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라면 라스베가스에 가서 살아라

조회 수 4204 추천 수 353 2005.07.05 03:3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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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강해(10)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

사람이 평생 동안 필요한 땅의 넓이는?

온유한 자의 복에 관해 세 번째로 알아 보고 있다. 처음에는 ‘온유’란 천성적 온순이나 도덕적 겸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로가 함께 하기 때문에 자신의 기질과 감정을 절제하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그 ‘뜻’에 관해 알아봤다. 두 번째는 신자가 자기 일생이 온전히 하나님의 계획과 통제 아래 있음을 확신해야 온유해질 수 있다고 온유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살펴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온유한 자가 받는 ‘복’에 관해 알아 볼 차례인데 본문에선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고 했다. 강남 복부인처럼 땅 재벌이 된다는 뜻인가?

톨스토이의 우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왕이 한 충실한 신하에게 네가 하루 종일 걷는 땅을 상으로 주겠다고 보장했다. 얼마를 많이 걷든 상관 없이 원 모양이든 사각형이든 사방 둘레를 만들면 그 속에 있는 땅을 다 주겠다는 것이었다. 정말 하루 종일 열심히 걷고 뛰고 해서 어마어마한 땅을 차지했다.

그런데 그 후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운동선수도 아니고 평소 때에 달리기 연습을 했을 리 없는 신하가 틀림 없이 마라톤 풀코스를 몇 번 뛰는 것 이상 그야말로 죽기살기로 뛰었을 텐데 안 죽는 것이 도리어 이상하다. 당장 눈 앞의 이익에 현혹되어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인간의 탐욕을 빗대어 지어낸 이야기다.

비슷한 내용이 성경에도 나온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縱)과 횡(橫)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13:14-17)

세상의 왕과는 달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둘레를 만들 것도 없이 가로 세로로 한 번만 행하라고 했고 심지어 걷는 것뿐 아니라 보이는 것도 다 주겠다고 약속했다. 또 하루 종일 걷는 것이 아니라 평생 동안 행하는 땅을 다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세상의 왕과는 그 능력이 도저히 비교할 수조차 없고 세상의 땅이 전부 하나님의 소유권 아래 있기 때문인가? 그래서 아브라함은 역사상 최초, 최고의 땅 재벌이 되었는가?

톨스토이는 자신의 우화의 결론을 이런 말로 끝을 냈다. “사람이 일평생을 두고 필요한 땅의 넓이는 오직 가로 1 미터 세로 2 미터이면 충분하다.” 농사를 직업으로 하지 않는 한 수영장과 테니스장이 딸린 저택이나 큰 빌딩을 지을 다운타운 요지도 필요 없고 단지 죽어서 시신이 누울 정도의 땅이면 된다는 것이다. 물론 현실의 삶에서 땅이 전혀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 결국은 최종적으로 완전히 자기 소유(?)가 되는 땅은 무덤 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도 동일한 결론으로 끝났다. “그가 수가 높고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매 그 아들 이삭과 아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것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라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니라.”(창25:8-10) 아브라함이 결국 자기 소유로 삼은 땅은 자기 시신을 눕힐 만큼의 몇 평 채 못 되는 작은 굴이었다.

그럼 하나님이 보이는 땅을 전부 주겠다고 하신 약속이 겨우 이것뿐이었단 말인가? 그럼 지금 신약에서 예수님이 온유한 자에게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도 그 결말은 시원찮게 끝날 것이라는 뜻인가? 구약의 하나님이나 신약의 하나님은 분명 동일할진대 구약에서 성도에게 준 땅이 몇 평도 안 된다면 신약에서 갑자기 수만 평으로 늘어날 리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 두 약속은 분명히 일관성을 갖고 있으며 그 내용에 있어 동일하다. 땅의 크기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온유한 자에게 하나님이 기업으로 땅을 주신다는 의미에선 신구약간에 차이가 전혀 없고 동일하다. 그 말은 또 예수님의 기준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온유한 자였으며 그가 기업으로 받은 땅이 막벨라 굴의 몇 평이 아니라 훨씬 다른 의미라는 것이다.

롯의 선택은 잘못이 아니었다.

