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들은 믿음의 정확한 본질과 내용은 알지 못한 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길 수 있다는 믿음 만능 주의 신앙에 너무 젖어 있는 것 같습니다. 성경도 신자 쪽에서 어떻게 잘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아 낼 수 있을 것인가에만 초점을 두고 읽습니다. 하나님 당신을 탐구해 보려는 노력은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하나님 다우심을 계시해 놓은 책입니다. 또 그 계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궁극적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성경 말씀을 전통적인 시각과는 다르게 접근하되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만을 통해 증거 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진짜 이름(마14:22-27)

조회 수 2341 추천 수 40 2013.01.01 20:2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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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진짜 이름
마태복음강해(158)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마14:22-27)


누구나 물 위를 쉽게 걸을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겠다. 아주 간단하다. 한 발을 먼저 디딘 후에 그 발이 빠지기 전에 얼른 다시 다른 발을 내디디면 된다. 어째 조금 썰렁한 개그같다. 썰렁하게 여겨진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모두가 한강을 헤엄쳐서 건널 수는 있지만 걸어서 건널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럼 지난주에 설교한 내용과 상충되지 않는가? 말하자면 예수님이 베푸신 모든 기적을 오늘날의 신자가 매일의 현실 삶에서 실제로 누릴 수 있다는 말이 틀린 것인가? 베드로가 잠시나마 물 위를 걸을 수 있었던 까닭이 그 현장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인가? 또는 당시는 기독교를 빨리 부흥시킬 필요가 있어서 그런 기적을 베풀었지만 이미 기독교가 확고하게 체계를 잡았기에 오늘날에는 더 이상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오늘날에도 병원에서 완전히 포기한 말기 암 환자가 기도만으로 깨끗하게 치유된다. 기적은 현대에도 일어난다. 신자들은 기적을 소망하며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기적이 절실한 궁핍하고 위급한 신자에겐 아무리 뜨겁게 오래 동안 기도해도 어지간해선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에 아무 문제없이 현실적으로 형통하며 별로 믿음이 있어 보이지 않는 신자에겐 갈수록 축복이 더하는 것 같다. 그래서 어디까지 기적을 기대해야 하며 또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다.

기적이 아니라 표적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요한복음은 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기록되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두세 세대 지난 후였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사건은 물론 그 사역과 베푸신 기적들이 서서히 전설처럼 변해져가는 시기였다. 또 당시에도 지금과 같이 왜 기적은 누구에겐 일어나고 나에겐 일어나지 않는지 혼동이 왔을 것이다.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로 변화산에서 천국의 모습을 실제로 목격했다.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의 현장에 함께 있었다. 사도로서 본인도 기도하면 불치병이 치유되는 기적을 베풀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가장 오래 생존했던 사도였다. 말하자면 그는 역사상 가장 많은 기적을 목격하고 체험한 기적의 최고 전문가로서, 기적에 대한 신자들의 오해를 바로 잡고 그 의미를 바로 세우기 위해 오직 일곱 개의 기적만 골라 요한복음서에 기록했다고 한다.    

요한은 의도적으로 ‘기적’(miracle)이라는 용어 대신에 '표적'(sign)이라고 표현했다. 무엇보다 기적에 대한 이해를 바로 잡으려는 뜻이었다. 표적은 문자 그대로 간판, 안내, 표지판을 말한다. 이곳 LA에서 Grand Canyon까지 차를 몰고 구경을 간다고 가정해보자. 종일 운전하느라 나중에는 너무 피곤하고 졸린다. 그러다 목적지까지 10 마일 밖에 남지 않았다는 표지가 나오면 너무 기쁘다.

그런데 드디어 그랜드케년에 도착했다면서 그곳에 내려서 텐트치고 바비큐 해먹고 사진을 찍고 바로 돌아오는 바보는 없다. 그 간판은 어디까지나 목적지로 향하는 길잡이 역할만 할뿐이다. 그랜드케년 안에 까지 완전히 들어가서 전망대에서 사진을 찍고, 나귀를 타고 계곡으로 내려가 탐색도 하고, 아이맥스 영화도 관람해야 한다.    

