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영성의 본질

조회 수 709 추천 수 38 2010.03.14 22:22:23
기독교 영성의 본질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딤전1:18-20)


의외로 많은 신자들이 이성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을 터부시하는 이상한 경향이 있습니다. 어떡하든 영적으로 심오한 의미만 찾으려 노력합니다. 상식적이고도 간단한 내용의 해석은 뭔가 부족하다고 여깁니다. 성령의 조명을 받는다는 구실로 어떤 신비한 깨우침이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이 모든 피조물 중에 최고급한 지정의를 갖게 된 것은 하나님의 너무나도 좋은 선물입니다. 성경을 읽는데도 우리가 일차적으로 의존할 것은 올바르게 작동하는 이성입니다. 훌륭한 영성은 이성과 상충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초월할 뿐입니다.  

본문은 한 번 얻은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자주 인용되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디모데와 함께 신앙생활을 잘 하던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의 믿음이 파선되어서 사단에게 내어 준 바 되었으니 구원이 취소된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차분히 이성적으로 본문만 잘 따져 보아도 그 주장의 무리함을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먼저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준”이라고 합니다. 행동의 주체는 분명 바울로서 그가 그들을 사단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이 가당한 일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는 주장은 일단 그들이 구원 받았다는 사실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바울이 취소시켰다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그것도 사단과 짜고서, 최소한 사단을 불러내어서 그들을 사단 임의로 처리하라고 맡겨버린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도였다 해도 인간 바울로선 하나님이 주신 구원을 취소는커녕 간섭조차 절대 할 수 없습니다.

또 사단이 성도는 물론 어느 누구도 ‘징계’할 수 없습니다. 징계는 오직 하나님의 몫입니다. 징계란 단어의 뜻이 회개로 이끌어 의롭게 회복시키고 나아가 더 성숙케 만들려는 일시적인 벌이지 않습니까? 구원과 심판 또한 바울 같은 사도마저 단 한 치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사단은 더더욱 그러합니다. 사단이 할 수 있는 일은 시험과 유혹으로 미혹케 하여 결국멸망으로 빠트리는 것입니다. 징계나 심판이란 말 자체를 사단에게 적용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단에게 내어준 바 되었어도 단지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훼방이란 용어 또한 완전한 멸망이나 심판이 불가능하다고 전제한 뜻입니다. 열심히 가고 있는 중도에 올무나 걸림돌을 두어서 성가시게 만드는 것입니다. 진로를 바꾸거나 속도를 지연시킬 수는 있어도 궁극적으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을 실패시키지는 못합니다. 한 마디로 그 두 사람을 사단에게 진짜로 넘겨주어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내가 사단에게 내어주었다”는 구절과 “징계”와 “훼방”이란 단어들의 뜻이 일관되게 연결되지 있지 않습니까? 바울이 그 용어들을 용의주도하게 골라서 서술했다는 뜻입니다. 사도의 논리 전개는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단지 교회에서 훼방을 일삼는 두 사람을 출교시켰다는 뜻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 안과 밖을 하나님과 사단이 통치하는 영역으로 대조시킨 표현입니다. 그리고 교회 밖도 하나님의 궁극적 통치권 아래 있음을 전제로 한 비유일 뿐입니다. 교회 밖에 나가서 하나님의 징계를, 재차 강조하지만 징계는 사단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므로, 받도록 함으로써 회개하기를 바랐지 않습니까?

따라서 출교도 단지 일시적 처방이었을 뿐입니다. 다른 성도들의 믿음에 지장을 주지 않고 교회 전체의 덕을 세우기 위한 부득이한 조처였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권면, 충고, 기도, 치리의 범위를 넘어섰기 때문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은 실제로는 그들을 사단에게 내어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 통치에 완전히 내어맡긴 셈입니다.    

