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37:23,24)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신자

조회 수 1052 추천 수 56 2008.05.27 19:2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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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신자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 입은 채색 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창37:23,24)



흔히들 요셉은 어려서부터 꾼 꿈을 어른이 되도록 잘 간직하고 가꿔서 나중에 애굽의 총리까지 되었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우리도 꿈을 크게 키워 하나님이 그 꿈을 이뤄주도록 굳게 믿고 최선을 다하면 이뤄진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이루어주실 꿈이라면 이왕에 아주 크게 잡으라고 하며 잘 안 되어도 일부는 달성시켜 줄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마치 상거래 하듯이 자신이 정한 꿈을 놓고 하나님과 거래 하게 만듭니다.

그런 가르침의 오류는 우선 꿈을 요셉이 미리 의도해서 꾸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즉 문자 그대로 꿈(dream)과 비전(vision)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비전을 가진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총애를 엎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11번 째 아들로 도저히 그럴 수 있는 처지가 아니면서도 집안을 대표하고 싶은 야심을 알게 모르게 키웠는지 몰라도 말입니다. 그가 꾼 꿈은 그야말로 비전이 아니라 그냥 꿈이었습니다. 그것도 자신의 평소 생각이나 고민이 무의식중에 꿈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시로 꾸게 해 준 것입니다.

물론 신자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무슨 일이든 소망하고 계획할 수 있으며 믿음으로 간구하면 하나님이 이뤄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올바른 비전이란 신자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이 심어주고 또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그분의 뜻과 계획이어야 합니다. 신자의 개인적 비전이 이뤄지는 경우는 하나님의 뜻과 같거나 최소한 위배되지 않으면서, 신자가 자신의 의와 유익과 영광을 전혀 구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희생해가며 오직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기를 소원할 때입니다. 단순히 자기 계획을 크게 잡아 강한 믿음으로, 그 믿음이 인내력과 담력과 의지력 등을 혼합한 것인지 잘 분간이 안 되지만, 기도하며 밀어붙인다고 다 비전이 아니며 또 하나님이 이뤄주시는 것도 아닙니다. 형들이 그를 꿈꾸는 자라고 부른 것도(19절) 순전히 이상한 꿈이나 꾸는 이상한 아이라는 비아냥거림이었습니다.

요셉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갈 때는 17살 소년이었습니다. 그가 일국의 그것도 타국에서 외국인으로 총리가 되리라고는 비전은커녕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입장이 되어 본문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버지 명대로 형들이 양치기를 잘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어서 빨리 돌아가 보고하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형들에게 걸어 왔습니다. 형들이 멀리서보고 자기를 죽여 없애려는 모의를 벌리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자마자 형들이 아무 말도 않고 다짜고짜 채색 옷을 벗기고 구덩이에 던져 넣어버렸습니다.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처음에는 장난인가 아니면 평소 미워했으니 조금 혼을 내주려는가보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리지만 구덩이에 던져지는 순간 아차 뭔가 사태가 굉장히 심각하다고 당장 눈치 챘을 것입니다. 장난이나 혼줄 내려는 것과 아예 죽여 없애려는 것은 던져 넣는 힘의 세기나 방향이 전혀 다르지 않겠습니까? 말하자면 다리나 머리가 부딪혀 부러지든 말든 상관 않고 던지는 것과 그래도 엉덩이부터 먼저 땅에 댈 수 있도록 던지는 것은 천양지차입니다.

성경도 마침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물이 귀한 가나안 지역에는 목동들이 빗물을 받아쓰기 위해 곳곳에 구덩이를 파놓습니다. 우기 때는 물이 차지만 건기에는 말라 물이 없는 곳이 많습니다. 지금 목축전문가인 형들이 그 사실을 사전에 몰랐을 리 없습니다. 말하자면 요셉은 요행히 몸에 상처가 안 나도 굶어 죽거나 야생 짐승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는 절대 절명의 처지에 빠졌습니다.

정작 요셉 본인으로선 사태의 심각성까지는 눈치 챘어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직은 몰랐을 것입니다. 그러다 형들끼리만 끼니를 때우면서 자기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니까(25절) 이대로 구덩이에 그냥 내버려둘지 모른다고 짐작했을 것입니다. 또 성경 기록에는 없지만 어쩌면 형들이 죽이기로 모의하는 이야기들을 주워들었을 수 있습니다. 까딱없이 완전히 죽게 생겼다고 뒤늦게야 감을 잡았을 것입니다. 다른 말로 이제 그가 취할 수 있는 길은 딱 하나밖에 남지 않았으며 틀림없이 요셉도 그 길을 택했을 것입니다. 형들에게 용서를 빌며 살려 달라 사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는 도는 이미 그럴 단계를 훨씬 지났습니다. 또 만약 살려주었다가 고자질장이 요셉이 아비 야곱에게 전후사정을 불면 어떻게 되리라는 것쯤을 그들이 감안 안할 리도 없었습니다.

