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4:1-3)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 (16/완)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1-3)

 

성경과 성화

 

성경의 영어 이름인 the Bible의 뜻은 ‘그 책’입니다. 바이블이란 단어는 고대에 책의 역할을 한 갈대로 만든 종이인 파피루스에서 유래했습니다. 거기에 정관사를 붙이고 대문자를 써서 오직 하나뿐인 바로 그 책, 즉 모든 사람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는 뜻이 된 것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세상은 언제 어떻게 생겼고, 사람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세상은 어떤 힘에 의존해서 어떻게 운행이 되며, 인간은 이 땅의 짧고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떤 의미와 목적을 갖고 살아야 하는지 등, 인간이라면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할 가장 근본적인 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실제로 완전한 무신론자이자 극렬한 안티 크리스천이었는데 마음을 열고 성경을 깊이 묵상하며 세밀하게 읽어보고선 믿음을 갖게 되었고 자기 인생이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다는 간증을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창조에서 세상의 종말까지 인류와 세상 전체에 관한 영적인 진리를 계시해 놓았는데 그 진리들이 개인의 인생에도 그대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해 성경은 사건 하나하나에 초점을 맞추고서 단편적으로 읽어선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진리도 부족하게 조각조각으로 알게 됩니다. 구슬은 꿰어야만 보배가 되듯이 가장 먼저 성경 66권 전체의 맥을 파악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 땅을 통치함에 어떤 궁극적이고 종합적이며 영원한 계획을 갖고 계신지부터 잘 살펴야 합니다. 신자는 자기 인생의 사건들을 볼 때도 개별적 미시적으로 접근해선 안 됩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출생에서 죽음까지 일생에 걸친 온전한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신다는 관점에서 종합적 거시적으로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살펴보고 있는 성화도 예수 믿은 후 평생토록 행할 신앙생활이므로 반드시 그런 차원에서 판단 적용해야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많은 신자가 개별적인 행동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신앙 연륜이 꽤 오래되었는데도 자기도 모르게 어떤 때는 빤히 알고도 죄를 지으니까 크게 실망 좌절합니다. “내 믿음이 도대체 왜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인가? 이러고도 내가 신자라고 할 수 있는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기만 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것 같아! 이 땅에서부터 예수님 앞에 도무지 고개도 들지 못하겠는데 어떻게 천국을 갈 수 있다는 말인가?”라는 자조 섞인 탄식만 하게 됩니다. 

 

신자의 특별한 신분

 

바울의 서신서에는 ‘그러므로’라는 접속사로 그 내용이 확연히 둘로 나눠지는 패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전반은 십자가 구원에 관한 영적인 진리를 설명합니다. 그 후반은 그 진리를 깨달아 구원받은 자가 실제로 믿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성화를 가르칩니다. 본문 1절이 에베소서에서 그런 분기점입니다. 

 

그런데 성화를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권합니다. “예수 믿은 신자답게 착하게 살라”고 명하지 않았습니다. 신자가 거룩하게 살려면 개별적인 행동의 선악 간을 따지기보다는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고 있는지부터 잘 살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선 “부르심을 받은 일”이라는 어구는 두 가지 의미를 함의합니다. 첫째로 ‘부르심을 받은’이라는 말은 구원받은 방식을 설명합니다. 둘째로 ‘부르심을 받은 일’은 구원 자체를 말하지만, 더 중요하게는 부르심을 받은 자가 그 후에 반드시 행할 일이 따로 있다는 뜻입니다. ‘부르심’의 헬라어 ‘클레시스’에는 특정한 사람을 지명해서 불러내어 특정한 일을 맡긴다는 뜻이 있는데, 영어 흠정역(KJV) 성경은 그런 뜻을 살리려고 vocation으로 번역했습니다. 