그들이 양심을 버리고 믿음이 파선하였다는 말도 믿음 자체를 버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의 취소 여부도 본문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사항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믿음이 도저히 힘을 발휘하지 못해 양심과 대치되는 행동을 일삼았다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도 알게 모르게 그럴 때가 많지 않습니까? 믿음과 상관없이, 심지어 자신이 죄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빤히 보고도 의지력마저 전혀 작동하지 않는 경우 말입니다. 지금 그들을 출교한 바울조차 로마서 7장에서 그러하다고 고백했지 않습니까? 그들은 그 정도가 아주 심하거나 습관적이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이미 받은 구원이 취소되지 않는다는 과도한 확신이 있었거나, 아니면 모든 죄를 용서하는 십자가 복음을 너무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죄를 짓고도 양심의 가책을 그리 심각하게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이 구원 후에 짓는 죄까지 모두 용서해 주었으니 이젠 마음 놓고 죄를 지어도 된다고 가르친 초대 교회의 이단분파에 속아 넘어갔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개인적으로 권면하는 말씀 안에 포함된 부연설명입니다. 권면의 초점은 그동안 바울이 가르친 복음의 진리에 따라서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 즉, 구원이 아니라 성화에 있습니다. 이미 구원 받은 성도라도 믿음이 파선 되어 양심에 저촉되는 행위를 많이 하는데 그 가장 심한 예로 그 두 사람을 든 것입니다.

또 이 서신은 특별히 디모데더러 앞으로 목회를 해나가면서 참조하라고 쓴 것입니다. 선배 목회자인 바울이 그들을 출교할 수밖에 없었던 뜻을 잘 새기라는 것입니다. 비록 성도를 교회에서 추방하는 것이 참으로 마음이 아플지라도 전체 공동체가 훼방되는 것보다는 도리어 낫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전에 모든 권면과 위로와 기도로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밖에서라도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회개하기를 소원하고 더욱 기도해 주어야(2;1의 내용이 그것임)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껏 설명 드린 내용은 특별히 심오하고 경건한 의미를 추적하지 않고도 순전히 말씀을 말씀 그대로 두고 이성만으로 분석한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바라며 간절히 기도해서 들은 음성도 아닙니다. 단지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준”이라는 한 구절, 아니 한 단어 “내”에서 출발해서 논리적으로 따져본 결과입니다.  

결국 많은 신자들이 쉽게 빠지는 오류는 이것입니다. 자꾸만 심오한 영성을 추구하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할을 자신 속에 있는 어떤 신비하며 초자연적 은사를 작동시켜서 뭔가 거룩한 결과를 맺게 하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에 따라 지정의의 역할은 아예 무시되거나, 아니면 자신의 지정의를 총동원해서 성령이 충만하게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 또한 너무나 말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성령은 신자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 중의 한 분입니다. 그분이 바로 신자의 영혼에 좌정해 있습니다. 신자가 그분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신자를 이끌어가는 것입니다. 단 신자의 자발적이고도 기꺼운 동의와 헌신 하에 말입니다. 또 그러기 위해서 신자의 인간적 정욕과 자질과 능력은 완전히 버려야 합니다.

말하자면 성령이 하는 역할은 오히려 신자의 지정의가 올바르게,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방향으로라는 뜻임, 작동할 수 있게끔 해주는 것입니다. 성령이 바로 지혜와 진리의 영이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신자의 기꺼운 동참이 선결 과제인데 그러지 못할 때에 그분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대신 간구해 주십니다. 때로는 강권적으로 역사하여 회개로 이끌며 필요하다면 징계도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성령이 신자의 지정의를 올바르게 이끄는 역사란 신자의 모든 사고와 말과 행동을 오로지 예수님을 중심에 두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만이 신자의 존재와 삶과 인생의 근원이 되게 하십니다. 머리 둘 곳이 없어도 좁고 협착한 길을 그분을 따라가게 만듭니다. 감사와 경외와 찬양을 가득 안고 말입니다. 물론 기쁨도 함께 말입니다. 좁고 협착한 길이라 현실적으로는 불편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본문은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십자가 복음에 근거한 올바른 영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셈입니다.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출교 당한 두 사람과는 달리 현실의 삶에서 자기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바른 영성이라는 것입니다.

양심과 믿음은 물론 이성에 반(反)하는 영성이란 없습니다. 신자가 자신이 가진 그 모든 것들을, 이미 하나님이 선물로 주어놓으신 은사와 재능임, 다 아울러서 오직 십자가만 지향하게 하여서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 기독교 영성의 본질이자 전부인 것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주을 알지 못하느뇨.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롬6:1-4)

3/3/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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