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엡2:8,9) 선물을 자랑하는 바보

조회 수 686 추천 수 34 2010.12.02 20:2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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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을 자랑하는 바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엡2:8,9)


자랑은 반드시 자기 쪽에서 잘한 일이나 잘난 점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설령 객관적 평가와는 무관하게 자기만의 만족, 도취, 착각, 편견, 고집일지라도 어쨌든 자기가 남보다 앞선다고 여겨져야만 자랑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구원 얻는 일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자기 공적이 단 한 치라도 개입되면 자연히, 겉으로 안 그런 척해도 내심으로라도, 자랑은 생기게 마련입니다. 반면에 자기에게 자격과 공로가 눈곱만큼도 없다고 절감하면 자랑이 나올 수 없는 법입니다. 따라서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에만 근거하는 기독교의 구원에선 결코 자랑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일 뿐입니다.

인간끼린 받는 자의 자격과 능력에 따라 선물의 질과 양이 변합니다. 높은 이에겐 아무래도 큰 선물이 가게 마련이고 그런 선물을 받은 높은 자는 자기 높음을 자랑하게 됩니다. 구원의 선물은 다릅니다. 인간의 공적이라곤 전혀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서 똑 같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신비한 경륜과 절대적 주권에 따라 선택한 자에게만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구원의 필요충분조건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온전히 채워졌습니다. 인간 쪽 자랑이라곤 아예 성립되지 않습니다.  

본문에선 독생자의 대속사역에 의거하여  한 죄인을 택하여서 성령으로 간섭해주시는 하나님 쪽의 구원 행위를 “그 은혜”라고 표현했습니다. 또 그 은혜의 선물을 단지 받기만 하는 인간 쪽의 행위 즉, 그 은혜에 대한 반응을 “믿음”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구원이 선물이라면 인간이 할 일이라곤 단지 받는 것뿐입니다. 당연히 자신에게 아무 자격이 없을 뿐 아니라, 자기가 선물을 받은 행위를 두고도 절대 자랑하지 못합니다. “내 믿음이 좋아서”는 물론, “내 믿음으로”(by faith, because of my faith) 구원 받았다는 말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믿음은 단지 은혜가 전해지는 통로일 따름입니다. 신자는 대신에 선물을 주신 분과 선물이 가능케 된 근거만 자랑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모든 영광과 감사와 찬양과 경배가 돌려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구원 진리를 너무나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아담이 타락한 후로 모든 인간은 태생적으로 자기 잘난 맛에 살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랑이 죽기까지 완전히 몸에 배였습니다. 쉽게 말해 자기가 하는 일 하나 없이 공짜로 받기만 하는 구원은 싫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 인간의 자격, 공적, 능력, 수고, 정성, 노력이 들어가는 구원이라야 구원답다고 여깁니다. 이천 년 전의 로마 사형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는 것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참으로 그럴싸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생각을 뒤집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는 남들보다 어떤 면에서건, 특별히 죄를 안 짓고 거룩해지는 영역에선 앞설 자신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를 또 뒤집으면 남들은 자기보다 훨씬 더럽고 추하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과연 이런 자가 그분 앞에서 자신의 의를 떳떳하다고 내세울 수 있을까요? 도리어 비논리적일 뿐 아니라 비도덕적인 교만이 되지 않습니까?