 

첫째 구원받는 방식에 관해선 신자 쪽에서 자발적 능동적으로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부르셨고 신자는 그 부르심에 수동적으로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고 선언합니다. 구원에 인간의 공로는 전혀 쓸모없다고 하면서 사람들이 구원에 필요한 조건이라고 가장 쉽게 착각하는 요소 셋을 열거했습니다. 첫째 혈통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둘째 육정은 정서적 도덕적 찔림을 받고 회개했다고 해서, 셋째 사람의 뜻은 인간이 먼저 믿고자 노력한다고 해서, 구원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 죄인으로 예수님을 자기 주인으로 영접하도록 처음부터 끝까지 주관하시는 것이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라는 뜻이며 또 그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길을 물으러 온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3:5)고 그 진리를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바울도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고, 즉 예수를 주라고 시인하게 되는 것은 성령으로 거듭난 결과라고 재확인했습니다. 

 

신자는 성령의 역사에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먼저 받고서 그에 순응한 자입니다. 혹시라도 주변에 거머리 같은 예수쟁이에게 전도를 받아서 평소에 신세도 많이 졌고 해서, 또는 먼저 믿은 마누라가 하도 졸라대서 가정의 평화를 지키려고, 아니면 대체 교회나 성경은 무엇을 가르치는지 궁금해서, 자발적으로 교회에 출석해 등록하였기에 내 의지로 신자가 되었다고 여겨집니까? 그러나 그때까지의 모든 전후 사정을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비교해서 잘 살펴보면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계획도 소망도 하지 않았는데 전도자를 만나게 되거나 성경에 대해 알아보고 싶어진 계기나 사건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먼저 신자를 이름을 지명해서 불러냈다면 그 후로는 이전과 완전히 다르게 대우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신자가 성령의 간섭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하여서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특별한 신분을 지니게 된다는 뜻입니다. 세상에서 크게 형통하는 축복을 준다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현실적 처지는 사악한 세상 안에서 인간 사회에서 통용되는 방식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영적인 신분은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그분의 자녀가 되었고 천국의 시민권을 완전히 확보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3;16) 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고 약속하셨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순간 그 즉시로 이 땅에서부터 영생이 확보됩니다.

 

신자가 행할 일

 

하나님이 신자가 이 땅에 살아있을 때 구원해 주셨다면 죽음 후의 영광스러운 인생이 이미 보장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은 후 그때까지의 인생을 당신께 전부 바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또 신자 인생에 대한 당신만의 특별한 뜻과 계획이 반드시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 특별한 신분이 된 신자라면 당연히 세상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생활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며, 모든 인간관계도 그들이 행하는 방식과는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지금까지처럼 성화를 단순히 죄를 덜 짓고 더 착하게 사는 일에 집중하면 세상 사람과 완전히 달라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에서 굳이 따로 불러낼 필요도 없습니다. 

 

우선 죄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서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지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다른 종교인들처럼 착하게 살아서 하나님의 합격 점수에 들어야 한다는 염려는 전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음 놓고 죄를 지어도 된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1,2) 죄에 대해서 이미 완전히 죽었는데 계속해서 죄에 죽어가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착하게 사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하나님이 맡기실 일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은혜로 구원받은 신자라면 더더욱 죄를 더 지을 수 없다고 한 후에 바로 그런 뜻을 밝혔습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롬6:3-5) 

 

로마 교인들더러 죄의 문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다 해결되었으니 이젠 주님의 부활에 주목하라고 합니다. 신자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고 그리스도의 부활에 연합시켰다고, 즉 영생을 이미 보장해 주었다고 합니다. 본문의 에베소 교인들에게 부르심을 입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권면이 바로 새 생명 가운데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맡긴 일은 새 생명을 받은 자답게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을 여러 각도로 설명할 수 있으나 한마디로 줄이면 예수 십자가 복음을 전파해서 사탄에 미혹된 영혼을 구원으로 초대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이어지는 설명에도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선물의 분량대로 은혜를 주셔서 만물을 충만하게 만들기 위해서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라고 명합니다.(7-12절)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을 제자로 삼아 당신께서 분부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과 맥을 같이 합니다.(마28:20) 하나님은 그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고(고전1:21), 불신자가 예수 복음을 듣지 못하면 믿지 못하니까 그들에게 십자가 은혜를 전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가 신자입니다.(롬10:9-15) 

