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 

출애굽기 강해 (30)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출14:10-14)

 

 

여호와보다 바로를 섬기려는 이스라엘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초자연적 기적을 열 번이나 역사했다. 그럼 애굽은 여호와를 믿고 따르지는 못할망정 최소한 거역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이스라엘도 당장에 하나님의 일에 헌신까지는 몰라도 믿음이 성장하거나 최소한 유지는 되어야 한다. 그러나 둘 다 정반대로 나쁘게 치달았다는 것이 본문의 내용이다.

 

애굽은 여호와에게 열 번이나 그렇게 호되게 당하고도 다시 이스라엘을 추격해왔다. 그런데 이는 사실 크게 이상할 것이 없다. 오늘날에도 불신자를 열 번 정도 전도하여 교회에 출석하면 아주 빠른 것이다. 부끄럽게도 저를 전도하려 수십 명이 수십 번을 복음을 전했어도 저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지금 애굽의 사정은 그것과 비교도 안 된다. 노예로 부려먹은 보잘 것 없는 민족이 살아 있는 신으로 추앙 받는 바로의 무덤을 눈앞에서 도굴했다. 바로와 애굽의 자존심이 도무지 참고 넘어갈 수 없는 치욕이었다.

 

마침 이스라엘이 숨을 곳이 마땅찮은 광야로 진군하다가 해변 곁(9절) 즉,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 곳에 장막을 쳤다는 보고를 받았다. 복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군대만 파견해 광야에서 전투하면 애굽 땅과 백성에게 직접적 피해가 없다. 애굽의 모든 장자들이 죽었으니 아들이든 형이든 죽지 않은 군인은 한 명도 없기에 히브리인에 대한 증오심으로 모두가 활활 불타고 있었다. 우리가 그들 같았으면 가만히 있었겠는가?

 

정작 문제는 애굽이 추격해 오는 것을 알게 된 이스라엘의 반응이다. 당장 모세에게 광야로 이끌어서 죽게 만들었다고 불평을 퍼부었다.(11절) 더 기가 찰 노릇은 애굽에 있을 때부터 사실은 출애굽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12절) 광야에서 죽느니 애굽에 남아 있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여호와를 섬기느니 바로를 섬기겠다는 엄청난 배역과 다름없는 뜻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 하나 붙들고 사백 년의 노예 생활을 견딘 것 아닌가?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선조인 야곱과 요셉의 유언조차 지킬 의사가 없는 천하의 패륜이지 않는가?

 

모세가 80년 만에 처음 나타나 출애굽 소명을 말했을 때는 못미더웠을 수 있다. 또 애굽이 출애굽을 허락할 리도 없어서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열 번의 기적으로 이왕에 출애굽을 한 마당에 차라리 애굽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너무 말이 안 된다.

 

우리와 똑 같은 성경인물들

 

성경을 읽을 때에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다. 성경은 판타지나 전설처럼 초현실적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다. 실제 일어난 사건을 강조는 해도 과장과 가감이 없이 일어난 그대로 기록한 책이다.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 행위들이 그 내용이다.

 

열 번의 기적도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것이다. 모세에게는 아무런 신통력이 없었고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뿐이다. 따라서 성경의 인물도 우리와 성정이 동일한 사람들이라는 전제 하에 당시 상황으로 돌아가서 묵상해야 한다.

 

출애굽 당시에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가려면 일상적으로 지중해 해변 길을 이용하는데 나흘 정도 걸린다. 그런데 그 중간에 블레셋 군대가 주둔하고 있다.(출13:17) 블레셋은 청동기 이후의 철기 문화가 융성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최신 무기를 장착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여호수아서 13:3에 여호수아가 늙어서 죽을 때까지 정복하지 못한 블레셋 다섯 족속의 이름이 나온다. 출애굽 때에 이미 그들은 동맹을 맺고 버티고 있었다. 애굽과 고대 바벨론에 맞서기 위해서였고 그 두 강대국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그 동맹은 강력했다.

 

이스라엘은 아무리 숫자적으로 이백 만이 넘지만 노인 부녀자 아이에 가축을 동행하고 가재도구까지 짊어진 이민 행렬이다. 전쟁 경험도 전무하고 군사체계와 무기가 전혀 갖춰지지 않았다. 블레셋과 싸워 도무지 승산이 없었다. 그럼 블레셋을 피해 우회해야 하는데 물과 먹을 것이 없는 광야로 들어가야 한다. 광야 길로 가면 최소 여섯 배, 즉 한 달 정도 걸린다. 애굽의 추격을 도무지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다.

