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6:34)
사람들이 백이면 백 아주 크게 착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인생은 과거에 연연하지 말고 미래도 걱정하지 말며 현재에 최선을 다해 충실히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지당한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엄밀히 따지면 인간에게 현재란 없습니다. 인간은 과거에 묶이거나 미래를 바라보거나 둘 중 하나로 밖에 살지 못합니다. 현재에 최선을 다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항상 순간적으로 과거를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지정의를 통해 어떤 일이든 인식하는 순간 이미 과거의 사건이 되어버린 후라는 것입니다. 간단한 예로 여러분이 이 글을 읽는 순간 이미 이글의 내용은 머리 속에 저장되고 글을 읽었다는 것 자체도 과거의 일로 변해버린 뒤입니다.
시간은 단 일초도 멈추는 법이 절대로 없습니다. 매 순간순간 우리에게 다가와서는 바로 우리 곁을 떠납니다. 전혀 우리의 사정은 봐주지 않고 매정하게 스쳐 지나갑니다. 그런 엄연한 사실을 의식하든 못 하든, 어떤 일을 의도적으로 행하든 안 하든, 심지어 아무 생각을 하지 않거나 잠을 자고 있어도 시간은 흘러 지나갑니다. 결국 눈 앞에 뻔히 보이는 현재의 삶도 붙들어 맬 수 없는 것이 인생입니다.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이 미래를 하나하나 갉아먹으면서 살고 있는 셈입니다. 인생의 삶이 현재는 아예 없고 과거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그 전부가 미래입니다. 한 순간 숨을 쉬는 만큼 늙어 가고 무덤을 향한 거리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미래를 잘 살아야 하는가, 다른 말로 하면 단 일초도 사정 봐주지 않고 계속 밀려오는 시간을 잘 관리하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전부입니다.
그렇다면 과거에 연연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입니까? 우리가 너무 무심결에 시간을 흘려보내니 별로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간을 테니스나 야구 자동 연습기에서 연속해서 나오는 공과 같고 그 연습기는 한 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공을 날려 보낸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런데도 받아친 공과 놓친 공의 개수에만 계속 미련을 가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 가끔 중간에 휴식을 할 수는 있어도 계속해서 그 공을 받아쳐야 합니다. 과거지사는 무조건 자신의 등 뒤로 넘겨 보내야 합니다. 바울이 고백한대로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빌3:13) 해야 합니다.
인생이 미래를 사는 것일 수밖에 없다면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과 염려는 어느 누구에게나 필연적으로 따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지금 내일 일을 위해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미래만 사는 인생에서 내일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단순히 시간적 개념에 국한해 생각할 때는 인생에는 현재가 없고 과거와 미래뿐입니다. 그러나 다른 피조물은 몰라도 인간만은 그 시간에 어떤 일을 함께 합쳐서 생각해야 합니다. 과거에 이미 끝이 난 일이라도 현재까지 그 여파와 효과가 남아 있다면 여전히 현재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 받은 기쁨을 아침마다 새롭게 여기게 되면 그것은 현재입니다. 또한 이미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그 구원이 영원히 취소되지 않기에 그 구원은 영원히 유효한 현재형 구원인 것입니다. 물론 과거의 상처와 슬픔에 자꾸 묶여 있는 것 또한 여전히 현재형 시련입니다.
그 반대로 시간적으로는 미래의 일이라도 현재가 되는 것이 있습니다. 다달이 반드시 내어야 하는 아파트 렌트비는 현재입니다. 미리부터 열심히 일해서 그 돈을 마련해 두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자에게는 영생은 이미 확보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입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그분의 거룩한 통치 가운데 전적으로 들어 있으면 이 땅에서부터 현재형으로 천국을 누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만은 과거, 현재, 미래를 나누는 기준은 시간이 아니라 일입니다. 특별히 인간이 통제 가능한 여부를 가지고 나눕니다. 아파트 렌트비를 마련하는 일과 같이 현재란 자신의 힘으로 대책을 세우고 실현해 나갈 수 있는 영역입니다. 과거는 도저히 자기 힘으로 다시 뒤집거나 변경할 수 없는 일입니다. 또 아무리 인간이 계획하고 준비했어도 어떻게 사태가 전개될지 몰라 자신의 통제의 한계를 벗어난 것은 미래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키가 자라고 있는 것은 분명히 현재의 일이지만 자신의 힘으로 통제가 될 수 없기에 미래입니다. 누구나 키가 크고 싶어 열심히 영양을 섭취하고 적절하게 운동합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일도 분명 현재지만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고 통제도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내일 일이며 또 당연히 염려하지 말아야, 아니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인간이 하는 염려의 대부분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 일에 관한 것입니다. 너무나 어리석은 짓 아닙니까? 신자마저 그렇습니다. 신자란 범사를 하나님이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자인데도 자꾸 염려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일을 하나님이 계획한 일이라는 데에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계획하여 자기 방식으로 이루려니까 혹시 하나님이 통제해 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불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근본적으로 내일 일에 대한 염려를 없애는 길이 밝혀졌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식으로만 하면 됩니다. 도덕적, 종교적 일만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에게 하나님이 심어준 소명을 오직 기도하여 그분의 인도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더라도 그 소망을 하나님이 심어주었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도 자기가 하는 일을 하나님이 분명히 기뻐하실 것이라는 확신은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일들을 하는데 하나님이 인도 안 해 주실 리가 있겠습니까? 또 하나님이 인도하는데 실패할 리가 있겠습니까?
과거의 일이 아무리 힘들었더라도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면 쉽게 잊을 수 있고 감사까지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그 일의 결과를 더 좋게 바꿔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장중에 완전히 붙잡혀 있다면 아직 전혀 닥치지 않는 일이라도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인생은 시간적으로는 현재가 없고 미래뿐입니다. 자신에게 허락된 종착지를 향해 한걸음씩 나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일로만 그 시간을 구별할 수 있을 뿐입니다. 다른 말로 쉴 새 없이 닥치는 시간에 부여하는 자신의 의미에 따라 그 인생의 가치가 나뉩니다.
자기 일에만 집착하는 자는 아무리 최선을 다하든, 심지어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현재에 묶여 있는 자입니다. 따지고 보면 시간적으로는 현재가 없기에 지나간 과거에 연연하는 자입니다. 인생을 자기가 살고 있으면 시간을 잡아먹는 불가사리 밖에 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인생이 미래뿐임을 확신하기에 하나님에게 그 모든 시간을 맡길 수 있는 자만이 그 인생에 참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요컨대 누구나 시간적으로는 미래를 꿈꾸며 사는 것은 마찬가지이되 하나님의 일을 꿈꾸는 자와 자기 일을 꿈꾸는 자 둘로만 나뉘다는 것입니다. 불신자와 신자의 구분입니다. 그리고 그 매정하게 스쳐 지나가는 시간의 종착점은 전자에게는 영원한 죽음인 반면에 후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신자란 하나님의 일을 꿈꾸며 그것을 수행하고 있는 자입니다. 현재 영생을 이미 소유했고 또 천국을 향해 현재진행형으로 걸어가고 있는 자입니다. 그런데도 왜 자꾸 염려를 합니까? 그 일이 어떻게 일어났든, 현재 어떻게 일어나고 있든, 앞으로 어떻게 일어날지 알 수 없든, 혹시 영생을 향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데에 확신이 없는 것은 아닙니까?
7/1/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