‘땅’의 의미를 알기 위해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런 약속을 하게 된 계기를 먼저 살펴 보아야 한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갈대아 땅을 떠나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 양 떼와 소유가 점차 늘어나자 두 집안의 목자끼리 우물을 두고 다툼이 일어났다. 그래서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창13:8)고 하여 헤어지기로 했다. 먼저 선택권을 행사한 롯은 물이 넉넉하지만 죄악의 땅 소돔을 차지하고 아브라함은 척박한 가나안 땅에 남기로 했다. 성경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그 일이 있고 난 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보이는 땅 전부를 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대부분의 신자들 심지어 많은 목회자들마저 이 기사를 읽을 때 오해하는 부분이 있다. 단순하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세상과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그 뜻대로 순종하였기에 나중에 큰 축복을 받았다고 해석한다. 그 후 진행되어진 결과만 봐서는 이 해석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완전하지는 않다. 어쩌면 아주 미흡하고 신자로 하여금 믿음에 대한 오해마저 불러 일으키기 좋은 해석이다.

만약 그런 해석이 맞을려면 롯은 세상 재물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뜻은 무시하고 자기 욕심과 계획만 앞세운 자로 신앙적으로는 죄인의 대표여야 한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세상과 환경을 바라보지 않고 순종하는 의인의 대표로 상호 정반대로 대조되는 인물이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은 롯의 경우 그 반대로 증언하고 있다. 그는 우상 숭배가 만연하는 죄악의 땅에서 친척으로는 유일하게 아브라함을 따라서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들어가기를 소원했다. 또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예고하러 온 여호와의 사자를 정성껏 대접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를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벧후2:7)이라고 표현했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한 번 상상해보자. 삼촌 아브라함이 롯더러 땅을 먼저 선택하라고 한다고 덥썩 옳다구나 하면서 비옥한 땅을 택했겠는가? 아마 롯은 여러 번 사양했을 것이고 그럼 아브라함은 먼저 택하라고 자꾸 재촉했거나 호의를 무시한다고 야단쳤을 것이다. 추석 같은 명절에 조카들에게 돈 한푼 줄 때 사양하면 어떻게 말하는가? “어른이 주는 것은 고맙습니다 하고 받는 것이 예의야”라고 야단치지 않는가? 롯이 죄인이었다면 아브라함은 더더욱 의인으로 칭송 받을 자격이 없다. 그는 마누라를 동생이라고 두 번씩이나 속여서 자기 목숨을 부지하려 했던 치사한 자였지 않는가?

또 하나 정작 중요하게 따져 보아야 할 것은 롯이 과연 선택을 잘못했는가이다. 롯의 선택 자체는 잘한 것이며 그 판단은 정확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신자가 월 3-4천불 정도 수입이 있었는데 자녀들 대학도 보내야 하고 돈 들어갈 일은 자꾸 생기는데 라스베가스에서 월 만불 정도 수입이 되는 Job Offer가 들어 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뜻은 죄악을 멀리하고 재물에 욕심을 내면 안 되니까 그 제의를 거절해 현대판 죄악의 도성인 라스베가스 근처에는 얼씬도 말고 로스앤젤레스에 남아 있어야 하는가? 신자는 그런 곳에 가서 살면 안 되는가?

하나님의 뜻대로 신자답게 살아야 하는 것이 반드시 경제적인 손해를 감수하고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아야 하고 도덕적 종교적 냄새가 풍기는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황금을 돌처럼 보라는 최영 장군 식의 생활관을 따라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외부적 모습과는 상관 없이 가장 먼저 그 중심이 온전히 하나님께로 향해 살아야 한다.

롯이 지금 땅을 선택할 때에 판단한 근거와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양 떼를 어떻게 해야 살찌울 것인가였다. 그래서 물과 풀이 풍부한 땅을 택해야 함은 너무나 당연했다. 신자는 가만이 앉아서 기도만 하고 있으면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시고 그래서 신자는 항상 구름 위를 붕붕 떠 다니듯 사는 것이 결코 신앙이 아니다. 신자도 세상적 실력을 갖추어야 한다. 문제는 그 실력을 정당하게 행사하느냐이지 실력 하나 없이도 매사를 도깨비 방망이 식으로 해결하려 들면 안 된다. 현실적 지식이 풍부해야 하고, 공부도 성실하게 하고, 신용과 기술과 정직과 성실에선 가장 앞서야 한다.