 

따라서 신자는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에서 불려 나와서 다시 세상으로 전도하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가 됩니다. 흔히들 전도를 십자가 구원 교리를 말로 잘 설명해서 이해 수긍시켜서 교회로 출석하게 하는 일이라고 종교적으로만 판단합니다. 물론 복음을 들어야만 믿으니까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간섭이 없다면 그래서 거듭나지 않았다면 기독교의 구원 교리만 지식적으로 믿은 것으로 그칩니다. 전도 받은 불신자는 나는 구원받았고, 전도한 자는 신자로서 행할 바를 다했다고 착각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구원받으려면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서 예수님을 자신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는 주인으로 모셔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어야만 하므로 주님의 사랑을 실제로 자기 삶에서 받아 누려야 합니다. 불신자가 교리를 아는 일은 당연히 필요하나, 그 전해진 교리가 새 생명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죽으면서까지 죄인들을 당신의 사랑으로 살려내었습니다. 신자도 그 십자가 복음을 전하려면 반드시 자신부터 예수님을 따라가며 주님의 사랑을 누리며 살고 있는 모습을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새 생명으로 행하려면

 

새 생명으로 행하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바울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2,3절)고 권합니다. 단어 하나로 줄일 수 있을 만큼 사실상 같은 내용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오래 참음, 용납, 힘써 지키라는 것은 ‘인내’로 묶을 수 있고, 나머지도 인내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덕목입니다. 고전13:4-7의 사랑에 대한 정의가 결국 끝까지 참는 것 한마디로 줄일 수 있었지 않습니까? 결국 신자가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할 바인 성화는 예수님의 가르침 대로 이웃을 끝까지 참아주며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꼭 주목해야 할 사항이 하나 있는데 이웃을 사랑하려면 먼저 겸손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당연한 가르침이라고 여기면 안 됩니다. 다른 적당한 표현이 없어서 우리말로는 겸손, 영어로는 humility라고 번역했으나 원어의 뜻은 훨씬 더 깊은 차원입니다. 이 서신을 작성할 때는 라틴어나 헬라어에 없던 단어로 신학자들은 바울이 새로 만든 것이라고 봅니다. 언어란 모든 이가 익히 알고 있는 사물과 사안을 대변하는 법인데, 바울이 설명하고 싶은 개념을 당시 사람은 전혀 몰랐고 그런 단어가 없었기에 신자만 이해 실현할 수 있는 새 단어를 고안한 것입니다. 

 

발음이 어려운데 ‘타페이놉흐로쉬네’로, 특이하게도 낮춘다는 ‘타페이노스’와 높인다는 ‘휘페레코’의 합성어입니다. 낮춤으로써 높아진다, 더 정확하게는 높은 자가 먼저 낮추는 겸손입니다. 당시 세상에는 높은 자가 스스로 낮추는 겸손은 아예 상상치도 못했던 것입니다. 거기다 낮춘다는 단어에는 자신의 작음에 대해 굴욕감을 느낄 정도로 비참한 마음을 갖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서 보여준 무조건적 무차별적인 완전한 사랑은 당시 인간 세상에선 처음 보는 것이라 아가페라는 단어를 제자들이 새롭게 만들었듯이, 마찬가지로 세상에 전혀 없었던 겸손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더러 닮으라고 말한 예수님의 그 마음입니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자기를 완전히 비어서 십자가에 죽어야만 하는 비참한 죄수의 자리에까지 낮아지신 그런 겸손입니다.(빌2:5-8) 십자가 예수님의 사랑과 겸손은 인간 세상의 그것과는 전혀 차원이 달랐으며 제자들로서도 생전 처음 체험하는 사랑이자 겸손이었습니다. 

