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조회 수 410 추천 수 8 2012.02.15 02:42:09

성령을 훼방하는 죄란?
마태복음 강해(139)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훼방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無益)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12:31-37)


할머니 산수 공부 같은 성경 해석

TV 오락 프로에서 들었던 개그우먼 김신영의 조크 겸 어렸을 때 할머니랑 살았을 때의 실화다. 산수를 너무 못해 매번 시험 점수가 형편없었다. 할머니가 하루는 “왜 그리 산수를 못하노? 내가 가르쳐 줄게. 문제를 낼 테니 풀어봐라. 3 더하기 4는 뭐꼬?”라고 물었다. 신영이는 아예 풀 수 없으니 아무 생각 없이 5라고 답했다. 할머니는 또 “5 빼기 2는 뭐꼬?”라고 물었고 신영이는 또 입에서 나오는 대로 4라고 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아주 잘하네. 그렇게만 하면 되는데 산수가 뭐가 어렵노.”라고 했다.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나 서로 헤맨 것이다.

교만하게 들릴지 몰라도 한국교회에서 성경을 가르치면서도 이처럼 우스꽝스런 경우가 많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본문이다. 성령을 말로 훼방하여 도무지 용서 받지 못하는 죄를 간혹 목사님들이 어떻게 가르치는가? 방언이나 신유 같은 성령의 은사가 있음을 부인 내지 의심하는 말만 해도, 심한 경우는 담임 목사의 사역 방침을 반대하거나 교회 행사에 적극 참여 하지 않아도 성령을 거역하지 말라고 야단쳤다.

신자들은 목사가 강단에서 아무리 엄숙하게 목청 높여 가르쳐도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아멘 하면 안 된다. 스스로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연구해야 한다. 조금 의심쩍은 성경 해석을 검증할 수 있는 아주 쉬운 방법이 하나 있다. 산수를 잘하려면 검산을 해야 한다. 신영이는 3 더하기 4를 5라고 했다. 그럼 5 빼기 4는 3이 되어야 정답인데 1이라고 했으니까 5라는 답은 틀린 것과 같은 이치다.

마찬가지로 방언을 부인하거나 목사의 잘못된 방침을 거역했다고 심판 날에 구원 받지 못할 것인지 역으로 따져보라. 그 답은 당연히 No이지 않는가? 방언을 의심하는 것은 성경을 해석하는 관점이 다른 것이며, 목사의 경우 같은 인간인지라 과실이 있을 수 있기에 오류가 확실하면 반대해도 된다. 심판 날에 결코 사하심을 못 받는 죄는 오직 하나다. 잘 아는 대로 살아 있을 동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은 것이다.    

조금 무리한 해석은 어느 정도 성경과 교리에 식견이 있는 신자라면 그 구체적 이유를 설명은 못해도 틀렸으리라 짐작은 한다. 상식적 판단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본문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아주 어렵다. 질문에 질문이 꼬리를 문다.

가장 먼저 말로 예수님을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고 성령을 훼방하면 그렇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가? 32절의 인자가 영어로 the라는 정관사에 Son이라고 대문자로 표기되었기에 분명 예수님이다. 그럼 성령이 예수님보다 더 우월하다는 뜻인가? 성삼위 하나님은 모든 속성과 능력과 권위에서 동일하지 않는가? 예수님 훼방이 바로 성령 훼방이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지 않는가?

아니면 베드로처럼 예수님을 말로 세 번이나 부인했는데도 용서 받은 사건과 연관이 있는가? 그럼 우리도 그처럼 해도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또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마10:33)와 상충되지 않는가?  

거기다 36, 37절에는 무익(無益)한 말을 하면 심판 날에 정죄함을 받는다고 했다. 쌍스런 욕이나 비방의 말이 아니라 단순히 아무 의미 없고 무가치한 말이다. 그럼 부부싸움할 때 화를 내며 내뱉은 말이나 세상 스캔들로 잡담을 한 것도 해당되는가? 심판 날에 상급을 못 받는 정도가 아니라 정죄함을 받는다고 했다. 불신자가 그러면 구원을 못 받고, 신자는 이미 받은 구원이 취소된다는 뜻인가? 정말로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문다.  