10절에 의하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는 일차적으로 내부의 죄악과는 상관 없이 외형적으로 아주 풍요하고 화려해 보였다는 뜻이다. 반면에 멸하시기 전이라 아직은 죄악이 들끓기는 했지만 완전히 관영하지는 않았을 가능성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롯이 단지 재물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심판마저 두려워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아직은 소돔 땅이 당장 심판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뜻을 좇은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 구절의 전통적 해석대로 롯이 자기 욕심만 앞서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현혹되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치자. 그러나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전통적인 해석에 분명 오류가 있음은 주목해야 한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여 그 뜻대로 가나안 땅에 남기로 결단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비옥한 땅을 조카에게 양보하고 일부러 척박한 가나안 땅을 선택했기에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흔히 생각하듯이 그가 신령하고 믿음이 좋아 하나님의 뜻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성경이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10절) 무슨 뜻인가? 그가 선택을 했다는 것인가 안 했다는 것인가? 그는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로선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가나안 땅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확신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만약 롯이 가나안 땅을 선택하여 끝까지 고집했다면 그로선 소돔 땅에 갈 수 밖에 없었고 또 갈 용의도 있었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처음부터 선택권 자체를 양보하고 포기했다. 나아가 현실적으로는 그 우선 선택권을 롯에게 양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선택권을 하나님에게 맡겼다. 좌하면 우하고 우하면 좌하겠다는 것은 좌우 어느 쪽이든 상관 않겠다는 것이다. 어떤 땅이 자기 몫으로 돌아 오든, 물과 풀이 많든 적든 기꺼이 그 땅에 가서 살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이 원래부터 성격이 겸손하고 세상적 욕심이 하나 없이 재물을 쓰레기로 여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지금 땅을 나누는 이유가 무엇인가? 소유가 많아 동거하기 힘들고 좋은 초지를 두고 서로 다투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이지 않는가? 그래서 서로 헤어지자는 것은 그 소유를 계속해서 증식 내지 최소한 유지하겠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은 외형과 환경을 보지 않고 믿음으로 소돔과 가나안 땅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한 것이 아니었다.

신자들은 제발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신자라고 해서 죄악의 땅을 멀리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악의 땅에 들어가서 변화시켜야 한다. 변화를 시킬 힘이 모자라면 그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이라도 보여주어야 한다. 롯의 잘못은 죄악의 땅 소돔을 선택하여 가서 산 것이 아니라 그 땅을 변화시키지 못했고 신자로서 의인으로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자기 삶을 통해 증거하지 못한 것이다.

신자는 라스베가스에 가서 신자답게 살면 된다. 로스엔젤레스가 오히려 천사의 땅이 아니라 더 큰 죄악의 도성일 수 있다. 아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모인 곳은 세상 어디라고 죄악이 들끓을 수 밖에 없다. 세상은 가는 곳마다 죄악의 도성이지 따로 구별되어 있는 곳이 없다. 신자는 하나님이 보내는 곳이라면 그곳이 좌이든 우이든 어디라도 가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면 된다.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는가? 내가 하나님의 기뻐하는 일을 하니까 하나님이 홀로 두지 않는다고 하셨지 않는가?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100%의 선택권을 완전히 위임했다. 하나님과 함께하면 광야도 옥토가 되고 함께 하지 않으면 옥토도 광야로 변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물이 적고 척박해야 하나님이 함께하고 물이 많고 풍요로우면 사단이 함께 한다는 법은 없다.

그는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자 그 땅이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지시한 땅이라는 것을 잠시 잊고 자꾸 남쪽으로 물과 풀을 찾아 내려가다 애굽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곳에서 정말 큰 코 다칠 뻔하다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오히려 소유가 더 많아지는 복을 받았다. 그런 경험을 두 번씩이나 했다. 그래서 그는 아무리 자기가 하나님 앞을 피해 하늘에 오르든 음부로 내려가든 하나님 쪽에서 자기를 놓치지 않으며, 그래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지라도 그분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안위케 해줌을 철저하게 실감했던 것이다.

그래서 땅을 나누는 이 시점에 이르러선 아브라함은 온유한 자로 바뀐 것이다. 비록 인간이 좌든 우든 자신의 생각과 판단으로 선택할지라도, 심지어 오랫동안 기도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임을 확신하여서 그렇게 할지라도, 그 길로 인도하고 목적지에 도달시킬 분은 오직 하나님임을 깨달은 것이다. 따라서 좌든 우든 결정하시는 것은 최종적으로 하나님 몫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인간이, 불신자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으므로, 사실은 신자가 가는 길을 좌든 우든 결정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뜻은 신자는 좌든 우든 선택하거나 결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 신자는 앞발 뒷발 다 들고 가만히 기도만 하고 있으면 저절로 앞 길이 다 형통해지는가? 신자도 세상적 실력을  갖추고 현실에서 요구 받고 있는 책임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는 믿음과 상관 없이 세상 속에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나 맡아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다.