 

신자더러 새 생명으로 행하라는 것은 신자 안의 썩어져 가던 옛 생명이 죽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생겼다는 뜻입니다. 본문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새 생명이 흔히 생각하듯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여 고난을 해결 받고 자기 소원대로 형통을 이뤄내는 능력이 절대 아닙니다. 이전과 달리 세상에는 없는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이웃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섬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이 사탄에 져서 인류가 짊어지게 된 죄의 형벌인 죽임을 당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통분하며 우셨습니다.(요11:35-38) 바로 그런 심정으로 사탄에 미혹된 불신 이웃을 불쌍하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전혀 그런 적이 없었고 예수 믿은 후에 생전 처음으로 그렇게 되니까 그리스도의 새 생명입니다. 주님이 심령이 가난해져야 하고, 그 가난해진 심정은 물론 이웃의 더 가난한 영혼을 볼 때 애통해하는 심정을 지녀야 천국을 차지한다고 팔복 강화를 시작하신 까닭입니다.(마5:3-5) 

 

그리스도께 하듯이

 

바울도 그래서 이미 살펴본 대로 세 가지 대표적인 인간관계에 관해서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하셨듯이’ 또는 ‘교회가 그리스도께 하듯이’ 행하라는 단서 조항을 붙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받은 자만이 행할 수 있는 겸손과 사랑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자가 먼저 최고로 낮은 자리로 내려가서 어떤 차별과 조건 없이 원수까지 참사랑으로 섬기는 일은 세상 사람은 절대 행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는 신자에게도 아주 힘든 일이긴 해도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성령의 신령한 능력이 매번 작동해 주지 않아도 할 수 있는데 의외로 간단하고 쉽습니다. 신약성경의 모든 계명은 성화에 대한 가르침인데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조건을 빼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도덕적 규범일 뿐 특별히 심오하고 경건한 내용이 따로 없습니다. 

 

본문에서도 ‘부르심’과 ‘새 생명’을 빼면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사랑으로 서로 용납, 평안하라는 것입니다. 믿음과 전혀 무관하게 초등학생도 다 배워서 익히 아는 내용입니다. 거기에 다시 ‘부르심’과 ‘새 생명’, 즉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수식어를 붙여서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면 차원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누차 강조하지만, 최고도의 열정과 정성을 바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목적과 의미에 근거하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죄를 깨끗게 할 수 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으므로 그 죄로 인간이 하나님께 받을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해서 완벽하게 감당해 주셨습니다. 바꿔 말해 기독교 신앙의 출발은 초등학생도 잘 아는 윤리를 그중에 하나라도 평생을 노력해도 절대 온전히 지킬 수 없다는 영적인 진리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생전 처음으로 깨닫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나 십자가 죽음에 비춰볼 때 누구도 감히 내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자신할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쩌다 죄를 지어도 스스로 회개하여 거룩해질 수 있다고 믿기에 끝까지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용서를 배척합니다. 그러나 만약 자기 평생의 행동과 말과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는 영상을 하나님과 함께 끝까지 볼 수 있는 자가 과연 그들 중 한 명이라도 있겠습니까? 저라면 목사가 된 이후의 삶을 찍은 영상이라도 너무 부끄러워서 하나님 없이 혼자서 5분도 채 보지 못하고 테이프를 꺼내 불살라버릴 것입니다. 

