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거기서 백성이 물에 갈하매 그들이 모세를 대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생축으로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얼마 아니면 내게 돌질 하겠나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아닌가 하였음이더라.”(출 17:1-7)

 

 

창조와 진화의 차이

 

하나님은 창조주이다. 창조란 무(無)에서 유(有)를 만든 것이다.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사물을 하나님이 “있으라.”고 말씀으로 명하여 생겼고 그 후에 계속 남아있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물을 다 창조했지만 크게 분류하면 세 가지 가장 기본적인 사물을 창조, 다시 강조하지만 무에서 유로 만드셨다.

 

첫째는 물질(substance)이다. 화학적으로는 물질을 구성하는 원소를 만들어 여러 순열조합으로 구성함으로써 각양 물체가 생겼다. 둘째는 생명(life)을 창조해 각종 물질로 구성된 물체 속에 그 생명을 부여했다. 세상 만물을 가장 크게 분류할 때에 물질 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무생물이고, 그 물질에 생명이 첨가된 것이 바로 동물과 식물이다.

 

그런데 사람은 조금 특이한 존재다. 물질로 구성된 육신이 있고, 살아 움직이는 생명도 있으되, 동식물이 갖지 못하는 특별한 요소를 하나 더 가졌다. 바로 영(spirit)이다. 인간은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다스릴 소명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그분과 교통하여 깨달아서 그대로 순종해야 한다. 영이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는 영을 인간만이 갖고 있는데 알기 쉽게 설명하면 절대자에 대한 인식과 그 절대자에게 기도할 수 있는 존재는 만물 중에 인간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셋째로 인간의 영을 창조했다.

 

창조란 결국 물질과 생명과 영은 절대로 저절로 생길 수 없으며, 또 그 각각도 절대로 저절로 서로 혼합될 수 없다는 뜻이다. 동식물의 종에서 종으로의 자생적 변화 전이는 당연히 불가능할 뿐 아니라 이 땅에 선재한 물질과 그 물질에 생명이 부여되는 것과 특별히 인간이 존재하게 된 근거와 능력이 절대로 피조물 자체에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에 없었던 물질과 생명과 영을 창조했을 뿐 아니라 그 셋으로 모든 만물을 각기 종류별로 만드신 것이다.

 

반면에 진화는 물질에서 장구한 세월 동안에 우연에 우연이 무한 반복됨으로써 생명이 저절로 잉태되었다고 믿는 것이다. 어떤 이론이 과학적이 되려면 그 이론을 진리라고 입증할만한 충분한 자료와 실험결과와 증거들이 있어야만 한다. 이 땅에 존재하는 물체들 각기 하나의 종류별로도 당연히 자료, 실험, 증거가 충분히 많아야 한다. 또 모든 만물에 다 그래야만 한다.

 

진화를 입증할 자료 실험결과 증거는 너무나 미약하다. 이 땅에 존재하는 물체 종류를 합한 숫자에도 훨씬 못 미칠 것이다. 그런데도 장구한 세월이라고 그럴싸하게 포장하여 마치 입증할 자료나 증거가 아주 많은 양 사람을 속이고 있다. 또 우연이란 말의 의미 자체가 “어떤 일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고는 어느 누구도 절대 증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일이 안 일어난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느냐고, 그것을 증명해보라고 덤빈다. 그럼 가장 먼저 “창조가 안 일어난다고, 하나님이 없다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느냐?”라는 명제에부터 적용해야 하지 않는가?

 

요컨대 장구한 세월과 우연이라는 것은 아예 증명이 불가능한 차원인데 진화는 비겁하게 그 뒤로 숨어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숨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 증거라고 할 것도 없는 증거를 내세워 과학적이라고 우기고, 창조는 비과학적이라도 매도하고 있다. 창조는 과학적이라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인간의 논리적 이성으로 모든 만물을 살펴볼 때에 부인할 수 없다고만 할 뿐이다. 바꿔 말해 진화론자들의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논리에 적용하자면 오히려 창조가 훨씬 더 합리적이고 개연성이 지극히 높다는 것이다.

 

웃픈 진화론자들

 

진화와 창조를 아주 자명하게 대조 비교시키는 한 비유로 설명해보겠다. 진화란 바위에 소나무가 자란 것을 두고 비록 장구한 세월이 걸리긴 했지만 바위의 일부가 소나무로 바뀌었다는 뜻이다. 물질에서 생명이 저절로 잉태된 것이 진화이지 않는가?