지금 불신자들을 탓하려는 뜻이 아닙니다. 많은 신자들이 이전에 자신이 어떠했는지 아예 모르거나,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입니다. 저도 예수님이 성령의 간섭을 통해 계속 만나주시고 깨우쳐서 변화시켜 주시기 전까지 나야말로 천국에 가장 먼저 입성할 자격이 있다고, 사실은 천국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았었고 만약에 있다면, 큰소리쳤습니다. 십자가 복음은 정말 말이 안 되는 엉터리였습니다. 저는 죄인의 괴수일 뿐 아니라 가장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빛 가운데 들어오게 되자 제가 믿은 것도, 정확히 표현하자면 믿어지게 된 것임, 전혀 자랑거리가 될 수 없었습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이 나를 완전히 뒤엎어서 고쳐주셨던 것입니다. 사람들 앞에 자랑하던 제 이성은 물론 맨 밑바닥의 영혼까지 말입니다. 교회를 핍박하여 사도라 칭함을 받기도 부끄럽지만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바울의 고백이 정말 문자 그대로 제 고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불행하게도 믿음을 자랑 삼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구원은 자랑과는 깃털 하나라도 스치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자도 꽤 있습니다. 또 처음 믿었을 때는 오직 주님의 은혜라고 감사했었는데 점차 지나면서 그 사실을 잊고 자기 자랑을 하기 시작합니다. 교회 안에 연약해 보이는 자들을 알게 모르게 깔아뭉개는 대신에 자기는 도덕적, 종교적, 영적으로 우월하다고 내세웁니다. 종교적 지식과 믿음을 혼동한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정말 웃지 못 할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불신자 시절에는 하나님 앞에까지 공짜는 절대 받지 않겠다고 아주 교만했습니다. 달리 해석하면 당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어쨌든 의롭게 살려고 스스로는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에게 큰 죄인지 모른 채 말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몰랐으니 변명의 여지는 있었습니다.

반면에 많은 신자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깨닫고 믿어주었으니 하나님 은혜를 받을 자격이 생겼다고 착각합니다. 거기다 이젠 죄를 지어도 복음 안에서 다 용서 받았으니 별로 심각하게도 생각지 않습니다. 복음 안에 들어왔다는 것은 이전에 자기는 의롭기에 공짜 구원은 죽어도 받기 싫다고 고집했던 일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만큼 얼마나 부끄러운지 절실히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언제 그랬던 양 까맣게 잊어버리고 서서히 하나님께 공짜만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이 이 얼마나 교활하고 치사한 존재입니까? 믿기 전에는 공짜는 싫다고 했다가 믿은 후에는 공짜만 바라는 청개구리 같은 자라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믿기 전이나 후나 자기 형편에 맞추어 오직 자기 기분대로 하겠다고 고집한다는 것입니다. 믿기 전에는 쾌락과 죄를 추구하고 있는 자신의 일에 방해만 되고 현실 형통에도 별반 도움 안 되는 예수는 싫다고 반발했습니다. 믿은 후에는 이제 믿었는데도 하나님이 내 뜻대로 형통케 해주지 않는다는 불만으로 가득 차있습니다.  

십자가 구원은 분명 신자에겐 최고로 큰 은혜, 하나님 쪽에선 독생자의 죽음이라는 최고로 큰 희생이 따랐지만, 쉽게 말해 공짜였습니다. 최고 큰 공짜를 주었다면 그 후로는 그 만한 공짜는 더 없다는 뜻입니다. 신자가 된 후로 하나님께 구원보다 더 크거나 비슷한 은혜를 받을 일은 없습니다. 그분이 주실 것은 이미 다 준 셈입니다.

하나님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벌거벗고 모든 것을 다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제 그런 공짜는 더 이상 없으니 네가 진짜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책임지고 하라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은혜와 권능 안에 붙잡혀 있음을 세상 사람들이 보고 알게 해야 합니다. 지기들과는 인생의 목표와 가치관이 전혀 다르기에 살아가는 방식도 어딘지 모르게 틀려 보인다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정말로 주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믿은 후 주님 뜻대로 살라고 해서 그분에게 신세진 것을 갚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분도 구원을 빌미로 신자에게 충성, 헌신, 치성, 열심, 희생, 수고를 바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십자가의 구원은 앞에서 말한 대로 한 죄인을 변화시키는 데에 필요충분조건을 만족시킨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부족하여서 보충해 넣어야 할 것이라곤 단 하나도 없습니다. 구원 받은 신자는 이미 그런 완성된 구원 속에서 벌써부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또 천국에 가는 날까지 그 완성된 구원 안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바꿔 말해 구원 이후에도 예수님은 신자에게 100% 충족한 상태로 임재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신자와 함께 할 때에 덜 임재, 더 많이 임재라는 말은 아예 성립하지 않습니다. 신자의 기분, 생각, 행위에 따라서 그분의 임재가 늘거나 줄지 않습니다. 그분은 항상 그분만의 100% 완전한 은혜와 권능으로 함께 하십니다.

