노력하게 된다. 외적 현실적 고난이 닥쳐도 잠시 불편할 수는 있어도 정금으로 바뀌어 가는 그 기쁨과 감사는 절대 방해하지 못한다. 나중에는 그런 것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되어서 오직 기쁨과 감사만 남게 된다.

바울과 실라가 그랬다. 하나님이 시킨 일을 할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자기들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너무나 기뻐했다. 자신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빛과 향기가 주위에 번져 나가고 또 주위 사람들이 그 빛을 보고 향기를 맡음으로써 조금씩 변화되는 모습이 너무나 기뻤다.

조금 표현에 어폐가 있지만, 사도들이 하나님께 감사했지만 내용적으로는 사실은 하나님이 사도들에게 절하며 감사한 셈이 된다. 당신께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일을 사도들이 대신 해주었으니 얼마나 기뻐하시겠는가 말이다. 그와 동시에 사도로선 그렇게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일에 자기들이 조금이라도 쓰임을 받았으니 얼마나 경이롭고 황공하며 감사했겠는가?

생애 최고의 추수감사절

이제 “올해도 무사히”에 그치는 감사가 바울의 감사에 비해 턱없이 부족함을 실감하겠는가? 또 의도적으로 생각만 바꾸는 감사가 크리스천의 감사와 본질적으로 다름을 알겠는가? 물론 우리의 감사의 수준도 바울의 수준에 비하면 너무나도 못 미친다. 솔직히 의도적으로 긍정적 낙관적으로 생각하는 감사도 잘 못한다.  

그러니까 더더욱 올해 감사절만은 최소한 지금껏 아무 생각 없이 해온 대로 “올해도 무사히” 수준에선 벗어나야 한다. 만약 그 수준에 머문다면 세상 사람과 똑같이 미국 전래의 명절을 단순히 교회라는 거룩한 장소에서 경건한 용어로 포장하여 치른 연례 종교행사로 그칠 것이다. “올해도 무사히”의 감사가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만, 내년에도 또 그러고 매년 그렇게만 감사하고 치운다면 대체 하나님이 진짜 기뻐하는 감사는 언제 할 수 있겠는가? 평생 가도 불가능하지 않겠는가?  

실제로는 너무 힘들고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이 가득 찬데도 억지로 감사하다고 말할 필요는 전혀 없다. 우리의 심령을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에게 립 서비스는 절대 통하지 않는다. 차라리 억울하다, 힘들다, 의심스럽다, 불만이 많다, 이해가 안 된다고 있는 그대로 솔직히 따지는 것이 더 참 된 감사다.

하나님께 두들겨 맞았기에 다시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어서 감사했다는 고백이 진심이라면 단순히 다시 돌아온 것 말고 그렇게 힘든 중에도 진짜로 깨달았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고백할 줄 알아야 한다. 단지 돌아온 것을 감사한다는 뜻은 다시 두들겨 맞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정말로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하고 그 빛이 얼마나 어떻게 좋았는지 고백할 수 있어야 진짜 감사다.  고난 중에 자신이 정금같이 변해져 가는 모습을 실제로 확인할 수 있었는지 따져봐야 한다.          

이제 지난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어둡고 추운 가운데서도 주님으로부터 진짜로 밝고 따뜻한 은혜를 받아 누렸던 체험을 구체적인 문장으로 고백해 보라.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왜, 어떻게, 구분해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고백을 세 개 아니, 한 개만 할 수 있어도 올해의 감사절의 의미는 이전과는 명백히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올 한해 하나님이 시키신 일을 잘 감당했는지 되돌아보라. 그 일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보았는가? 나의 현실적 상황이야 어떻게 되든 하나님이 정말로 기뻐하실 일을 하나라도 했다면 그것을 감사의 제물로 그분께 올려드려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일로 얼마나 기뻐하실지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기쁨에 신자가 기쁘게 동참할 수 있어야 참 감사가 아니겠는가? 그야말로 생애 최고의 감사절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해보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내가 행할 때에 하나님이 도리어 나에게 “Thank You!”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윗처럼 “인자가 무엇이관대 영광과 존귀의 관으로 쒸우시고 세상 만물을 다스리게 하시나이까”(시8:4-6)라는 고백이 절로 나오지 않겠는가? 또 하나님이 내가 하는 일을 보시고 기뻐하시고 나에게 감사하는 그런 삶을 사는 인생만큼 복되고 풍성하고 아름답고 성공한 인생이 따로 있겠는가?

11/19/2012  

운영자

2012.12.18 16:09:06
*.104.235.77

지난 추수감사절에 남가주가스펠 교회의 1부 예배에서 행한 설교입니다.
이미 You-tube에 올린 동영상 설교는 2부 한영합동예배에서 영어로 통역해야 했기에
그 내용을 대폭 줄인 것인 반면에,
본문은 1부의 한어 회중을 상대로 주일 정식예배 형식으로 행한 설교입니다.
이왕에 동영상을 보셨던 분들도 다시 이 글을 읽어봐 주십사하는 뜻입니다.

감사절이 지난지 한 달이나 되어 때 늦은 감이 있어서 죄송합니다.
그 동안 임시 담임이지만 교회 일을 직접 맡다보니
홈피에 새글을 써서 올리는 일에 아무래도 조금은 등한히 되네요.
이번 기회를 나름대로 목회사역과 홈피문서사역을 병행할 수 있을지
저를 테스트하고 훈련하며 여러 정황을 분석해보는 기회로 삼아 감사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새 글의 업데이트가 조금 더디더라도 회원님들의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샬롬!

양요한

2012.12.19 13:50:38
*.53.94.30

^^동영상 설교도 은혜 많이 받았는데...원고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순태

2012.12.22 13:45:29
*.142.126.91

아멘! 감사히 읽었습니다.
귀한 사역, 반드시 병행하시도록 인도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이윤정

2018.04.02 07:13:41
*.31.94.144

현실에 상관없이, 항상 기뻐하고 감살 할 수 있는 이라면, 이미 이 세상을 초월한 이일텐데, 제 주위에선, 이런 이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서 슬프네요..

master

2018.04.03 00:51:30
*.246.122.206

이윤정님 

저는 물론이고 제 주위에도 그런 분을 찾기가 힘듭니다만... 예컨대

오지에 선교사로 가있는 분이나, 열악한 환경 가운데도 목회를 묵묵히 감당하시는 분들은

소명감만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반드시 기쁨과 감사가 넘치기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현실적으로는 힘들어서 실망 고통 슬픔을 겪을 때가 더 자주 있겠지만

주님이 가끔 주시는 위로 기쁨 감사 소망이 그 모든 것들을 상쇄할 정도를 넘어 

앞으로 닥칠 또 다른 고통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는 충만함으로 채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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