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이유

조회 수 998 추천 수 8 2013.02.19 20:11:16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이유


요셉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 있는 자가 없도다 너는 내 집을 치리하라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창41:38-40)


요셉이 바로의 꿈을 해몽하여서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주일학교 아이들까지도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극심한 어려움 가운데도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자신의 비전을 키우면 하나님이 반드시 이뤄주신다고 교회 청소년들을 권면하고 격려합니다. 특별히 이민교회에선 이방 땅에서의 온갖 어려움을 딛고 성공한 롤모델(role model)이 되어 있습니다.  

한창 자라는 청년들에게는 요셉이 가장 귀감이 되는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또 얼마든지 그렇게 권면 격려할 수 있고 해야 합니다. 지금 격려하고 있는 내용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 내용이 성경이 말하는 바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틀림을 아주 간단하게 증명할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요셉은 구약 인물 중에서 예수님을 가장 잘 예표(豫表)한다고 해석합니다. 그럼 역으로 예수님을 위의 권면 내용에 대입시켜 보십시오. 예수님이 천국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비천한 종으로 오신 뜻이, 믿음으로 고난을 이겨내고 당신의 비전을 키워나가 이 땅의 총리가 되기 위한 것이었습니까? 결코 아니지 않습니까? 한 사람을 두고 상반된 해석을 하면 둘 중 하나는 틀린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처음부터 십자가에 죽으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낮아짐으로 다른 이를 높이고 살렸습니다. 요셉이 예수님과 비견되는 가장 큰 이유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백성들을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7,8)

그 외에 그의 일상적 삶이 그리스도와 가장 닮았기 때문입니다. 한 신학자가 예수님과 그의 생애에 18가지 공통점이 있다고 평가했을 정도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자기가 품은 큰 꿈을 모든 난관을 이겨내며 성취한 입지전 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기에 자신의 전부를 그분께 온전히 내어맡겼을 뿐입니다. 또 하나님을 완전히 따르자 그 인생 여정에 자연스레 하나님을 따르는 자다운 모습이 완연히 드러났습니다. 본문에도 그런 점이 쉽게 발견됩니다.        

먼저 이방족속 애굽의 왕과 방백들도 분명히 알아챌 정도로 하나님의 신에 충만했습니다. 그가 바로의 관원장들과 또 바로 자신의 꿈을 정확하게 해석한 신통력 때문만은 아닙니다. 꿈을 정확히 해몽했다면 나중에 반드시 현실에서 그대로 실현되어야 합니다. 꿈이란 장래 일에 대한 예고 내지 경고의 의미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애굽의 술객과 박사들이 절대 자기 생각만으로(自意) 혹은 제 멋대로 지어내어(恣意) 해몽할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장래에 그대로 실현되지 않으면 사형 당할 것은 자명하니 말입니다.  

반면에 요셉은 자신의 분석이나 짐작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이 꿈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신 18:22) 요셉으로선 성령의 깨우침이 너무나 확실했기에 혹시라도 나중에  증험과 성취가 따르지 않을지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었습니다. 자연히 어떤 망설임이나 꼬임도 없이 논리정연하게 풀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를 비롯해 그 현장에 있던 술객과 박사들로선 요셉처럼 담대히 해몽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나아가 생명까지 걸어야 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지금껏 자기들이 해몽해오던 방식과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쩌면 해몽 자체를 위한 또 다른 신탁절차를 거쳐야 했을 것입니다. 반면에 요셉은 잠시 묵상하는 듯 마는 듯 하더니 곧바로 막힘없이 해석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그들이 묻기도 전에 그 완벽한 해결책까지 그들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꿈의 해석과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성경 말씀의 이음새를 보십시오.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속히 행하시리니 이제 바로께서는....”(32,33절) 아무 중단 없이 곧바로 이어지지 않습니까? 해결책도 입에서 술술 나왔던 것입니다.

애굽인들로선 진짜 더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입이 딱 벌어져 다물지 못할 정도였을 것입니다. 정확하게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쉽게 고안할 수 없는 정치적 대안까지 제시했으니 말입니다. 자기들 신들과는 그 권능의 완전함과 지혜의 정밀함에서 도무지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신들에게 그저 제물을 갖다 바쳐 그해의 풍년만 빌어 왔습니다. 그래도 흉년이 들면 그 다음 해엔 더 많이 바치는 길 외엔 뾰족한 방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요셉이 믿는 신은 향후 14년간에 일어날 일은 물론, “바로와 그 모든 신하가 좋게 여기는” 대비책까지 가르쳐주었습니다.

바로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라는 감탄은 한 치의 과장이나 가식 없이 진심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바로는 또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보이셨고 요셉 같이 명철과 지혜 있는 자가 없다고 했습니다.(39절) 바로는 명철과 지혜는 요셉의 개인 자질로 돌렸지만, 유대인들은 그것도 하나님께로 받는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하나님의 사람의 특징을 요셉에게서 정확히 배울 수 있습니다. 단순히 초자연적 은사를 시행하거나, 종교적 절정감을 맛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그친다면 사탄의 종들도 쉽사리 체험하는 일입니다. 성령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계시나 말씀의 증험과 성취가 실제 삶에서 반드시 따르도록 만듭니다. 쉽게 말해 신자에게 성령 충만하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가 봐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기다 현실에 말씀을 적용함에도 하나님이 주신 지혜와 명철로 행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유익은 물론 주변 사람 모두에게 덕이 되어서 그들 사이에 거룩한 결실을 맺게 됩니다. 다른 이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 알게 하며 그들의 삶에 선한 영향력을 끼쳐서 하나님나라가 확장되어집니다. 요셉으로 이스라엘을 보존케 하여 궁극적으로 출애굽 사건과 연결시켰듯이 말입니다. 또 출애굽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더 정확히는 아담에게 주셨던 인류 구속의 언약을 모세와 다윗을 거쳐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완성되게 했듯이 말입니다.  
    