 

그런데 만약 진화를 믿는 자에게 저 소나무는 저 바위가 수억 년에 걸쳐서 낳고 기른 것이라고 설명하면 어떻게 반응하겠는가? “무슨 바보 같은 소리하느냐? 너 미친 것 아니니? 어떻게 바위에서 소나무가 생길 수 있어? 솔방울에서 씨앗이 바람에 날려 바위틈새에 박혀서 뿌리가 내려 싹이 트고 자라서 저렇게 된 것이지.”

 

참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물질이 생명으로 탈바꿈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진화론이다. 지금 역으로 물질과 생명은 전혀 별개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있지 않는가? 거기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 작은 씨앗이 해머로 내려쳐도 깨어지지 않는 바위를 뚫고 뿌리를 내렸어. 바위 속에 수분과 영양이 거의 없을 텐데도 저렇게 싱싱하게 자랐다. 그 끈질긴 생명력이 경이롭지 않니?” 이렇게 신자에게 도리어 반문하는 지경에 이르면 시쳇말로 ‘웃프기’까지 하다.

 

우스운 것은 자기가 말하는 바의 의미를 자기가 모르기 때문이다. 씨앗이 없으면 절대로 생명이 출생 성장할 수 없다고 지금 창조를 주장하는 중이다. 바위에 소나무가 자라는 것은 그 작은 씨앗 안에 하나님이 부여하신 신묘하고도 엄청난 능력을 지닌 생명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바위를 뚫고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것은 인간의 기술로는 아직도 불가능하다. 중장비를 동원해 바위에 구멍을 내거나 완전히 산산조각 내어 깨트릴 수는 있다. 그러나 바위를 그 모양 그대로 두고 금도 가지 않게 하고서 뿌리가 속속들이 파고들어가는 모습처럼 바위 속에 다른 이 물질을 심어 넣을 재간은 절대 없다. 하나님과 그분이 창조한 생명력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불신자들의 반응이 슬픈 까닭은 말로는 창조를 주장하면서, 또 이런 엄연한 사실과 진리를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도고 끝까지 창조주 하나님은 완악하게 부인 거역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어떻게 선언하고 있는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롬1:20)

 

하나님이 책임져라!

 

흥미롭게도 성경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백성도 그와 비슷한 모습을 보인다고 증언하고 있다. 오늘의 본문은 신자들이 잘 아는 내용이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군사를 보면 두려워할까봐 애굽의 국경수비대가 있는 해안가 지름길을 피해 광야로 우회시켰다.

 

백성들이 물이 없는 광야에서 갈증에 시달리다 못해 모세에게 크게 원망했다. 너 때문에 우리 자녀와 생축이 목말라 죽게 되었으니 책임지라는 것이다.(3절) 모세에게 불평했지만 실은 하나님께 대든 셈이다. 모세는 하나님께 이 비상사태를 해결해 달라고 부르짖었고 하나님은 그 응답으로 모세에게 몇 가지를 행하라고 명령했다.

 

먼저 백성 앞을 지나가라고 했다. 그들은 애굽에서 열 가지 재앙의 기적과 마지막에는 홍해가 갈라지는 은혜로 구원 받았다. 그럼에도 아직도 하나님의 권능과 섭리에 대해 완전한 확신을 갖지 못하고 물이 없어 죽게 되었다고 불평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모세를 그들 앞으로 지나가게 한 것은 “지금부터 일어날 일을 똑똑히 보아라. 과연 너희에게 그런 불평을 할 자격이 있는지 잘 따져보라”고 미리 다짐한 것이다.

 

둘째는 장로들을 데리고 가라고 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두령들로 전 백성을 대표하는 자다. 그들로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과정을 직접 목격시켜서 증인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어쩌면 장로들이 뒤에서 선동하여 백성들로 불평케 했는지도 모른다. 만약에 백성을 위로 격려해야 할 지도자들이 오히려 앞장서서 분란을 조장했다면 하나님은 그들부터 그 죄를 엄격히 물을 것이다.

