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16:17,18 신자가 가진 최고 큰 권세는?

조회 수 2386 추천 수 38 2009.09.19 02:3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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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가 가진 최고 큰 권세는?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7,18)


성경에는 믿는 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여 병이 나은 모습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도 앉은뱅이, 문둥병, 소경 같은 불치의 병이 나았고 심지어 죽은 자도 살아났습니다. 또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마4;24), 즉 감기몸살 같은 작은 병도 다 낫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승천하기 직전 제자들에게도 같은 약속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날에는 어지간히 기도해선 낫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믿음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요 기도를 뜨겁게 하지 않은 것도 아닌데도 말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 누구라도 기도만 하면 나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기도하면 항상 나을 수 있다면 그것은 능력(ability)이요 권세(authority)입니다. 반면에 표적(signs)은 특별한 목적이 있을 때만 일어나는 징조입니다.

그렇다면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당연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 역사하시되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초자연적 은혜를 끼쳐 당신의 당신 되심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약속을 주시기 전에 예수님은 제자들더러 복음을 전하여 믿는 자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당부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받아들여 믿는 자에게 그 복음이 진리임을 확증시켜서 믿음을 견고케 해주기 위한 것이 표적의 일차적인 목적입니다.

나아가 새롭게 믿은 자들도 주위의 믿지 않는 동료들에게 그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도록 고무시켜 주고 또 그 때에도 다시 동일한 목적으로 표적이 따를 것이라는 뜻입니다. 한 마디로 복음을 전하는 자와 받아들이는 자 공히 온전한 믿음 위에 세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요컨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소명에 헌신할 때에 표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자가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 보상이라는 단순한 의미는 결코 아닙니다. 표적이 나타나면 이미 그 자체로도 하나님의 큰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그 증거를 진정으로 순전하게 받아들여서 믿음이 자랄 수 있는 여건이 될 때만 표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단지 기도하여 병이 낫고 고통을 없애려는 신자에겐 표적이 따를 필요가 사실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의 주목적이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이미 잘 믿고 있는 신자에게 구태여 표적으로 또 다시 복음을 전할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표적이 일어날 가능성만 믿고 기도해선 표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영광이 특별히 불신자들 앞에 크게 드러나야 할 일에 진정으로 헌신하다 보면 표적은 전적으로 하나님 당신의 뜻과 시기와 방법에 따라 나타날 뿐입니다.        

1920년대 초에 전염병이 돌고 있을 때에 레이몬드 브라운 목사는 병균에 노출되어 전염될 위험이 있음에도 죽어가는 사람들을 심방했습니다. 어떤 날은 하루에 6번의 장례식을 치르기도 했는데도 전혀 병에 걸리지도 않았습니다. 마지막까지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자의 천국 가는 길을 인도하는 것이 자기 소명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표적은 어디까지나 표적인지라 복음 전도에 헌신된 자라고 항상 따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한 대로 복음이 가장 잘 전해지고 또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여건에서만 일어납니다. 복음을 듣는 자가 전혀 믿지 않고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데 표적이 일어날 리는 없습니다. 또 전하는 자의 심령에 여러 시험이 걸려 있다면, 예컨대 표적을 일으켜서 당장에 믿도록 만들어야지라는 욕심이 앞서면 표적은 더 안 따르는 법입니다.

반면에 복음을 진정으로 전하는 자에게는 표적과 달리 그 듣는 자의 믿음과 상관없이 항상 일어나는 일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자의 권세이자 능력이 되는 일입니다. 바로 세상으로부터 오는 핍박과 환난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15;19)

전도자가 당하는 핍박과 환난이 왜 권세이자 능력이 됩니까? 세상과는 전혀 다른 신령한 삶의 방식을 보이며 썩어 없어질 이 땅의 재물과 형통 대신에 영원한 하늘의 가치를 드러내기 때문에 권세입니다. 또 세상에선 환난을 당할지라도 함께 하는 예수님의 권세로 세상 권세를 언제 어디서든 능히 이길 수 있기에 능력입니다.  

