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에서

조회 수 1339 추천 수 28 2008.10.13 22:46:35
○말씀과 성령

사탄과의 일전을 말씀으로 이기신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로 돌아 왔습니다. 예수께서 마귀와의 싸움을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 하셨습니다. 이것은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에게 많은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자연스럽게 신앙 하면서 주입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능력 이라는 단어 입니다. 특히 믿음이 있는 성도의 특징이 능력과 매치가 되는것이 사실 입니다. 능력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라든가 능력있는 기도를 하자 라든가 능력을 받아야 한다 라는식의 말을 쉽게 듣고 하기도 하면서 나도 그런 능력을 받아서 파워 크리스쳔이 되어야 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그래서 각종 세미나와 집회의 공통적인 특징이 권능을 받자라는 것이고 거기에 반드시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타이틀이 따라다니는 것입니다. 성령은 능력입니다. 성령은 권능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거룩하시며 예수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생명의 영이십니다. 성령은 하나님 이십니다. 성령은 인격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성령에 대하여 논할 자리가 아니므로 더이상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성령은 굉장히 중요한 본질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우리의 기대와 소원을 위해 역사하시지 않는다는것을 이해 하셔야 합니다. 성령의 일하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하여 라는것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기 위하여 일하십니다. 그리고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을 위하여 일하십니다. 여기서 한가지 확인할 것은 성도를 도우시고 지키시고 보존하시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는 것을 자꾸만 내 소원을 해결해주시는 것으로만 생각을 하는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분명히 성령의 충만함으로 보호를 받으시지만 그 도우심이란 광야로 몰아가시고 마귀와 싸우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힘을 완전히 다 빼고서 말입니다. 신적인 능력을 사용할수 없는 자리로 몰아 가십니다. 아무것도 보호막이 되거나 방패가 되거나 그런거 없이 완전히 광야에서 홀로 버티도록 한것입니다. 나중에 살피겠지만 제자들을 보내실때도 분명하게 '내가 너희를 보냄이 이리가운데 보내는 양같다고 하시면서 뱀처럼 지혜롭게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시대의 성도들의 형편도 다를게 없습니다. 여러분 주위를 보십시오. 모든 가족과 친척들이 예수 믿어서 즐거운 마음으로 모이며 예배 드리시는 분들 얼마나 있어요? 남편이 안믿던가 아내가 안믿던가 부모님들이 안믿든가 친척들이 안믿든가 그러지 않습니까? 저도 아내와 둘만 믿습니다. 처가식구들도 아직은 믿음안에 들어 오지 않았습니다. 위로 두분 형님 가족들 역시 아직도 믿지 않습니다. 명절만 되면 큰 시험거리입니다.

기도를 십년이상 했어도 불신 가족이 변하지않습니다. 그렇게 핍박을 하던 남편이 아직도 돌아 오지 않습니다. 내가 그렇게 믿음으로 간구하고 열심으로 섬기지만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누가 알아줄까요? 물론 돌아온 가족들도 있구요. 오랫동안 힘든 시간들을 이기고서 이제는 기쁨으로 온 가족이 찬양하며 주안에서 복된시간을 누리시는 분들도 있습니다만 하루 아침에 된것이 아니지요. 어디 그동안의 말못할 고통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성령의 도우심이 있었지만 직접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우리의 소원대로 덜커덕 응답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제들도 처음부터 확 믿었다는 기록이 없지요? 친척들과 동생들은 심지어 미쳤다고 까지 생각한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신데도 말입니다. 뭐든지 때가 있고 기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인위적으로 바꾸거나 앞당기거나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애굽의 종살이를 430년간 해야하고 바벨론 포로를 70년을 끝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도 즉시로 그런 것이 아니라 33년 이라는 시간이 흘러야만 성취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참을성도 없고 기다릴줄을 모릅니다. 뭐든지 속성으로 능력을 받아서 반드시 이루고야 말겠다는 자기욕심이 가득한 것입니다.