결국 구원 이후에도 하나님 쪽에서 보면 신자에게 당신의 은혜와 권능을 완전 공짜로 제공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해주었을 뿐 아니라 그 후에도 모든 것을 완전하게 다 해주시는 분으로 신자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신자가 행할 것은 구원 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분의 완전하심을 발견하여서 그에 걸맞게 반응하는 것뿐입니다. 그분의 “은혜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바꿔 말해 믿을 때뿐만 아니라 믿은 후에도 신자가 하나님 앞에 자랑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그분에게만 절대적 주권이 있어서 신자더러 죽으라면 죽을 수 있는 실력입니다. 그런데도 신자가 어떤 연유든 자기 쪽 이유로 하나님의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은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선행, 구제, 봉사, 전도, 말씀공부, 기도, 심지어 믿음 그 무엇이라도 어떤 형태로든 그에 비추어 하나님 보응이 따라야 한다고 생각 내지 기대하면 자랑입니다. 하나님이 비록 신자의 연약함을 미리 다 아시고 은혜로 주실지라도 신자가 100% 은혜로 받지 않고 자기 핑계를 조금이라도 대면 자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공적은 절대 상호 인과관계나 공통분자가 없습니다. 그 둘은 동일한 시공간이나 차원에서 공존하지 않습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겹쳐지면 벌써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헛된 기대를 종교적 용어로 바꾼 것일 뿐이며, 인간의 공적 또한 자기 자랑과 교만을 종교적 덧칠로 감춘 것일 뿐입니다.

신자의 일생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만, 본인의 생각과 느낌과는 무관하게, 머무르게 됩니다. 예수님 그분이 진짜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이미 완전히 충족된 구원에서 신자를 빼앗거나 훼방 놓을 수 없습니다. 신자는 그분의 그 은혜에 온전히 반응만 하면 됩니다. 그분의 은혜를 정말 은혜답게, 그분의 권능을 정말 권능답게 누리면 어떤 일에서나 넉넉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힘들고 쓰라리며 이해 안 되는 환난 중에도 오히려 그런 환난을 허락하심조차 그분께 기쁨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은혜를 누리기 위해서 다른 것이 필요 없습니다. 그분은 이미 충족하게 임재해 있기에 신자가 그 충족한 임재에 걸맞은 상태로 바뀌면 됩니다. 요컨대 오직 그분과의 관계만 바로 잡기만 즉, 그 관계를 방해할 수 있는 신자 쪽의 하자나 잘못만 제거 하면 됩니다. 은혜를 자랑으로 알지 말고 선물로 받으라는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서조차 내 쪽의 공로가 되려고 고개를 내미는 것을 완전히 잘라버리라는 것입니다.

역으로 말해 지금 내게 그분의 은혜가 어딘지 모르게, 다른 말로 내 믿음이나 상황에 비추어서,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순간 이미 신자는 자기 자랑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셈입니다. 아무리 우리 눈에는 부족해보일지라도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분의 은혜도 이미 완벽하고도 넘치게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우리가 어리석어서 은혜를 은혜답게 바라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아니면 더 많이 바쳐서 더 많이 받아내겠다는 생각에 눈이 어두워져 있거나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의미가 얼마나 깊고도 높고 넓은지 아직도 미처 다 모른다는 반증일 뿐입니다. 그저 그분의 선물을 받아서 자랑하고픈 마음이 앞서있다는 뜻입니다.

12/2/2010

이선우

2010.12.03 18:39:25
*.199.239.12

"믿음이란 그분에게만 절대적 주권이 있어서 신자더러 죽으라면 죽을 수 있는 실력입니다. 그런데도 신자가 어떤 연유든 자기 쪽 이유로 하나님의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은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특히, 목사님의 위 말씀이 가슴에 닿습니다.
사실 매일의 삶에서 나는 그 '보상'을 찾고 구합니다.
내가 열심히 한다는 이유로, 내가 다른 이보다 좀 낫다는 이유로..
그러니까 내 믿음의 '실력'은 영 형편없지요.
은혜를 은혜답게 바라보라..
깨달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oh younghee

2011.03.14 22:19:52
*.254.51.128

나의 나된것은 전적인 하나님 은혜입니다....아멘 아멘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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