성경해석의 원리

이번에는 제가 지어낸 비유다. 할머니가 신영이에게 “이번 학기 끝날 때에 산수 성적이 좋아지면 네가 원하는 스마트폰을 사주마.”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신영이는 어제는 빵점 맞다가 오늘 10점 맞았으니 당장 사달라고 조른다. “성적이 좋아지면”과 “스마튼 폰” 두 마디에만 신경을 쓴 것이다. 할머니는 “학기 끝날 때”라고 분명히 못을 박았는데도 말이다.  

신자들이 성경을 볼 때 가장 많이 범하는 실수다. 극히 일부만 그것도 자기 좋아하는 문구만 골라본다. 나아가 자신의 선입관, 편견, 고집, 오류를 믹스시켜서 전혀 엉뚱한 성경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경우도 많다. 그래선 아무리 새벽마다 큐티를 해도 신영이처럼 겨우 산수 10점 맞고도 왜 복을 안 주느냐고 하나님만 졸라댄다. 성경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거나 마음에 드는 위로의 말만 찾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 최면을 건 것에 불과하다.

본문의 이해가 어려운 이유는 믿음이 약해서가 아니다. 기독교의 교리를 몰라서도 아니다. 오직 본문(text)만 떼어 내어 독립된 구절로서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읽을 때는 가장 먼저 성경이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성경은 반드시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 성경 안에 해석의 열쇠와 힌트는 물론 정답도 다 들어 있기 때문이다.

제기된 의문들 중에 본문 안에 이미 그 답이 나와 있는 것도 있다. “무익한 말을 하면 심판 날에 정죄받는가?”라는 질문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34절에서 어떻게 불렀는가? “독사의 자식들아!”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언뜻 고상하게 보이지만 이는 아주 심한 욕이다. 어떤 목사님이 한국에는 개가 많아서 ‘개 새끼’가 욕이 되듯이, 이스라엘은 뱀이 많아서 ‘뱀 새끼’라고 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런 뉴앙스를 지닌 욕이라는 것이다. 거기다 사탄이 뱀을 조종해 이브를 유혹해 타락시켰다. 말하자면 예수님은 “이 사탄의 종 개 새끼들아!”라고 욕한 셈이다.

예수님도 욕을 했다니 참으로 위로가 되지 않는가? 그것도 바리새인들에게 말이다. 그들은  오늘로 치면 목사에 해당된다. 목사를 거역하면 벌 받는다고 목사들이 신자에게 겁을 주지만, 그들이 잘못하면 이처럼 욕을 해도 지옥 가기는커녕 벌도 받지 않는다. 누가 뭐라 하면 나는 예수님 따라 했다고 하면 된다.

단 예수님처럼 영적으로 완벽한 분별력을 갖추고 평소에도 전혀 하자가 없이 살아가는 자라야 한다. 그래야만 목사 욕을 할 자격이 있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그래야만 예수님을 따라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저 한두 개 그것도 어설프게 예수님을 흉내 내는 것은 돌팔이 신자에 불과하다. 쉬운 예로 자동차에 십자가나 물고기 표지를 잔뜩 붙여 놓았다면 과속이나 교통법규 위반은 절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을 성경으로 읽는다는 가장 기본적 의미는 앞뒤 문맥(context)의 바탕에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두에 제기된 질문들의 답을 본문 안에서 찾기 힘드니까 더더욱 그래야 한다. 다행히도 쉽게 그럴 수 있는 길이 있다. 선각자의 도움으로 성경에는 새롭게 시작되는 이야기마다 작은 동그라미가 붙어 있다. 장절의 구분보다 반드시 한 동그라미에서 다음 동그라미까지 이어서 읽고 묵상해야 한다. 하나의 연결되는 스토리나 주제이기 때문이다. 본문도 반드시 22절에서 37절까지 이어서 묵상해야 한다.

