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행하라 (산상수훈 연구 14, 1932년 2월, 37호)

마태복음 7:24~27 (참조 누가복음 6:46~49)

24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들은 마치 지혜 있는 사람이 집을 반석 위에 지은 것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장마물이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는 것은 반석 위에 세운 연고요,
26 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집을 모래 위에 지은 것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장마물이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지리니, 그 무너짐이 대단하니라.

산상순훈을 마치려 하실 때에 명심하여야 할 세 가지 요긴한 일을 덧붙이셨다.   그 하나는 "좁은 문으로서 험한 길로 행하라", 그 둘은 "거짓 교사들을 삼갈지어다", 그 셋은 "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자가 되라" 하심이다.   실로 심령을 투시하는 능력을 가진 자이기에 비로소 내릴 수 있는 처방이다.   과연 저 자신이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까닭이다.

산상수훈을 직접 들은 자나 후세에 이것을 읽는 자들의 공통된 경향은 그 교훈이 너무 순결하고 너무 엄숙해서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갓 아름다운 시가(詩歌)나 높고도 먼 이상(理想)의 일종으로 여겨서 겉으로는 이것을 공경하는 체 하지만 실생활에서는 무시해버린다.   아니면 그 일부분을 깍아내고 완화시키는 등 인간적으로 다듬질을 하고 사족을 첨가하려 하니 다 실행을 회피하려 함은 똑같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그러므로 내 말을 듣고"라 하여 위에서 말씀하신 교훈 전체의 결론을 지으시며, 특히 생명에 들어가는 요건을 제시하시는 중에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와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를 알곡과 죽정이처럼 엄격하게 구별하심에는 큰 이유가 있었다.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을 비교한 것은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실로써 전자의 건실성과 후자의 허망성을 비교한 것뿐이니, 이것은 조선에서도 건축공사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사실이다.

감사할 것은 무릇 중대한 진리, 인간이면 누구나 알아야 할 진리는 스스로 지혜있다하는자들의 사색과 변론과 추리로써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비근하고 평범한 '교훈을 생활'하는 자들이 소유하게 되어 있는 사실이다.    

진리가 우수한 두뇌를 가진 자에게만 알려지는 종류의 진리는 알아도 좋고 몰라도 좋은 것이다.   배움이 없고 소박한 자일지라도 건전한 심정을 가진 자에게는 다 알 수 있는 종류의 진리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햇빛, 공기, 물, 불 등과 같이 인간생활에 잠시도 없을 수 없는 진리요, 그리스도의 교훈은 이런 종류의 교훈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권능이 되나니 기록하였으되, 내가 지혜있는 사람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사람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지혜있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선비가 어디 있으며 이 세대에 변사가 어디있느뇨.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하나님의 지혜에 합당한 것은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세상이 미련하다 하는 전도로 믿는 사람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심이로다.   유대 사람은 이적을 구하고 헬라 사람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 사람에게는 거리끼는 것이 되고 이방 사람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되, 오직 부르심을 받는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이나 헬라 사람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권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대개 하나님의 미련하다 하는 것이 사람보다 지혜있고, 하나님의 약하다 하는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린도전서 1:18~25) 하였다.    

교훈은 머리로만 이지적으로 완벽한 점만을 이해함에 그치면 그것은 산 것이 아니요, 실행에 부합할 수 없는 것이다.   복음의 진리가 심장의 고동에까지 그 약동을 함께 할 때에 저는 비로소 진리를 납득한 자요, 그 진리가 생활에 구현하지 않고는 마지 못하는 자가 된다.   이것이 이른바 "그러나 나는 그(하나님)를 알고 또 그 말씀을 지키노라." (요한 8:55) 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 대했던 생활이요,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한 14:15) 하여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한 우리의 생활이여야 할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는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이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아버지의 사랑 안에 있는 것 같으니라." (요한 15:10) 는 대로다.

여기까지 이르지 않고는 하나님을 믿는다 할 수 없고 예수의 교훈을 알았다 할 수 없다.   최고의 진리를 앎에는 머리보다도 손과 발이 일하는 생활로, 사고보다는 실천으로 가능하도록 되어 있는 까닭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고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하는지 알리라." (요한 7:17) 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은 산상수훈을 음미하고 납득하는 때에 더욱 그러하다.   실행하는 자에게라야 진리의 문은 열려진다 한다.   복음의 심오한 뜻에 도달하는 길은 소수 천재의 사색의 말장난이 아니다.   소수 평범한 자의 몸소 실천함의 결과로 열려지는 것이니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과연 실행할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가? 들은 대로 행하는 자를 지혜있는 사람이라 하시고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라 하신다면 우리는 어리석은 자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라는 탄식이 나오지 않는가?

이에 '행하는 자'라는 글자의 뜻을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행한다 함은 글자대로, 형식대로, 전통대로 행하는 것이 참말 행하는 것이 아님은 산상수훈 전체를 통하여 그리스도가 반복하여 역설하신 바이다.   특히 제6장 상반부에서 '행위와 동기'에 관하여 자세히 일렀으므로 행한다는 속뜻에 대해서는 다시 말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행하는'이라는 단어 peiei 는 문법상 제3인칭 단수 현재 직설법 능동사로 되어 있음에 주의하려 한다.   즉 교훈을 실현하여 완료하여 놓기를 요구하신 것은 아니다.   지금 이 교훈을 근본으로 하여 실행하려는 생활을 요구하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해석함으로써 성서의 준엄함을 털끝만큼이라도 깍으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높은 산은 탐험가의 능력에 의하여 그 높이가 변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한사람의 실행자도 없다 할지라도 산상수훈의 숭고함은 영원에 이르는 그 순수함을 지켜 나갈 것이다.   거기에 인간의 능력을 감안하여 더하고, 빼고, 늘이고, 줄이는 것을 시도하려 함은 어리석음의 극치이다.

다만 어떻게 하면 이 교훈을 틀림없이 본래의 뜻대로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점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산상수훈을 모세 율법보다 한층 엄숙한 것으로 여겨 공연히 여러사람의 영혼을 괴롭게만 하는 율법주의로 볼 것이 아니다.   성서 전편을 관철하는 하나님은혜와 긍휼의 견지로서 '듣고 행하는 자'라는 한 구절을 읽는 것이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뜻인 줄 안다.   구체적으로 '듣고 행하는 자'를 성서에서 찾아보면,

"오호라 나는 괴로운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 (로마서 7:24) 하여 절망의 골짜기에서 헤매며,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빌립보 3:!2) 고 고백하던 위대한 사도 바울이 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취한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이 한 일만 하여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함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위로 부르사 상 주심을 얻고자 함이니라" 라고 말한 바울의 넋, 이것이 틀림없이 '행하는 자'의 넋인 줄로 안다.

그리스도가 "지혜 있는 사람은 집을 반석 위에 지은 것 같다"고 하신 것은 완전무결한 귀신 같은 사람이 아니요, 이 바울과 같은 종류의 인물을 가리키신 줄로 안다.  

복음으로 시작된 산상수훈은 '행하는 자'로 마쳤다.   생명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도덕적 완전이나, 철학적 지식이나, 예술적 천재가 필요하다면 인류의 대다수는 낙망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행하는 자'로서 반석 위의 집이라 하셨다.   이보다 반가운 소식이 어디 있을까? 낙심치 말고 다시 정상을 향하여 오르라.   선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기어코 완성하시리라. (고린도전서 9:25~27, 누가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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