그것을 믿음이나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감췄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특별한 기적이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다고 하면 전부 그쪽으로 쏠리는 것이 감춰진 인간의 욕망이 반응을 하는것은 아닐까 우려가 됩니다. 그것이 극대화 되고 조직화 되고 프로그램화되면 사람들이 몰려 옵니다. 개인적으로 교회에서 무엇 무엇을 기획하고 특별집회를 구상하고 요란스럽게 광고하는것이 별로 안좋아 보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곳입니다. 왜 예수께서 사람으로 나셨고 왜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셔야 했으며 그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를 전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입은 예수께서는 광야에서 고통당하시다가 마귀의 시험에 대하여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적하였습니다. 성령의 능력이란 결국 아무것도 없는 형편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비참한 곳에서도 분명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된 하니님의 말씀으로 싸워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으로 시험을 통과하는 것이 살아있는 믿음이라는 뜻입니다. 초자연적인 놀라운 능력으로 마귀를 쫒아내거나 대항 하는것이 아니라 순전한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광야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어야만 살 수 있었습니다. 오늘의 이 광야에서 우리가 살 수 있는 힘은 오직 말씀입니다. 성령은 그 말씀과 함께 우리가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갈릴리로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하신 예수께서 갈릴리로 돌아 옵니다. 그동안은 요한과 더불어서 요단강 근처에서 머무르셨습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회개의 소리를 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걸어 다니시는 예수를 보고서 증거하기를"“보라. 하나님의 어링 양이시다.” 하였습니다. 요한은 그렇게 기회 있을때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거 하였습니다. 그것이 요한의 사명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태어난 나실인이 요한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알았고 성령의 뜻에 순종한 순종의 사람이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요한의 증거를 받은 예수께서 별다른 사역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습니다.

시험을 통과하시고 승리하신 예수께서 즉시로 다니면서 회개의 복음을 전파하셔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갈릴리로 거쳐를 옮겼습니다. 이제 검증을 받았기 때문에 활발하게 사역을 시작하셔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기다리셨습니다. 언제까지 기다리셨는가 하면 이때까지 입니다. 요한이 감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께서 갈릴리로 물러나셨습니다.(마4:12) 왜 하필이면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였을까요? 오직 예수를 증거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던 요한입니다. 광야에서 사람이 누려야할 기본적인 삶을 누려보지도 못한 요한입니다. 그렇게 충성했던 요한이 왜 감옥까지 갔을까요?

그리고 요한은 또 다른 많은 말씀으로 백성들을 권고하고 좋은 소식을 전파했습니다. 그런데 분봉왕 헤롯은 자기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에 관해, 또 헤롯 자신이 저지른 악행에 관해 요한이 질책하자 그 모든 것에다 악을 한 가지 더 행했습니다. 요한을 잡아 감옥에 가두었던 것입니다.(눅3:18-20)

요한이 감옥에 갇히자 사람들이 혼란스러워 합니다. 오실 그리스도가 아닌가 하며 내심 기대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인도할 것인가 라며 비탄에 빠졌습니다. 진리를 가르치고 선지자의 소리를 하던 요한이 백성들의 희망이었습니다. 그 희망이 불온한 세력에게 간악한 헤롯에게 희생이 된 것입니다. 백성들의 절망은 왜 하나님은 막지 않으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은 불의한 자들이 활보하고 의인이 핍박을 당하고 감옥에 가도록 방치하시는가 하며 하나님의 침묵하심에 대하여 절망한 것입니다.

지금이 절호의 찬스 아닌가요? 예수께서 이제 나타나셔서 백성들을 구원할 기회가 아닌가요? 아니 어쩌면 요한과 함께 동역해서 사역을 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충성스러운 요한의 넘치는 선지자적 카리스마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예수께로 인도하면 신적인 능력을 동원하셔서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즉시로 불의한 정권을 심판하면 간단할 것 아니었을까요? 우리의 생각은 그런것입니다. 능력을 받아서 악을 심판하고 귀신들을 내어 쫒아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워서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말씀을 이루시려고

우리는 반드시 능력을 받아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고자 합니다.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믿어버리고 믿음으로 일을 합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좌절되거나 하면 정신을 못차리고 시험에 들어 버립니다.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었다는 야고보 사도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하나님의 길은 사람의 길과 다릅니다. 예수께서 왜 그 중요한 시기에 갈릴리로 들어 가셨을까요?