예수님이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더러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서 귀신을 쫓아내었다고 비난했다. 그에 대해 주님은 상식적으로 따져도 같은 편끼리 서로 싸우면 망하지 않느냐고 반발한 후에 본문의 말씀을 하셨다. 그럼 본문을 해석할 수 있는 두 가지 열쇠를 이미 얻은 셈이다. 귀신을 쫓아낸 사건과 연결된 말씀이라는 것과, 또 일차적으로 당시의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하신 말씀이지 오늘날의 신자에게 직접 해당되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적으로 상당히 깨인 바리새인들

그런데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방한 말이 전혀 틀린 말이 아님을 아는가? 한국에 있을 때에 도사(道士) 친구가 있었는데, 제가 미국 이민가면 목사가 될 것이라고 알아맞혔다. 또 다른 친구 중의 가까운 지인이 한국에서 제일 작두 위에서 춤을 잘 추어 일본 NHK TV 방송에까지 출연한 박수가 있었다. 도사 친구가 그 박수더러 엉터리라고 지적하면서 가서 한번  혼쭐을 내줄 것이라고 큰소리 쳤다. 오래 전에 기독교로 개종한 한 무당이 쓴 간증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무당들끼리는 실제로 어느 귀신이 더 센지 무협지처럼 서로 힘을 겨루며 싸운다고 한다.

고대의 모든 종족이나, 아직도 선교지의 미개 종족들에는 반드시 주술사가 있었는데 족장을 겸하거나 족장보다 더 권세가 세었다. 간단한 병을 고치고, 앞일도 알아맞히고, 귀신을 쫓아내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사단의 음흉하고 교활한 술수가 있다. 사람들에게 신비한 초자연적 능력으로 현혹하고 겁을 주어서 노예로 묶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약한 귀신을 쫓아내고는 예수님 말씀대로 더 강한 귀신 일곱을 집어넣는다. 부적이나 굿 값을 더 받아 내거나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는 목적이다. 시쳇말로 “짜고 치는 고스톱”에 불과하다. 그런 현상이 있음을 바리새인들은 익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모세오경에는 박수는 반드시 죽이라고 다섯 번이나 명령하고 있다. 우상 숭배를 가장 심각하게 정죄한 것이다. 대신에 거룩한 율법은 인간이 살고 죽는 것은 오직 어린 양의 피로 드리는 대속제사 뿐이라고 거듭 거듭 강조하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주술사들의 행태와 모세 율법에 정통했던 것이다. 영적 차원으로만 따지면 실은 상당히 깨인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정작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다. 오늘날도 모든 불신자들이 범하는 가장 큰 잘못이다. 지금 눈앞에 서있는 예수님이 바로 그 세상 죄를 지고가실 어린양임을 몰랐다. 사람을 영원히 살고 죽일 구세주요 심판주로 오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이다.

성경은 참으로 정미한 기록이다. 22절에 보면 예수님이 고쳐주신 자는 귀신이 들렸고, 장님이었고, 벙어리였다. 각기 다른 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 현대의 첨단 의학기술로도 도무지 고치지 못하는 증상이 셋이나 있었다. 예수님은 순간적으로 그 셋을 말씀 한 마디로 고쳤다. 말씀 한마디로 이런 자를 완벽하게 고치는 이는 오직 인간을 지으시어 인간의 육과 혼과 영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뿐이다.

그래서 23절에 따르면 무리들 즉, 일반 유대인들은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했다. 다윗의 자손은 유대인들의 메시아에 대한 별칭이다. 바리새인들보다 영적으로 훨씬 덜 깨인  대중이 보아도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이적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메시아이거나, 최소한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냈다는 사실만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는 뜻이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24절에서 바리새인들은 “듣고 가로되” 귀신의 왕을 힘입었다고 비방했다. 대중들이 예수를 인정하는 말을 하자 그 인기를 시샘하고 자기들의 정치적 종교적 기득권을 지키려한 것이다. 초등학생도 부인할 수 없는 엄연한 진실을 부인했다. 인간의 그 작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려 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래서 28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했다”고 말한 것이다. 비록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있었지만 여전히 사탄의 흑암의 권세가,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장악하고 있었다. 특별히 그 때는 아직 십자가 구원이 성취되기 전이었다. 죄악과 사망과 사탄의 노예가 되어 신음하는 불쌍한 죄인들을 구원하러 오신 하나님 그분을 지금 사탄 혹은 사탄의 종이라고 비방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임재케 하는 메시아라는 사실만 단순히 부인한 것이 아니었다. 이미 예수를 죽일 모의를 하고는(마12:14) 그 구실을 찾고 있었다. 율법에 당장 죽이라고 다섯 번이나 강조하고 있는 사단의 종 즉, 무당으로 몰아가는 것만큼 편한 것이 없었다. 마음속에 이미 확고히 자리 잡은 흉악한 살인모의를 겉으로는 거룩한 율법을 핑계 삼아 감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음에 가득한 악을 입으로 내뱉은 것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한 것이다.(34절) 당신을 바알세블의 종이라고 비방하는 너희들이야말로 바로 독사의 자식 즉, 사탄의 노예라는 것이다.        