영국에 구세군 운동을 처음 시작한 사람들은 길거리 폭력배와 술주정꾼들에게 끝없는 조롱과 협박을 받았지만 절대 굴하지 않았습니다. 웨일즈 부흥 운동을 일으킨 기도하는 청년들은 무지막지한 광부들의 핍박을 견뎌내고 결국은 그 도시를 술, 도박, 매춘, 폭력이 사라진 하나님의 도성으로 바꾸었습니다. 이보다 더한 권세와 능력이 따로 어디 있습니까?

또 그런 권세와 능력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무엇입니까?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행7:59,60) 핍박이 권세라면 핍박이 최고로 많은 것이 최고의 권세가 됨은 당연하지 않습니까?

어떤 핍박과 환난에도 불구하고 자기 생명을 예수님의 복음과 맞바꾸는 권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권세와 동일합니다. 죄악과 사단과 사망의 권세를 모두 깨트릴 수 있는 최고의 권세입니다. 예수님도 복음을 위해 당신의 생명을 바쳐서 인류 역사상 최고의 큰일을 이루었듯이 그를 따르며 믿는 신자도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바친다면 당신께서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보다 더 큰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스데반의 결국이 어떻게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까? 순교하여 죽었다고 하지 않고  “이 말을 하고 자니라.”고 했습니다. 천국의 복락과 안식 가운데 들어갔다는 뜻입니다. 그 전에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55,56절)고 했습니다. 육신의 생명이 다 하기 전에 너무나도 장엄하고 아름다운 천국의 광경을 미리 본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인간이 이 땅에서 이보다 더 큰 권세와 능력을 누릴 수는 도저히 없습니다.      

표적만 구하는 신앙을 두고 예수님은 악하고 음란하다고 했습니다.(마12:39)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했는데도 왜 내 병이 낫지 않는가?”라는 불만을 가지는 것도 표적만 구하는 신앙일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의 권세 안에 있는 자는 표적보다는 핍박과 환난을 당하면서 자기 생명과 복음을 맞바꿀 수 있는 최고의 권세와 능력을 구해야 합니다.

무조건 이방의 오지를 찾아가 선교하다 순교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담대하게 십자가 복음만 증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과 사람으로부터는 온갖 환난과 핍박이 따라 올지라도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신령한 권세와 영원한 능력은 도저히 막을 길이 없이 풍성히 드러납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모두를 그 일에 걸 때에는 세상의 어떤 죄악과 사단과 사망도 두렵지 않게 되고 하늘의 영광을 이 땅에서부터 분명코 맛볼 수 있습니다.

설령 정말로 순교를 당해도 스데반처럼 하늘 문이 열리고 천국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을 때에 과연 고통을 느꼈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이지 않는 천국의 아름다운 빛 가운데 둘러싸여서 생전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한 최고의 평강과 기쁨에 잠겼을 것입니다. 성령 안에서 예수님과의 신령한 교통이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에 물려 죽거나 산 채로 불에 태워진 신자들 모두 다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권세가 단순히 믿음으로 복음만 전한다고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몇 번 말한 대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가장 잘 증거 되는 여건에서만 그렇습니다. 다른 말로 복음을 가장 잘 증거하는 전도자만이 누릴 수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교리적으로 조리 정연하고 심오하게 전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데반이 이 땅에서 마지막 남긴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과 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신자가 누리는 최고의 권세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을 모르는 다른 사람의 영혼을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히 여기는 심정만이 이 땅 최고의 권세이자 능력입니다. 또 그런 사랑만이 세상의 어떤 권세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믿음, 소망, 사랑 그 가운데 사랑이 최고이며 또 사랑이 없이는 어떤 권세와 능력도 겉모양만 갖춘 가짜일 뿐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과연 어떤 권세와 능력을 소원하고 있습니까? 가장 큰 권세인 순교를 소망한 적이 있습니까? 당장 죽으라는 이야기 아니라 생명을 걸고서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만 전하고 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까? 그래서 핍박과 환난을 기꺼이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습니까? 아니 그런 것들이 신자의 권세요 능력이라는 사실을 알기라도 합니까? 오히려 핍박과 환난을 걷어갈 표적이 어서 빨리 나타나게 해달라고 떼만 쓰고 있지는 않습니까?
  
12/20/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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