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6:5-9) 상사는 부하를 위협하지 말라.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1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 이는 그들과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라.”(엡6:5-9)

 

노예 제도와 성경

 

평생토록 가정과 직장이라는 두 환경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차원에서 보면 인생은 참 단조롭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형성되는 온갖 종류의 인간관계는 너무나 복잡하여서 골치 썩지 않고 넘어가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가정에선 부부끼리와 부모와 자식 사이에, 직장에선 상사와 부하 간에 또는 동료끼리 날마다 크고 작은 일에서 서로 얽히고설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부부는 에로스 사랑을 할 수 있고, 부모와 자식은 피를 서로 나누므로 사랑하기 쉽거나 최소한 적당한 평화는 유지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생판 남끼리 만나는 데다 현실적 이해타산의 문제가 발생하는 직장 안의 인간관계는 미묘하고 복잡합니다. 심지어 교회 성도끼리도 서로 마음을 털어놓고 진실로 섬기기가 너무 힘듭니다. 성경은 신자라면 아무리 그래도 고대의 노예와 상전 사이에서도 참사랑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명합니다. 

 

우선 종들이라고 해서 성경이 노예 제도를 용인한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들이 만들어 낸 당시의 사회 관습이었을 뿐입니다. 인간에겐 종교적 믿음과 무관하게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어진 흔적이 도덕적 양심으로 남아있어서 절대적인 악에 대해선 보편적인 합의를 이뤄냈습니다. 현대에 와선 일부 미개한 지역과 광신적인 집단을 빼고는 노예 제도는 용납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죄라고 인정하는 잘못을 하나님이 허용할 리는 절대 없습니다.

 

본문처럼 성경의 특정한 구절이나 표현을 꼬투리 잡아서 기독교가 남성 우대, 일부다처제, 노예 제도 등을 지지하는 양 비방하는 것은 문해력이 매우 뒤떨어진다고 자인하는 셈입니다. 그 반대로 이 구절이 오늘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석하는 것도 같은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노예라는 신분은 없어졌으나 직장은 물론 인간의 사회활동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상급자와 하급자의 관계는 항상 생기는 법입니다. 본문은 그래서 모든 세대의 신자가 가족 외의 모든 인간관계에 적용해야 하는 가르침이 됩니다. 

 

바울 당시에 신자가 노예 제도라는 사악한 관습에서 벗어나려면 로마제국 전체를 뒤엎든지, 제국 밖으로 나가서 산속에서 혼자 기거하는 자연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싫어서 일찍 천국 가려고 자살할 수는 절대로 없으며 하나님께 빨리 죽여달라고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신자로선 자기 당대의 현실 세계 안에서 당시의 관습과 제도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쉽게 말해 신자가 사정에 따라서 노예가 되거나 노예를 부리는 주인이 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예컨대 미국의 영적 대각성 운동을 일으킨 조나단 에드워드도 노예를 부렸고 나아가 노예 제도를 필요악처럼 용인해야 한다는 글을 써서 후대의 비난을 받았듯이 말입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세상의 잘못된 제도, 관습, 사조 등과 적당히 타협하면서 세속의 쾌락과 죄악을 즐기며 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사회적 여건이 악하고 그런 관습과 체도 안에서 살 수밖에 없어도 하나님의 뜻에 최선을 다해서 순종해야 합니다. 

 

충성된 종 요셉

 

그래서 먼저 종더러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고 명합니다. 단순히 예의 바르게 시키는 대로 순종하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상전이 아니라 예수님이 자기에게 어떤 일을 명했다고 여기라는 것입니다. 상전이 주님과 동격이라는 뜻은 아니며 종이 주인을 섬기는 마음과 모습이 주님께 하는 것과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인을 두려워한다고 해서 주인에게 잘못하거나 기분을 거슬리면 가혹한 벌을 받게 될 것을 염려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두려움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는 큰 재앙이나 위험과 마주쳤을 때 덜덜 떨리는 공포감(fear)입니다. 둘째는 본문이 말하는 두려움으로 태양이 수평선을 넘어가는 장엄한 광경에서 느끼는 것 같은 경건함(awesome)입니다. 신자는 모든 이와의 관계를 절대로 가볍게 여기지 말고 전심을 다해서 경건하게 인격적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아주 좋은 예가 있습니다. 철이 없던 요셉이 아비 야곱의 총애만 믿고 설치면서 형들이 자기를 섬기게 된다는 꿈이나 자랑했습니다. 그를 극도로 미워하게 된 이복형들이 그를 죽이려고 광야의 구덩이에 빠트렸지만, 그나마 남아있던 혈육의 정 때문에 지나가는 미디안 상인에게 팔아 버렸습니다. 요셉은 졸지에 사랑하는 부모와 떨어져 만리타향인 애굽에서 노예살이를 시작했습니다. 현실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길은 완전히 막혔고 제도 관습 문화가 전혀 다른 곳에서 비천한 신분으로 평생을 마쳐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바로의 시위 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팔렸는데 정말로 두렵고 떨림으로 주인을 성실하게 진심을 다 바쳐 섬겼습니다. 순종하는 척 시늉만 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일을 자기 일인 양 최선을 다했기에 주인이 집안의 모든 일을 임의로 처리하도록 맡겼습니다. 그러다 젊고 잘생긴 그를 보고 음욕을 품은 보디발의 아내가 끈질기게 유혹했는데 매번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주인에게 충성하고 그 아내와 간음하지 않는 정도는 인간이라면 보편적 양심에 따라서 당연히 행해야 할 일입니다. 요셉이 과연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순종했는지 따져봐야 합니다. 