그들의 더 결정적인 잘못은 따로 있었다. 예수를 사단 혹은 그 종이라고 말한 것은 일종의 종교적 유권 해석이었다. 만약 앞으로 그를 따르는 자는 같은 편으로 취급하겠다는 경고였다. 그들로선 예수는 언제든 무당으로 몰아 그 자리에서 돌로 쳐 죽이면 되었다. 그들의 관심은 어떻게 하든 무리들을 예수로부터 떼어내는 일이었다.

복음서에 예수를 죽이려다 미루었다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온다. 대중들이 예수를 지지 호응하고 있는데 자칫 무리수를 둘 이유는 없었던 것이다. 그를 죽일 결정적 기회를 엿보고 또 대중들에게 그의 인기를 떨어트릴 목적으로 종교적 권위를 갖고 이단이라고 공포할 필요 때문이었다. 대중에게 경고를 계속 발하면서 예수를 골고다로 끌고 가는 구실을 쌓으려는 뜻이었다.  

성령을 거역하는 죄와 예수를 거역하는 죄

성경에 대한 질문의 답은 성경 안에 있다고 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직접 모든 질문에 대한 정답을 설명해 주셨다. “나와 함께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30절)가 바로 그것이다. 사하심을 못 받는 죄는 예수와 함께 하지 아니하여 반대하는 자다. 모든 죄 중에 유일하게 예수를 믿지 않는 죄만 하나님의 사하심을 결코 얻지 못한다.

거기다 더욱 큰 벌을 받을 죄는 함께 모으지 아니하고 헤치는 자다. “헤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을 방해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사람들을 모으는 것(collect)의 반대 즉, 흩어지게 만드는(scatter) 것이다. 혼자 예수 안 믿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 믿으려는 자들을 믿지 못하게 적극적으로 훼방 놓는 것이다. 유대 무리들이 다윗의 자손이라고 인정했는데 사탄의 종이라고 유권해석을 내렸고 앞으로 그를 추종하면 같은 편으로 취급하겠다고 한 짓이다. 자기들 밥그릇을 지키려고 적극적으로 예수 못 믿게 만드는 죄다.

성령의 가장 첫 째 가는 역할이 무엇인가? 방언이나 신유의 은사를 일으키는 것인가? 아니다. 한 죄인을 거듭나게 해서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있는 자는 예수를 저주할 자라고 말하지 못한다.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를 주시라 고백할 수 없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당신의 하나님 되심을 알게 하도록 하나님이신 또 다른, 서로 다른(different)의 의미가 아닌 똑 같지만 다른(another), 보혜사를 보내주신 것이다. 악령은 성령의 정반대다. 악령이 하는 첫 째 가는 역할도 당연히 어떻게 하든 불신자로 예수를 못 믿게 하고, 이왕에 믿는 자는 멀어지게 만드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풀어야 할 질문은 사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말로 인자를 거역하는 죄”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 뜻을 풀 수 있는 열쇠도 예수님이 이미 말씀해 주셨다. 좋은 실과가 열리면 나무도 좋다고 말하라고 했다. 쉽게 말해 사과 열매가 열리면 사과나무이지 절대 배나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유대 무리는 성령의 권능이 아니고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이적이 일어났으므로 그 이적을 일으킨 예수를 다윗의 자손이라고 인정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사과가 열린 나무를 보고도 배나무라고 우겼다.