반면에 신자란 어느 길로 갈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는 하나님께 맡겨두고 자신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먼저 정하라는 것이다. 좌로 가든 우로 가든 그 방향과 상관 없이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이 되어 가야 한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동행하심을 확신하기에 좌우에 상관하지 않는 온유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신자가 가는 길의 과정과 결과는 오직 그분의 손에 달렸으므로 자신은 정말 그분이 원하는 모습으로 변하기만 소원하고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죄도 안 짓고 선하고 거룩한 일을 꼭 해야 할 필요도 없다. 아브라함처럼 무슨 일을 만나도 모든 선택권을 오직 하나님께 맡기면 된다. 구체적으로는 현실에서 아내더러, 남편더러, 자식더러, 동료더러, 불신자더러, 먼저 좌든 우든 택하라고 하면 된다. 대신에 자신은 상대가 택한 대로 따라 주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바로 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려야 하는 부분에서 대부분의 신자들이 잘못을 범하고 있다. 꼭 기도를 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이 어느 쪽인지 알아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자의 신앙생활을 보면 다람쥐가 쳇바퀴 돌 듯 한다. 달걀이 먼저인가 닭이 먼저인가를 따지는 것 같다. 하나님께 자기의 삶을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맡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 기도를 간절히 해서 그 뜻을 먼저 알아 자기의 삶을 그 뜻에 맡기겠다는 것이다. 이미 자기의 갈 길의 선택권을 하나님께 몽땅 맡겼는데도 왜 또 그 뜻을 구태여 알려고 하는가?  

좌든 우든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하나님이 좌든 우든 어느 쪽으로 인도하시는가 알아 그곳을 가라는 것이 아니다. 좌우 어느 쪽이 되었든 온전히 신뢰하며 따르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신자에게 가장 먼저 원하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면 바로 그것이 신자가 하나님의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자기를 두고 무엇을 하기 보다는 어떤 사람으로 되기를 원하는지 헤아려 자신의 인격, 품성, 습관, 태도, 인생관을 바꾸어 자기 존재와 삶과 일생 전부가 하나님의 기뻐하심 가운데 속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 위에서 공의와 정직을 실현하며 사랑과 자비를 주위에 베풀어야 한다. 항상 하나님의 선하심과 거룩하심을 맛 보기에 정말 하나님의 고귀한 형상을 닮은 참 인간으로서 책임을 다해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거룩하게 변화시켜야 한다. 하나님이 슬퍼하는 일에 함께 슬퍼하고, 분노하는 일에 함께 분노하고, 안타까워하는 일에 안타까워해야 한다. 그분의 생각대로 생각하고, 그분이 말하는 대로 말하고, 그분이 행동하는 대로 따라 행동해야 한다. 한마디로 신자는 항상 자기를 쳐서 복종시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먼저 되면 신자가 무슨 일을 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선포했는가?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서 찾다가 얻지 못한 고로 내가 내 분으로 그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 행위대로 그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겔22:30-31) 이 황폐해진 땅을 위해 하나님 대신에 그 무너진 데를 막아 서줄 자를 찾았지만 실패했다고 한다.

요즘 식으로 하자면 라스베가스에 가서 십자가 복음을 선포하고 회개를 촉구할 자가 없더라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신자는 그곳으로 이사가면 마치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는 것처럼 착각해 피하려고만 하더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그곳으로 이사 가서 막아서라고 하는데도 말이다. 만약 정말 신자들의 생각대로 라스베가스가 죄악의 도성으로 그 성벽이 무너져 있는 곳이라면 신자가 가서 막지 않으면 그 성은 점점 더 무너지고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게 된다. 그럼 신자는 가만히 앉아서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그 심판을 구경만 하겠다는 심보거나 심지어 요나가 니느웨에 했던 것처럼 하나님께 라스베가스에 진노를 쏟아 부어달라고 요구한 셈이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의 심판은 불신자뿐 아니라 신자에게도 마찬가지로 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파숫군이 칼이 임함을 보고도 나팔을 불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경고치 아니하므로 그 중에 한 사람이 그 임하는 칼에 제함을 당하면 그는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바 되려니와 그 죄를 내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겔33:6)

신자란 세상 앞에 파숫군으로 부름 받은 자다. 단순히 말로만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몸으로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거룩한 산 제사를 드려야 한다. 아프리카나 남미의 정글로 선교까지 갈 필요 없다. 가장 가까운 주위에서부터 성벽이 무너진 데가 없는지 살펴 보고 가서 막아서야 한다.