 

그는 보다발의 아내에게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창39:9)라고 선언했습니다. 주인의 아내와 상관하는 일을 ‘주인에게 큰 죄’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죄’라고 했습니다. 요셉은 모세 율법을 받기 훨씬 전의 사람이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의 답변이 왠지 아주 익숙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아담에게 하나님이 선악과 금령을 내린 의미와 똑같은 차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한 후에 에덴동산의 모든 과일은 다 따먹어도 되지만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고 했고 그러면 정녕 죽는다고 엄숙히 경고했습니다. 선악과 안에 독이 든 것이 아니라 동산의 주인으로 하나님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라는 상징이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을 거역 대적하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죄가 됩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결코 이 땅의 주인이 될 수 없으며 자기를 창조해 준 하나님을 대신해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려야 하는 청지기 직분만 받았습니다. 출생과 죽음조차 스스로 주관하지 못하는 연약한 인간이 감히 세상의 주인이 되겠다고 설치는 것은 큰 죄를 넘어서 스스로 멸망에 빠지는 너무나 어리석은 짓입니다. 

 

아담의 거역과는 달리 요셉은 자기는 보디발 집을 임의로 관리할 수 있는 청지기일 뿐이며 그 집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 여인은 주인의 소유일 뿐 아니라 그 집의 주인이 따로 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첫째 징표로 선악과처럼 금지된 과일입니다. 간음 같은 불의한 사랑을 금단의 열매를 먹었다고 표현하는 까닭입니다.

 

인간관계는 하나님과 관계다. 

 

다시 강조하지만, 요셉이 주인의 아내와 간음하면 하나님께 죄라고 말했다고 해서 인간 보디발을 하나님의 위치에 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자기가 보디발의 청지기가 된 것이 일차적으로는 노예 시장에서 주인이 선택했기 때문이지만, 그 모든 과정을 자신에 대한 거룩한 뜻과 계획을 가지신 하나님이 주관하셨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를 자기 주인으로 붙여 준 이가 하나님인데 주인을 거역하면 하나님과 그분의 뜻을 거역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로선 자기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과 계획을 구체적으로는 모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온 것도, 현재 살아가는 것도, 앞으로 살아갈 일도 전부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벽한 손안에 붙잡혀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절대로 의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설령 보디발이 때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노엽게 만드는 일을 해도 그런 중에도 하나님의 뜻은 있고 언젠가는 자기에게도 유익이 된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거절당한 보디발의 아내가 크게 모욕감을 느끼고 강간미수죄라는 누명을 덮어씌우는 바람에 왕의 죄수가 갇히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옥에 갇힌 후에도 그는 간수장에게 성실하게 순종했고 동료 죄수였던 왕의 두 관원에게도 해몽해 주는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에게 은혜를 받은 관원이 화장실 갈 때와 갔다 올 때가 다르다는 속담처럼 자기들이 출세하자 요셉과의 약속은 잊어버리고 전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전혀 불평하지 않고 전과 다름없이 모범수의 생활을 지속했습니다. 그는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이 특별한 뜻이 있어서 간수장과 동료 죄수들을 자기에게 붙여 주었다고 믿고서 그들을 마치 하나님 대하듯이 순종하고 섬겼던 것입니다. 

 

요셉은 어려서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최고로 높아져서 형들의 섬김을 받을 것이라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렇게 교만하고 철없던 그가 형들에 의해 광야의 구덩이에 던져져 죽음만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절망에 빠져 하나님 제발 나를 다시 살려주시면 오직 주님의 뜻대로만 살겠다고 눈물로 전심을 바쳐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그 기도가 응답이 되었습니다. 마침 그 곁을 지나가던 미디안 상인들에 의해 기적적으로 살아났는데 그때 그는 완전히 새사람으로 거듭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자기보다 더 잘 아시고 자기를 온전히 붙들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후로는 자기 생각과 욕심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했을 것입니다. 