만약 예수님이 신적 권능이 드러나지 않는 인간적 행위를 한 것을 두고, 예컨대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지 않는다거나 죄인들과 교제하며 술을 마신다고, 비난한 것은 괜찮다는 것이다. 인간의 일상적 일을 보고 그 인간을 평가했기 때문이다. 또 할례나 안식일에 관한 율법을 달리 해석한 것을 두고 비평해도 괜찮다는 것이다. 예수를 인간 랍비로만 보고 한 말이기 때문이다. 단 그 말을 하는 자의 나무도 반드시 실과와 같아야 한다. 순수하게 유대사회의 좋은 관습과 율법을 지키려고 예수를 말로 거역했다면 사하심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말이다. 본문이 바리새인들에게 직접 해당된다고 해서 안심하기는 이르다. 서두에서 간혹 목사들이 자신이 세운 사역 방침을 따르지 않는다고 성령을 훼방한다고 야단친다고 했다. 그 의도는 자신의 잘못 유무는 제쳐두고 무조건 목사를 따르라는 것이다. 교인들로 예수님의 제자로 양육시키기보다는 자기 수하에 묶여 두려는 의도다. 교회의 교인 숫자만 늘리려는, 다른 말로 밥그릇을 지키려, 성경을 잘못 가르치고 성도를 오도하는 셈이 된다.

바꿔 말해 목사들이 신자들을 겁주려고 성경 말씀을 자기 의도하는 바에 맞추어 악용한 것이다. 영의 양식을 먹이고 가르쳐 자라게 만들어야 할 회중들에게 성경의 깊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함으로써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방해한 것이다. 어쩌면 예수님으로부터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저주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봉사가 봉사를 인도하면 함께 구덩이에 빠트리게 된다고 유독 바리새인들만 그렇게 야단쳤지 않는가?  

지옥에서도 계속하는 기도

이제 각 자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말로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짓고 있는가? 또 말로 인자를 거역하는 죄를 짓는가? 결코 아니다. 불신자들마저 정확히 인식은 못해도 은연중에 두려워서라도 하나님이나 예수를 비방하지 못한다. 신자들은 더더욱 그렇다. 본문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대로 예수 믿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훼방 놓는 일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한다. 가뜩이나 제대로 전도를 못해서 하나님께 죄송한 심정이지 않는가? 그럼에도 신자들이 본문과 관련해서 쉽게 간과해버리는 사항이 하나 있다. 아주 심각한 오류인데도 쉽게 지나친다.

어떤 나이든 미국 신자가 너무나 심각한 죄를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이 용서를 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심한 죄책감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그 죄를 용서해달라고 계속해서 빌었다. 이제 곧 죽을 텐데 자기는 천국 대신에 지옥에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기도해도 마음에 용서 받았다는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자기가 지옥에 가게 되면 무엇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틀림없이 거기서도 자기를 용서해달라고 계속 기도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불현듯 이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를 다 용서하시어 구원하셨는데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싶었다. 복음의 진리가 명확하게 새삼 깨달아졌다. 내가 나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이 예수님의 십자가 의를 통해 용서하신다는 너무나 간단한 진리를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를 믿기 전에 자신의 영적 무지, 무능, 타락 등을 깨닫고 애통해 하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그러나 예수를 믿은 후에도 자칫 자기 연민, 자기 동정, 자기 후회를 넘어서 죄책과  정죄에 빠져 있는 자들이 의외로 많다. 신자는 이미 용서 받은 죄인이다. 반면에 불신자는 아직 용서 받지 못한 죄인이다. 글자 한두 자만 다르지만 그 차이로 인해 신자가 누릴 수 있는 은혜와 권능이 얼마나 귀하고 엄청난지 잘 모르고 있다.

많은 신자들이 현실에서 조금만 어려운 일이 생겨도 혹시 내가 잘못해서 하나님께 벌 받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해진다. 그래서 기도를 열심히 해보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덧난다. 그럼 하나님은 자기를 외면하는가, 아예 알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된다. 기도를 해도 말씀을 봐도 평강과 기쁨이 생기지 않는다.

말하자면 예수 믿는 것이 전혀 즐겁지 않게 된다. 기독교 구원의 교리를 모르는 것도 아니다. 속으로는 죄책이나 염려가 끊이지 않는데도 교회를 다닌 지 오래다보니 주위 성도들 눈치가 있어서 겉으로는 경건하고 엄숙한 표정을 가장한다. 그러다보니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이상야릇한 표정이 된다. 차지도 덥지도 않은 것이다. 스스로 예수 믿는 것이 자신이 없으니 전도는 아예 할 엄두도 못 낸다. 신자들의 그런 표정을 본 불신자들이 예수 믿어볼까 흥미나 관심을 갖지 못하게 되니까 실은 함께 모으지 아니하고 오히려 간접적이긴 하지만 헤치는 죄를 짓고 있는 셈이다.    