 

신자는 자신의 실체를 정확히 발견했다는 차원에서 유일하게 세상 사람들과, 즉 이전의 자신과 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적 부르심을 받을 때 성령이 그 심령에 역사하여 자신의 영적인 실체가 가장 기초적인 윤리 하나도 온전히 지켜내지 못하는 너무나 가난하다 못해 비참하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 전체가 죄의 덩어리라 속에서 나오는 것 전부가 교묘하고도 영악하게 위장된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 증거, 훼방(마15:19)임을 생전 처음으로 처절하게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런 식의 깨달음과 그에 따른 진정한 회개를 하고 싶었던 소망과 의도는 전혀 없었고 오히려 그 반대로 하나님과 원수 되어 죄악 중에 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렇게 자신이 천하 죄인 중의 괴수임을 처절하게 절감했다면 아무리 높은 자라도 스스로 최고로 낮아질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갑질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겸손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런 모습들이 분명히 마음에 안 들어서 시기하는 세상으로부터 주님이 당한 것처럼 이런저런 조롱 멸시 핍박을 받게 되겠지만, 신자는 그렇게 당하라고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소명을 실현하라. 

 

의로운 불신자들도 열심히 자신을 위한 도덕적 수양은 합니다. 신자는 범사에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께 하듯이 행해야 합니다. 영혼 구원의 소명을 그리스도의 새 생명에 힘입어서 평생토록 이뤄나가는 것이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 이기는 성화입니다. 바울과 베드로가 평소에 윤리적 수양과 훈련에 집중했겠습니까? 그보다는 주님께 받은 음부의 권세를 이기는 천국 열쇠를 주변 모든 사람에게 소개하고 나눠주는 일에만 전념했을 것입니다. 그들로선 굳이 윤리적 죄와 싸울 여유도 필요도 없었습니다. 

 

물론 그들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사탄의 시험과 세상의 유혹을 받으며, 특별히 주변에 크게 형통해서 풍요롭게 사는 자들을 보면 마음이 흔들리고 나아가 죄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지은 죄를 진정으로 회개하여서 성령 안에서 깨끗이 씻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신분이 바뀌었기에 자기가 받은 소명을 재확인하고 다시 그 실현에 헌신했을 것입니다. 

 

흔히들 소명이라면 목회자 선교사 같은 전임 사역자에게만 적용되는 줄 압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신자는 한 명의 예외 없이 하나님으로부터 먼저 세상에서 불려 나왔고 복음 전파의 임무를 품고 다시 세상으로 보내어졌습니다. 사역자와 일반 신자가 다른 점은 그 소명을 실현하는 방식 하나뿐입니다.

 

세상 안에서 세속적으로 살 수밖에 없는 신자는 자기가 행하는 바로 그 세속의 직업을 통해서 복음을 입증해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불의 불법에도 참여하지 않는 대신에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에만 힘입어 사는 모습을 내보여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겪게 될 온갖 현실적 손해는 기꺼이 감수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성화에 대한 본문을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라는 말로 시작한 까닭이 너희도 주님을 따라는 가는 삶을 살다 보면 자기처럼 감옥에 갇히는 고난도 받을 수 있다는 뜻을 드러낸 것입니다. 

 

실제로 초대교회 교인들은 유대와 로마로부터 박해가 아주 심했습니다. 헬라인은 로마 사형수 예수만 믿으면 구원 얻는다는 복음을 어리석다고, 유대인은 예수가 나무에 달려 죽었기에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았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착한 행실로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택하여 구원으로 예비해 놓으신 자들이 그들의 일상 삶에서 세상과 다른 겸손과 사랑을 발견함으로써 복음에 관심을 갖게 되어서 제 발로 교회로 찾아왔기에, 기독교가 세상 어떤 힘도 막지 못할 정도로 염병처럼 퍼져나갔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가정주부도 선교사다.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삶을 살아야 하는 가정주부들이 자기가 받은 소명이 대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반문합니다. 주부도 목사와 하나 다를 바 없는 복음 전파 소명을 받았습니다. 이해하기 쉬울 것 같아서 제 아내의 예를 들겠습니다. 완전 불신자인 저희 집안에 시집왔고 저 또한 극렬한 안티크리스천이었습니다. 결혼 후에 교회 출석을 하지 못했으나 한 번도 그 문제로 불평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제가 누워 자는 사이에 7년 반을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교회의 새벽기도에 출석해 저와 제 집의 구원을 위해서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나머지 주부로서 행할 바는 성실히 순종 수행하면서 말입니다. 세상에서 부르심을 입어서 저희 집안을 구원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다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남편의 전도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고 단순히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런 열매 없이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반감만 더 늘어나는 저를 보고도 그 오랜 기간을 그렇게 묵묵히 순종하며 기도하는 일이 절대 쉽지 않습니다. ‘예수 천당’을 모르는 저를 너무 불쌍하고 안타깝게 여긴 것입니다. 지금도 주변 사람들, 특별히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을 보면 애통해하면서 눈물로 기도하고 형편이 닿는 대로 사랑으로 섬깁니다. 무조건 쳐들어가서 교리부터 풀어 놓지는 않습니다. 물론 말로 가르쳐야 할 기회가 되면 담대하게 전합니다. 