요한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이 공통적으로 정확히 이끄는 도착지 한 곳이 있다고 말한다. 바로 예수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믿게 하는 것이다. 오병이어의 기적에서도 유대 대중들이 비록 메시아의 역할을 오해하긴 했어도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다. 또 본문의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본 제자들도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33절)고 고백했다. 본인만 물 위를 걸은 것이 아니라 베드로까지 걷게 했다. 도무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 외의 어떤 설명으로도 이 사건은 온전히 이해될 수 없다.    

지금도 평생을 예수와 등을 지고 살았을 뿐 아니라 너무 싫어서 비난만 했던 불신자라도, 병원에서 말기 암으로 포기하라는 선고를 받으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싫어하던 기독교의 기도원에 올라간다. 죽을힘을 다해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여서 기적적으로 낳았다 치자. 곧바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하고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가? 이처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게 만드는 것이 기적이 갖는 첫째이자 가장 중요한 의미다.  

왜 우리에겐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는 아무리 기도해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미 정답을 다 가르쳐준 셈이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고 따르고 있기에 더 이상 표적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랜드케년 안에 들어와서 신나게 구경하고 있으면서 대체 케년이 어디 있지 하면서 계속 간판만 찾으러 다니는 바보는 없지 않는가?

지금 굉장히 심각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작금 너무나 어려운 경제 상황에도 신자들이 봉사와 헌금을 힘에 넘치도록 하고 있다. 아주 좋은 일이고 하나님도 아주 기뻐하신다. 그러나 “제가 얼마나 교회를 위해 수고하고 희생하는지 하나님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금 불경기에 비즈니스 매출이 엉망인데 제가 수백, 수십 배 복 달라는 것도 아니고 단지 두 배, 아니 매출이 조금 늘어나는 오병이어의 기적만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기도만 자꾸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그랜드케년 10 마일 남았다는 간판 앞에서 춤추고 놀다 오는 꼴이다.

기적에 동참한다는 것이 오늘날도 그 외적인 현상을 동일하게 재현한다는 뜻이 아니다. 신자는 예수를 믿고 따를 수 있는 표적을 이미 보았다. 아니 예수 그분을 보배로 모시고 있다. 각 개별 기적의 고유 의미를 자신의 신앙생활에 접목하여 실천할 수 있을 뿐이다.  

한 공동체의 어떤 소속원이라도 자기 가진 것을 떼서 나눌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그 나눈 자보다 공동체 안에 더 풍성해진다는 것이 오병이어 기적의 재현이듯이 말이다. 또 할머니가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인 수프를 끓여 불신자 홈리스와 나누면서 복음을 전하고 죽어가던 한 영혼을 살려냄으로써 그녀 인생의 의미와 보람을 다시 찾은 것이 오병이어 기적의 개인적 적용이듯이 말이다. 그럼 물 위를 걷는 기적은 오늘날 신자의 삶에 어떻게 구체화 가시화 할 수 있겠는가?

모세에게 가르쳐 준 하나님의 이름

미디안 광야에서 양치기를 하던 80 노인 모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 애굽에서 430년간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구원해내라는 소명을 준다. 모세가 하나님에게 이런 취지로 물었다. “동족들이 갑자기  한 노인이 나타나 하나님의 대리자로 구원하러 왔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애굽의 왕자였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자도 거의 없을 것이며, 설령 기억한다고 해도 원수의 궁정에서 자란 자기를 누가 인정해주겠느냐? 누가 자기를 보냈는지 물으면 하나님의 이름을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고 당신의 이름을 가르쳐주었다. 만물의 영장이라 일컫는 인간만 해도 물, 공기, 햇빛 등이 없으면 생존조차 못한다. 모든 피조물은 상호 의존하여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초월하신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토록 당신 외의 다른 것으로부터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 이 대답은 당신은 세상 모든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룩한 존재라는 뜻이다.