예수 믿은 후에도 죄를 지을 수 있다. 또 연약하고 무능한 인간인지라 주위 환경에 따라 힘이 빠질 때도 많다. 죄에 민감한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영적으로 침체 된 것을 자각하는 것도 그렇다. 문제는 그런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계속 자책하고 회개하고 낮아져 있는 것을 믿음이 좋은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마저 있다. 자기는 회개하고 있고 또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다는 자부심이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 자칫 자긴 연민, 자기 동정, 자기 최면과 혼동될 수 있다.

영적 침체를 자각하는 것 자체가 좋은 신앙은 아니다. 좋은 신앙으로 들어가는 입구일 뿐이다. 낮아지는 것은 항상 다시 올라가기 위한 것이다. 하늘에 쌓인 하나님의 보물은 엄청나다. 성령을 통해 신자에게 부어주시는 위로, 은혜, 권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른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게 해 줄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 그런데도 신자들은 고개를 하늘로 향할 줄 모른다. 어깨에는 힘이 다 빠지고 연신 고개를 땅으로 떨구고만 있다. 신자들 사이에는 아주 겸손한 신앙으로 칭찬 받을지 몰라도 하나님 보시기엔 게으른 신앙 밖에 안 된다.

사람을 진짜로 살리는 것.

예의 신자가 아무리 기도해도 용서에 대한 확신이 안 생겨 평강이 없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스도 십자가 사죄의 교리를 몰랐던 것이 아니다. 이미 설교나 성경공부를 통해 수도 없이 듣고 배워서 줄줄 외울 정도다. 기도할 때에 그런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라는 권면도 들었다. 아마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 죄를 다 사해주셨음을 믿습니다.”라고 선포하면서 의지적으로 그 용서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 노력도 많이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평강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 이유는 자신의 감정으로 자기 신앙을 높이고 낮춘 것 때문이다. 감정이 고양되면 신앙이 좋아진 것 같고 그에 따라 하나님의 은혜와 권능도 자기에게 더 많이 베풀어진 것 같다. 말하자면 자신의 지정의가 자기 신앙과 하나님의 은혜를 판단하는 기준이자 받아들이는 수단이 되었다. 자기 스스로 하나님 그분까지 크게 만들었다 작게 만들었다 하는 것이다.

정작 그 신자가 잊고 있었던 사실은 인간을 살리고 죽이는 것은 결코 자신의 지정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말 그대로 자신의 지정의로는 자기가 누구인지, 자신의 정체성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죽이 끓듯이 생각이 바뀐다. 먹고 마시는 것에 아무 부족이 없어도 까닭 모를 불안, 염려, 초조, 공허, 갈급, 나아가 분노 저주가 치민다. 그러니 불신자는 평생 자아를 찾으려고 헤매다 모두가 실패하고 생을 마감하지 않는가?  

그 신자가 계속 기도해도 평강이 생기지 않은 이유는 기도 자체가 평강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도 자기 지정의로만, 특별히 감정이 좋아지도록 초점을 맞추고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진 인간은 그분의 생기를 호흡하지 않고는 살아도 죽은 시체와 다름없다. 인간 심연의 깊은 본질을 충만케 하여서 참 안식과 평강과 자유를 줄 수 있는 근거는 오직 성령의 역사뿐이다.

그 신자가 불현듯 지옥에서도 기도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 것도 실은 성령의 간섭이었다. “아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가 너무나 소중하구나. 이 세상에 그보다 귀한 것은 아무 것도 없구나. 내 인생에서 예수가 빠지면 시체일 뿐이구나. 오직 예수만이 처음이자 마지막이고 알파요 오메가로구나. 이 곤고한 몸에서 나를 구원해 줄 수 있는 분은 예수뿐이구나.”라는 고백이 저절로 나온 것이다.