 

이스라엘은 모세가 출애굽 소명을 처음 언급했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익히 알고 있었다. 지금 염려했던 그 시나리오와 하나도 다르지 않게 진행되고 있다. 그 때 우리가 이렇게 될 것이라고 이미 이야기 했지 않느냐고 따진 것이다.

 

노예 생활이 더 편하다.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싫어한 더 결정적인 원인이 있다. 애굽 노예 살이의 타성에 젖어 탈출에 대한 절박한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만 공급해주면 시키는 일만하면 몸이 조금 고단할지라도 그만큼 편한 일은 사실 없다. 뭔가 계획하고 고민하여 추진하고 또 잘못 되면 그 책임을 질 필요가 하등 없다.

 

아이들이 얼마나 편하게 사는가? 모든 사람이 남태평양 섬에서 유토피아를 꿈꾸지 않는가? 미국 사람들의 소원이 믿음과 상관없이 조기 은퇴이지 않는가? 노예 살이도 아무 고민할 필요 없이 생존이 보장된다는 측면에서 사실상 조기 은퇴와 다름없다.

 

아무리 그래도 이스라엘의 민족적 자긍심이 있지 너무 이스라엘을 비하하는 말 같은가? 그렇지 않다. 애굽에 이주한 이스라엘은 한 나라가 아니라 한 집안이었다. 한국이 일본에게 식민지 지배당할 때와 사정이 완전히 다르다. 쉽게 말해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른 한 거지 집안이 잘난 아들 한 명 둔 덕분에 횡재한 셈이다.

 

그 아들 요셉을 예우해주는 유효기간이 끝나자 애굽은 자기 국민들이 하기 싫어하는 3D 직종에 히브리인들을 강제로 동원시켰다. 애굽도 공짜로 부려먹으려니 미안해서 가끔 우상 신전의 제사에 참석시켜서 고기와 수박을 먹게 해주고 신전에서 난교 파티 같은 음란한 쾌락도 즐기게 해주었다.

 

히브리인들은 점차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한 기억도 희미해져 갔다. 정치 문화 경제 심지어 종교에도 자기들만의 색깔과 체계를 전혀 형성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바로가 모세와 처음 대면했을 때에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들어야 하나라고 따졌겠는가? 히브리인들이 평소 안식일에 여호와에 대한 경배를 철저히 이행했다면 아무리 바로라도 대놓고 그런 말을 함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나라가 아니었고 행정체계라고 할 것도 전혀 없었다. 이백 만이나 되는 백성들이 서로 민원을 쏟아내자 기껏 공동체 의사소통 채널을 언제 만들었는가? 출애굽 후에 모세의 장인이자 미디안 제사장인 이드로의 지도로 겨우 형성했다. 죄송하지만 이스라엘은 한마디로 무식한 천민들이었다.

 

생계 문제가 걸리면...

 

애굽이 끝까지 여호와를 거역했다고 해서 특별히 더 사악했던 것이 결코 아니다. 또 이스라엘이 여전히 하나님을 불신한다고 해서 우리의 믿음보다 월등이 나쁘다고 함부로 정죄할 수 없다.

 

당시나 지금이나 인간은 기본적인 생계 문제가 걸리면 자기들 자존심과 정체성은 언제든 포기한다. 멸시와 박해를 당해도 감내한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당장 현실의 도움을 주지 않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은 더 쉽다. 인간 죄의 본성이 자기를 하나님 위에 두는 것이지 않는가?

 

베드로는 예수님과 삼년간 동고동락하면서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기적은 열 번보다 훨씬 더 많이 보았다. 본인 입으로 예수님을 살아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다. 그런데도 자기가 죽을 지경에 이르자 세 번이나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했다. 베드로가 그랬으니 제 같은 사람도 지금 이런 설교를 할 수 있다. 베드로가 만약 세 번 부인하지 않았다면 그 정도로 의로운 사람만 설교해야 할 것이지 않는가?

 

잘 들으셔야 한다. 애굽은 민족적 종교적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나님에게 죽음을 불사하고 덤볐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육신적 죽음이 두려워 민족적 종교적 자긍심을 다 팽개쳐버리고 하나님께 불평만 쏟아내었다. 그럼 과연 누가 더 나쁜가? 누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 정확히 말하면 종교적 자아나 육체적 목숨이나 따지고 보면 결국 똑같다. 인간 자신을 말한다. 애굽이나 이스라엘이나 자기를 세상에서 최고로 높이고 인생의 주인으로 삼았기에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는 면에서 하나 차이가 없다.