 

셋째로 호렙산 반석으로 오라고 했다. 광야의 어딘가 있을 오아시스나 물이 고인 웅덩이로 오라고 하지 않았다. 물은 낮은 곳으로 흐리기 마련이다. 광야에 물이 없다면 산 위의 반석에는 아예 한 방울도 없다. 바로 그런 곳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 보이겠다는 것이다.

 

마지막 네 번째로 모세더러 하수를 치던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고 명했다. 지팡이 자체가 요술 방망이는 아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임재하는 상징이자 도구일 뿐이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하수를 치던 지팡이”라고 명시했다. 애굽에서 그 지팡이로 나일강을 쳐서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는 핏빛 죽음의 강으로 바꾼 첫 번째 재앙을 상기시킨 것이다.

 

강물은 풍요한 곡물을 생산케 만드는 생명의 젓줄이다. 하나님은 그것을 죽음의 강으로 바꿨다. 지금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바위는 죽음의 반석인 셈이다. 그것에서 생명의 근원이자 생명을 유지시키는 동력인 물을 터져 나오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당신만이 생명을 죽음으로, 그 반대로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는 절대적 주관자임을 똑똑히 보이겠다는 것이다.

 

반석에서 물이 나오는 것은 순전히 이론적으로만 따지면 물질에서 물질이 생긴 것이다. 미국에서 모래를 압축 정제해서 세일 가스나 기름을 뽑아내는 것처럼 바위 속의 수분을 응축 추출하면 과학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하나님이 그 정도도 못하시겠는가? 그러나 이스라엘 전 백성의 갈증을 해소하려면 그 정도론 턱없이 부족하기에 무에서 유로 생수를 만들어 분수처럼 솟구치게 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세상 어느 민족도 겪지도 듣지도 꿈도 꾸지 못하는 기적을 누렸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었다. 그런 하나님이 광야로 인도했다면 목이 말라 죽게 할리는 만무하다. 그럴 양이면 애초에 출애굽 시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불평하기 전에 겸손히 하나님에게 기도부터 했어야 했는데도 너무나 어리석고도 완악하게 굴었다.

 

바위에 뿌리내린 소나무 비유에서 진화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실제로는 진화를 전혀 믿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 이스라엘은 반대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랑하면서 실제로는 창조주를 전혀 불신하는 꼴이지 않는가? 거기다 우리 중에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라고 하나님의 실존마저 의심했다.(7절)

 

이스라엘은 과연 하나님의 권능을 의심했는가?

 

그런데 이 단계에서 우리는 한 발자국 물러나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가 그런 형편이었다면 달랐을까? 전혀 불평하지 않고 하나님만 전적으로 신뢰했을까? 여러분은 몰라도 저는 도무지 자신이 없다. 당장에 목이 타들어 간다면 불평은 자연발생적일 것이다.

 

나아가 과연 그들이 하나님의 큰 권능을 믿지 못했고 그 많은 기적들을 잊어버렸을까? 이 또한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열 가지 재앙과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은 당시 지구상, 아니 현재까지도 전무후무한 일로 엄청난 규모로 행해졌다. 열한 번이나 일어난 기적을 어찌 잊을 수 있는가? 잊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오히려 불합리한 분석이다.

 

저 개인적 추측이나 생각이 아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불평하고 원망할 때에 하나님을 못 믿었는가? 그분의 전지전능성을 잊었는가? 아니지 않는가? 바로 그 순간에는 아주 잠깐 그럴 수 있지만 실제로 소지하고 있는 내면의 믿음은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 모두 전지전능하시어 반석에서 생수를 내시는 하나님을 철두철미 믿는다. 매일 기도하며 찬송할 때에, 죄송하지만 주문처럼 입술에 붙어 다니지 않는가?

 

저와 여러분의 의심과 불만이 어떤 모습으로 튀어나오는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제가 뭐 크게 호강 사치시켜 달라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평생의 골칫거리로 지난 수년간 간절히 기도했던 이 간단한 문제 하나도 왜 해결 안 해줍니까? 저에겐 너무 큰일이자 도무지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에겐 식은 죽 먹기 아닙니까?” 우리 불평에 하나님의 전능성을 믿었는가 안 믿었는가? 너무나 잘 믿고 있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수를 쳐서 죽음의 강으로 바꾸실 수 있는 여호와가, 홍해를 가르며 구원하셨던 하나님이, 왜 그 큰 권능으로 이 광야로 내몰아서 물을 못 마시게 하느냐? 물 정도는 우습게 줄 수 있는 것 아닌가? 과연 우리 가운데 하나님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의 불만 가운데도 사실은 하나님의 전능성을 철저히 믿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믿은 지 얼마 안 되고 기도 응답을 받은 체험이 적은 자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이 안 생길 수 있다. 그래서 믿은 후 3년 안에는 기도를 잘 들어준다는 크리스천 조크가 있다. 그런데 저나 여러분 모두 예수 믿은 지 3년은 지났지 않는가? 이스라엘도 열한 가지 기적을 맛본지 겨우 몇 달도 지나지 않았다. 그들이 불신의 늪에 빠질 리는 없다.