실제로 성령의 위로가 임하는 것이다. 단순히 지성으로 교리를 재확인 하고 의지로 자신의 감정을 좋게 바꾸려 노력하는 정도가 아니다. 그런 고백이 자신의 지정의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심령 깊숙한 곳에서 저절로 토해져 나오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이 자신의 지정의를 완전히 무력화(無力化) 시키고 자기 가슴에 가득 밀려오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기에게 아무 생각이 없거나, 마약을 먹었듯이 비몽사몽간에 하는 말이 아니다. 분명히 자신의 지정의는 멀쩡하다. 아니 더 생생하고 깨끗하다. 자신의 지정의를 초월하는 성령님의 신비하고도 다함없는 위로가 실제로 임한 것을 자기 지정의로 충분히 감지할 수 있다. 그래서 지금껏 자기 노력으로는 도무지 얻을 수 없었던 충만함, 따뜻함, 안도감, 만족감이 자신을 감싸고 있음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된다.  

예수 믿는 엄청난 권세

예수 믿는 것이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납득 동의하여 믿어보기로 노력하고, 불신자들보다 더 선하게 살고, 이런 저런 문제 기도하여 해결 받는 정도가 결코 아니다. 불신자들은 자신의 생각과 기분으로만 판단하고 결정하고 시행한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서 내 멋대로 산다. 그러나 그렇게 사는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철두철미하게 깨어지고 또 깨어지는 체험을 통해서 지정의가 주관하지 못하는 차원이 있음을 절감하게 된 것이 신자다.

그리고 그 지정의를 넘어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 차원이 가시적 영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더 아름답고 생기가 넘치며 풍요롭고 거룩하다는 사실을 실제로 체험하게 된 것이다. 자신의 존재와 삶과 인생 전부가 그 영적 차원에서 주관되고 있음도 알게 된 것이다. 영의 눈이 열려 거룩하신 하나님이 나를 온전히 붙들고 있음을 보고 듣고 만지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받아 누릴 뿐 아니라 주위의 사탄에 미혹된 영혼들이 너무 불쌍하고 안타까워 그 사랑을 나눠주고 있는 것이 신자의 삶인 것이다.  

예수 믿는 권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직접 확인해 보자.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8:26,27)

성령 하나님이 연약한 우리가 빌 바를 모를 때에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해 주신다고 한다. 죄책감과 자기 연민에 빠져서 하염없이 바닥에 엎드려져 있을 때에, 현실의 환난이 겹치고 이해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불만이 가득 찰 때에, 사방이 꽉 막혀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에, 기도할 기분과 힘도 없어서 그저 땅이 꺼질 것 같은 한숨과 함께 단지 "주여! 주여!"라고 밖에 외치지 못할 때에, 게으름과 잘못된 이전 습관에 빠져 주저앉아 있을 때에, 사탄의 시험과 유혹에 빠지고 스스로 옛 본성에 넘어가 죄악을 즐기고 있을 때에, 사탄이 아주 위급한 지경으로 끌고 가 내 인생의 진로를 결정적으로 훼방하려 할 때에, 인간관계나 교회에서 상처를 받아 믿음이 줄어들고 심지어 하나님에 대한 열정과 소망마저 자꾸 줄어들 때에, 특별히 아직도 지정의만 가지고 하나님의 크기를 내가 줄였다 늘였다 할 때에, 등등 헤아릴 수 없는 모든 경우에 성령이 대신 기도해 주신다.

요컨대 하나님 그분이 한 인간을, 그것도 믿음은 물론 도덕적 상태도 아주 형편없는 한 신자를 위해서 기도해주신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가? 믿음과 열성이 좋은 내 아내나, 구역장이나, 중보기도 팀장이나, 담임 목사의 기도도 소중하지만 도무지 그 기도들과는 비교도 안 되지 않는가? 성령 하나님이 우리 대신에 기도해주시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성자 하나님은 그 기도를 금 대접에 받아서 성부께 중보하시며, 성부 하나님은 그 대접을 받자마자 바로 응답할 준비를 하신다는 것이다.

제대로 믿어지지 않는가? 스데반의 순교 사건에서 충분히 증명되지 않았는가? 그가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기도하면서 죽을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지 않는가? 돌에 맞아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가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빛이 넘치고 평강으로 가득 차 있었지 않는가?

바로 그 자리에 바리새인이자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이 있었다. 그가 스데반을 하나님을 모욕하는 죄로 바로 그 자리에서 돌로 쳐 죽이라는 유권적 명령을 내린 것이다. 본문의 사건에서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 예수를 따르는 이는 같은 사탄의 편으로 간주하겠다고 경고했던 것을 최초로 직접 실천한 것이다. 그러나 과연 누가 사탄의 편이며 누가 하나님의 편인가? 또 사탄이 잠시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탄과 사망의 권세마저 뚫고 나와 승리한 자는 바로 예수 믿는 스데반이지 않는가?