 

강간당할 뻔했다는 아내의 거짓말에 보디발이 불같이 화를 내었으나 자기를 바로 죽이지 않고 감옥에 보냈습니다. 이번까지 두 번이나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우심으로 새 인생을 살게 되었다고 절감했을 것입니다. 그로선 비록 억울한 누명을 썼어도 어떤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이 지켜 주리라 다시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감옥에서도 거짓 시늉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 모범수로서 모두를 진심으로 섬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신자의 형통은 다르다. 

 

놀랍게도 성경은 그가 시위 대장의 집에서 노예로 섬길 때와 감옥에서 억울한 옥살이를 할 때, 즉 현실적으로 아주 힘들었는데도 형통하다고 선언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창39:2,3)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창39:21,23)

 

애굽 사람인 시위대장과 간수장이 어떻게 요셉에게 여호와가 함께하는 것을 알고 모든 일을 일임시켰을까요? 그가 매일 여호와를 부르며 기도하며 예배드리고 또 무슨 일을 맡아도 아무 하자 없이 책임지고 완수하는 모습을 매번 자기들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입니다. 노예와 죄수의 신분으로서 힘든 일만 도맡아 하는데도 기쁨으로 성실히 행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지금 현실 형편은 도무지 그렇지 못한데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더 정확하게 말해서 요셉이 하나님의 품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기에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세상 사람의 형통은 자기가 남들보다 앞서고 재물 권력 명예가 넘쳐야 합니다. 신자의 형통은 현실 형편과 전혀 무관하게 하나님과 교제 동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을 두고 형통한 자라고 먼저 말한 후에 범사에 하나님이 형통하게 했다고 설명한 것입니다. 

 

요셉도 하나님이 자기 인생을 어떻게 결말지을지 전혀 몰라도 형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 언젠가는 아버지 야곱과 형들을 다시 만나서 진심으로 용서를 빌 수 있게 해주실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어려서 꾼 꿈도 하나님이 당신의 때와 방식으로 이뤄주시리라 믿고서 그 두 가지 소원을 붙들고 쉬지 않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애굽의 총리가 되어서 큰 기근에서 자기 가족을 구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창45:7,8)라는 진심어린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신자에겐 전 일생에 걸친 하나님의 거룩하고 완벽한 계획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통치에 때로 이해하기 힘들고 너무 고달파도 순응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쉽게 말해 상급자가 인격적으로 선하든 악하든 간에 신자의 유익을 위해서 그분께서 붙여 주신 것입니다. 그 상급자에게 진심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에게 거역하는 것이며, 자신을 위해서 마련된 그 거룩한 계획도 실현되지 않습니다. 

 

요셉이 노예가 된 이후로 그 고백이 나오기까지 무려 20년이 걸렸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자기 인생이 이십 년 후에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만 믿고 반드시 나를 당신의 영광에 참여시킬 것이라는 확신은 있어야 합니다. 그대로 이뤄져야만 형통이 아니라 그런 확신이 신자의 형통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리라 확신한다면 안 이뤄질 리 절대 없으니 이미 형통한 것입니다. 

 

애굽에서 노예로 사백 년간 살아가는 동안 이스라엘이 나중에 바로에게 십전십승(十戰十勝)하고 홍해의 기적으로 가나안 땅을 차지할 줄 꿈에라도 꾸었겠습니까? 이런 광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대한 생생한 증거로서 후대 신자들더러 참고하라고 성경에 기록한 것입니다. 바울도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인이나 주께로부터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라”(8절)고 권면했지 않습니까? 

 