바꿔 말해 성령의 은사와 권능이 개인적 깨우침과 성장에만 머물게 하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뜻입니다. 기독교는 진리의 터득, 성품의 성숙, 도덕성 종교성 영성의 훈련에 그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통치가 성도를 통해서 주위에 누룩처럼 번져 나가게 해야 합니다. 신자가 그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당신의 열심으로 강권적으로라도 이루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역동적으로 개척 확장했듯이, 신자들도 그분과 동일한 사역을 감당하며 그분이 가셨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말과 행동에서 그분께 배운 진리와의 불일치를 없애서 말씀의 증험과 성취가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을 모르는 이에게서 바로처럼 “하나님의 신에 감동 된 자를 처음 본다.”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던 또 다른 숨겨진 이유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 다음의 높은 권좌에 올랐습니다. 그를 주관하는 이는 바로 뿐이었습니다. “내 백성이 다 네 명을 복종하리니 나는 너보다 높음이 보좌뿐이니라.”(40절) 바로는 신분과 계급만 높았지 통치에 관한 모든 실권을 요셉에게 넘겼습니다.

이전에 그를 감옥에 보낸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도 요셉의 수하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요셉이 그 일을 다시 문제 삼았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바로가 요셉이 옥에 갇히게 된 경위를 조사하지 않았을 리 없습니다. 바로가 요셉의 그간의 억울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면 시위대장과 그 처를 불러 따졌거나, 요셉에게 처리를 어떻게 할지 물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에 기록이 없다는 것은 분명 요셉이 용서했다는 뜻입니다.

그가 보디발은 아내에게 속았기에 잘못이 없다고 봤을 수 있습니다. 그 처도 총리 요셉 앞에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용서를 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요셉은 도무지 거역할 수 없는 광대하시고 의로운 하나님의 손길이 자기 인생을 이끌고 있음을 절감했습니다.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구덩이에 빠지자 꼼짝없이 죽었다고 포기했었는데 때마침 미디안 상고에게 노예로 팔리는 바람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아니고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요셉의 믿음은 구덩이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달라졌던 것입니다. 구덩이 이후로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애굽에 도착해 비록 종이지만 어려움 없는 삶을 살다가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 아래 진행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결정적으로 바로의 꿈을 해몽하여 총리의 자리에까지 이르자 보디발의 처에게 모함을 당한 것마저 하나님의 신비한 계획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의 가부간 호불호를 인간이 감히 따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나아가 모든 일을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니 다른 이의 잘못을 자신이 정죄 심판할 문제가 결코 아님도 깨달은 것입니다. 일반인들도 완전히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기고 나면 그 인생관과 가치관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자기 인생을 하나님이 특별한 계획을 갖고 이끌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 자는 더더욱 그럴 것입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최소한 그 마음을 알아서 그대로 행하고자 노력하게 된 것입니다. 요컨대 요셉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보디발과 그 처를 용서했던 것입니다.  

결국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길에서 좌로도 우로도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뜻대로 성실히 준행했기에 증험과 성취가 따랐던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이방인들마저 그의 올곧음과 지혜에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또 그래서 요셉이 믿는 하나님을 진정한 하나님으로 인정할 정도였습니다. 한마디로 어떤 고난이 닥쳐도 하나님의 길이 아니면 걷지 않았기에 애굽의 총리가 된 것입니다.

더 이상 요셉을 이방 땅에서 믿음으로 자기 꿈을 키워서 총리가 된 롤모델로 가르쳐선 안 됩니다. 바로가 총리로 세우기 직전까지도 자신이 애굽의 총리가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한 것으로 해석해야 타당합니다. 물론 어렸을 때의 그 두 꿈은 잊지 않았겠지만, 형제들과 부모가 자기에게 절한 것이지 이방 백성들이 자기에게 절하리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습니다.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는 것은 이스라엘로 출애굽 시키려는 하나님의 수단이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요셉을 향한 최종 목적은 출애굽의 시초를 놓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선 이방 땅에서 총리를 시키는 것이라고 자꾸 평가절하 합니다. 가르치는 자나 배우는 자 모두가 이스라엘의 구원보다 애굽 총리에 더 관심이 가있다는 반증입니다.

애굽 총리가 하나님은 물론 요셉에게 무슨 대수입니까? 하나님은 마음만 먹으면 바로를 폐위시키고 요셉을 전 세계의 통치자로도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만약 요셉 본인에게 총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지 물었다면 어떤 대답을 했겠습니까? 틀림없이 총리는 전혀 관심 없고 오로지 가나안으로 돌아가 부모형제와 함께 살고 싶다고 했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은 물론 본인조차 생각지도 않았던 일을 지어내어서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으니 .....  

요셉은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자기 생명을 걸고서라도 하나님의 길만 걸었기에 하나님이 그에게 마련해 놓은 계획대로 그의 인생이 이끌린 것입니다. 자신이야 현실에서 어떤 형편에 처하든 하나님의 의로움을 증명하는 도구로 쓰임 받기만을 진정으로 소원하는 자의 대표였습니다.    

1/26/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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