예수를 절대 시시하게 믿지 말라.

우리 모두는 예수님 당시에 살았더라면 유대 무리와 동일하게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쳤을 자들이다. 그런데도 주님은 일방적으로 택하여 모든 죄를 사하시고 구원해 주셨다. 아무 자격과 공로 하나 없이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전문 사역자가 아닌 일반 신자라도 선교지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꾸짖기만 해도 그 마을의 주술사는 꼼짝도 못하고 패배하게 된다. 거기다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장님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는 이적도 심심찮게 일어난다. “예수 믿는 신자는 점괘가 안 나온다.”라고 흔히들 말하는데, 그것이 얼마나 엄청난 영적 진리와 권능을 대변하는지 모른다. 사탄은  예수 믿는 이를 잠깐 유혹은 해도 전적으로 통제 조종하지는 절대로 못한다.    

우리의 기도의 응답이 늦어진다고 영적으로 침체될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 늦어지는 이유는 다니엘서(10;12)에 기록된 그대로다. 우리가 진정으로 겸비하여져 엎드려 간구하는 기도는 하나님이 듣자마자 바로 응답해 주시려고 천사들을 보낸다. 그러나 중간에 오는 동안 악한 귀신들과 만나서 싸우느라 지체된다.

천사들이 매번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한 영역에서 무협지처럼 귀신들과 힘 겨루기 한다는 뜻이 아니다. 사탄은 하나님에게 한주먹 감도 안 된다. 신자를 세상의 어떤 거짓, 미혹, 더러움, 추함, 악함, 훼방, 간사, 음란, 궤휼, 죄악 등에서 지켜서 당신처럼 온전하고 거룩하게 바꾸어주려 하신다는 뜻이다. 거기다 우리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그분만의 신비하고 엄청나며 영원까지 이어지는 선하신 뜻과 계획을 이루려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가 죽고 난 뒤에도 우리의 모든 기도는 응답이 된다.

작금 신자들이 예수를 너무 시시하게 믿고 있다. 기독교가 힘이 빠지고 있다. 신자나 교회들이 도덕적 비리를 많이 저질러서가 절대 그 원인이 아니다. 아무래도 예수를 믿는 자는  이전보다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실제로 죄를 덜 짓는다. 그보다는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에서 합동으로 사역하고, 아니 우리 대신에 기도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권세인지 제대로 믿지 않거나 잊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믿는 자 모두에게 성령님이 내주하고 있다는 진리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신자는 성령을 말로 훼방하는 죄는 결코 짓지 않는다. 오히려 교회 성장에 눈이 먼 목사들이 그러는 경우는 가끔 있어도 말이다. 대신에 신자 스스로 성령의 충만한 역사를 자신의 인간적 지정의로, 특별히 감정으로 누르고 있는 잘못은 범한다. 거의 모든 신자가 거의 모든 경우에 그러고 있다. 나아가 그러고도 믿음이 좋은 것으로까지 착각하고 있다. 신영이와 할머니가 산수 공부하듯이 성경을 가르치고 배우기 때문이다.

신자가 기도하고 말씀 보지 않으면 왜 힘이 빠지는지 아는가? 종교적으로 나태해졌다고 하나님이 야단치시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사탄이 훼방하는 것도 아니다. 내주하신 성령님이 안타까워 탄식한 것이 우리 영에 그대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우리를 불쌍히 보시는 우주보다 더 무거운 하나님의 한숨이 우리를 누르기 때문이다.

모든 신자가 이 진리 하나만은 평생토록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또 모든 신앙생활에, 특별히 영적으로 침체될 때에 실제로 적용해야 한다. 분명치는 않지만 “내 안에 악마가 있다”라는 한국 영화 제목이 있었음을 기억한다. 신자는 어떠한가? “아직은 내 안에 악마의 본성이 생생하게 많이 남아 있다. 하지만 그것과는 도무지 비교도 안 되는 거룩한 권능을 지니신 성령님이 내 안에 있다. 거기다 나를 위해 대신 기도해 주신다.” 한마디로 줄이면 “내 안에 나를 위해 기도하는 성령이 있다.”이다.

2/7/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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