혹시 현재 사회적으로 너무나 평범한 월급쟁이, 즉 종의 위치에서 현실적 고난 가운데 있습니까? 장래가 안 보이고 도무지 그런 처지를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까? 죽지 못해서 겨우 연명만 하는 것 같습니까? 요셉처럼 신자는 아무리 출구가 보이지 않아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소망을 잃지 않고 그분께 매사를 의탁해야 합니다.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뜻은 당신의 거룩한 통치를 받으며 피차 복종하는 것, 바꿔 말해서 모두가 형통하는 상급자가 되어서 큰 기쁨으로 다 같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후손들도 하나님이 형통하게 해주었습니다. 요셉 덕택에 큰 기근에서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야곱의 가문 70여 명이 애굽으로 이주해서 총리 가족으로 최고 대우를 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죽자 결국 그 후손들은 애굽에서 4백 년간 노예로 학대당했는데 실은 그마저도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었습니다. 당시에 이름도 없는 수십 명의 가족이 다른 나라에 이주해 살면 그 나라 사람으로 귀화하지 않으면 차별과 핍박이 심해서 생존조차 하기 힘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 후손이 하늘의 뭇별처럼 창성하게 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며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당신의 방식으로 온전히 이루신 것입니다. 비록 노예지만 세계 최강국 애굽의 보호를 받으니까 안전하게 번성했습니다. 애굽으로선 노예로 부려 먹으려면 생존은 보장해 주어야 하고, 또 힘을 써야 하니까 수시로 좋은 것도 먹여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애굽이 두려워할 정도로 창성했고 또 출애굽 후 먹고 마실 것이 없는 광야를 방황하면서 고기와 수박을 먹었던 애굽을 계속 그리워했지 않습니까? 

 

종을 위협하지 말라.

 

현실적으로만 따져도 주인이 악독하다고 종이 계속 불평 원망하면서 맡은 일을 건성으로 하는 척만 하면 사실은 주인보다 종이 손해를 봅니다. 재물과 권력이 많은 주인은 눈도 깜짝하지 않고 종에게 벌주고 새 노예로 바꾸면 됩니다. 악한 주인일수록 종에게 힘든 일을 더 많이 맡기지만 그래도 종이 묵묵히 성실하게 순종함으로써 주인의 마음을 조금씩 누그러뜨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안 되어도 최소한 자신의 실력은 계속 쌓아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평생 노예로만 살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더 큰 일을 맡길 때를 대비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래서 때가 악하므로 낭비하지 않는 것이 바로 신자의 지혜라고, 즉 하나님을 알고서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5:15-17) 

 

설령 사악한 주인을 만나 계속 억울한 고통만 당해도 주님께 하듯이 순종해야 합니다. 그 사정을 하나님이 다 아시므로 당신의 때와 방식에 따라 당신께서 다 갚아 주십니다. 요셉이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 시위 대장 보디발은 그의 부하가 됩니다. 만약 그때까지 보디발이 살아 있었다면 서로 간의 모든 시기 원망 분노는 다 씻어지고 더욱 아름다운 관계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부부 사이나 부모 자식 사이처럼 을의 위치에 있는 자가 갑의 위치의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상전이 종을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는 일이 훨씬 더 어렵습니다. “상전들아 너희도 그들에게 이와 같이 하고 위협을 그치라.”(9절)고 합니다. 먼저 상전도 ‘이와 같이’ 하라고 즉, 그리스도의사랑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전제했습니다. 그 기본 사항 외에 위협을 그치라고, 즉 절대 갑질하지 말라고 한 가지 더 명했습니다. 상전은 주님이 교회에게 행하셨던 대로 종에게 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상전이 종에게 따로 더 위협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간단합니다. 원래 계약된 것 외에 추가로 더 뜯어내기 위해서입니다. 예를 들면 회사 공금을 빼돌려 착복하려는 데에 부하더러 동참하지 않으면 인사고과에 최저 점수로 매겨서 평생 승진하지 못하게 막겠다고 겁을 주는 짓입니다. 사회적으로 갑의 위치에 있는 지도층더러 절대로 불의를 행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연약한 소외계층을 핍박 착취하여 자기 배를 채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상전이 부하의 잘못은 얼마든지 합리적으로 야단칠 수 있으나 개인적 이익이나 감정에 따라서 제멋대로 다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비더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차원으로 약자를 어떤 현실적인 문제를 빌미로 위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른 이도 한 사람의 온전한 인격체로 받아들이고 그 사람의 인격을 감정까지 존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상전도 바로 그 종을 자기에게 붙여 준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따른 것이므로 그분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관계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길 원하시는데 그 일을 주도해서 행할 자는 지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상전이나 종이나 하나님의 뜻 안에선 그 신분 위치 자격 조건이 똑같은 지체일 따름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역할만 다른데 다른 지체를 협박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초대교회 부흥의 원인

 

초대교회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로마제국 전역에 염병같이 번져 나간 중요한 원인이 하나 있습니다. 모두가 똑같이 형제와 자매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동생들이 당신을 만나러 왔을 때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마12:48,49)고 했습니다. 잔치에 가서 높은 자리 대신에 말석을 차지하라고 하면서 “잔치를 베풀거든 차라리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눅14:13)고 가르쳤습니다. 십자가 복음으로 열리는 새 시대에는 예수의 피로만 맺어지는 새로운 가족, 형제자매, 상전과 종의 관계가 생긴다는 것입니다. 