그 하나 남은 길은 바로 하나님께 매달려 기적을 바라는 것뿐이었습니다. 사방에 인간의 도움의 손길은 완전히 끊겼고 자신이 취할 수 있는 방도도 완전히 소진되었습니다. 정말 눈앞이 캄캄하고 죽음의 문턱 바로 앞에 섰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붙들고 뜨겁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다른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딱 한 가지 회개는 빼고 말입니다. 진작 형들의 입장도 좀 생각해 주었더라면, 조금 더 겸손하게 대했더라면, 아니 건방만 안 떨었어도 이런 지경에까지는 내몰리지 않았을 텐데 자신의 잘못과 허물들을 땅을 치며 후회했을 것입니다. 또 하나님에게 살려 달라고 매달리면서 어떻게 기도했겠습니까? 누구라도 그런 처지에 빠지면 하게 되는 상식적인 맹세를 틀림없이 곁들였을 것입니다. “이번 한번만 살려주시면 앞으로는 정말 올바르게 처신할 뿐만 아니라 평생을 두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경건하게 살겠습니다.” 이런 맹세와 탄원을 수백 번도 더 아뢰었을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곧 바로 하늘 보좌에 상달되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의 절대적 계획과 주권적 섭리가 미리부터 작용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요셉이 그런 진정한 회개와 간절한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사태는 또 달라졌을 것이라는 의미에서 그의 기도는 분명 하나님을 즉시 움직이도록 했습니다. 미리 준비시킨 미디안 상고들은 당연히 그들 곁을 지나가게 했지만 그보다는 형 유다의 마음에 동생을 죽이기보다는 노예로 팔아버리자는 일말의 동정심을 심어주는 모습으로 응답되었습니다.  

이처럼 요셉의 일생은 하나에서 열까지 하나님이 연출한 작품이었지 그가 어려서부터 꾼 꿈을 믿음으로 밀어붙인 흔적이라고는, 그 이후의 성경 기록에서도, 전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가 취한 믿음의 행동은 단 하나입니다. 구덩이에서 진정으로 회개하고 간절히 기도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세상을 완전 포기한 염세주의자가 아닌 다음에는 누구나 그런 처지에 빠지면 당연히 그렇게 합니다. 불신자라도 하나님을 찾아 매달립니다. 그의 믿음은 하나님께 한 맹세를 그 후 평생을 두고 온전히 지켰던 것입니다.        

지금 요셉은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아니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졌다 다시 천국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그것도 반나절도 안 지난 아주 짧은 시간 안에 말입니다. 그 사이에 일어난 변화는 하나님을 잊고 있었거나 느슨히 붙들고 있다가 철저하고도 확실하게, 다른 말로 두 번 다시는 절대로 놓지 않게 된 것입니다. 반면에 외적으로는 부잣집의 늦둥이 아들로 귀염만 독차지 하며 고생이라고는 모르던 처지에서 크게 부상을 입고 사슬에 묶여 외국의 노예로 팔려가는 모습으로 전락되었습니다. 그로 봐선 외면보다 내면의 변화가 훨씬 더 가치 있고 유익했습니다. 노예 처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견고해진 그것이 바로 천국이었습니다. 비록 자신은 당시에 그렇게까지 실감 아니 생각도 못했지만 말입니다.
  
결국 정말 우리가 견고히 붙들어야 할 믿음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독생자를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으므로 우리를 떠날 리는 만무합니다. 아니 우리에게 당신만의 영원하고도 거룩한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럼 우리가 취할 길도 요셉처럼 딱 하나 뿐입니다. 우리 쪽에서 그분의 손을 결코 놓지 않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 상황에 맞게 기도하며 그분과 함께 한걸음씩 나아가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삶과 인생이 천국과 지옥을 그것도 짧은 시일 안에 반복적으로 오가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일지라도 우리 내면의 존재를 오직 예수님의 은혜와 권능 안에만 붙들어 매는 것입니다.

5/28/2008  


운영자

2008.05.27 19:38:48
*.104.224.128

어제는 이곳이 공휴일이라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한국으로 치면 현충일인 Memorial Day로 토요일부터 월요일까지 3일 연휴였습니다.
전통적으로 여름휴가철이 시작되고 야외에서 바비큐를 할만큼 날씨가 좋아지는 기점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이곳 LA도 날씨가 추워 바비큐를 못할 정도로 이상 기온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 기름 값이 갤런(약 4리터) 당 드디어 4불을 돌파하고 다른 물가들도 덩달아 너무 올라
연휴임에도 예년 같은 자동차 여행은 꿈도 못 꿀 정도입니다.
어쨌든 저희는 가족들이 오랜만에 모여 밖에서 구운 갈비를 집 안에서 나눠 먹는 좋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특별히 어렸을 때 고향에서 보낸 추억들을 나눴습니다.
현재 자라는 아이들은 그런 고향과 자연 환경들이 없어져서 참으로 불행한 것 같습니다.
세계 도처에 있는 방문자님들도 비록 이모양 저모양으로 갈수록 살기 힘들어지지만
가끔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가족이랑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을 주님께서 허락해 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샬롬!

김광찬

2008.05.27 21:37:59
*.169.140.105

분위기가 느껴지는듯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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