 

흔히 이스라엘이 열 번의 기적을 보고도 하나님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빨리 그 은혜를 잊고 배역할 수 있는지 힐난한다. 이 또한 그렇게 쉽게 정죄할 수 있는 차원이 결코 아니다. 그들은 열 번의 재앙을 자기 눈으로 직접 목격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홉 번의 자연 재앙은 고센 땅 근처에도 오지 않았다. 고센은 오직 평온 속에 잠겨 있었다. 물론 그 재앙들에 대한 소문은 들었겠지만 고센의 애굽인들은 창피해서 쉬쉬했을 것이다. 모세와 아론에게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것뿐이다.

 

열 번째 애굽의 장자들이 죽을 때에도 문밖에 일절 나가지 못하고 곡성만 들었다. 은금 패물을 취할 때도 말만하니까 애굽 사람이 자진해서 갖다 주었다. 혹시 그 집안에 들어갔어도 애굽 장자들 모두가 일시에 죽었기에 침상에서 누워 자다가 심장마비 같은 죽음을 맞았다. 여호와 사자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칼로 찔러 죽인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밤 열두 시가 넘어서 황급하게 패물을 챙겼기에 집안을 둘러볼 여유도 없었다.

 

이스라엘 모두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얼떨결에 황급하게 탈출했다. 애굽 사람들의 마음이 언제 변할지 몰라 생존에 필수적인 피난 도구만 챙겨 나오기 바빴다. 하나님의 권능을 자기들 몸으로 체험해서 확고한 믿음이 생성될 짬이 전혀 없었다. 이스라엘은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권능에 대해 아직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심히 두려워 여호와께 부르짖었던 것이다.(10절)

 

처음으로 울부짖는 이스라엘

 

그런데 놀랍게도 출애굽 사건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에게 기도했다고 정식으로 기록하기는 본문이 처음이다. 노예로 학대 받을 때에 고통당하는 신음 소리는 분명 하늘에 상달되었으나 하나님 쪽에서 먼저 그 소리에 권념하셨다. 모세가 바로와 첫 대면 한 후에 노역을 갑절로 강화시켰다. 그 때도 바로를 찾아가 항변하고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은 했지만 여호와께 기도하지는 않았다.

 

열 가지 재앙은 하나님의 일방적 역사였기에 이스라엘은 그저 가만히 있기만 했다. 비록 노예 생활이 고달파도 큰 어려움 없이 평탄하게 지냈다. 사백 년 만에 처음으로 죽음의 위기에 내몰렸고 어쩔 수 없이 여호와께 부르짖게 된 것이다.

 

지금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그리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이스라엘로선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어서 계획도 하지 않았고 예정에도 없었던 국가와 군대 체계를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간섭하여 정식으로 만들게 했다.

 

또 애굽 군대의 추격을 허용함으로써 이스라엘의 공동체의 믿음마저 하나님이 세워나가고 있다. 하나님은 요셉이 형제들의 시기를 받아 광야에서 죽음의 구덩이에 빠트려지는 것을 허락하셨다. 요셉으로 진심으로 목숨을 걸고 여호와 당신을 찾게 만들어 그 전과 후의 인생을 정반대로 바꾸셨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로 그런 믿음의 첫 단계를 거치게 하셨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제발 이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달라는 기도가 저절로 터져 나오게 했다. 어느 누구도 기도하라고 강요 권면 심지어 주도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또 처음으로 아브라함의 언약에 대해 심각하고 진지하게 회상하게 되었다. 하나님이 우릴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여 복의 근원으로 삼아서 창성케 해준다고 약속하셨지 않는가? 그런데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지경에 빠트리느냐고 따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라도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애굽보다 더 거룩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배운 것이 많거나 적거나, 종교적으로 경건하거나 천박하거나 간에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무지하고 어리석기는 마찬가지다. 눈에 확실히 보이지 않으면 온전히 믿지 못한다.

 

심지어 애굽은 하나님의 큰 권능을 열 번을 보고도 자기들 눈앞에 당장 죽음이 닥치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으니 항복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죽을 고비가 닥치니까 겨우 하나님을 찾는 기도를 했다. 둘 다 영적으로 우열을 도무지 가릴 수 없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라.