그런데 정확하게 말해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스스로 있는 자”가 이름이 아니다. 영어로 치면 주어와 Be 동사가 합쳐진 형태인, “I am.”이라고 대답했을 뿐이다. 성경을 번역할 때에 신학적 의미를 보태어 경건하게 번역하려니 그렇게 된 것이다. 제 개인적 의견으로는 하나님이 대답하신 원래의 뉘앙스를 살려서 차라리 문자 그대로 번역하는 것이 훨씬 나을 뻔 했다. 바로 “내다”, 혹은 “내라니깐.”이라고 말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아니 그분에게 이름이 꼭 있어야 할 필요나 이유가 있기나 하는가? 그냥 “내다.”라는 한마디 답이면 충분하지 않는가? 다른 설명이나 사족이 전혀 소용이 없고 오히려 오해만 불러일으키지 않겠는가? 그런데 예수님이 본문 27절에서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할 때에도, 똑 같은 용법을 사용했다. 헬라어로 주어 동사만으로 “I am.”이라고 자신에 대해 설명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의미인지 실감하겠는가?

엄마가 읍내에 장을 보러 가면서 어린 남매에게 문을 걸어 잠그고 누가 와도 열어주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늑대가 아이들을 잡아먹으려고 똑똑 문을 두드렸다. 아이들이 누구세요라고 묻자 “엄마다.”라고 대답했다. 아이들은 굵은 남자 목소리라 자기들 엄마가 아니라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늑대가 또 조금 있다가 가늘게 여자 목소리로 변장해서 엄마다라고 하자 아이들은 손을 문틈으로 넣어보라고 했다. 손에 털이 많으니 엄마가 아니라고 하자 늑대는 다시 밀가루를 손에 바르고 집어넣었다. 아무래도 수상하게 여긴 아이들이 문을 더 꽁꽁 잠가버렸다. 그러자 늑대는 본색을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며 아이들을 잡아먹으려 들었다. 아이들은 너무나 겁이나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서로 끌어안고 내내 울기만 했다. 밤은 점점 더 깊어 갔다. 아이들은 엄마를 기다라다 지쳐서 엄마마저 오는 도중에 늑대에게 잡아 먹혔나보다 여기고 너무나 무서워졌다.    

다시 똑똑 소리가 났다. 이번에는 진짜 엄마가 온 것이다. 누구세요라고 아이들이 묻자 “내다”라는 대답만 들었다. “나는 OOO이다.”라고 실제 이름으로 대답하는 엄마는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 그냥 “내다.”라는 한마디로 충분하다. 거기다 대고 아이들이 엄마인지 못 믿겠으니 포토 아이디 보자고 하지도 않는다.

대신에 아이들은 엄마의 음성을 듣자마자 모든 걱정과 두려움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안도감으로 가득 차게 된다. 엄마에게 문을 열어주기도 전에 집안에서부터 너무 기뻐서 춤을 출 것이다. 큰 딸은 밖의 컴컴한 어느 구석에 늑대가 숨어 있을 줄 알아도 문을 열고 엄마를 맞으러 뛰어 나갈 것이다.    

십자가에서 들리는 음성

예수님이 물 위를 걸은 시간은 밤 4경이라고 한다.(25절) 새벽 서너 시 경으로 밤이 제일 깊고 춥고 깜깜할 때다. 또 배는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 있었다.(24절) 배는 갈릴리 바다 한 복판에 있었고 앞으로 갈 길이 멀었다는 뜻이다. 밤새 풍랑에 시달린 것이다. 이러다 죽는 것은 아닌지 완전히 낙심된 상태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바다에 파도와 바람이 요동을 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멀리서 희멀건 사람의 형체를 한 물체가 바다를 가로질러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당시의 장면을 상상해보라. 모두가 머리끝이 삐죽 서고 완전히 얼어붙었을 것이다. 혹시 저승사자가 잡으러 왔는가 여겼지 않겠는가?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며 소리지르거늘”(26절) 기도할 여유가 없을 정도로 혼비백산 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예수님은 “내다”라고 말한 것이다. 가뜩이나 컴컴한데다 파도에 가려 얼굴이 잘 안 보였겠지만 제자들은 그 음성만으로 금방 누군지 알았을 것이다. 아직 풍랑은 거세고 예수님은 멀찍이 떨어져 있어 배에 오르기 훨씬 전이었다. 갈릴리 바다의 최고 전문가였던 베드로마저 이 정도 폭풍이면 꼼짝 없이 죽겠다고 반쯤 포기하고 있는 바로 그 때에 “내다”라는 스승의 음성을 들었다. 예수님은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요10:14)고 했다. 특별히 당신의 양들이 당신을 아는 것이 그 음성을 듣기 때문이라고 했다.(요10:16)

당신의 양들은 당신의 음성을 어디서 듣는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1:18) 모세에게 “내다”라고 나타나신 그 하나님이 십자가에서도 “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한다는 뜻이다.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는 것이다.