 

복음 전파의 최일선에 목숨을 걸다시피 하는 선교사만 소명에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후방에서 재정으로 기도로 후원하는 자도 선교사입니다. 마찬가지로 가정주부가 진정으로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면에서 스스로 자기를 낮추어 사랑으로 섬기면 그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예컨대 된장찌개 하나를 끓여도 가족의 육체적 정서적 건강을 위해서 기쁨으로 행하면 반드시 가족들 사이에 성령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러면 남편도 직장에서, 자녀도 학교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나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화의 본질입니다. 

 

물론 윤리적인 죄와 싸워 이기는 싸움에 게을러도 된다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신자는 선악의 기준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거하고 있으면 선이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 악이 됩니다. 신자가 된 후에도 종종 일상적인 죄로 쓰러질 수 있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품 안에 있습니다. 거기다 자기는 여전히 그럴 수밖에 없는 연약한 죄인이라는 철저한 인식이 있기에 언제나 다시 자기를 철저히 낮출 수 있습니다. 자기 속에 천국의 영생이라는 새 생명이 있기에 죄에 대한 영원한 심판의 염려는 전혀 없는 대신에 안심하고 다시 소명의 실현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밖에 있는 사람이 아무리 세상적으로 최고 의인이라도 하나님 안에서 최고 악인이므로 최고로 불쌍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온전한 선으로 이웃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신자가 교회에선 끝까지 참으려 노력하나 교회 밖에선 서로 간에 위장된 평화만 유지하려는 체면치레 식의 이전 겸손으로 되돌아가 버립니다. 새 생명 가운데 행해야 하는데 새 생명이 주일 하루 교회에서만 작동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오히려 나머지 평일 엿새 간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과 만날 때에 새 생명의 빛과 향기가 드러나야 합니다. 주일에 교회에 모이는 이유는 첫째로 그리스도의 안에 거하게 해주신 은혜에 감사 경배하는 것이나 이웃 사랑을 어떻게 할지를 배워서 성도들을 상대로 미리 연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시리즈 내내 강조했듯이, 기독교의 성화는 개인의 도덕 수양이 아니라 부르심을 받을 때 함께 받은 십자가 소명을 주변에 실현하는 일입니다. 예수 십자가 복음을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전파하십시오. 그것이 가장 확실하게 거룩하게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기를 높여서 하나님 밖으로 자신을 내몰려는 끈질긴 본성을, 그것이 바로 죄의 본질임, 피 흘리기까지 죽이십시오. 자신 속에 있는 새 생명이 충만히 작동되도록 자기 전부를 바치며 노력하십시오. 바울이 ‘모든 겸손’이라고 말했으니까 신자는 관계를 맺는 모든 사람을 예수님의 십자가 성육신의 겸손으로만 대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새 죄와는 자연히 멀어지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점점 자랄 수 있습니다.

 

(10/15/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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