 

그럼 인간 구원의 관건은 무엇인가? 인간이 소망을 걸어야 할 대상은 무엇인가? 전적으로 하나님 그분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다스리는지 그 원리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 그분의 관심은 오직 당신이 택하신 백성에게로만 향한다. 그 백성이 하나 잘난 것 없다. 오직 당신께서 택하여 언약 백성으로 삼았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렇게 하신다.

 

우리의 영혼은 너무 가난하고 초라하다. 죄 중에 빠져 있거나 너무 힘들어 탈출구 하나 없을 때에, 심지어 주변 사람 모두가 집안 식구까지도 손가락질을 할 지경에 이르러도 우리의 얼굴을 하나님 쪽으로 향하게 해야 한다. 그럼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있게 된다.

 

본문 13절의 결론이 어떻게 말하는가?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하나님의 권능을 눈으로 봐야만 믿겠다니 너희 소원대로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모세에게 간접적으로 전해들은 아홉 번의 자연 재앙과 한 밤중에 정신없이 탈출하느라 미처 실감하지 못한 열 번째 재앙과는 비교도 안 되는 더 큰 권능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선언한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된다고 하는가? 오늘 본 애굽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신다. 너희가 연약하고 무지해서 애굽의 추격을 보고 불안에 떠는 것은 당연하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로만 전해 들었기에 너희 믿음이 가난할 수밖에 없음도 알고 있다. 사백 년간 화려하고 장엄한 애굽의 우상 신전 제사에 속아 그 신들이 애굽을 창성케 해준다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 혹시 이 애굽 신들이 여호와보다 더 센 것이 아닌지 오해했을 수 있다.

 

그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 그래서 이제 출애굽 대장정의 클라이맥스로 홍해가 갈라지게 해주겠다. 애굽은 설마 바다가 갈라지는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고 지금 너희들을 추격해왔다. 그 애굽 군대가 모두 수장(水葬) 되는 엄청난 장면이 너희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다시는 애굽을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이라는 약속에는 크게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현실적으로 애굽이 세계 역사의 중심에서 벗어나 변두리에 머물 것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출애굽 이후에 애굽은 중동의 패권국가의 지위에서 떨어져 지금껏 나아지지 않고 더 약해졌다. 내세울 것이라고는 아무 쓸모없는 돌덩어리 무덤들뿐으로 그것들만 3500년 동안 자랑하고 있다. 그것도 히브리인들의 노역으로 만든 것을 말이다.

 

둘째는 그래서 다시는 애굽이 우상들은 물론 앞으로 접할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그곳 신들에게 현혹되지 말라는 것이다. 이전의 나태했던 생활 습관과 너무나 초라했던 사고방식 가치관 모두를 홍해에 완전히 던져 버리라는 것이다.

 

셋째로 가장 중요하게는 홍해의 기적은 당신께서 보여주신 권능의 절정이었다. 다시는 그만한 큰 기적은 없다는 것이다. 여호와 여호와다우심을 다 보여주었으니 당신이 보이지 않더라도 다시는 영원히 의심하지 말라는 것이다.

 

요컨대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세상에 어떤 신도 없다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여호와가 너희를 대신해서 모든 사악한 세력과 싸워서 너희를 지켜줄 테니 너희는 당신 쪽으로 얼굴만 향하고 잠잠히 있으라는 것이다.(14절)

 

믿음을 성장시키려면?

 

지금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믿음을 심어주고 있는데 일차적으로는 홍해가 갈라지는 큰 권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런 큰 권능을 다시는 보여주지 않을 것이니까 하나님이 정작 이스라엘에게 심어주려는 믿음은 “보지 않고도 당신을 믿는 믿음”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1:1-3에서 믿음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창조는 보지 못해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음을 아는 것이 믿음이라고 한다. 또 그래서 미래도 그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풍성히 역사할 것을 안 보고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다. 미래는 당연히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미래에 대해서 염려하지 않는 실력이 믿음이다.

 

그런 믿음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나님이 신자들 모두를 홍해를 반드시 건너게 만드신다. 죽음의 구덩이에 빠져 죽었다 살아나는 체험을 하게 한다. 각자 만의 고유의 방식으로 어떻게든 당신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 인생이 정반대로 뒤집어지게 만든다. 말씀에 깨어지든 죽을병에서 살리든 당신을 부인하려야 할 수 없게 만드신다.