당신과 등을 지고 원수 된 자들에게까지 그 사랑의 메시지를 전했다. 진정으로 회심하여 그분의 십자가 앞에 엎드리는 자들은 하늘의 생명책에 이름을 올려주고, 당신의 손바닥에도 새기신다. 십자가에서 주님의 “내다”라는 음성을 들은 자는 죄와 사탄과 사망의 권세의 멍에에서 풀어주신다. 인생의 맨 밑바닥에 엎드려져 있는 절망에서 건져 올려주신다.      

십자가에서 죄인을 향한 그 크신 사랑의 음성을 들은 신자는 더 이상 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바치고는 천 배, 만 배의 복으로 갚아달라는 엉터리 같은 기도를 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사방이 다 막혀서 빛 하나 비취지 않아 캄캄하고 거기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도 절대 실망하지 않는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묵상한다면 곧바로 “내다”라는 구원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힘들어도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회상하면서 그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면,  아니 기도할 힘조차 없어서 “주여!, 주여!”라고 그 이름을 부르기만 해도, 아니 그런 탄성조차 지르지 못해 얼굴을 예수님 쪽으로 돌리기만 해도 “내다”라는 너무나 따뜻하고 포근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나의 현재 모습이 아무리 형편없고 궁핍해도 주님으로부터 “내가 바로 여기 있잖니? 그런데 무엇을 걱정하느냐”라는 참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신자의 고난의 와중에 주님이 침을 삼키는 순간도 놓치지 않으시고 머리 가락까지 세면서 단 한 순간도 떠난 적이 없음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늑대와 엄마의 차이

남매를 잡아 먹으로 온 늑대는 “엄마다”라고 음성을 변조하면서까지 흉내는 내어도 함부로  “내다”라는 말을 못한다. 어떡하든 엄마라고 속이려면 더더욱 엄마 흉내를 내어야 한다. “엄마라니까, 왜 자꾸 묻고 따지느냐?”도리어 호통을 칠 것이다.

그러나 진짜 엄마는 엄마라고도 말할 필요가 없다. 단순히 “내다.”라고만 하며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 말은 엄마만 할 수 있는 특유의 말이다. 또 아이들도 너무나 그 말에 익숙해 그 짧은 한마디로도 엄마 목소리를 제일 잘 알아들을 수 있다.  

신자의 삶이 너무나 고달프고 힘들다는 것을 하나님은 잘 아신다. 그래도 기적을 베푸시지 않고 잠잠하신 이유는 무엇인가? 솔로몬 왕 앞에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두 엄마가 나타났다. 그래서 왕은 둘 다 엄마라고 우겨서 누가 진짜 엄마인지 모르겠으니 아이를 둘로 쪼개 나눠가지라고 했다. 가짜 엄마는 그러겠다고 했고 진짜 엄마는 그 아기를 포기하겠으니 다른 엄마에게 주라고 했다.

가짜 엄마는 아이를 차지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아이를 진짜 엄마에게 주지만 않으면 되었다. 거짓의 아비 사탄과 세상 흑암의 세력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오직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하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때로는 화려하고 풍성한 것도 준다. 그러다 결국은 그를 절망과 사망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을 뿐이다.

그 진짜 엄마처럼 하나님은 신자를 잠시 환난 중에, 심지어 사탄의 훼방에 빠지도록 묵인하신다. 욥처럼 모든 것을 졸지에 다 잃고 차라리 죽은 것이 낫겠다고 소리칠 지경까지 침묵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일까지도 포함하여 모든 것을 합력하여 반드시 선으로, 궁극적 승리로 이끄신다. 참 목자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과 바꾸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의 자녀를 절대로 더럽고 추한 세력에게 내어주지 않으신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의미