갈릴리는 이방인의 지역이라고 까지 불릴 정도로 소외된 곳입니다.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당했던 곳이 갈릴리 지방입니다. 또한 이 지역에 나사렛이라는 곳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자라신 곳입니다. 나사렛에서 동북쪽으로 조금 가면 해발 500m쯤 되는 곳에  갈릴리 바다가 있습니다.나다나엘이 어떤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가 하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것이 나올수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버림을 받은곳이 갈리릴 지역입니다.

우리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중앙으로 진출하고자 합니다. 외딴곳이나 섬이나 산골에서 도심지로 나오려고 합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환영하는 곳으로 가고자 합니다. 인정을 받고자 한다면 큰 물에서 살아야 합니다. 한마디로 중앙의 무대가 황금의 장소라는 것입니다. 연예인들도 그래서 세계로 진출하고자 헐리웃을 기웃거립니다. 운동선수들도 유럽이나 특히 축구의 종가라고하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거가 되는것이 최고의 목표입니다. 야구선수는 미국의 빅 리그인 메이져 리거를 꿈꿉니다.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뒤집고 반대로 가셨습니다. 마귀는 높은곳으로 데리고 가지만 예수께서는 낮은곳으로 내려 오셨습니다. 제자들은 당장에 로마를 심판 하기를 원해서 부활하신 주님에게 질문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같이 모여 있을 때 예수께 물었습니다. “주여, 주께서 이스라엘에게 나라를 회복시켜 주시려는 것이 지금입니까?”(행1:6) 하지만 주께서는 십자가로 가셨습니다. 주께서 베드로에게 검을 도로 집어 넣으라 하십니다. 주를 잡으려고 온것을 막으려고 검을 사용한 베드로를 말리십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내가 내 아버지께 청하면 당장 12군단보다 더 많은 천사들을 보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너는 모르느냐?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면 성경에서 이런 일이 마땅히 일어나야 한다고 말한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마26:53-54)

그렇습니다. 주께서는 말씀을 이루시려고 갈릴리로 향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사렛을 떠나 스블론과 납달리 지역의 호숫가가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그곳에 사셨습니다. 이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해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입니다. “스블론 땅과 납달리 땅이여, 호수로 가는 길목, 요단 강 건너편, 이방 사람의 갈릴리여, 어둠 가운데 살고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마4:13-16)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을 이루시려고 하나님의 뜻을 쫒아 사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으로 보내시듯이 오늘 우리들도 성도로 부르시고 보내십니다.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령이 거하도록 은혜를 베푸시고 모든것을 생각나게 하시도록 지혜를 주신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지금도 그 약속은 동일하게 주어졌습니다. 말씀을 이루시려고 하나님께 순종한 예수님처럼 우리도 성령 안에서 말씀을 따라 살도록 그렇게 부름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쓸만해서 무엇인가 남다른 열심이 있어서 성령을 주신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함께 거하도록 하신 이유는 능력있게 엄청난 일들을 하게 하심이 아니라 주의 가신 그 길을 바로 보게하며 그 뒤를 따르도록 하심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무슨 표적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시험하려고 달려드는 세상의 문화들과 가치관들을 향하여서 힘을 길러서 싸우라는것도 아닙니다. 정당을 만들어서 기득권을 확보해서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내라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말씀으로 생각하고 말씀을 믿으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삶으로 살면 그 순종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워 가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에서 구별된 존재입니다. 신분이 달라 졌습니다. 이제는 이전에 알지 못하고 행하던 옛 사람처럼 자기 권리를 주장하거나 확보하기 위하여 싸우라는 것과는 다른길로 가야 합니다. 세상의 도전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저항은 말씀으로 가는 것 뿐입니다. 세상적인 힘이나 물리적인 세력을 등에 업어서 세상을 정복하는 전쟁이 아니라 팔복의 내용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엄청난 자기 포기와 자기희생이 담보되어야 합니다.

오늘 이시대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르는 길을 과연 좋아할까요? 그렇게 자기를 부인하지 않으면 결코 온전하게 예수를 믿는다라고 말할 수 없다는것입니다. 저는 요즘 그 부분에 대하여 심각하게 내전을 치르는 중입니다. 제가 뭔가를 알아서가 아니라 이룩한것도 아니라 깨달았다는 것도 아니라 다만 이제와는 다른길을 찾아가는 몸부림입니다.

2008-10-14. http://cafe.naver.com/pray153/7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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