 

요셉처럼 옛 사람이 완전히 깨어지게 한다. 우리 모두는 안 보이는 하나님을 스스로 믿을 수 있는 영적 실력이 원래 없다. 홍해의 기적 같이 그분의 최고의 권능에 따라 완전히 죽었다 살아나는 체험을 한 후라야 그분이 안 보여도 믿을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런데 그런 후에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온전히 확신 못할 수 있다. 계속 보여 달라고 아우성 칠 수 있다. 그러나 다시는 그런 큰 권능을 보여주시지 않는다. 보지 않고 믿어야 참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럼 믿음이 자라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해야 하는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 모두 지금껏 그러고도 계속 안절부절 하지 않는가? 그럼 길은 하나뿐이다. 안절부절 하는 것을 의지적으로라도 중지해야 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밖에 없다.

 

기도와 말씀은 우리도 어지간히 열심을 내며 많이 행했다. 그만하면 충분하다. 또 처음 한두 번 기도로 하나님이 우리 사정을 아신다. 아니 기도 안 해도 이미 다 알고 계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를 하지 않았는데도 그 고통을 하늘에서 보시고 권념하셨지 않는가?

 

의지적으로라도 염려하지 말라고 해서 하나님을 무조건 맹목적으로 믿으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순전하고도 겸손한 마음으로 찾을 때에 그분 얼굴을 언제든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분은 절대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 시간이 지체되는 것 같아도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반드시 우리의 소망을 회복시켜 주신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 히브리서 12:2 말씀대로 우리 믿음의 주요 믿음을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에 십자가에 죽으셨지 않는가? 자꾸 불안할 때에 그분 십자가를 생각하라.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기억하라. 그마저 실감 나지 않으면 각자가 홍해를 건넜던 회심의 체험을 회상하라. 그도 힘들면 매일 아침 각자 만의 유월절 제사를 드리면 된다.

 

우리 신앙 중에 가장 미약한 부분이 무엇인가? 잠잠히 지켜보지 못하는 것 아닌가? 그럼 바로 그것을 키워야 하지 않는가? 기도해도 정작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염려가 없어지지 않는다. 계속 같은 내용으로 반복해서 기도하려니 기도의 약효도 떨어지는 것 같다. 솔직히 습관적으로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 같은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는가? 또 혹시 뭔가 내가 잘못해서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지 죄책감까지 든다.

 

어떤 고난이 닥쳐도 평강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이 대신 나서서 싸워주는 것을 잠잠히 기다릴 수 있는 힘을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이 길만이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9/17/2017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78 출#31 14:15-20,31출애굽의 영광은 애굽을 위한 것이었다. master 2017-10-05 318
» 출#30 14:10-14 믿음이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 master 2017-10-05 105
76 출#29 13:17-22 구름과 불기둥은 은혜도 아니다. master 2017-09-15 194
75 출#28 12:29-36 은혜 받을 일밖에 남지 않았다. master 2017-09-15 280
74 출#27 12:29-36 가룟 유다보다 못한 목사 master 2017-09-15 71
73 출#26 12:21-28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master 2017-08-13 594
72 출#25 11:1-8 개의 혀를 움직이지 않게 하는 하나님 master 2017-08-03 74
71 출#24 9:4 기독교 좌파와 우파의 공통된 잘못 master 2017-07-24 46
70 출#23 9:1-7 차별과 구별을 분별해야 신자다. master 2017-07-19 99
69 출#22 7:20-25 현대과학이 풀지 못한 피라미드의 비밀 master 2017-07-19 233
68 출#21 7:8-13 하나님께 맡길 것은 문제와 고난이 아니다. master 2017-07-08 1441
67 출#20 6:1-9 가장 좋아하되 가장 모르는 하나님의 이름 master 2017-06-30 122
66 출#19 5:10-21 사탄이 가장 잘 쓰는 수법 master 2017-06-12 130
65 출#18 5:1-9 거짓말로 전도하고 거짓말로 살아라. master 2017-06-10 181
64 출#17 4:21-26 당신의 종을 죽이려는 하나님 master 2017-06-10 395
63 출#16 4:18-20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는가? master 2017-06-10 113
62 출#15 4:13-17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master 2017-06-10 123
61 출#14 4:10-12 “이제 가라 내가 함께 하리라.” master 2017-05-04 73
60 출#13 4:1-9 쉽고도 간결한 기독교 신앙 master 2017-04-08 102
59 출#12 3:18-22 광야로 사흘 길을 떠난 적이 있는가? master 2017-04-08 472

로그인

로그인폼

로그인 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