예수를 잘 믿는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신앙생활을 잘 한다는 것이 어떤 상태를 말하는가? 교회의 중직을 맡아 열심히 봉사하는 것인가? 대표기도를 청산유수처럼 하고 성경 지식을 꿰뚫고 있는 것인가? 물론 그렇다. 여러분 모두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이전에 예수님에게 이름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왜 이름이 없는지 그 깊은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이름이 없음에도 그분이 나의 목자이고 나는 그분의 양임에 단 한 치의 의심도 없어야 한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분과 자신과의 사이에 어떤 이해타산, 흥정, 계산, 꼼수, 거짓, 잔머리, 과장, 가식이 전혀 개입되지 않아야 한다. 친 엄마와 아이 사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는가? 정말 마음 턱 놓고 무엇이든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게 의탁할 수 있어야 한다. 너무나 고달프고 힘든 가운데도 새벽기도에 나오면 “아버지 저 왔습니다.”라고 잠잠히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친부모에게 지난 추석에 김치 냉장고를 선물로 드렸으니, 이번 설에는 아버지가 집문서 중에 하나쯤 주겠지라고 기대하거나 강요한다면 즉, 내가 수고하고 봉사했으니 수천 배의 기적으로 갚아주겠지 기대하고 떼쓴다면, 기독교 교리를 몰라도 상식적으로 틀렸음을 알 수 있지 않는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른다. 미국에 와서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 수백만 불짜리 집에 벤즈를 몇 대씩 굴리는 사람을 보면 신자라도 잠시 시기가 날 수 있다. 그러나 금방 예수님의 “내다”라는 음성이 들리는 순간 그런 질투가 얼마나 부끄러운 짓인지 금방 깨닫게 된다. 나아가 그런 호사가 전혀 부럽지 않게 되고 주님을 보배로 모신 것만으로도 감사가 넘친다.

한국에선 상대도 하지 않았을 것 같은 별 볼일 없는 교인한테 상처 받는 말을 듣고 자존심이 상해 밤새 끙끙 앓을 수 있다. 그런 순간에도 항상 함께 하시는 주님으로부터 “내가 있잖냐?”라는 위로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그 음성을 듣는 순간 나의 억울함과 상처와 눌림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도리어 그 상처 준 사람이 너무 안타깝고 불쌍해서 그 심령을 안고 내가 지금 받아 누리고 있는 주님의 풍성한 은혜가 그에게도 임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할 수 있다.

자신에게 해를 끼친 원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를 모를 때에는 꿈도 꾸지 못한 일이지 않는가? 이 얼마나 놀랍고 풍성하며 아름다운 은혜인가? 또 이런 기적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만약 표적이 아니라 뻥튀기 하듯이 대박 같은 기적을 기대했다면 번지수를 잘못 찾아온 것이다. 교회로 올 것이 아니라 다른 종교로 발길을 돌려야 한다.

교회 안에 들어온 여러분에게는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에 동참할 수 있다. 바꿔 말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예수님에게서 “내다”라는 따뜻하고 은혜로운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또 우리로 이런 놀라운 특권 가운데 있게 하신 이유는 십자가의 은총과 권능이 항상 함께 하고 있으니 죄악과 사탄과 사망에 당당하게 맞서 싸워 이기라는 뜻이다.  

12/9/2012


사라의 웃음

2013.01.01 21:28:11
*.109.85.156

솔로몬 앞에서 재판을 받았던 두 여인의 모습에서, 사탄의 계략은 아이를 진짜 엄마에게서 빼앗아 오려는 것일 뿐, 진짜 엄마의 아이를 향하여 불붙는 듯한 맘으로 일단 아이의 생명을 살리려 포기하는 모습, 그러나 결국은 자기 아이를 되찿게 될 수 밖엔 없는 그 불붙는 사랑의 맘.. 십자가에 높이 달리시며 끝까지 자기의 자녀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맘이 오롯이 느껴집니다.

"내다~~" 포토 아이디가 필요없고, 목소리 증명이 따로 필요 없는 아버지의 이름,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곤 곧장 알아듣는 양들처럼 어떤 골짜기여든, 어떤 산이여든 그 음성이 들리기에 푸근하고 평안하게 걸어가는 자녀가 되길 기도하게 됩니다.

임화평

2013.01.13 15:23:55
*.92.77.125

예수님께
"저에요~^^" 라고 대답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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