부부사이에도 서로 자존심을 세우느라 사랑이 식고 짜증과 다툼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는가? 자녀를 말로 상처주고 열등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지는 않는가? 형제 간에도 돈 문제 때문에 시기 질투하여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직장 동료, 상사, 부하들을 정말 사랑과 존경과 섬김으로 대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교회에서마저 체면과 위신 세우기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을 확신하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되는 일에 어떤 모습으로든 쓰임 받기를 원하며 또 실제로 참여하고 있는가?

신자가 다시 성을 쌓고 영적 부흥을 일으킬 곳은 수도 없이 많다. 그것도 지금 당장 바로 자신에게 시작하여 바로 곁에 있는 사람에게 아주 작은 일에서부터 정말 심각하고 위대한 일에까지 도저히 손으로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자신이 무너진 성벽을 막고 서야 할 사람으로 부름 받았음을 확신하고 그 일에 기꺼이 자신을 던질 각오를 하기 전까지는 그 무너진 곳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곳곳에 구멍이 나있고 심지어 너무 오래되어 거미줄과 이끼가 끼어 있는 곳도 있고 이미 대적이 점령하고 있는 곳도 있는 데도 말이다. 그 말은 신자가 자기 주위의 무너진 성벽을 막아서겠다고 헌신하는 순간 비로소 좌우 간의 선택에 구애 받지 않게 되고 온유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맛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신자가 종횡으로 밟는 땅을 반드시 다 주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종횡으로 밟는 땅을 다 주시겠다는 약속은 그가 믿음의 조상이기에 그 후손 되는 신자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그러나 신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성벽을 막아 섰기에 기특하고 예뻐서 그런 상급을 주시는 것만은 아니다. 물론 그런 면이 없지는 않겠지만 사실은 그 땅을 하나님이 주시기보다 신자가 자기 힘으로 차지하는 셈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 없이 신자 뜻대로 세상에서 성공을 쟁취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신자가 자기가 속한 공동체의 무너진 성벽을 막아서고 주위에 하나님의 거룩한 빛을 비취며 소금으로 역할을 다해 부패하는 것을 방지한다면 그 공동체는 자연히 신자가 정말 모든 것을 다 바쳐 섬길 자신의 것이 된다는 뜻이다. 신자를 본 자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권능을 함께 맛 보고 그래서 그 영혼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무릎 꿇어 그 인생이 변화될 때에 그 공동체는 당연히 심판이나 멸망과는 거리가 멀어지며 바로 그런 공동체에서 신자가 종으로 횡으로 밞으며 어딜 가더라도 하나님의 거룩한 인도와 간섭이 끊어질래야 끊어질 수 없을 것 아닌가?

아브라함에게 보이는 땅 모두를 주겠다는 것이 수백만평, 수십 에이커의 땅을 믿음의 보상으로 주시겠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더러 네가 어디를 가더라도 당신을 보고 걷는가, 당신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가를 도리어 묻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만나고, 누구와 함께 있더라도 하나님은 아브라함더러 당신이 보라는 것을 보고, 당신이 들으라는 것을 듣고, 당신이 하라는 것을 하며, 당신이 가라는 곳을 가기 원하신다는 것이다.  

신자가 이런 참 믿음의 바탕 위에서 걷는다면 좌로 가든 우로 가든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바로 그곳이 하나님이 임재한 거룩한 땅이 된다. 롯의 잘못은 소돔 땅을 택한 것이 아니라 이런 믿음이 없었던 것이다. 세상 어디라도 신자가 밟는 모든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인식이 없이 자기가 스스로 땅을 택하고 또 그 땅의 주인이 되려 했던 것이다.