 

정작 부족하고 잘못된 믿음은?

 

그들과 우리의 믿음에서 정작 잘못되고 부족한 측면은 따로 있다. 그 답은 하수를 치던 지팡이로 반석을 치라는데 있다. 적극적인 행동의 순종을 요구한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진화론자들이 사실은 진화를 부인했고, 이스라엘이나 저희는 창조를 믿으며 사실은 창조주를 부인하고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엔 도토리 키 재기밖에 안 된다.

 

애굽이나 이스라엘이나 하나님 앞에 동일한 죄인인데 모세의 동일한 한 지팡이로 죽음의 강과 생수의 반석으로 구분한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오직 하나다. 하나님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는 것이다. 그분의 택함을 받아 그분의 언약에 참여하여 지금도 그 안에 남아 있는 것이다.

 

친 자식은 아무리 밖에서 나쁜 짓을 일삼고 또 밤늦게 집에 들어와 용돈 안 준다고 부모에게 대들어도 최소한 밥은 차려 준다. 굶겨 죽게 만들지는 않는다. 남의 집 자식은 아무리 전교 수석으로 모범생이자 효자라도 구태여 밥을 사줄 이유도 의미도 없다.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엄연한 사실, 관계, 은혜, 진리, 특권을 소지하고 있다는 것인데 여러분은 그런 확신이 있는가? 우린 정말로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하나님과 혈연관계의 부자지간으로 맺어졌다. 그 관계는 세상 어느 것도 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능력에만 초점을 맞춘 믿음은 “왜 이 쉬운 것을 왜 빨리 해결 안 해주시나?”의 불만이 저절로 생길 수밖에 없다. 재벌 아버지를 둔 아들은 돈이 그렇게 많은데 왜 안 주나 밖에 생각 못한다. 재벌 자식들이 유산 다툼밖에 더하는가? 반면에 가난해도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인격적인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진정으로 존경하는 아들이라면 돈과 상관없이 아버지를 믿으며 큰 기쁨으로 주위 사람들에게도 자랑하지 않는가?

 

여러분의 삶에 큰 바위가 막혀 진전이 없는가? 특별히 오래 기도하는 제목이 아직도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가? 하나님이 지금 광야로 내몰고 있는 중이다. 물이 전혀 나오지 않는 반석에서 만나자고 사랑의 초대장을 보낸 것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해줄 만한 공로, 의, 선, 자격 단 하나도 없다. 정말 솔직히 우리 자신을 살펴라. 하나님 앞에 떳떳이 내세울 예쁜 구석이 있는가? 그분 마음에 합할 만한 의가 있는가? 전혀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았다는 오직 그 한 가지 이유로, 당신의 이름을 걸고 기도에 응답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반석에서도 생수를 내시는 하나님이다. 단 우리 생각에는 아예 불가능한 어떤 일에도, 아무 것도 남지 않고 죽음으로 내몰리는 것 같아도, 우리가 하나님 그분만이 나의 기업, 소망, 기쁨이자 처음이자 끝이라고 진정으로 항복하고 고백한다면 말이다. 그럼 언제 어디서나 반석에서 생수를 받아 마시는 은혜를 누릴 수 있다. 신자가 된 이상 하나님의 권능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분의 자녀 된 나의 신분과 특권을 잊지 않는 것이야말로 참 믿음이라는 뜻이다.

 

4/17/2016


master

2016.04.19 02:25:39
*.162.221.131

지난 주일(4/17) 야외예배에서 행한 설교인데

바람이 조금 심하게 불어서 녹음을 하지 못했고 대신에 내용을 조금 보완하여

주제가 본 사이트에 맞을 것 같아 글로만 올립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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