 

소설이긴 하지만 셍퀘비치의 쿼바디스에 아주 좋은 예가 있습니다.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로마의 사령관이 황제의 보상으로 예쁜 여자 노예를 자기 첩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 여인은 다른 나라 왕족이었으나 전쟁 포로로 오래전에 잡혀 와있었던 신세였습니다. 그 여종은 강제로 자기를 첩으로 두려는 사령관에게 결코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사령관은 그녀를 너무 사랑해서 내키지 않았으나 예수 믿는 신자들의 예배에 참석해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여종의 주인인 로마 귀족도 함께 참석해 모두가 형제자매처럼 서로 사랑으로 섬겼습니다. 그는 자기가 속한 세계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생전 처음으로 목격하고는 깊은 영적 갈등에 빠졌습니다. 결국 로마 대화재 때에 네로가 크리스천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군인들로 교인들을 잡아들이도록 했으나, 로마 장군인데도 오히려 로마에 맞서서 신자들을 구해주었습니다. 비로소 그도 예수 안에서 노예들과 동등한 위치 신분의 형제자매가 된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3)고 선언합니다. 초대교회 예배에 참석한 모든 이들에게 한 성령이 역사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다 같이 새로운 가족으로 맺어주었던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금지할 법이 없이 즉, 저절로 모든 성도의 가슴에 충만히 채워진 것입니다.(갈5:22,23) 또 그래서 사도들로 기적이 나타나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을 돕고 날마다 성전에 모여 함께 떡을 떼며 예배드리고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아서 날마나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해주신 것입니다.(행2:43-47)

 

초대교회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간관계에서 갑질은 완전히 내려놓고 참사랑으로 피차 복종했던 것입니다. 혹시 사회적으로 우월한 위치에 있다면 종의 위치로 최고로 낮아진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인간을 기뻐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서로 진심으로 순종했습니다. 그들의 모임과 관계에는 항상 하나님의 기쁨으로 충만했던 것입니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야말로 최악의 죄인이었고, 지금도 그러하다는 철저한 자각이 있는 자입니다. 갑의 위치에선 당연히 그래야 하지만 을의 위치에서도 어떤 치사한 방식의 갑질이나 앙갚음하지 않게 되어야 합니다. 서로를 자기보다 낫게 여김으로써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역사가 신자의 공동체에 반드시 풍성히 일어납니다. 

 

절대로 신자들이 의로워서가 아니며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예수를 믿어서도 한시라도 예수님의 은혜가 없으면 다시 자존심을 세우고 갑질로 빠질 너무나 연약한 사망의 몸이라고 절감해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와 만나든 자기는 완전히 없어져야 하며, 그렇다고 상대만 있게 해서도 안 되며, 그들 사이에 오직 예수님만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바울처럼 오호라 이 곤고한 몸에서 주님만이 나를 건져 주실 수 있사오니 나를 이대로 버려두지 마시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쉬지 말고 간구해야 합니다.

  

단순히 조금 더 사랑하고 죄를 조금 덜 짓고 착한 일 조금 더 하는 정도가 절대 성화의 본질이 아닙니다. 부부 사이, 부모 자식 사이, 상전과 종 사이가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정말로 예수님의 사랑으로만 사회적 조건 자격 신분 재물 권력 지성 등에 전혀 구애받지 않고 원수까지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눈물 흘리며 진심으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오직 둘로만 나누는데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자냐 아니냐입니다. 신자는 세상 모든 이를 그리스도의 몸에 같은 지체로 붙어 있는 관계이거나, 아니면 앞으로 그렇게 되게 하려는 목적과 방향으로만 그 관계를 맺어나가야 합니다. 

 

혹시라도 지금 내 코가 석 자라서 이웃 사랑할 여유와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못 하고 있습니까? 인생은 고난이 그칠 새가 없으니 그렇게 따지면 죽을 때까지 온전한 이웃 사랑을 한 번도 할 수 없습니다. 요셉처럼 어떤 고난 가운데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형통한 자가 먼저 되어서 하나님이 그 관계를 형통하게 해주도록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조차도 하나님의 기뻐하는 일을 할 때 성부가 당신을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고 고백했습니다.(요 8:29) 신자가 어떤 인간관계에서도 피차 복종해야 하고 특별히 상급자는 절대 갑질하지 말고 더 큰 사랑으로 섬기라는 가르침은 분명히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한데 우리가 이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하나님의 형통을 발로 차버리고 세상의 형통에만 관심이 있다는 뜻이지 않습니까?

 

(10/8/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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