모세가 소명을 받으려 불려 나온 경우를 보라. 그곳은 시내산 기슭 어느 곳의 척박한 땅이었을 것이다. 나무도 가시 덤불 같은 것 밖에 자라지 못하는 사막 한 복판의 바위 산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당신이 임재한 곳이라 거룩한 땅이니 신발을 벗어라고 했다. 땅에 신발의 먼지가 묻을까 깨끗하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바로 그곳에 임재해 있는 당신 앞에 무릎을 꿇어라는 의미였다.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대면한 모세는 그 후 정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했을 것이다. 그러니 어디를 가든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은 그 땅을 차지하게 해 주었다. ‘땅’이 부동산 소유의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이 그를 떠난 적이 없고 신자가 하는 무슨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반드시 실현된다는 것이다. 모세는 정말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의 평생에 함께 하며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았다. 비록 모세 또한 가나안 땅을 바라보는 모압 땅의 한 이름 없는 골짜기의 한 평도 안 되는 땅에 묻혔고 지금도 그 묘를 아는 자가 없을 망정…

하나님을 점쟁이로 몰아가는 신자들

신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결심하고 신앙 생활을 해 나가면서  항상 어디에다 포커스를 맞추는가? 하나님이 이번에는 좌로 보낼지 우로 보낼지 그 방향을 알려고 한다. 이 일을 해도 될까요?  이 일을 하되 어떤 방법으로 언제 할까요? 방향과 때와 방법을 두고 제발 하나님께 간구하지 말라. 하나님께 그런 기도를 한다는 것은 마치 교회 나오는 것이 점치러 나오는 것과 같다.

물론 신자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항상 좌우든 순종할 준비가 먼저 된 후에 구체적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라면 문제가 없고 또 하나님이 직접 음성으로 들려 주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먼저 알면 그 때 가서 순종할 준비를 하겠다는 것은 점을 치는 행위와 같다는 것이며 또 그래선 하나님이 뜻을 보여주지도 않는다는 뜻이다.      

흔히 목사나 장로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하나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좀 알아달라고 한다. 하나님의 뜻을 따로 물을 필요가 없다. 신자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성경에 이미 다 나와 있다. 나아가 구체적인 선택과 결단에 대해서도 아브라함을 통해 좌를 택하든 우를 택하든, 아니 택할 필요 없이 그 선택권조차 하나님께 완전히 맡기면 된다. 나아가 그런 선택권을 포기한 결과로서 어디로 가든 보이는 모든 땅을 주시겠다고 보장해 놓았지 않는가?

신자는 더 이상 무엇을, 언제, 어떻게 할까요 하나님에게 물을 필요 없이 하나님이 어떤 곳으로 이끄는지 예의 주시만 하면 된다. 그 말은 신자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면 이 일에 물이 넉넉해질까 혹시 저 일에 풀이 더 많은 것이 아닐까 염려하고 초조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대신에 정작 기도하고 애통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아직도 세상의 물이 많고 적음에 따라 내 믿음이 흔들리고 심령에 주눅이 들어 두려움과 불안이 가시지 않는 것을 회개해야 한다. 예수를 믿은 지 10-20년이 지나도 그분이 말씀하시는 세 번째 복 - 온유의 상태에도 들어가지 못한 것을 슬퍼해야 한다.

그 동안 세상 속에서 물이 많은 곳만 찾아 다녔지만 여전히 갈급함을 절실하게 느끼면서도 또 다시 세상에서 더 찾다 보면 찾을 수 있으리라 착각한 잘못을 뉘우쳐야 한다. 바로 곁에서 언제나 함께 하시는 참 생수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을 두고 다른 곳만 헤매고 다닌 것이 얼마나 헛된 낭비였음을 안타까워 해야 한다. 세상의 우물은 이상하게 한 쪽 구석이 항상 새고 있거나 쉽게 메말라 버리는 것을 수도 없이 겪고도 아직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이 죄인을 용서해달라고 주님 앞에 엎드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좌로 가든 우로 가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 드리고 오직 자기 주위에 무너져 내리는 성벽을 막아 서기로 다시 결단하고 헌신해야 한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다고 했을 때의 그 ‘기업’의 의미는 ‘회사(enterprise, 企業)’가 아니라 ‘상속(heritage, 基業)’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거저 주시는 선물이자 또 그 모든 것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신자에게 속한 것, 일어나는 일 모든 것이 하나님 일이자 당신의 소유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보이는 것과 종횡으로 밟는 땅 모두를 지금도  주실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지 않겠는가?

여러분이 현재 겪고 있는 모든 일, 만나는 모든 사람, 처해 있는 모든 여건 등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확신하는가? 그럼 여러분은 이미 온유해진 것이며 그 모든 것을 여러분은 이미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어디를 가든 반드시 주님과 함께 승리할 수 있으며 또 주위의 모든 사람들로 그 승리를 목도하게 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해 주신다.      

김인기

2005.07.29 04:33:26
*.231.106.2

좋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저에게도 필요한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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